[鶴林集] 解題
李 源 杰
[학림집]은 안동의 선비이며 관료인 권방(權 訪 : 庚申, 英祖 16, 1740 ~ 戊辰, 純祖 8, 1808)의 시문집(목판본 13권 7책)이다.
1. 학림의 생애
권방의 본관은 安東이며, 자는 季周, 호는 鶴林이다. 그의 호는 거주지가 학가산 일대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는 안동 지방에 대대로 살면서 기반을 마련한 안동 권씨 가문의 후예이다. 그의 부친은 생원시에 합격한 濤이며 모친은 宜人 출신의 예안 김씨인데, 元烈의 따님이며 이조판서를 역임한 金玏의 후손이다. 권방은 1740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촉망을 받았다. 글을 읽히면서 이내 문리를 터득하였다. 12세(1751)에는 「土鼠說」․「祭溺水人文」을 지었다. 그의 총명함과 글재주를 아는 자들은 그의 장래가 촉망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4세(1763)에는 대소 향시를 거쳐 사미시에 합격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선비로 태어나 사장학에 치중하면서 과거 급제에 몰두하는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다고 탄식했다. 그는 곧장 대산 이상정을 찾아가 수업을 청했다. 대산은 그의 재주가 영특함을 보고 칭찬하였으며, 학림은 부지런히 성리학 공부를 하였다. 함께 공부하는 이들이 그의 재주가 빼어남을 보고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8세(1767)가 되던 해 봄에는 釋菜獻官이 되었는데,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무고를 받아 河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는 그 이듬해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당시 세상에 대해 환멸을 느낀 그는 학가산 북쪽 餘隱洞의 산수가 빼어남을 파악하고, 32세(1771)에 아우와 함께 가산을 정리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 여은동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독서와 사색, 그리고 산수를 소요하며 시를 읊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리고 간혹 독서궁리하는 가운데 의문점이 생기면, 주위의 스승들에게 서찰로 질문하였다. 한편 그는 궁박한 집안 살림을 경영하면서 가족들이 굶주림을 면하도록 주선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7세(1776) 때에는 모친상을 당했으며, 42세(1781)에는 스승인 대산의 상을 당했다. 이어 44세(1783)에 급제하여 承文院副正字에 選補되었다. 당시 李琓․柳範休가 그와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했는데, 학림은 그들과 함께 論語․中庸을 강론하며 그 결과, 「問答錄」을 남겼다. 47세(1786)가 되던 해 5월에 文孝世子가 紅疹으로 갑자기 죽게 되자, 三司에서는 藥房提調인 徐命善과 醫官 李廷楫의 죄를 탄핵하라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주상께서 윤허하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는 成嬪이 병을 앓다가 죽자, 상소문이 빗발쳤다.
이에 학림은 金翰東․柳光澺․金熙稷과 상의하여 상소문을 올리게 되었다. 학림이 이 상소문을 작성하였는데, 상소문의 내용은 이들의 죄상은 중국 역대 역사상 신료로서 제왕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불충과 불경의 죄에 해당하므로, 그에 따른 응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강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문효세자와 성빈의 죽음에 대한 직무 유기죄를 온세상에 밝혀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해 명백히 조치해 두지 않는다면 종묘사직의 위협적인 문제에 부닥친다고 강조했다. 군신 상하의 대의명분을 확립하고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 묵인해 둘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48세(1787) 때에는 宗簿主簿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 12월에는 昌陵令으로 옮겨졌다. 49세(1788)에는 귀향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그 해 5월에 부친상을 당했다. 51세(1790)에 탈상을 하고, 53세(1792)에 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다. 이에 반감을 품고 있던 반대파들이 연이은 상소로 그를 모함했지만 정조는 윤허하지 않고 그들을 엄중히 다루었다. 이에 대해 학림은 동지들과 함께 뜻을 모아 상소하여 그들을 성토하였다. 이 당시 정조는 그들의 처사가 바람직하며 의리를 천명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학림은 거취 문제에 있어서 정조의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이어 그는 完營亞使職을 받아 부임했다가 이내 돌아오게 되었다.
54세(1793) 때의 6월에는 兵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이 당시 그는 외직으로 전전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벼슬살이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은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학가산의 남쪽에 은거지를 옮겼는데, 골짜기가 깊고 숲이 울창하여 은식처로 적합했다. 그는 그곳에서 연못을 만들고 철에 따라 피는 꽃을 심고 독서와 풍류를 일삼았다. 학림은 만년의 생애를 이렇게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67세(1806)에 당시 우의정이었던 達淳이 1792년에 영남 선비들이 올린 상소문을 트집잡아 疏首인 李堣에게 죄를 묻기를 주청하게 되었는데, 학림은 이 일에 앞장서서 변무하려고 했지만 侍中 崔獻重의 저지를 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우는 이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점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 해 9월에 하늘로부터 큰 우레가 울리는 변괴가 있어서 그는 순조에게 국가에서 강상을 범한 자들에게 엄한 법률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변괴가 발생한다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와 함께 과거의 폐단과 군정의 문란을 촉구하며 주상의 덕치를 강조하는 상소문을 올렸다[畏天命 明典刑 革科弊 修軍政 勉君德]. 하지만 그의 상소문은 承政院의 저지로 인해 주상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68세(1807)에는 全羅都事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이듬해인 1808년 동짓달에 감기에 걸려 약 이십 일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9세였다. 임종시에 늙은 용의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뜻을 펴지 못한 채 학가산에 감추고 말았다는 시를 남겼다[千秋遺恨老龍心 空使文章鶴駕藏]. 부인은 예천권씨로, 權文海의 후손이다. 학림은 부인에게서 아들 한 명을 얻었지만, 요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재종형 海運의 넷째 아들 衱을 양자로 맞아 들였다. 학림의 따님은 柳秉祚에게 시집을 갔다. 极은 3남 2녀를 낳았다.
2. 문집 체재
卷1에 135題 160首의 詩와 輓詩 21首(金漢鍊․權興祖․黃啓熙․金宗敬․權範翼․金龍普․李獻慶․孫相龍․權星江․權應鏶․柳燮春․柳宗春․權明佑․孫思翼․李命天․權㯙․權玧․鄭必復․金叔․金宗德)가 실려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連作詩이다. 連作詩는 「擬古六首」․「秋懷六首」․「由還擬遊水落臺集赤壁賦字得五言律詩十二首」․「直中雜詠三首」․「高嶺雜詠」이다.
卷2에 61題 134首의 詩와 輓詩 15首(蔡濟恭․金僉樞․申時成․金墩․黃鱗采․權堣․金柱國․洪胤忠․金一鍊․金若鍊․權季善․金宗錫․趙錫晦․權進道․權啓萬․趙晩谷)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도 連作詩인 「和宋敬輔相天水落臺漁歌九曲幷序」․「次笙潭十景韻」․「餘洞雜詩次晦庵雲谷二十六詠」․「和陶集飮酒二十首」가 실려 있다.
卷3에 31題 71首의 詩와 輓詩 20首(金象鍊․李憲儒․柳象春․宋敬輔․權鼎鉉․權思簿․李孝慶․兪漢人․權其天․李幼聞․李仲章․金斗燦․金馹燦․李楨國․權睦․趙晏․李致道․權師萬․權昌植․趙虎然) 및 連作詩 「雜詠二十首」․「園林雜詠」․「洛江亭十詠이 실려 있다. 이어 上疏文 2篇(屛山書院請額疏․應旨求言疏)이 있다.
卷4에 書簡文 23篇(洪檍․李重光․權欕․李集斗․趙而盛․金君楫․金斗庵 各 1篇․李宗洙 2篇․李象靖 6篇․李健燮 8篇)이 실려 있다.
卷5에 書簡文 30篇(金子正․權益孚․李仲章․柳皥汝․金正根․金德․金雲老․李龜錫 各 1篇․金子野 2篇․李稚春 3편․金士淵 3편․柳秀夫 4篇․柳君實 5篇․李致道 5篇)이 실려 있다.
卷6에 書簡文 35篇(金公叔․申時成․權正九․沈師亮․權成伯․河聖弼․李宇綱․朴堣․金墩․崔獻重․朴命燮․朴文朝․黃敬熙․李義夾․權應範․李宗濂․權宅孚․李仁行․朴鼎元․金稷 各 1編․柳天瑞 2篇 金翰之 2篇․權季善 3編․權季善 3篇․李景瞻 5編)이 있다.
卷7에 書簡文 19篇(金熙周․權思愼․柳爾卿․柳士鉉․金田運․李際可․校中道會所․朴慶喆․金暻․柳秉祚 權奎度 2編․金履復 3篇․宋敬輔 4編)이 실려 있다.
卷8에 書簡文 33篇(權海運․權睆․權褘․權衱 2篇․權必秉 2篇․權思國 3篇․家兒 5編․權諿 9編․權濤 9篇)이 실려 있다.
卷9는 雜著이다. 雜文 9篇(「師門記聞」․「孝狗說」․「魯有兩生不肯行論」․「念中論」․「春王正月論」․「玉帶私議」․「泮村漫錄」․「送兒衱赴省試」․「自警雜錄」) 및 序文 12篇(「松鄭亞使岐瑞赴湖南序」․「仲朔宴屛風帖序」․「送李典籍致道南歸序」․「送柳鑑察達夫序」․「安東權氏族譜序」․「林溪曹公實紀序」․「林氏五孝傳後敘」․「檜谷書堂文會錄序」․「權氏三世稿序」․「魯軒權公遺稿序」․「退庵權公實紀序」․「延安宋氏族譜序」과 記文 10篇(「河東山水可遊者記」․「由道齊存省樓記」․「審安齊記」․「鳳山書堂記」․「遊西京記」․「水落臺雜記」․「逍遙堂記」․「進溪書堂記」․「道湖書堂
記」․「花川書堂記」)이 수록되어 있다.
卷10에 跋文 11篇(「書巖齊文會錄後」․「書朴潛冶知誡答權重之書後」․「書朴主簿加喪一朞說後」․「題兒衱對策諸篇後」․「書延安宋公遺事後」․「龍巒權公遺稿跋」․「謹書判書先祖磨厓公遺事後」․「鐵城聯芳集跋」․「松潭蔡公逸稿跋」․「題權公貽家乘後」․「題權一大詩卷」) 및 上樑文 3篇(「丹溪河先生家廟上樑文」․「臨淵亭上樑文」․「洛江亭重建上樑文」)과 哀辭 6篇(權鳴國․權吉甫․李東仁․金稷․權身度․柳奭祚)․祝文 8篇(「昌豊寢室上樑告文」․「鶴巖里社湖陽權公常亨祝文」․「涵碧堂柳公墓立石告由文」․「白雲齊權忠毅公影幀改摹後奉安文」․「玉峰權公還安道溪時告由文」․「張太師貞弼祭壇常亨祝文」․「龜湖書院思復齊權公奉安文」․「亡子移定時告由文」)․祭文 23篇(李萬宏․權炳文․伯兄․亡子․金光翊․李象靖․金相玉․內舅․趙某․李致道․柳畏齋․柳海春․金川沙․李后山․金叔․金柱國․權橋․淑人․李伯維․金若練․權而瞻․宋敬輔․金德)과 墓碣銘 4篇(申尙龍․權某․李洺․朴在龍)․行狀 1篇(權濤)․「處士安東權公行錄」․「叔兄遺事」․跋文(柳致明 撰)이 실려 있다.
續集에 편집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卷1의 서두에 「鶴林先生續集序」(李南珪 撰)가 실려 있으며, 이어 4․5언 형식의 시 11首 및 輓詩 10首가 실려 있다. 上疏文 2篇(「請罪醫院諸官疏」․「義理辨誣疏」)․書簡文 3篇(蔡濟恭․李世澤․金宗德)이 실려 있다. 이어 편집된 내용은 「闡揮錄序」․「周公東征辨」․「完璧論」․「折屐齒論」․「金孝子傳」․「題性理會通」․「書金上舍先憲遊丹山錄」․「書權訓鍊鳳章家藏書帖後」가 실려 있다.
卷2는 부록인데, 權訪의 「行狀」과 「墓碣銘」(李周禎 撰)이 실려 있다. 이어 鶴林의 죽음을 애도하는 李堣․政來成․朴文明․李宗儒․權宅孚․李周禎․李宗周․權思浹․金熙周․鄭必奎․金宗壽․朴時源․金星說․權必中․李樟秀․金光濟․金龜練․權思愼․金弘龜․金趾燦․鄭允濟․權錫寅․河景羲․權褘․權進洙․權漢度․張翊韓․金弼亮․柳秉祚․權讜․權師億의 輓詞 및 祭文이 실려 있다.
이어 「京試官洪儀冰𤗐諭」․「議政府筵奏」 및 跋文(權相翊․權在中 撰)이 실려 있다. 말미에 이 문집을 간행한 연대를 기록해 두었는데, 昭和 6년(1931) 9월 18일에 인쇄하여 그 달 20일에 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행한 자는 慶北 安東郡 一直面 遠湖의 權泰東이며, 인쇄를 맡은 자는 慶北 醴泉郡 知保面 新豊里 尹鍾益, 인쇄 겸 발행처는 慶北 醴泉郡 龍門面 上金谷洞 權在中의 처소라고 기록되어 있다.
3. 문집 내용
卷1에는 160首의 詩와 輓詩 21首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卷2에 134首의 詩와 輓詩 15首가 실려 있다. 卷3에 71首의 詩와 輓詩 20首가 실려 있다. 이러한 시에서 학림의 문예적 성과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시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연작시이다. 영남 지방 사대부들의 문집 가운데서도 특이하게 그는 연작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권1에 수록된 연작시는 「擬古六首」․「秋懷六首」․「由還擬遊水落臺集赤壁賦字得五言律詩十二首」․「直中雜詠三首」․「高嶺雜詠」이다. 그리고 권2에 실린 연작시는 「和宋敬輔相天水落臺漁歌九曲幷序」․「次笙潭十景韻」․「餘洞雜詩次晦庵雲谷二十六詠」․「和陶集飮酒二十首」이다.
권3에 실린 연작시는 「雜詠二十首」․「園林雜詠」․「洛江亭十詠」이다. 이런 연작시에는 자연 경물 묘사와 함께 풍류 흥취의 낭만 정서가 담겨 있다. 「高靈雜詠」(권1)은 봄 흥취 표현에 이어 한가한 자연미를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新居雜詠」(권2)에는 새로 거주지를 옭기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고 전원적 생활에 만족하는 심상이 그려져 있다. 「和宋敬輔相天水落臺漁歌九曲幷序」(권2)에는 풍류 낭만적인 시풍이 표현되고 있다. 「次笙潭十景韻」(권2) 청신한 당시 계통의 시가 표현되어 있다. 학림의 문학적 역량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餘洞雜詩次晦庵雲谷二十六詠」(권2)는 7언 절구 형식을 취해 그의 은거지를 회암의 운곡에 비겨 26개로 나눈 뒤, 경치를 상세히 묘사한 것이다. 고상한 품격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田園雜詠」(권3)은 학림이 전원에 심긴 각종 화훼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江洛亭十詠」(권3)은 전원 정경과 목가 정서가 반영된 낭만적 표현이다.
대체로 그의 시풍은 맑고 경쾌한 정조를 많이 반영하고 있으며, 당 시풍을 추구하고 계승하며 답습하려는 의지가 많은 부분에서 발견된다. 그의 이러한 연작시에는 국토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연 친화적인 교감이 반영되어 있다. 자세한 사물의 추이 모습과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스케치하듯이 담아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자연 물상의 상세한 묘사와 추이적 변화의 모습을 담아 내기에 연작 형태가 용이했던 까닭에 이러한 시의 형식을 취했던 것 같다. 보다 많은 내용을 다양하게 시에 담아내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묘사했던 것이다. 「卽事」(권2)는 전원적 경물 묘사가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仙遊洞」(권2) 역시 경물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산수자락의 풍류가 담긴 작품으로는 「二樂樓歌」(권2)를 들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尋眞․養眞이라는 시어도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시는 위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시풍은 한거와 평화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은 경우가 많다. 그는 관료 생활에 지친 심신을 자연과 함께 벗삼아 일상의 평화를 모색하며 참된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려고 했던 점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담박하며 평화스러움이 우러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당시의 형식을 답습하여 지은 시에서 이러한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 서경과 서정이 절묘하게 조화된 시는 「秋夜與趙梧竹軒宜陽唱酬」(권1)인데, 흡사 당시를 옮겨 놓은 것 같다. 한가한 분위기가 관류하고 있다. 「幽居」(권1)에도 이러한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시구에는 興趣․閒趣․眞趣․幽興․乘興 등의 시어가 많이 드러난다.
이와 함께 그의 의식 근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역시 당시 영남 지방 출신 인물의 의식 구도와 특별히 다를 바는 없다. 자연과 더불어 심성을 수양하며 학문을 갈고 닦으려는 일련의 의식이 시에 반영되어 있다. 장편 7언 고시인 「次金子正見寄韻」(권1)에는 이러한 유자 의식이 토로되고 있다. 그리고 유교적 사유가 담긴 작품으로는 「水落臺得絶句二首」(권1)를 들 수 있다. 이런 시에서 일련 유가적 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讀易偶吟」(권1)에는 천리 유행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敍懷」(권2)에도 이러한 유자 의식이 드러난다. 자신의 신세가 궁박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성리학을 부단히 추구하려는 의지를 승화하고 있다.
그리고 학림은 퇴계와 대산의 인품․학문을 추구하고 싶은 의지를 담은 시도 남겼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자적 가풍을 이어 퇴계의 학문 경향을 추모하며 그를 실천하려고 했던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학가산 일대는 그의 심성 수양을 위한 도장이 된 점은 어쩌면 퇴계가 도산의 산수를 사모하며 인격 연마와 학문 수양에 전념했던 점과 닮은 점이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스승 퇴계를 존모하며 학문과 덕행 수양에 전념하려 했던 점이 드러난다. 「鳴玉臺敬次退陶先生韻」(권1)은 7언 절구 3수인데 여기에 퇴계에 대한 존경과 이를 답습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표현되어 있다. 「敬次退陶先生江亭詩韻二首幷序」(권2)에서도 퇴계의 유풍을 잊지 못하는 마음을 담아 내었다.
「偶吟 20首」(권2)에는 자연 경물 묘사와 함께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언급하는가 하면, 천리 유행의 진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세도가 쇠약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도심을 길러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이단에 대한 배척의 의지도 표명하고 있다. 「雜詠 20首」(권3) 역시 이러한 의식을 담은 시이다. 기자 유풍이 깃든 조선에서 유교적 기풍을 진작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표현하고 있다. 유자적 인식이 강하게 작용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敬次大山先生集中韻二首」(권2)는 그의 스승 대산의 학덕을 추모하며 유업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리고 때로 그의 시에는 영사회고시의 작품도 보인다. 특히 유가적 인물에 대한 추모와 선현들의 풍모를 사모하며 이를 체득하려고 애쓴 일단의 노력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이런 시는 고적 유람을 통해 여실히 표현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선현들을 회고하며 유교적 유풍을 계승하며 추구하려는 의지도 담아내었다. 특히 연작시인 「擬古六首」(권1)에는 지난 사적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은 시인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감상적인 정서와 회고의 분위기가 전체 시를 관류하고 있다. 그리고 「臨津渡」(권1) 역시 이런 경향의 작품인데, 기행을 통한 역사회고의 정조가 강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이와 함께 「開城府」․「尋九封君遺墟」․「平壤」(권1)․「新羅陵墓有感」(권1)․「善竹橋」(권1)에는 지난 역사에 대한 무상과 흥망성쇠에 대한 애상감이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시도 파악된다. 「怨歌行」(권1)에서는 산촌 백성들이 어렵게 살아가는 현 실정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불우한 일면을 담아 신세 한탄조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개인 정서의 표현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정서는 「秋懷」(권1) 6수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다소 우의적인 수법이 작용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를 담은 개인 정서 표현은 「得家書志喜」(권1)에 집약되어 있다.
애민 정서가 담긴 작품도 발견된다. 「旱餘得雨次寄金德升復仁長生殿直中」(권1)에 가뭄 끝에 비가 내려 만 백성들에게 혜택이 주어질 것을 기뻐하며 애민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除夕以一年將盡夜萬里未歸人爲韻」(권1)에는 자신을 성찰하며 근면, 근신하기를 다짐하는 정서가 표현되고 있는데, 애민 정조가 부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憫旱次東坡旱後韻」(권2)은 7언 고시인데, 가뭄을 겪는 농민들의 아픔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어지는 것은 「屛山書院請額疏」인데, 유림들을 대신해서 지은 것이다. 병산서원의 사액이 필요한 점을 역설하면서 이에 대한 당위성을 조리가 있게 상소한 글이다. 유가 의식이 드러나 있다. 「應旨求言疏」는 주상에게 현 실정을 개선하며 민폐를 혁파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가 구현되어야 함을 역설한 글이다. 강조하는 내용은 하늘이 우레를 울리는 것은 조정의 법도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임을 언급한다. 국법을 엄중히 하여 간악한 무리들이 척결되어야 하며, 문란해진 세상 풍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과거 제도의 문란한 모습을 하루 속히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군정의 혼란함 가운데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져간다는 점을 경각시키며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여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군왕의 자기 수신과 근검한 생활이 우선되며 덕치 정치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했다.
권4에서 권8까지에 서간문 140편이 실려 있다. 서간문이 문집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일반 안부나 자제들의 교육을 당부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여 이기 철학이나 성리학 관련 서적에 대한 논변이나 질의 응답한 내용을 왕복하는 등의 편지 글이 많다. 스승 대산에게 평소 성리학에 관해 공부하면서 의문이 나는 점을 묻는 내용이 많다. 그 범주는 퇴계의 이기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특별한 내용을 담은 서간문을 정리하기로 한다. 「上大山先生(甲午)」(권4)에서는 당시 퇴계와 고봉의 사칠 논변 왕복 서찰의 내용을 보건대, 정미롭게 분석하고 의미가 투철하다고 칭찬했다. 이에 대해 학림이 다소 이해가 부족한 부분을 대산에게 질문하였다.
그리고 「與權完伯」(권4)은 학림이 호남 감사로 부임하는 權欕에게 일곱 조목에 걸친 위민 정치의 요체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결국 학림이 평소 생각하는 지방 정치에 대한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백성의 형편을 헤아려 그들을 위한 정치를 구현해 달라고 당부했다[愛養民力]. 이 부분에서 학림의 목민관과 애민 의식이 드러난다. 둘째, 수령들을 엄격히 단속시켜 부정부패의 온상을 만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嚴束守令]. 셋째, 풍속 교화와 민심의 안정에 이바지하라고 당부했다. 유가적 기풍이 향촌 곳곳에 정착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振厲風化].
넷째, 호남 지방의 군기를 확립하고 허술한 방위 체제를 튼실하게 구축해 달라고 당부했다[修明軍政]. 다섯째, 선비들의 기풍을 진작시켜 학문을 권장해 줄 것을 당부했다[興起士風]. 여섯째, 진대법과 관련된 민폐가 발생되지 않도록 조치하며, 이미 그러한 폐단이 있다면 응당 시정하여 백성들의 삶이 안온해 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綜劾賑政]. 일곱째, 조운 제도를 정비하고 원활한 조운 체제의 구축과 함께 폐단으로 누적된 부분을 혁파하는데 주력하라고 당부했다[申明漕運]. 여덟째, 황폐해진 역참 제도를 바르게 잡고 역참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강조했다[㑱恤郵驛]. 이 편지글에서 지방 행정이 주력해야 할 점을 지적하고, 폐단으로 누적된 각종 양상을 혁파해 주기를 당부하는 학림의 소견이 담겨 있다. 그리고 학림의 애민 의식과 함께 정치관 역시 드러나 있다.
이와 함께 「與李剛叔」(권4)․「答李剛叔」(권4)의 성리학설에 대한 논변은 주목된다. 특히 중용의 내용 가운데 의문이 나는 문구나 해석을 들어 학림이 질의하고 답장했다. 이와 함께 별도로 問目을 만들어 질의한 것도 돋보인다. 이러한 편지 글에서 학림의 성리학 사유 체계가 깊고 논리가 정연함을 느낄 수 있다. 학림은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심원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권4의 편지글은 대부분 이강숙과의 왕래 서한으로, 성리학 관련 논의가 집약되어 있다.
「答金子正」(권5)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학림의 성리학 논변은 지속적으로 보인다. 「與金行之(甲午)」(권5)에서는 학림이 과거의 폐단을 논급하면서 현재의 글이 저급하고 비속해진 원인을 진단했다. 특히, 과거 급제를 위한 글이 날마다 저속해지는 것은 근본인 도학에 힘쓰지 않고 부화한 문장에만 치중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런 데서 학림의 문장관을 엿볼 수 있다.
「答朴主簿堣」(권6)에서는 하동으로 유배를 다녀 온 쓰라린 경험을 진솔하게 표현하며, 천하는 한 집이며 사해의 모든 사람은 형제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함께 유학을 추구하는 자라면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하자는 폭넓은 교유관을 피력하고 있다. 「答朴德亨」(권6)에서는 군자가 출처에 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자는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고 양보하는 미덕을 소유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자랑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答權季善別紙」(권6)에서는 중용과 맹자 등의 집주에 대해 의문이 나는 점을 답변하고 일부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점도 돋보인다. 비교적 장문의 편지 글이다. 「答權季善(庚申)」(권6)의 별지에서는 朱書疑義에 대한 견해 및 의문점을 답했다. 이어 별지에서는 퇴계의 이기설 가운데 이해가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 언급했다.
이어지는 편지 글에는 본격적인 성리학 논변을 담고 있는 내용이 많다. 「答劉敍文書理不囿於氣」(권7)는 理不囿於氣에 대한 논변을 담고 있다. 학림의 해박한 성리학 관련 견해가 드러난다. 「與柳爾卿」(권7) 「大學」의 1장과 7장의 物理之處無不到 및 心不在焉 구절에 대해 논변하고 있다. 「答宋敬輔」(권7)에서는 圖學圖에 대한 논변을 했다.
太極圖에 대한 해설과 논변이 정리되어 있다. 장황한 논변은 아니다. 이어지는 편지 글은 주로 송경보와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편지 글에서는 수준 높은 성리학 논변이 드러난다. 그리고 별지에서는 이에 대한 보충 설명과 논변이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答金履復問目大學」(권7)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여러 학설을 인용하면서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答金履復箚疑」(권7)에서도 중국 역대 유명한 성리학자들의 견해를 들어 설명과 함께 간략한 해설을 붙여 답변하고 있다. 「重答金履復大學問目」(권7)에서는 대학의 조목 가운데 특정 부분을 발췌하여 그에 대한 해명과 함께 답변하고 있다. 논리가 간명하며 깊이가 있다.
권8의 서간문은 가족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일상의 안부와 당부 등이 주축을 이룬다. 부친에게 올린 편지 글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육친에 대한 정이 묻어난다. 그러면서 부친의 안부와 건강 등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두 형에게 보낸 편지 글에서는 건강에 대한 염려, 가족과 친지의 생활 안정 등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학림의 인간적인 따스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많다. 「答再從姪師國」에서는 가법의 준수와 예의를 준수하라고 당부하는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寄再從姪師億」에서는 목민관을 역임하고 있는 재종질에게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해 주길 당부하는 장문의 편지 글을 남겼다. 특히 별지에는 上官과 서리의 폐단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이들의 비리와 부정을 혁신해야 한다는 지론을 전개하였다. 이 부분에서도 학림의 목민 의식을 엿볼 수 있다. 「答族姪褘」에서는 귀신에 대한 논변이 있어 주목된다.
이어지는 편지 글은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아버지로서 자식들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담긴 편지 글이다. 학림은 시종 아이들에게 면학을 강조한다. 수신과 근검한 생활 철학을 소유하라는 당부도 빼지 않았다. 문장은 소기이며 선비로서 추구해야 할 본업은 성리학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간간이 성리학적 사유를 전개하기도 했다. 학림은 여러 아들이 성리학 교양을 익히며 단아한 선비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심정을 곡진히 표현했다.
권9에는 잡문이 실려 있다. 「師門記聞」은 대산과 주고받은 성리학 관련 특정 어구에 대해 설명한 글이다. 「孝狗說」은 내성 변씨 집안에서 키운 어미 개를 죽이자, 강아지가 어미 개를 그리워하며 결국 따라 죽었다는 기이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효행을 강조한 글이다. 그리고 「魯有兩生不肯行論」은 예와 악을 강조한 논설문 형식의 글이다. 중국의 전고를 든 학림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念中論」은 應製한 것이다. 학림은 이 글에서 해박한 성리학 식견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정의와 견해를 명쾌하게 제시했다. 「春王正月論」은 음양 오행과 월력과의 관련 사항을 정리한 논설문이다. 이에 대한 역대 중국 제왕의 사례를 조목조목 나열하면서 변증한 글이다.
「泮村漫錄」은 성리학에 관한 그의 단견을 자세히 기록해 둔 것이다. 짤막한 내용들이 모여 만록 형태를 취한 글이다. 성리학 관련 논변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반부에는 그의 문장에 대한 인식론도 언급된다. 경문일치 내지 문이재도론이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送兒衱赴省試」은 학림의 아들이 성시에 참가하기 위해 가는 것을 권면한 내용이다. 「自警雜錄」은 도학 논변과 문장론 및 도문일치론의 문학관이 집약되어 있다.
이어 서문 12편이 기록되어 있는데, 임지로 부임해 가는 자에 대한 권면과 당부의 글이나 전공을 세운 자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병풍에 글을 써 준 글․전적 벼슬을 하는 자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는 글 등이 주축을 이룬다. 그리고 안동 권씨 족보를 만들고 난 뒤에 서문을 써 준 글이나 임씨 가문의 다섯 효자를 소개하면서 이에 대한 행적을 고양하고 있다. 그리고 서당의 문회를 개최하고 나서 감회와 향후 발전 방향 등에 대해 언급한 글도 있다.
연안 송씨 족보서문과 10편의 기문도 있다. 기문에는 산수 경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하면 간혹 그의 유가적 수양론과 연관된 언급이 많다. 그의 유가적 인식 논리가 자연 경관 묘사에 삼투된 것을 반증하고 있다. 「河東山水可遊者記」는 전형적인 산수유기의 형식을 갖춘 기록으로, 지난 곳의 경관과 역사․전설을 자세하게 담고 있다. 상세한 묘사력이 돋보이고 문학적 형상이 뛰어나다. 학림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산수유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장문의 형식으로, 내용의 치밀성과 문학적 형상이 구비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어 「水落臺雜記」․「逍遙堂記」에서는 성리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산수유기의 문학적 형상화가 이루어져 있다.
권10에는 발문 11편이 실려 있다. 일반적인 발문의 내용을 담고 있다. 「書巖齊文會錄後」는 문회를 개최하면서 느낀 감회를 문의 말미에 적은 글이다. 「題兒衱對策諸篇後」는 아들 겁에게 독서하는 본연의 목적이 明理에 있음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공부를 선행할 것을 강조한 글이다. 「書朴潛冶知誡答權重之書後」에는 격물치지의 원리를 행로에 비유한 논설이다. 「書朴主簿加喪一朞說後」는 상례에 논변이다. 3년 상을 마치고 다시 1년 더 연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書延安宋公遺事後」는 인근 고을 효자 宋思遠의 효행을 찬양한 글이다. 그의 효행은 이미 선대로부터 이어진 유풍임을 강조했다. 「龍巒權公遺稿跋」은 권기의 행적과 향토 안동에 끼친 그의 행적을 기린 발문이다. 「謹書判書先祖磨厓公遺事後」는 학림의 선조 문집 발문이다. 「鐵城聯芳集跋」은 이어 몇 분의 문집이나 시문에 쓴 발문이 있는데, 일반적인 발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松潭蔡公逸稿跋」․「題權公貽家乘後」․「題權一大詩卷」). 그리고 세 편의 상량문과 애사 여섯 편 및 축문 여덟 편 및 다수의 제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말미에 학림의 부친 행장 및 柳致明 찬한 발문이 실려 있다.
續集의 내용을 다음과 같다. 권1의 서두에 李男珪가 撰한 「鶴林先生續集序」가 있으며, 이어 4․5언 형식의 다양한 시 11수와 만시 10수가 있다. 문학적으로 그렇게 우수한 작품은 아니다. 이어 상소문 2편이 있는데, 「請罪醫院諸官疏」는 학림이 金翰東․柳先澺․金熙稷 등과 合疏한 것이다.
궁중 내의가 문효세자의 병세를 다스리지 못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죄를 면밀히 따져 응분의 조처를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학림은 서두에서 중국 역대 군주지간에 이러한 사례가 발생되었을 경우, 의법조치한 사례를 예증했다. 이어 「義理辨誣疏」에서는 영남 유림을 대신하여 지은 장편의 상소문이다. 당시 시국과 관련된 학림의 충정과 의분이 담긴 상소문이다. 그의 정치 철학과 우국지심이 담긴 글이다.
그의 논설과 논변이 집약된 「周公東征辨」․「完璧論」․「折屐齒論」 등은 주목된다. 명분과 의리를 강조한 글이다. 그리고 효행을 강조한 「金孝子傳」과 성리학 관련 내용을 역설한 「題性理會通」 등도 실려있다. 권2는 부록인데, 권방의 「행장」과 李周禎이 찬한 「墓碣銘」이 있다. 이어 학림의 죽음을 애도하는 영남 유림의 만사와 제문이 있다. 이어 「京試官洪儀冰𤗐諭」․「議政府筵奏」․跋文이 있다. 말미에 이 문집을 간행한 연대가 昭和 6년(1931)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4. 마무리
학림은 대산을 통해 영남 학맥을 이어간 인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나고 총명하였다. 애당초 그는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반대파들의 시기를 받아 28세에 하동으로 유배를 떠나는 경험하였다. 그는 이후 세상 명리를 멀리하고 학가산 자락에 몸을 숨기는 은거의 길을 도모했다. 이후 그는 일시적으로 벼슬길에 나갔지만 결국 학가산에서 두 번이나 거주지를 옮기면서 영구적 은둔지에 정착했다.
그는 산수 자연과 더불어 사색과 심성 수양에 전념하는 의지를 굳히고 자연 경물을 묘사하며 자연 친화적 시를 많이 남겼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서 담백한 시풍을 느낄 수 있다. 낭만정조의 당시를 계승하려는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산수 시인의 영역을 구축한 영남 문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그의 연작시이다. 영남 사대부 문집 가운데서도 이채롭게 그는 많은 연작시를 남겼다.
학림의 대표적 연작시는 「의고육수」․「추회육수」․「유환의유수락대집적벽부자득오언율시십이수」․「직중잡영삼수」․「고령잡영」․「화송경보상천수락대어가구곡병서」․「차생담십경운」․「여동잡시차회암운곡이십육영」․「화도집음주이십수」․「잡영이십수」․「원림잡영」․「낙강정십영」이다. 이런 연작시에는 자연 경물 묘사와 함께 풍류 흥취의 낭만 정서가 담겨 있다.
이처럼 학림은 시문학에서 문예적 성과가 돋보일 뿐만 아니라 성리학에 있어서도 심오한 경지까지 추구하는 열성을 보여 주었다. 장문의 편지 글에 성리학 사유가 담긴 논변과 철학적 깊이가 있는 내용이 많다. 음양 오행설과 거경궁리 학설은 유가의 일반적인 상식과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단 학설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며, 오직 심성 수양에 주력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 글을 많이 주고받았다. 그의 편지 글에는 성리학 논변의 글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별지에 따로 지면을 할애하여 질의하거나 강조하고픈 내용을 담아 보냈다. 그는 퇴계의 이기 학설을 계승하면서 성리학 관련 연구와 사색을 통해 학문적 구축을 지향하였다. 그는 비교적 많은 분량의 문집을 남겼는데, 성리학과 관련하여 교유 인물들과 주고받은 서간문에서 그의 성리학 사유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는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 글에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심정을 표현했으며, 학문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마음을 담아 보냈다. 관련 시문이나 산문 및 잡문 등에서도 그의 이러한 인식 논리는 동일하게 전개되었다.
학림의 유가적 인식 논리와 그의 시문 및 산문․잡저가 영남 학맥에서 갖는 문학사적 위상과 동 시대 교유 인물과의 검토를 거쳐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주어져야 하겠다. 그는 강직한 유자 형상을 소유했으며, 문예적 성과도 면밀히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