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장군선인, 을밀(乙密)
- 조의(皂衣) 을밀(乙密)
을밀은 고구려 22대 안장왕(安藏王, 재위 519~531년) 때의 대장군이며 선인(仙人)이다. 출몰연대는 미상이다. 을밀은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와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국상 을파소(乙巴素)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나 출생 당시 그의 집안은 몰락하여 미미했던 것 같다.
을밀은 일찍부터 선도를 수련하여 글을 읽으며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고 삼신(三神)을 노래하였다. 그는 국중대회에서 우승하여 조의선인이 되었으며, 문도들을 수련시키고 정의와 용기로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절세미인으로 소문난 안학(安鶴) 공주와 만나, 사랑을 불태웠다. 그녀는 안장왕의 여동생이었는데, 왕은 을밀의 집안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해 을밀의 젊은 시절을 소개하고 있다.
- 안장왕과 을밀의 사랑 얘기
고구려 안장왕은 장수왕의 증손자이며 문자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홍안이다. 그는 태자 시절에 상인 차림을 하고 백제 땅인 개백현(皆伯縣 지금의 고양군 행주)에 가서 백제의 정황을 살필 겸 놀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백제 군졸들을 피하려다 그 지역 유지인 한씨의 집안에 숨어들었고, 그곳에서 한씨의 딸인 한주(韓珠)를 만났다. 절세미녀인 그녀를 보자 한눈에 반한 안장왕은 은밀히 정을 통하고 부부의 언약을 맺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 태자요. 귀국하면 대군을 이끌고 이 땅을 취한 뒤 그대를 맞이하리다.” 하고 떠났다. 이후 519년에 문자왕이 죽자 고구려 왕이 된 안장왕은, 수차 백제를 쳤지만 계속 패했다.
한편, 백제의 개백(皆伯) 태수는 한주의 미모를 전해 듣고 나서 한주와의 결혼을 요청했다. 하지만 한주는 이를 한사코 거부했다. 분노한 태수는 적국 고구려의 태자와 사귀며 적국과 내통한 죄를 물어, 한주를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한편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하며, 온갖 감언으로 꾀었다.
그러나 한주는 옥중에서 노래하기를, “죽고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塵土)되고 넋이야 있든 없든, 임 향한 일편단심이 가실 줄 있으랴” 하니, 듣는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이를 전해들은 태수는 그녀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그녀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522년 안장왕은 한주를 구하기 위해, 을밀 장군을 보냈다. 을밀은 수군(水軍) 5천 명을 거느리고 내려왔고, 평복에 무기를 숨긴 결사대 20명과 함께 개백현에 앞서 들어갔다.
이때 개백현 태수는 자기 생일을 맞아 관리와 지인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벌였다. 이 기회에 한주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으나 또다시 거절 당하자, 태수는 대노하여 그녀의 처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
초청을 가장해 연회장에 들어간 을밀의 결사대는 칼을 빼서 태수와 빈객들을 죽이고는, “고구려 10만 군이 쳐들어왔다.”고 외치자 온 성안이 크게 요동했다. 이 틈을 타서 을밀은 군사들과 함께 성을 넘어와 감옥을 부수고 한주를 구해냈다. 때를 같이 하여 개백현 부근에 상륙한 5천여 명 을밀의 군대는 성현(현재 일산)을 기습하고 고봉산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안장왕이 대군(大軍)을 몰고 남진하자, 한강 일대 각 성읍들이 항복했다. 안장왕은 개백현으로 달려가서 한주를 다시 만났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뒤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한주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은 ‘고봉(高烽)’이라 이름하였다." 이곳은 고양시 관산동과 고봉산 일대로 추정된다. 이로써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과 함께, 을밀와 안학공주의 사랑 역시 결실을 맺게 된다.
이로 인해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일대는 고구려 때 왕봉현(王逢縣)이라 했다. 또 우왕현(遇王縣), 왕영(王迎)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왕을 만난 곳’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만난 곳이므로, 왕봉(王逢)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 장군(將軍) 을밀(乙密)
529년 안장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북변의 혈성(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백제 성왕은 좌평(佐平) 연모(燕謨)의 보기군(步騎軍) 3만 명으로 고구려 주력군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을밀 장군의 매복에 걸려 격파 당하고 말았다. 오곡원(五谷原, 황해도 서흥군 일대) 전투에서 백제군은 2천여 명이 전사하며 대패하고, 이로써 한강 이북의 쟁탈전은 고구려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이로써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 안장왕 대까지 이어졌다. 안장왕은 백제를 공격해 두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부친(문자왕) 때 백제 무령왕에게 잃은 한강유역을 되찾았다. 또 북위가 차지했던 용성(옛 북연의 수도)을 급습해서 요서지역까지 차지했다. 이는 안장왕을 힘써 보좌한 을밀 장군의 공이기도 했다.
- 조의선인(皂衣先人)의 대스승, 을밀(乙密)선인
기록에 을밀은 당대에 이름난 조의(皂衣)였다고 하며, 또 많은 전공(戰功)을 세운 것으로 보아 최고의 조의(皂衣) 지위인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에까지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은 고구려의 국상(國相)과 같은 위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더욱 수도에 지극히 정진하여 마침내 대도를 이루고, 겨레의 선맥을 계승한 인물이다. 『청학집』 『규원사화』 등에는 한겨레 선도(仙道)의 계보가 단군(檀君)에서 문박(文朴)선인으로 이어지고, 다시 을밀(乙密) 선인으로, 또 계속 영랑(永郎) 선인, 보덕(寶德) 여선 등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를 따르는 문도가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을밀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제자(낭도, 조의선인)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인 듯하다. 을밀 선인이 길러낸 조의선인의 후예들은 훗날 수나라, 당나라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이들을 물리치는 큰 바탕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선거(仙去)하였으며, 선맥계승자의 위치로 보아 아마도 시해(尸解)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묘소는 평양 을밀대 부근에 모셔졌다고 전한다. 후일 그를 기리기 위해 묘소의 앞산은 을밀봉(乙密峰)이라 하였으며, 거기 을밀대(乙密臺)라는 누대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는 을밀 선인이 직접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문도들에게 이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부르며 명상 기도, 무예 등의 수행을 하게 했다고 한다. ‘다물(多勿)’은 ‘땅을 다물려 받는다(되찾는다)’는 뜻이고, 흥방가(興邦歌)는 ‘나라를 흥하게 하는 노래’라는 뜻으로, '고조선의 옛땅을 다시 찾자'는 ‘고구려 애국가’라 할 수 있다.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에 전해오는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는 다음과 같다.
먼저 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된다.
법은 나지도 죽지도 않고, 비록 위에 있어도 귀함도 천함도 없다.
사람 안에 천지가 하나로 존재하며, 마음과 정신의 근본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빈 것과 가득 찬 것은 같으며, 정신과 사물은 둘이 아니다.
진실이란 많고 많은 선의 극치이며, 정신은 하나 가운데 그 극치를 주관한다.
때문에 삼진(三眞, 성性 명命 정精)은 하나가 되고, 하나는 곧 셋이 된다.
천상과 천하에는 오직 나 스스로 있고, 다물은 큰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억지로 일하지 않아도 나라가 일어나고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가르침이 이뤄진다.
참 생명이 크게 떨쳐 신성(神性)을 밝게 비추니,
집에 들어와서 효도하고 밖에선 충성하니 빛나는 존재이다.
모두 착하여 효와 충을 봉행하니 어떠한 악행도 일어나지 않는다.
백성이 오직 의로 여기는 것은 나라의 소중함이니,
나라가 없으면 내가 없으니 어찌 나라가 소중하지 않은가.
때문에 백성은 재물을 소유하고 복되게 살며
내가 태어남에 나라는 혼이 있어 더욱 강하고 밝아 흥해진다.
....(중략)
내 자손이 나라를 위하니, 태백교훈이 내 자손의 스승이 된다.
태백교훈이 모두를 고르게 가르치는 스승 되니 그 가르침은 늘 새롭다.
- 을밀대(乙密臺), 을밀선인의 유적
평양(平壤)의 을밀대(乙密臺)는 금수산(錦繡山) 마루의 을밀봉(乙密峰) 아래, 11미터 축대 위에 세워진 누대(樓臺)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 내성(內城)의 북쪽 장대(北將臺)에 처음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숙종 40년(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었는데, 축대 원형은 고구려 때 모습 그대로라 한다. 이곳은 경치가 매우 수려하여 '평양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을밀대의 유래에는 몇 가지가 있다. 옛날 ‘을밀(乙密) 선녀’가 이곳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한다. 다른 설화로는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아들 을밀(乙密) 장군이 이곳을 지키며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또 다른 기록은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 나온다. 을밀대의 주인공은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때의 조의선인(皂衣先人) 출신 을밀(乙密) 장군이라 한다. 북에서도 을밀대(乙密臺)는 을밀 선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모두 선도와 관련이 있는 전설들이다.
을밀대 부근에는 오래 전부터 둥근 봉분(封墳)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을밀(乙密) 선인의 묘(墓)라고 한다(이해응, <계산기정>(1803년) 등). 또 평양에 있는 한 궁전의 이름은 안학궁(安鶴宮)인데, 이는 을밀선인의 부인 안학(安鶴)공주와 한자가 같다. 따라서 을밀대는 을밀선인의 유적인 것이 확실하다.
글; 무 애 (한국선도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