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서러움이 왈칵 밀려온다.
수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수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수희 아버지의 월급으로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래서 늦둥이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들은 말은 대학은 스스로 벌어서 가라는 말을
달고 사는 부모님이었다.
특희 큰 딸은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예뻤다.
그래서 자연스레 집안에서도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수희는 행동이 굼뜨고, 공부를 못했다.
수희 부모는 아들을 간절하게 바랬는데, 소망이 이루어져서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
늦게 낳은 아들은 딸만 둘 있는 집에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늦둥이 막내를 돌보는 일은, 늘 수희가 도맡아 했다.
집안에서 눈총만 받으며 성장한 수희는, 자신도 공부 잘하는 언니처럼
늦둥이 막내 동생처럼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부모님은 끝내 수희를 외면했다.
수희가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에도, 특별한 도시락을 준비하는 게 아닌
무심하게 반찬도 신경을 쓰지 않고 보냈다.
수희는 엄마에게 따져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냉랭하기만 했다.
"이것아? 밥이 대수야 시험 문제를 잘 풀어야지."
"공부도 못하면서 뭘 대학을 가겠다고 덤비냐..."
"엄마... 그 말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돈이나 벌었으면 하는 거야?"
도시락을 들고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수희 뒷모습에 힘이 없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과 함께 시험장에 도착을 해서 기도를 하고
힘내라고 응원을 하는데, 수희는 혼자 교문을 들어섰다.
시험장 주변은 한 번에 척 붙기를 기원하는, 학부모들의 염원으로 엿을 파는 상인들과 끈적하고
말캉한 찹쌀떡을 파는 상인들로 떠들썩했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른 수희는 집에서 가까운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긴 겨울 방학 동안 집안에서 아무 할 일도 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기 싫었던 수희는 빵집에서 서빙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엄마의 잔소리와 늦둥이 남동생을 보살피는 일에
해방이 된다는 기쁨이 컸다. 수희 언니는 공부를 잘해서 방학이면 부잣집 아이들의
과외를 해주고 자신의 용돈을 벌었다.
빵집에서의 일은 힘이 들었다. 출근을 하면 맨 먼저 가게 문을 연고
환기를 시키고 나서, 바닥을 쓸고 닦았다.
다음은 케이크를 진열해둔 쇼게이스를, 수시로 닦아야 했다.
또한 출입문과 간판 등을 청소를 하다 보면 열이 나고 더웠다.
수희는 아직 학생이었고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정식 직원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그런 수희에게 힘들고 귀찮은 일이 주어 졌다.
손님들이 마시는 음료수 컵과, 쟁반을 닦는 일 손님에게 서빙하는 일등
수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손님이 잠시 비는 틈에도
의자에 앉지 못하고 일을 했다. 수희가 잠시 쉬려고 하면 선배 직원들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애...일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손님이 나기면 인사도 해야지..."
"뭘 멍하게 서 있는데..." 선배들의 잔소리에 수희는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수희는 자신의 대학 입학시험 성적을 확인하고 실망을 했다.
부모님께 실망을 안겨 드리게 되어 집안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누구를 닮은 것인지 그렇게 돌머리냐..."
수희는 언니의 말에 절망을 했다. 늘 어린 시절부터 공부 잘하는 언니와 비교를 당한 수희는
머리 나쁘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에게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부모님은 수희의 성적을 확인하고는 혀를 끌끌 차며 못마땅해했다.
그리고 수희는 서울 근교 대학에 입학을 했다.
비록 자신이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새내기가 되었다는 기쁨이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엄마는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한 학기 대학 등록금만 대주고 나머지는 수희에게 부담을 시켰다.
신학기부터 알바를 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아침부터 일을 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기원에 나가 손님들에게 음료를 서비스하고
돈 계산을 해 주었다. 기원은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담배 냄새로 고통을 받은 수희는 이번에는 만화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늦은 시간 손님이 뜸하지면, 학교 과제를 하고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돌아갔다.
부모님께 큰 소리를 쳤지만 알바를 하느라 성적은 늘 하위권을 맴돌았다.
바닷가에서 산책을 하던 수희가 식당으로 돌아온 시간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 3시였다.
수희가 들어서는 것을 본 분이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난 손님이 말도 없이 안 와서 다시 서울로 올라간 줄 알았네요."
"에이 설마..."
수희가 웃자 분이도 따라 웃는다.
수희는 시장기가 돌았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마다
"나 배고파요."
"얼른 제일 빨리 되는 것으로 주세요."
"어머, 손님 많이 시장하셨나 보다."
분이가 수선스럽게 말을 한다.
"바닷가에 다녀왔더니 무척 배가 고파요."
"혹시 바닷가에서 무슨 일 생긴 것은 아니지요?"
"왜요? 무슨 안 좋은 일 상상한 것은 아니지요?"
"아니 뭐 그냥."
"생각할게 많으셨나 봐요."
"저는 무슨 일이 생겼나 했거든요."
"그런데... 손님 연락처를 몰라서..."
수희가 분이를 가만히 바라보자 분이는 괜히 머쓱해서
"제가 주책이지요. 손님 사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면 안 되는데., "
분이가 타주는 달달한 믹스 커피를 홀짝 거리고 있을 때, 드르륵 유리문 소리가
들리더니 이 집의 아들이 들어온다.
분이가 아들을 반색을 하며 반긴다.
"아들 오늘은 무슨 빵 배웠어?"
분이 아들인 청년이 멍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한다.
"응... 오늘은 곰 곰보빵."
"맛있는 곰보빵을 배웠구나."
"엄마는 곰보빵이 제일 맛있는데." 분이가 수선을 떨자
청년은 말없이 그대로 서있다. 한참을 망설인 분이 아들이
수희를 바라보더니 등에 매고 있던 배낭에서 빵을 꺼내어 분이에게 내민다.
"엄... 마 이이 거 먹어."
"응 고마워 아들."
분이는 아들을 꼭 끌어안는다.
모자지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희는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들 생각이 났다.
저녁 5시가 되자 식당은 손님들로 붐볐다.
분이 혼자 주방과 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정신없이 손님을 받는다.
여기저기에서 아줌마를 부른다.
커피잔을 앞에 두고 창밖 너머 자동차들이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보던 수희는, 갑자기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뭐...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분이는 "손님인데 그냥 앉아 계세요. 힘든 일이에요."
"아니에요."
"대접만 받았는데 간단한 것은 도울 수 있어요."
수희는 앞치마를 질끈 묶고 홀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긴 찬반을 치웠다.
손님들은 밀려드는데 빈 테이블이 없다.
수희는 일회용 장갑을 끼고 테이블을 닦고 있으니
단골손님인 듯한 남자들이 수희를 보더니 농을 던진다.
"이거 오래 살고 볼일이네 그려, 이런 촌에 이렇게 세련된 아즘니가 식당에 일하러 오다니."
"아무리 봐도 이 식당에서 일할 사람은 아닌데..."
이때 분이가 얼굴이 벌게져서 주방에서 나와서는 남자들을 향해 일침을 가한다.
"점잖게 굴어요."
"이분은 우리 집 손님인데 손이 달려서 잠시 돕고 있는 거니까..."
"알았소, 우리가 무슨 말을 했다고..."
남자들이 자리에 앉자, 잠시 밖에 있던 분이의 아들이 돌아와
손님들 테이블에 물 잔을 가져다준다.
수희는 안채로 돌아와 씻고 누웠다.
방안에 있던 텔레비전을 켰다.
평상시 드라마를 시청을 안 하는 성격이라 눈은 텔레비전에 가 있지만 집중이 안된다.
창밖에서는 술에 취해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누구와 다툼이 있었는지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말속에는 욕설이 흥건 하게 고여 있다.
조금 있자 누군가 가래침을 탁 하고 뱉더니 핸드폰을 통화를 하는지
거만한 말투가 들린다.
수희는 밖에서 밖에서 들리는 소음에 잠이 깼다.
피곤해서 깊은 잠이 들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벽시계를 보니
겨우 10분 잠깐 눈을 붙이고 잠에서 깬 것이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어 분이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손님은 아무도 없고 분이가 피곤 한지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다.
수희가 머뭇거리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잠이 깬 분이가
"아직 안 주무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미안 하기는 요.
수희가 대답했다. "근데 아드님은 안 보이네요."
"예, 복지관 다녀오면 피곤해서 저녁만 먹으면 곯아떨어진답니다."
"복지관에서는 베이킹을 가르치면서 양로원과 아이들 보육원에 보낼 빵을
원생들과 함께 만들어요."
"좋은 일 하시네요."
"사람은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불을 끄고 누워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 진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 진다 하지 않았던가. 그럼 나는 이미 태어나는 순간에
암이라는 무거운 불운을 안고 태어났을까.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수희는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기고
상점에는 깜빡거리는 불빛이, 길가는 길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혼자 긴 한숨을 쉬던 수희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부모님과 시골 외갓집에 갔을 때 보았던 별들의 무수한 반짝임이
떠올라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별은 없고, 이따금 반짝거리는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것은 별이 아니야. 별은 저렇게 반짝이지 않지.
알퐁스 도데의 소설 속 스테파니 아가씨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마음이 부산 스러 젔다. 그리고 폰을 열고 친정 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희냐?"
"너 어디냐?"
"혹시 딴 맘먹으려고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
엄마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근심이 주렁주렁 매달려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순간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동안
쌓였던 원망을 쏟아 놓고 싶다.
수희는 울먹이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겨우 한마디를 건네는데 "엄마 걱정 마요."
"나... 죽지 않아요."
"그냥 그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 한심스러워서...."
"그것은 네 탓이 아니다."
"넌 그냥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았어.
누가 잘못해서가 아니야."
"이제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면 네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니."
친정 엄마와 긴 통화 끝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왜 그동안 일에 미처 살았는지 삶에 대해 회의 적이었는지, 이젠 알 것 같다.
대학 4년 내내 알바를 하느라 학우들과 제대로 추억도 쌓지 못했던 지난날. 휴일에도 돈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늦은 밤에 귀가했다. 하지만 수희의 부모는 언니와 남동생을 끼고 도느라
수희의 고생을 외면했다. 단 한 번도 등록금에 대해 묻지 않던 부모님.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자신에게 왜 그리 냉담했는지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너무 화가 나서 아버지 산소 찾는 것을 등한시했던 수희다. 서운한 감정이 쌓여 친정 엄마를 자주
찾지 않았던 자신이 이제야 후회가 밀려온다.
그토록 고생해서 겨우 겨우 졸업을 하는 날에도 수희는 가족들의 축하 꽃다발도
없이 혼자 학사모를 쓰고 기념사진 한 장 달랑 찍은 게 전부다.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그 시간 남동생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가시느라 그랬다, 이해하려 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언니 조차도 자신의 졸업식에 참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가슴에는 원망과 분노가 싹트고 있었다.
수희는 엄마와 통화한 후 가슴에 쌓인 원망이 해소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가슴이 조금 시원해진다.
엄마가 처음으로 수희에게 진심을 말했다. '미안하다고 이미 지난 일이니 잊어버리라고...'
질주하는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희 앞에 언제 왔는지
분이가 수희 앞에 서 있다.
"여기 계신 줄 모르고 한참을 찾았어요."
"방에 가 봤더니, 옷이랑 짐은 있는데 기척이 없어서..."
붙이는 마음 좋은 미소를 짓는다.
"갑자기 친정 엄마 생각이 나서."
수희가 말을 멈추자
분이가 말을 잇는다. "친정 엄마 저에게도 엄마가 계셨지요."
"그런데 효도를 제대로 못했어요."
"효도는 물질로 대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나 봐요."
"아버지의 노름빚을 갚기 위해 남에게 못 할 일을 했는데도 제맘도 모른 체
"몹쓸 아주 부도덕한 딸로 낙인을, 찍어서 외면을 해더니, 나중에는 아예 부모를 욕보였다 해서
집에 발을 못 붙이게 했어요."
"사실 나쁜 사람 맞지요. "분이가 말했다.
"제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한 일과 동생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어떤 짓을 하고 살았는지, 부모님들이 알고 형제들이 알고 난 후
모든 인연을 끊었어요."
"무슨 일을 하셨기에 부모 형제와 연을 끊고 살아요". 수희가 물었다.
"손님께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지만 저는 천하디 천한 여자랍니다."
"뭇 남자들의 품에서 웃음을 팔고 몸을 팔다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고 힘들게 했지요."
"그래서 그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남들은 평탄한 삶을 사는데 나는..."
분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천장을 바라본다.
"정말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끝까지 그러지 못했어요. 그동안 저를 거쳐간
남자가 수없이 많지요. 들었다시피 첫아들은 돈 때문에 버리고...."
"지금 내 곁에 남은 아들은 언제 병으로 죽을지도 모르고.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은 수명이 짧지요."
"남들처럼 천수를 누리지 못하지요. 저란 사람과 엮이면 다들 불행해지는지 결말이 좋지 않아요."
"그동안 죽으려고 목숨을 끊으려 여러 번 시도는 했는데 그래도 죄 많은 여인인데도,
더 살라고 아픈 아들을
키우라는 신의 뜻인지 지금껏 살고 있어요."
"그렇게 저는 장애아를 낳은 죄 많은 여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아들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은 거고요."
"그런 사연이 있네요." 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수희도 술잔을 가까이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손님은 그냥 이거 드세요 하면서 분이가 사이다를 내민다.
분이는 소주잔에 소주를 쪼르르 따르더니 창밖을 바라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있을 때, 누군가 수희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혼잣말을 하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약하게 똑 똑 의식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약하다. 누굴까 이 시간에,
이 집 주인장인 분이는 장사하기 바쁜 시간일 텐데...
수희는 생각했다. 타지에서 여자가 혼자 자는 방에 들어올 사람도 없는데 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타지에 와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디서 왔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 묻는 게 더 불편했다.
수희는 한참을 망설이다 물었다.
"누구세요?"
"처음에는 잘 못 들은 줄 알고 재차 물었다.
"누구세요."
"저어기..."
더듬거리는 말투에 망설임이 느껴진다.
수희가 방문을 열자 이 집 주인장인 분이의 아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서 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분이의 아들은 입술만 달싹 거리며 식당을 가리킨다. 아마도 자신의 엄마가 찾는다는 말을
우물쭈물하는 것이리라 생각을 하고, 수희는 윗옷을 걸치고, 분이 아들을 따라 식당으로 왔다.
식당에는 술꾼들이 소주잔을 앞에 두고 시끌벅적하게 소란이 일었다.
테이블마다 손님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는데, 아마도 손님들의 분위기로 봐서 주문을 할 모양이다.
그런데 분이 아들은 손님들 앞에 나서서 주문을 받기를 꺼리는 모양이다.
그리고 보니 이 집 주인장인 분이가 보이지 않는다.
손님만 놔두고 어디 갔을까. 수희는 주인장 아들에게 눈짓을 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우 하룻밤을 함께 했는데, 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분이의 아픔을 알아서인지 걱정이 앞선다.
무슨 일은 없겠지. 수희가 커피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테이블에 마약 앉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분리가 나타나서, 술꾼들을 향해 너스레를 떤다.
"오늘 기분도 좋은데 모든 손님들에게 소주 한 병이 무조건 공짜예요."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소주 한 병을 공짜로 준다고."
"아 그럼 까짓 거 우리 테이블에도 소주 한 병 줘요."
"기분이다. 기분. 오늘은 기분 좋게 마셔 볼까."
수희는 술 한잔에 삶이 주는 고단함을 씻어내는 그들로 인해 가슴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로 어느 집의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왁자지껄 떠들던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간 식당은 정적이 찾아오고,
주방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분이가 마지막 설거지를 마치고 분이가 묵는 방에 들어온 것은 10시가 지난 뒤였다.
분이의 손에는, 어제와 달리 쟁반에는 과일과 접시, 과도가 들려 있었다.
"고단 하실 텐데 이런 것까지 챙겨 오셨네요."
수희가 활짝 웃으며 묻자 분이는
"손님 서울 가시기 전에 추억 하나 만들려고 그러지요."
그 말에 수희는 마치 분이가 친언니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이렇게 마음 써 주시니 그냥 감사할 따름입니다."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아요?"
"술 손님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깊은 잠도 못 주무시고 죄송해요."
분이가 말했다.
"불편 하기는요. 마치 여행 온 것처럼 신비로운 것을 체험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러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혹시 가족들이 우리 집에 있는 거 모르지요?"
"예... 뭐 연락하기 싫어서요 가끔은, 필요해요."
"설마 연락도 하지 않고 여기 계시는 것은 아니지요?
설마 연락도 하지 않고 여기 계시는 것은 아니지요?"
"외람된 말이지만 , 가족들 걱정하지 않게 미리 전화하세요."
"그럴까요." 수희는 슬며시 웃었다.
"장사를 오래 해서 그런지 손님들과 몇 마디 나누면 그분들의 생각이 보인답니다."
"어쨌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얼마 전까지 죽음이 가까이 온 것 같아 두려웠어요."
"의사는 괜찮다는데,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요."
"사형 선고를 앞둔 사형수의 심정이 이럴까요." 아니면 죄 많은 여인이라 그럴까요?"
"이미 죄를 많이 지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는 사람은 따로 있지요."
"혹시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어요?"
분이가 묻는다.
"그것은 아닌데..."
"이미 수술을 했는데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아요. 부모님이 주신 신체 일부를 훼손했지요.
살기 위해."
"어린 시절 그토록 나를 힘들게 해서 철들고 사서 묵은 감정이 남아 원망을 많이
해서 나에게 병이 찾아왔을까요?"
"그것은 아닐 겁니다."
"누구나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지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세요."
"나를 걱정하고 아껴 주는 가족이 있고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지요."
"몇 번이나 죽고 싶었는데 인명은 재천이라더니 죽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수희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 손님은 복이 많으신 분 같아요.
사랑하는 가족도 있고 잘 키운 자녀들도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에요."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보니 세상을 살 자신이 없어졌어요."
"직장에 출근을 했는데도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잊어버렸는지
모든 게 낯설고 무서웠어요."
함께 해야 할 가족들 그리고 회사 직원들의 안위까지
모든 게 물거품이 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용기를 가지세요, 그리고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일은 함께 하는 것이지요."
분이가 수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은 서로 조금씩 나누어지면 훨씬 가볍지요."
두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을 비우고 있을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분이는 또 한숨을 푹 쉬면서 가슴을 친다.
분이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방을 나간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분이의 목소리가 차분 하게 들리더니 곧이어, 기괴 하게 들리던 소리가 멈추고
마당에는 이따금 바람이 차고 들어와 수돗가에 있던 세수대야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린다.
발자국 소리가 탁탁 들리다, 이따금 술취한 취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누군가 시끄럽다고 투덜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방안 텔레비젼에 시선을 보내다 리모컨을 가지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분이가 들어온다.
"무슨 일 있었어요?"
분이는 난감해 하더니 이내 표정을 밝게 하더니
"조금던 소리는 제 아들이 우는 소리였어요."
"몸은 정상이 아닌데, 에미가 되어 못난 자식을 병신이라 말 할수도 없고..."
"신체는 정상의 성인 남자인지 그만 험한 꼴을 보이게 되었네요."
수희는 분이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분이 아들의 상태는 이미 눈으로 보았지만 대략 나이는 20살 전후로 보이는데 키는
150 센티나 될까 하고 배는 불룩 튀어 나와 있는데, 수염은 깍지를 않아서
마치 산적으로 분장을 시켜 놓은 듯한 얼굴이다.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얼른 피해 도망을 했을 외모이다.
피부는 까무잡잡 하고, 눈은 툭 튀어 나와 있고 입술은 툭 불거진게
처음 보는 사람은 기겁을 할 정도로 못생긴 사내였다.
수희가 분이 아들 외모를 생각 하고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마치 읽기라도 하듯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간다.
분이가 혼자 쓰는 방 맞은편에 있던 창고를
개조한 방을 아들에게 쓰게 했더니, 비가 내리거나 우중충한 날이면
골방에 앉아 어디서 사이트를 찾았는지 성인 사이트에 접속을 해서 자위를 한다고 한다.
엄마로서 아들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닌데, 얼마 전 복지관에서 같이 수업을 듣던 아가씨와
마음이 통해서, 얼마 동안 연인이었단다. 두사람은 서로 위해 주고 너무나 아꼈다는 것이다.
아가씨는 청각 장애를 앓고 있어 늘 반려견을 데리고 다니는데
어느 날부터 장애인 복지관에 출석을, 하지 않아 나중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분이 아들이 아가씨를 임신시킬 걱정에 타이르다 잘 되지 않자 아가씨
부모가, 복지관을 옮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생 이별을 했다고 한다.
아가씨와 헤어진 후 분이 아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동안 울기만 했다. 분이 얘기를 듣던 수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답답했다.
분이 이야기를 듣다 수희는 오래전 여고 동창생에게 들었던 황당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동창생의 말에 의하면 딸년이 고등학교 2학년인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걸핏하면 학교에 결석을 하고 교칙을 위반을 해서 학교에 불려 갔더란다.
수희 동창생이 학교에 찾아갔더니, 담임선생 이야기가 가관이 아니다.
딸이 학교에 출석을 해도, 책가방에는 교과서 대신 화장품과, 옷과 신발만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딸의 담임을 만나고 나서 딸과 한바탕 전쟁을 치렀는데
그래도 딸이 고쳐지지 않고 말썽을 피워서
학교 쉬는 날 방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었다는 말을 듣고 요즘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뒤 딸아이가 학교에 간 후 딸 책상 서랍을 검사를 했더니 피임약이 나와서
기겁을 했다는 이야기에 다른 동창생들도 모두 합세를 해서 이구동성으로 말을 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부터 먼저 하면 집안 망신이니 차라리 일찍
성교육을 시켜서 임신 만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들 가진 엄마와 딸 가진 엄마의 입장이 달라
자신도 모르게 집에 두고 온 자식 걱정으로 분이 와 같은 마음이 되었다.
모성애란 자식을 낳아본 사람 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식이 아파하고 울 때 자신이 대신 아플 수 있고 대신 울어 주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지금 분이의 심정이 얼마나 아플까. 아들의 사랑을 지켜 주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이...
아들이 첫사랑의 상처를 어떻게든 극복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또한, 부모의 도리가 아닐까.
자식도 품 안의 자식이지 머리가 크면, 부모도 자식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처럼
무조건 부모가 옳다고 우기지도 못한다.
수희 아들도 고교 시절에 무척이나 자신의 속을 썩였던 아들이었는데
대학에 입학을 하고 군에 입대를 하고 나서 철이 들었는지,
그동안 미뤄던 공부에 대한 미련이 생겼는지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견문을 넓히겠다는 포부를 다지고 유학 준비를 하는 아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대견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처럼 어렵기만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요?"
"예 맞아요."
"저도 자식을 키워 보니 부모님 마음을 알 것 같더군요
그래서 늦게 철이 든다고 하는데,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데, 제가 꼭 그런 것 같아요."
수희가 말했다.
그동안 오로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활했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인생인데 즐기면서 사세요."
"가고 싶은 곳 마음껏 다니시고 먹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만나고 싶은 사람도 원 없이 만나면 좋지요."
"맞아요." 수희가 맞장구를 쳤다.
예전에는 바빠서 정말 너무 바빠서 만나서 밥 한 끼 먹는 게 어려웠는데,
지금 제 건강이 이렇게 되니 새삼스럽게 보고 싶고 그리워지네요."
"누구랑 이렇게 밤늦도록 수다를 떨어본 적이 없는데, 여기 와서 많이 배운 것 같아요
"특히 제 삶에 대해서..."
사장인 수희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잠수를 타게 되자, 회사에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지 직원들이 술렁거린다. 사장인 수희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계약으로는 가장 큰 액수의 프로젝트를 맞아 동분서주하던 직원들은
최종 심사를 앞두고, 대표가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심란한 모양이다.
마지막 최종 점검을 앞두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김대리도 오늘은
풀이 잔뜩 죽어, 죽상을 하고 앉아 있다.
그는 마치 심통을 부리듯 컴퓨터 자판을 탁탁 두들기는 폼이, 화풀이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때 수희의 창업 멤버인 윤상무가 회의 소집을 하고, 사무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회의실로 직원들을 불러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 지금 사장님이 안 계신다고 일을 안 하실 겁니까?"
"우리들은 그럴수록 맡은 바 일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윤상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단인 박주임이 손을 들고 질문을 던진다.
"상무님! 혹시 저희들만 모르는 사장님과 상무님의 숨겨진 일이 있는지요?"
"뭐야!... 지금 자네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도 자네들처럼 속이 타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 사람은 말이야 가끔은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나고 싶을 때도 있는 거라고..."
회의가 끝나고 각자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온 직원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싱숭생숭 한지 다들 한숨만 푹 쉬고 있다.
영우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긴 한숨을 쉬었다.
가끔 혼잣말처럼 되뇌던 수희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딱 3일만 지내고 싶어."
" 회사 일도 하지 않고 집안일도 하지 않고 그리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이 정리가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거지.
마치 연어의 일생처럼 나도 한번 그렇게 한번 잠수를 타고 싶은데..."
"당신 미쳤어!"
"가끔 일이 힘들면 쉬엄쉬엄 하면 되지 뭐하러 잠수는 타고 그래.
"그래도 휴대폰은 열어 두어, 정말 급하면 연락을 할 수도 있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당신! 내가 죽을까 겁이 나는 거야 그렇지..."
갑자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영우는 자동차를 몰고 나갔다.
감성적인 수희가 혹시 잘못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한참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예은이다.
"아빠! 어디야?"
"응... 운전 중이야."
"아빠 혹시 엄마를 찾으러 다니는 거야?"
"걱정 마 아빠! 조금 전에 엄마에게 문자 왔는데,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어."
"정말이니?"
예은의 전화를 끊고 나서 영우는 서둘러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다.
직장에서는 결재 서류를 쌓아 놓고 영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잠시 딴생각에 빠져 업무에 지장을 초래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결혼 25년 차 부부인 영우와 수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다른 부부들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영우 역시 아내인 수희 외에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살아왔다.
그동안 접대를 위해서 술집에 가기도 했지만, 성격이 워낙 소심해서
젊고 예쁜 여자에게 눈길이 갈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하룻밤 몇 시간의 유희였다.
아들과 딸이 성장해 가면서 신혼 때 뜨거웠던 사랑도 이제는 점차 식어서
남들처럼 전우애로 살고 있는 평범한 평범한 사이가 되었다.
"손님 내일은 바닷가에 있는 어시장에 한번 다녀오세요."
"가서 보면 틀림없이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어시장이요?"
"어시장이라면 생선을 파는 시장을 말하는 거지요?"
"암튼 그곳에 가서 막 잡은 싱싱한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 딱 하면 아마도 살맛이 날 것이에요."
"내가 죽으러 여기에 온 것처럼 보이나요?
"에이 설마 아닌거 알아요 머리 식히러 오신거지 뭐..."
분이는 수희 눈치를 보더니 샐쭉 토라지는 표정을 짓는다.
"가정 주부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으면 다들 수군거릴 거예요."
"수군 거리면 어때요!
"여기 손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잠시 연애를 해도 모를걸요.... ㅎㅎㅎ"
분이의 말에 수희도 깔깔 거리며 웃고 말았다.
속으로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손님 웃으라고 내가 농을 한 거예요."
구경하면서 생선이나 살까
수희가 막 잡은 생선이 있다고 하니 매콤한 매운탕을 좋아하는 남편 영우 생각이 났다.
"참 내 정신 좀 봐, 어제 저의 기구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했는데."
분이는 수희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마치 가슴에 묻어 두었던 것을 끄집어 내려는 몸짓이 가여웠다.
"내 가요!... 꼭 한 번은 신세타령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요."
"가슴에 묻어 두기엔 설움이 많아 서지요."
오늘도 깊은 잠을 이루기는 틀렸다는 생각에 수희는
다리를 펴고 등을 벽에 기대었다.
얇은 창틀 사이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리는데 방안은 정적만이 감돌고
두 사람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퇴원 후 건진을 하러 병원에 갔지요."
"담당의는 이제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드니 쉬라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의사의 말에 좌절을 했어요."
도무지 승복을 할 수 없어서 내 자신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어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 같아서..."
"그동안 일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일은 안하면 죽을것 같고..."
"일을 놓고 집안에서 밥하고 빨래를 하라는데,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그 길로 병원을 뛰쳐나왔지요."
"남의 밑에서 일을 배우고 창업을 해서 오롯이 나의 회사를 꾸리면서
정말 힘들었던 적도 많아요."
"어느 땐 실컷 일을 해 주고 노력의 대가를 받지 못해서, 빚을 내서 직원들 월급을 주면서
버틴 적도 있는데, 지금은 업계에 입소문이 나서
의뢰도 많이 들어오는 편이랍니다."
여기까지 말한 수희는 천장을 바라본다.
수희의 이야기를 듣던 분이는 그러니까 다른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군요?"
"단순히 병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어서 그게 두려워 이렇게 방황을 하시는군요."
"맞아요."
"사실!... 남들이 보면 저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요."
"그것을 인정 하지만..."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요?"
"일을 안 하면 미칠 것 같고 무엇인가 집중을 해야만 살아 있는 것을 느끼니까요."
"의사는 저에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하네요."
"정신과 전문의를 연결을 해 주면서 먼저 육체의 안정을 찾으면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정신과 진료를 하라는 겁니다."
"내가 만약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게 소문이 나게 되면..."
"정말 끔찍 하고 무서운 일이지요, 예 손님 말씀을 들으니 이해가 됩니다. 분이가 말했다.
"저는 이 업계에서 매장되는 겁니다."
"매장되면 저는 산사람이 아닌 거지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죽은 사람과 매 한 가지다, 그런 말씀이군요." 분이도 수희의 말에 동감을 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태연하게 회사에 출근을 하고 집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머리를 식히고 마음의 정리가 되면 스스로 결정을 해야 지요."
"여기 오기 전에는 마치 내가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아주 나빴지요."
'그거 아세요?"
"사랑이라는 열병에 걸려 보신 적 없으세요?"
"사랑이라..."
분이는 시선을 멀리 둔다.
"미친 사람처럼 눈앞에 있는데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사랑...."
"그 사람이 아니면 미칠 것 같아서... 분이는 먼 과거를 헤매는 듯하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른 60 넘은 여자의 눈꼬리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분 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인생의 교과서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짠해진다.
그런 그녀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은 아주 이기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랑을 진실한 사랑을 주고받았다는 그녀의 삶이 이토록
처절하게 아플까,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끼어서, 속살이 보이지 않는 초로의 여인에게
가슴 시린 사랑의 상흔이 지금도 남아서, 이렇게 아프게 하다니...
이끼를 그 주름까지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안아 주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리움이 깊어지면 가슴에는 시퍼런 멍자국만 남아, 날카로운 메스로 도려 내고 싶을 텐데...
어쩌면 분이 와 분이의 아들은 서로의 상처를 혀로 핥으며 세상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수희의 아픔은 어쩌면 잠시 지나가는 바람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일을 못하면 죽을 것 같다는 것도 다른 어떤 이에게는 사치고
정신적 허영일 수도 있겠다.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큰 일을 하겠다고
남편과 자식들을 내팽게치고 나와서, 걱정을 끼치는지 모를 일이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분이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짙은 회한이 밀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의 가슴 먹먹한 사랑의 순간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한 남자의 사랑으로 탄생하고, 그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날 새벽 수희는 수협공판장으로 향했다.
아침잠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새벽에 갖 잡은 물고기를 사기 위해
몰려든 주부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이어지고 있는 시장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손님과 상인들이 더 좋은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었다.
수희는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새벽 찬바람에 두꺼운 옷에 두꺼운 장갑을 낀 시장 상인들은
손님들의 눈길을 받기 위해 소리치고 있었다.
"자아... 여기 보세요."
"오늘 새벽에 막 잡아 올린 방어 있어요."
"싱싱한 방어가 아주 쌉니다."
"어서어서 오세요."
구성진 상인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천천히 걸었다.
한쪽에서는 큰 고무대야에 전복이며 소라가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맛있겠다고 생각하고 군침을 흘렸을 테지만 오늘은
식욕도 없고 무기력증이 생긴 듯 다리에 힘이 없다.
아침을 굶은 탓이지만 며칠 동안 약을 먹지 않은 자신이 생각이 났다.
수협공판장 뒤편에는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곳에서는 어부들이
어구들을 손질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새벽 시장은 생동감이 넘친다.
시장 상인들과 중간 도매상들의 경매가 진행 중인 곳에는 수신호를 하고
빠르게 소리치는 사람들 틈새로, 물고기를 실어 나르는 수레가 요란하게 달린다.
예전에 노량진 수산시장에 간 적이 있다. 그때도 새벽에 갖 건져 올린 생선들이 파닥거리며
뛰어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바다에서 막 잡은 물고기의 신선도를 확인을 하니
삶이란 이렇게 한시도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시간이었다.
횟집이 몰려 있는 곳을 지나 이번에는 방파제가 쌓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얀 파도가 한번 몰려왔다, 몰려 가니 그곳에는 하얀 거품이 일고,
방파제에는 시커먼 홍합이 덕지덕지 붙어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꼭 끌어안고 있었다.
수희는 방파제 가까이 다가가서 방파제에 붙어 있는 홍합을 채취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 부모님을 따라 여수 바닷가에 가서 방파제에 붙은 홍합을 채취하던 추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그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때는 언니와 동생 셋이서
서로 홍합을 많이 잡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부모님의 말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린다.
그러나 수희는 방파제로 가던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바다에 파도가 가세게 밀려오더니,
수희가 서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밀려온다.
오늘 저녁 바람이 세차게 불 모양이다.
바람이 불면 바닷가는 또 어떤 모습일까...
바다를 등지고 얕은 야산으로 향했다.
야산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고, 그곳에는 예쁜 집이 한채 있다.
아마도 누군가의 살림집일 것이다.
바닷가에 작은 집을 지어 놓고 가끔 파도치는 바다를 보러 올 것이다.
수희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계절이 봄이라 그런지 산에는 풀꽃들이 많이 피어있다. 풀꽃을 꺾어 손에 쥐어 본다.
언젠가 꽃을 꺾어서 신랑각시 하며 놀았던 옛 추억이 떠올라 그만 빙그시 웃고 말았다.
항상 안방에 걸려 있던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을 보고 아랫집 영식이와 신랑각시를 할 때면
수희는 언제나 엄마가 아끼는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목소리도 가늘게 '여보 여보' 밥 먹어할 때면 영식은 부끄러워 도망을 치곤 했다.
그날도 엄마가 찬거리를 사러 나간 틈에 엄마의 뾰족구두를 신고 신랑각시를 놀이를 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께 야단을 맞았다.
"이놈의 가시나가 정신이 있어 없어
이 비싼 화장품을 이렇게 망가트려 놓고..."
수희는 엄마 몰래 엄마가 아끼는 루주를 새빨갛게 그리고
엄마 몰래 엄마가 아끼는 루주를 새빨갛게 그리고
엄마의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소꿉놀이를 하다 들킨 것이다.
엄마는 수희 종아리를 때리며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신랑각시 놀이냐고
막 화를 냈던 것이다.
어릴 절 신랑이었던 영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회였는데 영식은 그동안 성공을 해서 번듯한 회사 사장이 되어 있었다.
수희는 늘 함께 소끕놀이를 해 준 영식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영식은 어릴 때 얼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늘 꾀죄죄하던 그는 말쑥하게 양복을 빼 입고 동창회에 나타나서, 친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반면 수희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젊은 시절의 고왔던 얼굴은 사라지고,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희는 몸이 뚱뚱 하다.
친구들이 다이어트에 돌입을 한다고 한약을 먹고
피트니스 클럽에 가입을 해도, 눈 하나 깜짝을 하지 않던 수희였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닌, 내면에 있다고 굳게 믿는 수희였기에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살이 쩠다는 것을 인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병원에서 큰 수술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수희는 과체중으로 인해 건강이 삼각 하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
바다 위에서 갈매기들의 물고기를 먹고 싶어 끼룩거린다.
누가 갈매기 소리가 좋다고 했던가
이젠 갈매기의 소리가 슬슬 지겨워진다.
저녁 장사를 하기 위해 분이는 수조에 생선을 채우고 있었다.
이제 막 잡아 올린 전복은 분이 손바닥보다 컸다.
"아따 요것은 참말로 크네."
"저녁에 초장에 푹 찍어 묵으면 맛있겠다. 옆에서 헤벌쭉 웃고 있는 아들에게
들으라는 듯 말하자 아들은 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다.
'오늘은 생선을 많이 들여놨네요. 단체 손님이라도 예약을 받은
모양이요?"
"아니! 뭐 단체 손님이 아무 때나 오나요? 장사라는 것이 본디, 미리 준비를 해놔야
손님 헌티 싱싱한 것을 팔지 물건도 없으면서 손님을 어떻게 대접하겠어요
안 그래요?"
"맞는 말이오."
"장사하는 사람은 손님의 마음을 다 알아야 하는 법이지..."
"옆 가게 노래방 이사장의 너스레에 분이는 괜스레 분주한 마음이다.
"근데 그 서울 손님 떠났어요?"
'아니요. 그 손님 그냥 인사도 안 하고 갈 사람은 아니지요?"
"그동안 방값이랑 밥값도 계산 안 했다면서, 아유 참 이사장님도 우리가 언제 돈 벌자고
손님에게 몹쓸 짓 했나요, 바가지 씌우면 안 되지요.
받은 만큼 드리고 베풀 수 있으면, 좋은 거지요. 할 수만 있다면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지요."
두 사람은 가게 입구에 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 호객 행위를 했다.
"손님 싱싱한 횟감이 있어요. 오늘 방금 잡아서 식감이 아주 뛰어납니다."
"전복도 아주 좋아요. 싱싱한 꽃게 있어요."
한 무리의 구경꾼들이 분이의 식당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저나 손님은 이제 곧 저녁인데 안 들어오시나..."
분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수희가 양손에 가득 무엇인가를 들고 분이의 식당에 들어선다.
"손님 무거운데 뭘 그렇게 사셨어요?"
"네... 뭐 이것저것 좀 샀어요."
"죄송하지만 이거 냉장고에 넣을 수 있지요?"
"그럼요... 그런데 왜 이걸 사셨어요?"
분이가 물었다
"내일은 집에 가려고요.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는데..."
수희가 인사를 하자 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동안 함께 한방에서 잠을 자고 함께 음식을 나눈 정이 쌓인 시간이
이렇게 감정이 깊을 줄은 몰랐다
"서운해서 어쩌지요.! 분이가 수희의 얼굴을 쳐다보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제가 다음에 이곳에 오면 꼭 잊지 않고 들를 거예요."
그때 출입문이 드르륵 열리고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이닥친다.
"어서 오세요. 분이가 냉큼 일어나서 식탁을 치운다.
덩달아 수희도 바쁘게 움직인다. 수희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어
테이블에 물병과 물컵을 가져갔다. 그리고 밑반찬을 작은 접시에 담아
날라 주었다.
주방에서는 분이가 회를 뜨고 있고, 나이가 지긋한 주방 이모는
옆에서 주방으로 나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분이 식당은 규모가 작아서
홀서빙을 구할 여력이 없다.
그나마 부족한 아들이 일을 대신 도와주었는데 아가씨에게 실연의 아픔을 겪고 나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구 꺼린다.
식당은 금방 후끈 달아오른다.
여기저기에서 아줌마를 부른다.
수희는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어 손님 테이블에 놓는다.
회를 치고 나서는 남은 생선으로 매운탕을 끓인다.
매콤한 매운탕 냄새가 수희의 코끝을 자극한다.
"손님 시장하시지죠?"
"어서 식사하세요."
분이가 수희에게 멍게와 해삼이 담긴 접시와 매운탕을 가져다준다.
"이것 좋아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실은 아까부터 멍게가 막 먹고 싶었는데..." 수희가 입맛을 다시며 좋아 한다.
수희는 새콤한 초장에 멍게를 찍어 먹으며 활짝 웃는다.
수희는 분이가 차려준 밥을 뚝딱 먹어 치운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입맛도 좋다
그동안 식욕이 없었는데 지금은 회 한 접시를 후딱 먹어 치우고,
매운탕을 국물까지 쪽 빨아서 먹었다.
"밥을 먹으니까 든든해요."
손님들이 한차례 빠져나가고 주방 이모와 분이
분이 아들도 저녁 식사를 한다.
"오늘은 좀 정신이 없네요. 그래도 손님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다 서울 손님 덕분이지요." 우리 식당이 요즘처럼 날마다 북적거리면
우리 사장님 날마다 덩실덩실 춤추면서 좋아할걸요." 주방 이모가 이렇게 거들자
분이도 "맞아 서울 손님이 우리 집에 오신 후로 매상이 조금 올랐어요."
"뭐...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이야기해요!"
"그럴까요."
"맛있게 밥을 먹었으니 저녁 후식은 뭐가 좋을까요?
"나는 통닭에 새우튀김이 먹고 싶은데요"
주방 이모 말에 "우리 그럼 통닭이나 시켜 먹을까요?
그날 저녁 근처에서 배달시킨 양념과 후라이드로 닭을 시켜서
먹는데, 입에 착 달라붙는다.
"어쩜 서울에서도 자주 먹은 통닭이 여기에서 먹으니 더 맛있어요."
"그런데 제가 사장님의 인생 이야기를 모두 듣지 못하고 떠나 아쉽네요"
"저도 그동안 만나지 못한 동생을 만난 것처럼 너무나 고마웠는데
보내려니 눈물이 나려 그래요." 그러면서 분이는 또 마음 좋은 얼굴을 한다.
"그럼 오늘 저녁에 저의 마지막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드릴게."
"내 이야기가 재미없어도 좋으니 꼭 들려 드리고 싶은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팔자에도 없는 점심 약속이 대낮부터 명동에서 있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잘 아는 언니가 명동칼국수가 유명하다고 해서 한 그릇 먹었지요.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후 3시가 되었더라고요."
"그때도 물장사를 하고 있을 때라 서둘러 나오는데 글쎄 명동역에서 딱 마주친 거예요."
"누구를 마주쳐요?"
수희가 눈이 동그랗게 뜨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했다.
사실 수희는 짐 정리도 하고 이것저것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오늘 저녁에도 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 사실 별 것은 아니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날 명동에서 점심을 먹고 조금만 일찍 헤어졌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서."
분이가 이렇게 중간에 말을 끊는다.
"누구를 만나셨기에 그러셨어요?" 수희가 궁금한듯 물었다
"글쎄 그날 만난 사람이 하필 어릴때 한동네 사는 소꿉친구지 뭐예요."
"사실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것보다는 친구 손을 잡고 있는,
예쁘장한 계집아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모양 이 꼴은 아닐 거예요
잠깐 만났는데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유치원에 다니는
나이었지 아마도."
"난 그때 친구의 딸아이를 만나고 나서 나도 모르게 모성애가 발동을 해서는,
아이를 갖고 싶었어요."
"예에..."
"아이를..."
"결혼을 하지 않아도 예쁜 딸을 낳고 싶었어요."
"그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서 남들처럼 떵떵거리고 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 잡혀서,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일을 했지요."
"사람이 본디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바보인지, 남자들의 꼬임에 빠져서 아이는커녕
그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서 있는 돈을 다 던져 주었지 뭡니까!"
"이번에도 또 사기를 당했다는 거네요..." 수희가 말했다
"남자들이 잘해 주고 높은 이자를 준다는 말에 번번이 속아서 돈 잃고 사람 잃고..."
"손님 그러니까 나는 사랑이 없어도 좋으니 그냥 아이를 한 명 갖고 싶은 욕망이 지나치다 보니
남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자 보니 결국 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어요."
"그렇게 세월이 가더이다."
"어릴 때는 시간이 더디 흐르는데 30이 넘고 40고개가 되려니 세월이 금방 흐르더군요."
"옆에서는 처녀 귀신으로 늙을 거냐고 하는데, 나중에는 남자들이 지겨웠어요."
"그러는 와중에 양쪽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나니 제 자신이 한심 하더군요."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도 못 해 드렸는데,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후회가 밀려왔어요.
"부모님 제사 때마다 고향에 내려 가도 어쩐지 을씨년스럽기만 하고 우울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명절 때 고향에 계신 부모님 산소에 갔다가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지금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애 아빠를 만났지요."
"버스표를 끊고 자리에 앉았는데, 후줄근하게 생긴 홀아비가 하필 제 옆에 앉았어요
저는 무심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아 글쎄 옆자리에 앉은 홀아비가 자꾸만 저에게 무엇을 권하는 거예요."
"자신의 집 고향에서 수확한 생밤을 먹어 보라고 권하는데
저는 먹기가 싫었는데, 어찌나 권하는지 자꾸 밀어내기가 미안해서
저도 한 개를 까서 먹었는데 아주 고소하게 맛있어요."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만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두 분은 인연이 되려고 만난 것이군요."
수희가 인연 서설이란 글에서 읽은 대목이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인연은 그리 아름다운 인연은 아니었어요."
"예전에 소설책을 읽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인연은 참 아름답잖아요.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만날 때는 왠지 애틋하고 헤어지고 나서도 또 보고 싶고 그런데..."
"우리들은 만나면 싸우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을 했어요."
"그 사람 말처럼 우리는 처음부터 인연이 아닌 것을 억지 인연을 만들어 결국은 서로가 불행의 씨앗이 되었어요.'
"피천득 작가님의 '인연'의 마지막 구절처럼 우리는 만나지 말아야 했는데,
결국 인연의 끈이 되어서, 서로에게 큰 상처만 남기고 말았지요."
"그때 제 나이가 43살이었어요."
분이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한다.
"여자 나이가 40이 넘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모혐에 가까운데
제가 고집을 부려서 아이를 끝까지 지켰지요."
"아이 아빠는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며 극구 아이를 낳는 것을 반대했어요."
"그런데 꼭 마지막으로 아이를 낳아서 정말 잘 키우고 싶었어요."
"예쁘게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키울 자신이 있었던 저는, 아이 아빠의 반대를 부릅쓰고 아이를 낳았지요.
"그럼 병원에서 태아 검사를 하지 않은 거예요?" 수희가 안타까운 마음에 물었다
"그때는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태아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낙태 시기를 놓친 거예요."
"아이 아빠는 미련스럽다며 저를 구박했지요."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아이는 아빠 호적에 올리지도 못하고 제 호적에 올렸지요."
"아들이 가여워요"
"못난 엄마를 만나서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많이 당했어요."
"그것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분이는 소리 없이 흐느낀다.
수희는 분이를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저에게 와 준 생명을 어떻게 헤쳐요."
"그래도 저 아이가 있어 지금까지 살아갈 동력이 되어 살고 있답니다."
수희는 잠에서 깨어나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식당에 올 때 들었던, 작은 옷가방과 핸드백이 들려 있었다.
손님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 테이블을 가로질러 출입문을 드르륵 소리 나게 열고 나서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 집주인 분이가 쏜살 같이 뛰어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손님 이제 정말 이별이네요!"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수희도 고개를 까딱 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둡다.
수희는 자신의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시동을 켠다.
새벽녘의 공기는 쌀쌀하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슴프레 하게 건물들이 보인다.
그리곤 한참을 그대로 정지된 상태로 앉아 있다 출발을 했다
수희는 라디오를 끄고 CD를 넣는다.
오랜만에 음악을 들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향해 달린다.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몇 달 만에 처음이다. 역시 기분이 꿀꿀할 때는 여행만큼
기분을 전환시켜 주는 것은 없나 보다. 자동차는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와
흰 파도가 넘실 대는 바닷가를 따라 달랐다.
수희는 자동차 창문을 열었다.
조금 전 까지도 비릿한 생선 냄새가 서서히 싫증이 나려 했는데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바다 위에서
갈매기들이 서로 물고기를 잡겠다고, 바닷물을 향해 긴 부리를 깊숙이 넣어 물고기를 낚아채는데
그 모습이 신기해서 자신도 모르게 ㅎㅎ 소리를 내며 웃고 있다.
며칠 동안 생선 냄새와 비릿한 갯내음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막상 떠나고 보니 그 냄새 역시 그리워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다는 멀어지고 보이는 것은 넖은 논에 자라고 있는
우리네 먹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은 위대해.
두 눈에 보이는 풍경이 평온하다. 운전을 하면서 휴대폰을 켰다.
띵띵 거리며 울리는 문자며 카톡 카톡 소리가 들리는 카톡이 오늘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정겹게 들린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뒤에서 수희의 뒤꽁무니를 따라오던 트럭이 빵빵 거리며 경적을 울린다.
"아이고 깜짝이야 제기랄 애 떨어질 뻔했네."
"누군지 모르지만 성격 한번 되게 급하네."
수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얼마나 달렸을 까
슬슬 시장기가 밀려온다. 아침 일찍 식당을 나오느라 아침을 굶었다.
"그래 간단하게 아침을 때울까!"
"화장실도 가야 하니까 서울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좀 쉬었다 가자."
자동차는 휴대소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이른 아침이라 다른 날과 달리 혼잡하지는 않다.
커피 한잔을 시키고 기다리고 있으니 옆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토스트가 보인다. 수희는 토스트 파는 가게 앞에 줄을 섰다
.토스트를 파는 매대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토스트를 먹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수희는 등나무 아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등나무를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뭐가 그리 바쁜지
등나무가 보라색 꽃을 피워도 가까이 다가가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등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푸른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빛깔이 참 고왔다.
비로 깨끗하게 씻어낸 하늘에는 이따금 한가하게 노닐고 있는 흰 구름 만이
정겹게 웃고 있다.
커피 한잔에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 희죽 거리고 있는 자신이 낯설다.
어제 까지만 해도 느껴 보지 못한 마음의 여유가 있다.
당장 무엇을 먼저 할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부딪쳐서 깨지고
아파할지라도, 이젠 앞만 보고 달리고 싶다. 이정표는 점점 서울과 가까워진다.
죽전 휴게소를 지나쳤다. 금방이라도 서울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주유하는데 낯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사연의 '바람'을 들으며 언제 까지나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느낀다.
서울에 도착을 하니 조금 전 까지도 출근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잊은 수희는
왜 이렇게 차량의 흐름이 더딜까 생각을 하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마치 자신이 방문객이 된 것처럼 어색하다
그녀는 사무실 비밀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살짝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나에게는 내일이 있어."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데
그것을 잊고 있었지 뭐야..."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수희는 지금 한복모델 선발 대회장에 와 있다
참가자 대부분 키가 늘씬하게 크며 몸매도 아름답지만
외모 또한 전문 모델 뺨치게 아름답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조금 위축이 된다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었다.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고 단백질 식사를 하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
모두 맛있는 음식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을 겪었다.
그동안 새벽에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아침 8시에 회사에 출근을 했다.
출근을 하게 되면 의례히 마시게 되는 커피를 줄이고
지방을 분해하는 차를 마시며 몸에 쌓여 있던 노폐물을 줄였다.
일을 하면서 입에 군것질 거리를 달고 살던 생활 패턴을 고치기 위해
음식이 당길 때면 야채를 먹으며 허전한 위를 달랬다.
점심은 보리밥에 쌈을 먹으며 부족한 탄수화물을 보충을 하고 저녁에는
살찌기 쉬운 식사 대신에, 닭가슴살 요리를 기름에 튀기거나 볶지 않고 삶아서
아주 조금만 먹었다. 그리고 피트니스 클럽으로 달려가 2시간 동안 뛰었다.
처음에는 몸무게에 변화가 없더니 한 달이 지나면서 몸무게가 천천히 빠지면서
자신감을 회복을 했다. 거울 보는 일이 괴로운 일이 아닌 신명 나는 일로 바뀐 것이다.
매일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내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된 지 2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동안 연락이 없던 대학동창 선미에게 전화 가 온 것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아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희와 대학과 동기면서 4년 내내 붙어 다니면서, 함께 미팅도 하고
함께 알바를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우정의 벗이었다.
그랬던 그녀는 결혼 후 지방으로 이사를 한 후 수희와 멀어졌다.
일과 집안일로 바쁘게 보내는 수희에게 학교 동창들과 만나 수다 떨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수희는, 그러나 그동안 많은 일을 겪은 후라, 갑작스레 걸려온 선미의 전화가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선미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아이 들도 모두 대학에 보내고 나니 한시름 놓으면서, 옛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한참을 통화를 하면서, 옛 추억을 더듬는 시간을 보냈다.
선미는 수희의 소식을 궁금해했다.
아직도 여대생 의 풋풋한 매력이 풍기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수희는 한마디로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를 했다.
학생 때의 당돌하고 멋진 사람은 없고 이제 지천명을 넘어 몸매는 변했고
얼굴에 주름만 가득해서 사는 일에 시들해지다 이제 막 새롭게, 변신 중이라고...
그런 수희에게 선미는 깜짝 놀랄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예전 예뻤던 기억을 되살려서 주부 모델 선발 대회에 함께 참가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다.
수희는 손사래를 치면서 웃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네가...주부모델 대회에 참가를 한다고...ㅎㅎㅎ"
"야... 선미야 네가 그렇게 나를 이야기해 주는 것은 좋은데
내가 참가를 한다고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애..."
"아니야."
"내가 알아봤는데 나이와 몸매는 상관이 없대,
우리 같은 중년 부인들도 한복모델이 될 수 있다니까 우리 한번 나가보자 응..."
"너!... 예전에 우리 과 퀸이었잖아 기억 안 나?"
"애는 그땐 우리가 가장 예뻤던 시절이고..." 수희가 웃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 넌 원래 예뻤으니까 몸매 조금만 다듬으면 되지 암 될 거야... 선미가 말했다.
"지금은 말이야, 네가 나를 보면 기절초풍할 거야..." 수희는 선미의 말에 계속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수희는 "정말 떨어지는 셈 치고 한번 도전해 볼까, "
"이번 기회로 새로운 내일이 펼쳐 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꼭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안돼도 괘념치 말자 우리,
우리들 50 인생에 유튜브 방송으로 방송을 탄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아마도..."
"그럴까 그러면 우리 예전처럼 사고 한번 쳐 볼까..."
그렇게 해서 수희는 오늘 모델 선발 대회장에 앉아 있다.
먼저 설레발을 치면서 함께 참가하자던 선미는 참가비만 입금시키고 나서
집안에 변고가 생겨 혼자 대회장에 있다.
스피치 연습을 하면서도 긴장이 밀려온다. 대회장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은
예비 모델들이 서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워킹 연습을 하고 장기 자랑 연습에 여념이 없다.
수희가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
조금 전 대기실에서 머리의 가채를 봐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아주 몸매가 날씬하고 예뻤다.
그런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떨리지 않아요?" 여자는 긴 한복 자락을 들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녀는 입꼬리에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사실 저는 지금 긴장이 돼서 죽을 것 같아요." 여자가 말했다
"그쪽도 떨려요?" 하고 수희에게 물었다.
"예 사실 조금 떨리네요." 수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다.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기획 행사를 치르면서,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위해
심호흡을 시키고 무대 매너를 지시했던 사람이다.
"이런 자리에 온 것이 처음이라 많이 떨려요." 그녀가 다시 대답을 했다.
"그런데 무슨 일 하세요?" 하고 수희가 그녀에게 묻자
"저는 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데, 옆에서 미인대회 참석을 해 보라 권유를 해서요."
"그러시군요." 옆에 있던 여자는 필기한 것을 열심히 외우면서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혹시 무대에 섰을 때 스피치 연습한 것을 까먹을까 봐 무척 긴장이 돼요."
그런 그녀의 웃음기 어린 얼굴이 무척이라 신선했다.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녀가 수희에게 물었다
"네 물어보세요!"
"무슨 일 하시는 분인지 궁금해서..."
"아... 저 말이지요."
"훗훗 ''' 나는 기획사 대표예요."
"기획사 대표요?" 학원장이라는 그녀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데 나올 생각을 했어요?"
수희가 웃으며 "사실 그동안 일에 빠져 사느라 나 자신에게
소홀했어요." "그래서 이번 미인대회를 계기로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려고 나왔어요."
"선물이요, 무슨 선물이요?" 학원장이 수희에게 물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살이 너무 쪄서 긴장감을 가지면서 살아 보려고요."
"왜 그런 생각을 ..."
"앞으로 죽자 살자 살을 빼서 멋진 여자가 되는 꿈이요."
"한복을 입어서 뚱뚱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학원장이 수희의 몸매를 살피며 말했다.
"한복이 풍성해서 그렇지 수영복을 입혀 놓으면 볼만 해요 ㅎㅎㅎ."
수희가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한창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한복 대회 스탭이 다가오더니 리허설이 있다고 알려 준다.
수희는 어깨띠를 살폈다.
"지금 저 어깨띠 괜찮아요?" 학원장이 수희에게 물었다.
"제가 볼땐 괜찮아요."
두 사람이 어깨띠를 새로 고치고 있자
새초롬하게 앉아 있던 수희와 학원장 보다 나이가 젊어 보이는 여자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더니, 죄송한데 제 어깨띠도 좀 봐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래요... 어차리 우리들 중에서 누군가 상을 받고 모델이 될지 모르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돕자고요." 쾌활한 학원장의 말에
수희가 나서서 젊어 보이는 여자의 어깨띠를 바로 살펴 주었다.
두 사람은 옷핀으로 어깨띠를 새로 매 주었다.
리허설이 시작되자 여자들은 서로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어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매만졌다.
조금 있으니 스탭이 다가와서 5명씩 앞으로 나와서 대기를 하라고 한다.
수희는 자신이 준비한 스피치 연습을 하느라 혼자 암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피치 말고 장기 자랑 준비했어요?"
학원장이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젊은 여자는 "아!... 저는 노래 한곡을 부르려고 준비했는데, 그런데 뭐 준비하셨어요?"
그러자 학원장은 "나는 시를 좋아해서 시 낭송 준비했어요"
"무슨 시를 낭송하세요?"
수희가 물었다.
"저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좋아해요 그래서..."
"아... 정말 좋은 시 지요.'
"그럼 그쪽은 요?" 수희에게 묻는다.
"나는 할게 없어서 노래 해요."
옆에서 다른 여자가 묻는다
"그런데 스피치 말고 장기 자랑 준비했어요?"
학원장이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젊은 여자는 "아!... 저는 노래 한곡을 부르려고 준비했는데, 그런데 뭐 준비하셨어요?"
그러자 학원장은 나는 시조를 좋아해서 시조 낭송 준비했어요
"그렇구나!... 다들 연습을 많이 했나 봐요." 아까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아 혼자 스피치 연습을 하던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언뜻 보아도 나이가 대략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아는 체를 한다.
"그럼요, 이번에 상을 받게 되면 현역 한복 모델을 할 수 있다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오겠어요 그렇겠네요."
이렇게 해서 수희 옆에는 여러 여자들이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떨게 되었다.
"혹시 심사위원을 알아요?"
젊은 30대의 여자가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었다.
"이번 이 행사에 오게 된 것은 심사 위원 중에 한 사람이 유명한 한복 디자이너라면서요?"
"누가 그래요?" 옆에서 학원장이 물었다.
"그분이 후원을 해서 이 무대에 서게 된 것인데 그런데 그것은 쉿 비밀인데요
"그 디자이너가 점수를 후하게 주면 상을 받을 수 있대요."
젊은 여자가 말했다.
"우리 이럴게 아니라 서로 통성명하는 것도 금방 잊어버리니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명함이나 교환해요.""
그럽시다 그래."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 모인 여자들과 명함을 서로 교환을 했다.
조금 있다 리허설이 시작이 되자 대기실은 금방 고요 속에 빠지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 무대 뒤에 서 있다 떨린다고 한바탕 호들갑을 떨어 댄다.
수희는 한참을 기다린 후에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많은 무대 경험이 있어 워킹도 자신 있게 했다.
사회자의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워킹을 할 때 긴 한복 자락이 신발에 끼인 것 같아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럭저럭
자신의 차례를 잘 마친 것 같았다.
리허설이 끝나자 이번에는 본 심사가 시작되었다.
심사위원들이 자리에 착석을 하고 행사가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지루한 시간이 시작되고 본격적이 대회가 시작되었다.
무대는 수희가 생각한 것만큼 화려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직접 기획을 할 때는 조명과 카메라의 위치 행사 진행을 하는 스탭
그리고 남. 녀 M.C대본까지 수정을 해 주는데 오늘 진행자들은 호흡이 느리고
답답했다. 수상자를 결정하고 점수를 집계하는 동안 연예인들이 출연을 해서 흥을 돋우는
시간이 있었다.
수희는 무대 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전에는 젊은 30대의 여자가 호명이 되어
떨린다고 하더니 깡총 깡총 뛰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자신의 이름이 불려 지지 않는다. 그리고 은상에
학원장 까지 호명이 되었는데 마지막 대상까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자 미리 포기한 어떤 참가자는 기분이 상했는지 그대로 옷을 갈아입고 후문을 통해서
참가자들이 빠져나갔다. 수희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참가자 37번 나수희... 그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그날 저녁 수희가 트로피와 왕관을 들고 퇴근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찔한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서 있었더니
허리도 아프도 다리도 아팠지만 기뻤다.
대학시절 과 퀸으로 뽑힐 때처럼 기분 좋은 흥분이 지속되었다.
가족들은 수희 손에서 빛나고 있는 트로피와 왕관을 보고 놀라는 한편
이어지는 그녀의 발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딸 예은은 늘 몽환적인 엄마의 삶을 보아왔던 터라 웃음으로 승화를 시켰다. 그러나
그녀 남편 영우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다시 말해봐 당신?"
"앞으로 뭘 하겠다고..."
어이없어하면서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아내를 노려 보는 남편의 표현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왜 그래 당신?"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는 거야?"
수희가 남편의 역정에 오히려 의아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수희는
일을 한다는 핑계로 집안의 대소사와 집안일에 무심했다.
또한 일이 많다는 핑계로 늦은 저녁에 퇴근을 했다. 남편의 출근복을 여름이 되어도 아직 봄옷을 그냥
입고 다니게 하거나, 양말이 구멍이 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위해 주부처럼 손에 습진이 생겨도 꾹 참고 집안일을 해온 영우는 기가 막혔다.
그는 아내를 대신해 퇴근 후에 직접 청소기를 들고 집안일을 했다.
평소 깔끔한 성격의 영우는, 아내의 찬찬 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힘들었다.
얼마 전까지 병원에서 퇴원 후 우울증으로 한동안 사는 일에 심드렁하더니 느닷없이
다이어트를 한다며 비싼 다이어트 약을 먹고 살을 빼더니
모델 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더니 사람이 변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그는 생각했다. 지금도 충분히 바쁘고 힘들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기획사 일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밤늦게 까지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실행을 해서 기획안을 따내도
다른 회사에서 더 싼 가격에 일을 채 가게 되면, 직원들 월급 주기도 버겁다.
그런 아내 수희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땐 차라리 작은 일을 맡아서 적게 남아도 좋으니 편안하게 일을 하라고 조언도 한다.
그런데 수희는 작은 회사 일은 도무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지금 당신 건강이 우선인데 지금 일을 벌여 놓고 나중에 가서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는 거야 엉?"
남편의 말에 수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미안해 여보."
"나는 꼭 모델 일을 하고 싶어."
모델 일을 하고 싶으면 취미로 한 번씩 대회에 나가서 추억만 만들면 되지."
"뭐... 모델 스쿨에 입학을 하겠다고. 당신 나이가 몇이야 대체..."
영우와 수희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예은이 부부 사이의
긴장감을 해소하려 애를 쓴다.
"아빠 이제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야 해요."
"모델 일 하고 싶다면 잘하시도록 격려가 필요해요."
"너는 그것을 말이라고 하니?"
"네 엄마 나이가 몇인데 이팔청춘도 아니고 50이 넘은 여자가 모델을 하겠다고
지나가는 소가 웃겠다."
"젊고 날씬한 젊은 아가씨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이도 많은 아줌마를 모델로 쓰냐는 거지..."
영우는 얼굴이 벌게져서 난리를 친다.
"당신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어요."
나는 이미 결심을 했어요
이제부터는 집안일도 잘하고 회사일도 모두 잘할 테니까, 당신은 조금만 기다려 줘요."
"당신이 아는 그런 젊은 아가씨 모델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시니어 모델 같은, 나처럼 아줌마도 한복 모델은 할수가 있다구요."
수희도 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한복 모델은 한복을 입고 카메라를 보니까 마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 말을 누가 믿어...
아무래도 당신은 환자 같아 연예인 병에 걸린..."
다음날 새벽에 일어난 수희는 집 근처를 뛰고 들어와 아침 식탁을 차리고 있다.
출근 준비를 위해 부엌으나온 영우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집안일에 나몰라 하던 수희가 아닌 다른 여자가 부엌에서 살림을 하는 줄 알았다.
수희는 멍하게 서 있는 남편을 식탁에 앉히고 된장찌개에 밥을 차려 주었다.
영우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내를 바라본다.
"당신!... 어쩐 일이야?"
"아침밥을 차려 주고."
"앞으로 두고 봐 꼭 아침을 차려 줄테니까."
집안일을 마친 수희가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다른 날 보다 약간 늦은 오전 9시였다.
회사 대표의 이른 출근에 익숙한 직원들은 의아해한다.
출근 후 각자 맡은 일을 마치고 오후 회의를 마치고 약 1시간 빨리 퇴근한 수희는
집 근처 마트에 들러 장을 본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는 주부로 돌아간다.
한복 모델 대회 대상 수상후 자신과 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어릴 때부터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 탓에 가족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오히려 가족들을 설득을 하려 노력을 했다.
남편 영우는 그런 수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만, 처음에 마음먹었더라도
금방 포기할 줄 알았는데 포기를 모르고 지칠 줄 모르고 실행에 옮기는 모습에
마음이 짠 해 지는 것이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하는 게 맞지만, 수희의 경우는 다른 것 같았다.
굳이 그 어렵다는 모델 일을 하겠다는 아내를 이해를 못 하겠다.
처음 수희를 만났을 때 영우는 그녀의 외모에 반해서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한 명씩 낳을 때마다 불어난 몸은 , 처녀 때의 코스모스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가냘픈 이미지는 사라지고 그 대신 육중하게 살이 쪄서 도무지 피곤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했다. 예전에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단식원에 들어가 굶으며 살을 뺐지만
요요 현상이 찾아와 다시 원래의 몸보다 더 살집이 불어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자신을 찾겠다고 며칠 홀연히 사라졌다 돌오와 죽기를 각오를 하고 다이어트를 했다.
그렇게 해서 몸무게를 10킬로 그램을 줄이더니 이번에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더니
기어이 모델 스쿨에 입학을 하고 나서 6개월을 혹독한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6개월 동안 매일 자신의 식사량을 조절을 하고 피부 관리를 한다고 피부 관리실에 다니고, 메이크업을 배웠다.
회사 일과 집안일 어느 한 가지라도 소홀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더니 기어이 버킷리스트를 작성을 하더니 그것을 영우 코 앞에 내민다.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영우는 아내가 더 이상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하루하루 자신이 계획한 일을 스스로 실천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참기 힘든 것은 음식의 양을 줄이는 것이었다.
매일 야채와 기름기 없는 단백질 위주의 식사와 운동은 수희를 지치게 했다.
특히 외부 손님을 만나 식사하는 자리는 수희를 난감하게 했다.
궁리를 하다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고 지방이 없는 일식집에서 손님을 만났다.
매일 싱싱한 야채와 과일 위주의 식사는, 포만감을 주지만 금방 위가 허전했다.
가족들은 그녀의 다이어트 식사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았지만 그녀는 식사 대신 피로감과 체력 강화를 위해 일주일에 두 번 태반 주사를 맞으며
간신히 체력을 유지를 했다.
그녀 자신도 가끔은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예전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해도 후회
하지 않으려 할 만큼 식욕을 억제 하기 힘이 들었다.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어느 땐 현기증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매일 체중계에 올라 서면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지치고 힘들 때면 가장 예뻤던 시절의 빛바랜 사진을 꺼내어 바라보며
힘을 얻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모습의 그녀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 할 수 있어. 조금만 참아 보자. 뚱뚱한 여자는 매력이 없지...
수희는 긴 한숨을 쉬면서 오늘도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
옷장에 걸려 있는 옷들은 이제 너무 헐렁해서 입을 수가 입을 수가 없다.
요즘은 날씬하게 변해서 어떤 사람은 몰라 보게 달라진 수희의 모습에 의아해하기도 했다.
오늘도 그녀는 쇼핑 중이다. 몸매에 자신감이 생긴 이후 생긴 버릇이다.
예전에는 빅 사이즈의 옷을 주로 입었다면 지금은 일하기 불편할 만큼 품이 딱 맞는 옷을 골라서
그 옷을 입기 위해 지독한 다이어트를 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인 12월이다.
그녀는 D신문사와 N 유튜브 채널 공동으로 개회하는, 시니어 모델 선발 대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약 일주일 전에는 성형외과에 가서 눈가와 입매에 보톡스를 주입을 했다.
몰라 보게 젊어진 모습에 한동안 취해 있던 수희는
스피치 연습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이번 대회에 입상을 하게 되면
젊은 모델들처럼 각종 의상 화보 촬영과 TV 방송 광고에 출연을 할 기회가 생긴다.
매일 거울을 보며 장기 자랑과 스피치 연습을 하는 그녀는 이제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모델이 된 것처럼 자신감이 생겼다.
성탄절을 2주일 앞둔 어느 날 강남 모 호텔 연회장에서 행사가 진행이 되었다.
행사 시작 2시간 전부터 지역 방송사와 유튜브 채널에서 카메라 맨들이 무거운 카메라를 설치를 하고
각도를 재면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신문 기자들은 노트북을 가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 행사는 방송 3사에서 인기 아나운서가 진행을 하는 등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수희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긴장감이 밀려온다.
이번 대회는 평상복과 드레스 등 옷을 차례로 갈아입으며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의 매력을 한껏 뽐내야 하는 것이다
이번 대회는 다른 대회와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대회 수상 상금도 어느 미인 대회 못지않게 상금이
많이 걸려 있어 참가자들의 외모 또한 출중했다.
1차 평상복 심사 후 휴식 시간을 10분 정도 가진 후 바로 드레스 심사에 들어가기에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수희는 드레스 렌털에도 많은 돈을 들였다.
작년도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에서 미스 진이 입었던 드레스를 어렵게 찾아서 착용을 했다.
수희가 대기실에서 워킹 연습을 하고 있다.
심사위원들 눈에 자신감과 밝은 표정으로 눈을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늘 꿈을 꾸었다.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꼭 한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지금 이 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드레스 심사가 끝나고 유명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심사위원들의 점수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심사 위원으로 자리에 착석한 사람은 모델 업계에서 이미 이름이 나 있고
유명 연예인과 사회의 저명한 인사까지 자리하고 있어 수희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대기실에 앉아 수상자를 한 사람씩 호명을 할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으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오늘 수상자로 뽑히지 않으면 어떡하게 하는 초조함이 수희를 힘들게 했다.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수희는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 이름 석자가 불려진다.
"대상 나수희" 씨 측하합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자 박수소리가 나는데
그녀는 무슨 정신으로 객석으로 걸어가서 수상 소감을 밝혔는지 자세하게 기억에 없다.
이제 그녀의 이름 앞에 모델이라는 1년 전 까지는 감히 상상하기도 스펙이 생겼다.
그녀는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던 꿈을 이룬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다. 죽을때 까지 자신을 가꾸면서
멋진 인생을 살고자 하는 그녀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