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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세례식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1:1-4:11절까지 이어지는, 구속주요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개시하기 이전의 주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 및 공생애 개시 준비를 보도하는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앞서 제 1,2장이 예수의 탄생 및 유아 시절의 중요사건을 보도했다면 그에 이어지는 본장과 다음장 전반부인 3:1-4:11절은 이제 나이 30세로 성장하신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메시야로서의 구속사역을 개시(開始)하시기에 앞서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들도 앞의 두 장의 기록들처럼 예수께서는 이미 구약 때부터 약속되고 예비된 메시야(the Messiah)로서 구속사역을 감당하실 절대 유일의 구주(救主)임을 확인 강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반부 1-12절은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이 등장(1-4절)하여 회 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洗禮)를 주심으로 세상을 향하여 택한 자를 구속해 주실 메시야 예수가 등장할 것을 예고하는 사역(5-12절)을 충실히 수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다음 후반부 13-17절은 세례 요한이 앞서 증언하던 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메시야 예수가 이제 자신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 앞에 나타나셔서 세례를 받은 사건의 전후 사실이 보도된다. 보다 상세히 말하자면, 13-15절은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시자 세례 요한이 예수를 메시야로 알아보고 그를 인정하였다는 사실 및 예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자청하여 받은 사건을 보도한다. 이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사실 예수께서는 자신은 죄가 전혀 없으시므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예수는 먼저는 자신은 본래 제 2위 성자이셨으나 죄인의 구속주가 되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죄인과 같은 낮은 자리에 낮추심을 더욱 확증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후대 교회가 세례 의식을 당신의 모범을 따라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또한 더욱 오묘한 이유로는 사실 세례는 훗날 성도들이 자신과 연합하여 구속의 공로를 힘입을 통로였는바, 비록 그 참 연합의 효력은 오직 성령 세례만이 주는 것이었지만, 그 성령 세례의 외적 상징인 물세례의 중요성도 인정하사 이를 당신이 먼저 받으신 것이었다(롬 6:5; 고전 12:13). 그리고 이어지는 16-17절에는 이처럼 메시야로서 공생애 개시를 앞두시고 선구자 세례 요한의 증언과 세례 받으심을 통하여 메시야로서 구속 사역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신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 선포(宣布)하는 말씀이 있었음이 보도되고 있다.
이제 본장 전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개관할 때에 우리는 결국 다음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탄생 이전에 등장할 엘리야 선지자로 묘사된 세례 요한으로부터도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모두 참 메시야로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즉 땅에 있는 인간 예언자로부터도 그리고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목소리와 비둘기 형상(形象)의 성령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도 참 메시야로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구속 희생을 하러 오신 예수는 그저 우연히 등장한 세속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태초부터 예비되고 인정된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을 깨닫게 하여 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절대 신뢰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함을 깨닫게 해준다.
외울 말씀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예수의 세례식
13 ○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 3:1-17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
눅 3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유대교 분파들
본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참조.
원어연구-3:2, 회개하라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이테'( )는 '메타노에오'( )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이다. '메타노에오'는 '~후에'라는 뜻의 전치사 '메타'( )와 '깨닫다', '생각하다'라는 뜻의 '노에오'( )가 결합되어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동사의 일차적인 의미는 '뒤늦게서야 잘못된 것을 깨닫고 뉘우치다' 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용어로서 '메타멜로마이'( )가 있는데 고대 헬라어 문헌들에서 이것들은 명확히 구분되어 사용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70인 역본(LⅩⅩ)마저도 히브리어 '나함'(슬퍼하다, 후회하다)을 번역함에 있어서 두 동사를 번갈아가며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이것들은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것은 가룟 유다
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를 팔고 나서 '스스로 뉘우쳤다'(마 27:3). 이 메 사용된 단어가 '메타멜로마이'이다. 즉 여기에서 이 단어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눅 3:3), '생명 얻는 회개'(행 11:18)가 동반되지 않은 단순한 감정적인 뉘우침' 또는 양심의 가책 등을 의미한다.
반면에 '메타노에오'는 '지적, 감정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죄악된 행실에서 완전히 돌이켜(히 6:1) 하나님께로 돌아가 회개에 할당한 일을 행하는 것(행 26: 20)까지를 포함한다. 즉 '메타노에오'는 원리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 곧 종교적' 도덕적 삶에 있어서의 변화까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단지 감정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잘못된 생활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 선한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의미이다.
주요 주제-3:11 세례 이해
행 8장 연구 자료 참조.
지도-3:13-17 예수께서 세례와 시험받으신 곳
막 1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3:11 그리스도의 명칭에 대한 예언과 성취
명 칭 | 예 언 | 성 취 |
예수 | 마 1:21 | 마 1:25 |
그리스도 | 시 45:7 | 눅 2:11 |
주 | 시 110:1 | 요 13:13 |
임마누엘 | 사 7:14 | 마 1:22,23 |
왕 | 렘 23:5 | 마 2:2 |
통치자 | 렘 30:21 | 마 2:6 |
아브라함의 자손 | 창 12:3 | 마 1:1 |
다윗의 자손 | 시 89:3,4 | 롬 1:3,4 |
아기 | 사 9:6 | 마 1:25 |
아들 | 시 2:7 | 마 2:15 |
기묘자 | 시 119:129 | 마 21:15 |
모사 | 시 119:24 | 마 13:54 |
전능하신 하나님 | 신 10:17 | 마 3:11 |
영존하시는 아버지 | 시 90:2 | 요 8:58 |
평강의 왕 | 미 5:5 | 요 16:33 |
보감-3:17 성자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사역
1 | 세상으로 보내심(요 3:16; 갈 4:4) |
2 | 인 치심(요 6:27) |
3 | 가르치심(요 8:8) |
4 | 기름 부으심(눅 4:18; 행 10:38) |
5 | 명령을 주심(요 10:18) |
6 | 증거해 주심(요 8:18) |
7 | 사랑하심(요 10:17) |
8 | 기뻐하심(마 3:17; 17:5) |
9 | 기도를 들으심(마 26:53) |
10 |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막 10:45) |
11 | 다시 살리심(엡 1:20) |
12 | 높여주심(빌 2:9-11) |
13 | 영광스럽게 하심(빌 2:9-11) |
14 | 교회의 머리로 만드심(엡 1:22) |
15 | 심판주의 자격을 주심 (요 5:22,27) |
3:1-12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
1,2장에서 메시야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소개를 마친 마태는 본장에서부터 마 4:11까지에서는 메시야의 사역 준비에 대해 소개한다. 그중 본문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의 사역을 준비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소개하기 전에 세례 요한의 사역을 먼저 서술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메시야이자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지닌 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2절)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 역시 이제 곧 예수님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말라기에 의해 예언된 바 있듯이 메시야 시대를 예비하는 '선지(先知) 엘리야'였다고 할 수 있다(말 4:5,6).
한편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계속된 약 400년간의 침묵을 깨뜨리고 등장한 세례 요한의 사역은 신 ․ 구약 제사의 분기점이 된다. 즉 율법에 규정된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속죄 받는 구약시대를 마감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신약시대의 막을 여는 분기점이 되었다. 특히 세례 요한이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눅 1:5).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출생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본서의 기록자가 전혀 그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차이점은 아마 두 복음서가 서로 다른 대상을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독특한 출생 과정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존재가 유대 사회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언급을 생략한 채 곧바로 그의 사역에 대해서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내용은 누가복음 이외에도 막 1:1-8; 요 1:19-28에도 나타난다. 이렇듯 네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이 소개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세례 요한의 사역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막 1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이러한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비하기 위해 유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했듯이, 우리는 주님께서 불원간(不遠間)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아직 구원의 때가 허락되어 있을 때 좀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힘써 복음을 전파해야만 하는 것이다(고후 6:2).
② 형식적이고 외식주의적인 신앙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가장 부적합한 요소라는 점이다. 세례 요한은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위선과 외식을 엄하게 책망했다. 만약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한 믿음과 삶의 자세를 지니지 못하면, 결국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책망과 심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마 7:21-23).
③ 복음 사역자들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기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높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세례 요한은 맡은 사람들의 추종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신을 낮추며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주님께 향하도록 만들었다(요 3:22-30). 우리가 아무리 큰 권능을 갖고 이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돌리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롬 11:36; 고전 8:6; 골 3:17).
3:1 그 때에. - 여기 언급된 '그 때에'(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케이나이스)라는 말은 마 2장에서 계속되는 시간적인 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마태는 단지 예수께서 나사렛에 계시면서 생활하셨던 상당히 오랜 기간을 포함하여 이제 자신의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래서 본절의 '그 때에'라는 것은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계속 살고 계시던 바로 그 무렵'에 세례 요한이 말씀 전파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2장과 3장 사이의 약 30년 간의 시간적 간격을 별다른 설명 없이 지나치고 있다(눅 3:23).
세례 요한이 이르러. -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몇몇 등장한다. 그런데 특별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에 '세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 그의 공식 임무와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여 '세례를 베푸는 일'이 그의 주 임무임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복음서의 네 기자가 공통적으로 밝히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의 복음 사역은 세례 요한의 활동과 관계가 있으며, 예수의 출현과 함께 세례 요한의 활동은 끝나고, 요한의 활동이 끝나면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사역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사역을 시작할 시기를 알리는 징조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 징조가 나타났을 때 예수는 30살 되던 해였다(눅 3:23). 바로 이때 요한이 출현하여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구약의 역사가 말라기로 종결되고, 신약의 시대가 전개되는 여명기에 나타나 400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신약의 첫 예언자로 나타난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출현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다(사 40:3; 말 3:1;4:5).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막 1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 여기서 '유대 광야'(엔 테 에레모 테스 유다이아스)란 사해 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성경에서는 '십 황무지'(삼상 23:14,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황무지'(삼상 24:1), '여루엘 들'(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광야'로 번역된 말은 문자 그대로 살 수 없는 황량한 들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이 많고 거칠어서 농경지로는 부적합하여' 그저 목초지로나 쓸 정도의 수풀과 바위들이 뒤섞여 있는 곳으로 인적이 드문 땅을 말한다(Gmllenberg). 유대 땅에는 이런 곳에서도 더러 사람들이 거주했고 마을까지 형성되기도 했다(삼상 25:1,2). 세례 요한도 바로 이러한 곳에서 성장했고(눅 1:80) 그의 최초 사역도 여기서 시작했다. 한편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곳으로, 그들이 옛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변화를 받은 곳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이 광야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출애굽 당시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살기를 촉구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2 회개하라. -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아주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막 1:4; 눅 3:3).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오래 전에 패역한 백성들을 향해 외친 것처럼 반드시 회개하여 정결함을 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특별히 여기서 '회개한다'(메타노에오)라는 말은 '달리'(메타)와 '생각하는 것'(노에오)의 합성어로 '생각을 고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책임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신앙 가운데 불신과 온갖 죄악을 행했기 때문이다( 눅 3:7,8).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 세례 요한이 전파한 메시지의 두 번째 내용은 천국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회개해야 할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즉 요한의 메시지는 구원론적 측면으로 '회개하라'와 종말론적 측면으로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메시야의 나라에 자동적으로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의 메시지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면 마음과 뜻의 변화, 즉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제시한 요구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있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말 3:7-12). 따라서 이러한 세례 요한의 외침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거침돌이었다. 하여간 여기서 '천국'(헤 바실레이아톤 우라논)이라는 말은 네 복음서 가운데 오직 본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으로' 다른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테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되었다. 마태는 아마도 본서의 주 독자가 유대인들이었던 까닭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피하는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 대신 '하늘나라' 혹은 '천국'이라 부른듯하다. 그러나 두 표현 다 의미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그리고 '하늘나라'나 '하나님의 나라'의 주요 의미는 역동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종말론적 측면에서의 세례 요한의 메시지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천국이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창세 이래로 하늘에서 그가 만든 우주 만물을 친히 통치하셨다(롬 11:36). 그러면 세례 요한의 메시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가 바야흐로 지상에 그대로 확장되려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지상 통치가 실현될 것이고 세례 요한은 바로 그분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3절). 한편 신약 시대의 천국 개념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서 구체화된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나타난 천국은 전자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눅 서론 특별자료,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보다 참조 하라.
3: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요한의 메시지는 사 40:3의 예언의 성취였다. 사복음서 모두가 세례 요한과 이사야의 예언을 연관 짓고 있다(막 1:2,3; 눅 3:4-6; 요 1:23). 사 40:3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유대 땅으로 돌아올 때(B.C. 537년) 그의 백성들과 함께 돌아오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마태는 이것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켜 그를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문자 그대로 물리적 음파일 뿐 어떤 의지나 사상이 개입된 것이 아니다. 이는 '말씀'과 '외치는 자'로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의지를 그대로 전달할 세례 요한의 사명과 역할을 잘 묘사해 준다. 아무튼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과거 역사적 사실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켜 세례 요한을 죄의 포로가 된 인류를 놓아 주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제시하고 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 여기서 '예비하라'(헤토이마사테)는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하라'는 뜻으로' 이는 세례 요한의 사명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에서 사역하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하는 선구자였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는 히브리어 '아도나이'( )에 해당하는 말로서 마태가 이처럼 '여호와' 대신에 '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기시하는 유대인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본문에서 '첩경'(트리부스)이라는 말은 '곧게 뻗은 대로', 곧 '왕의 대로'를 말한다. 그리고 '평탄케 하라'(유데이아스)는 말은 '곧게 하라', '바르게 하라'는 말로 '회개케 하라'의 은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본절은 세례 요한의 사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은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들어오시도록' 그들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자만심을 버리고 회개케 하는 사명을 가졌던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은 이런 것들이 장애가 되어 메시야가 왔으나 영접치 아니했다. 그래서 요한은 마치 군대가 행진할 때 앞서 가서 준비하는 전령사와 같은 임무를 가지고 그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야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도록 보내어졌던 것이다.
3:4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 본문에 소개된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는 다소 설명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하 1:8에 나타나고 있는 엘리야에 대한 묘사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이 다시 오리라고 믿고 있었던 엘 리야(말 4:5)의 재현임을 암시해 준다(슥 13:4; 마 17:10-13). 한편 약대는 당시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던 짐승이었던바 요한이 약대 털옷을 입었다는 것은 메시야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그의 사역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 요한이 음식으로 사용한 '메뚜기'(아크리데스)는 아라비아인이나 수리아인들이 일반적으로 먹는 음식이었으며, 레 11:22에서는 식용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로 언급되고 있다. 아랍에서는 지금도 메뚜기를 식용으로 시장에서 매매하고 있다. 그리고 '석청'(멜리 아그리온)은 광야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야생 꿀로' 이것은 광야 바위틈이나 바위 밑에서 쉽게 찾아낼 수가 있었던 하나의 식품이었다(신 32:13; 삿 14:8,18; 삼상 14:25,26,29). 어쨌든 이와 같은 생활은 광야 생활에 합한 것이었고 예언자들의 경건한 삶을 암시해 준다. 그래서 마태는 세례 요한의 출현을 알리면서 세례 요한의 활동이 오로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왔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즉 마태는 요한이 예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임을 강조함으로써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위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메뚜기는 성경에서 흔히 사탄을 예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욜 1:4; 계 9:3), 석청은 청결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세례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을 먹은 것은 결국 예수께서 사단을 정복하고 승리하시리라는 것과 메시야의 순결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3:5 이 때에. - 이는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으나,여기서의 '이 때'는 어떤 일시적인 때라기보다는 세례 요한의 사역 전반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Williams).
예루살렘과‥‥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 세례 요한의 전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다. 즉 예루살렘을 비롯해 온 유대 지역과 요단 강 사방에서 그의 메시지를 들으러 갔다. 실로 세례 요한의 외침은 구약 선지자들의 활동이 중단된 지 무려 400여년 만에 들려온 외침이었다. 때문에 영적 기갈 상태에 있던 유대인들은 마치 단비라도 만난 듯이 몰려들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개중에는 세례 요한이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무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눅 3:15; 요 1:20). 한편 지역적으로 보아 세례 요한에게 몰려온 무리들은 요단강 사방이 제일 먼저이고, 그 다음이 온 유대, 그리고 예루살렘이 맨 마지막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예루살렘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에게 갖는 중요성 때문인 듯하다. 하여간 여기서 '온 유대'는 예루살렘을 중심하여 남방 지방을 뜻하며, '요단강 사방'은 갈릴리와 베레아,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 등을 가리킨다.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무리들이 자신들의 죄를 항목별로 따져서 자복한 사실을 의미한다(Williams).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그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죄와 국가에 대한 범죄를 고백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상
일찍이 개인적으로 지를 자복한 일이 없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죄를 개인적으로 자복한 일이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온 국민이 개인적으로 자복하는 것은 이번 경우가 처음이었고, 그전에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민족적인 죄를 자복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절의 죄의 자복은 이스라엘의 종교가 민족 종교에서 개인 신앙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더니. - 여기에 나타난 요한의 세례는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표시로 베풀어진 것이었다. 또한 오실 메시야를 대망하는 거룩한 삶에의 헌신을 의미하는
일종의 종교적 의식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 게 베풀어지는 세례와는 구분된다. 즉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죄 사함의 증표이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증거(고전 12:13)인 것이다. 세례의 의미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것은 행 8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결국 세례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의 준비 과정이라 할 수 있다(행 19:4). 한편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요단강에 대해서는 신 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3:7 바리새인. -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파라쉬'( )에서 유래한 말로 '구별하다' 혹은 '분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기원은 마카비 시대(B.C. 1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원래는 신앙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려는 의도에서 조직되었
다. 그러나 이들의 분리적인 태도는 점차 내면보다는 외면과 형식에 치중하였던 까닭에 성경에서는 외식주의자의 대명사와 같이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인정받을 만큼 대단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마 5:20). 그러나 본절에서 이들이 세례 요한이 세례 베푸는 장소에 나타난 것은 자신들이 경건하다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즉 그들은 회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의식해 마지못해 이곳까지 나타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세례 요한의 노도와 같은 질책을 받은 것이다. 한편 신약 시대의 유대교 분파에 대해서는 본권 신약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사두개인. -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와 더불어 유대의 3대 종파에 속하는 자들로' 이들의 주요 특징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고 다른 전승은 모두 부인할 뿐만 아니라 내세나 부활 등을 믿지 않는 매우 현세주의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숫자적으로는 바리새파에 비해 열세였으나, 경제 ․ 정치적으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무튼 이들이 요한이 세례 베푸는 장소에 나타난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Bruce). 한편 '사두개파'란 명칭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에서 유래한 듯하다(Carr). 본권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독사의 자식들아. - 마 12:34; 23:33에서 예수께서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이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신바 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말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겉모양은 선민으로 경건한 체하였지만 그들의 속에는 선한 것들에 대해 악의와 적의가 가득찬 데 대한 준엄한 책망이었다. 즉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 스스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 한 사탄의 도구인 뱀의 후예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피하라 하더냐. - 본문은 문자적으로 '너희가 무슨 근거로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말이다. 요한은 저들의 마음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강퍅한지 장차 분명히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마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대해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의 '임박한 진노'란 하나님의 분노로 인하여 죄인에게 임할 형벌을 가리키는(살전 1:10; 2:16) 것으로, 이미 말 3:1,27; 4:1,5에 암시되어 있다.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온전한 회개는 단순히 외적인 죄의 자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뉘우침에 합당한 열매를 수반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앜시오스)이란 말은 '같은 분량'이란 뜻이며' '열매'는 '행위'를 나타내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또한 본문의 '맺는다'는 말은 '행한다'(포이에사테)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은 참 회개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선한 증거를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서는 '열매'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단수(칼폰)로 쓰였으나, 본절과 병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칼푸스)로 쓰였다. 이는 눅 3:8이 일반 백성에게 행한 말인 반면 본절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한 말이라는 차이점 때문이다. 즉 바리새인들은 많은 선한 일을 행했으나 그들의 많은 선한 일의 근원, 즉 선한 일들의 동기가 되는 그들의 내면은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수를 사용하여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본절의 세례 요한의 책망은 참된 회개에 따르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 말임을 알 수 있다(Bruce, William).
3:9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유대인들은 구원의 조건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요 8:33-37,53), 아브라함은 그 후손들의 의(righteousness)에 대한 영원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없다'라는 랍비들의 교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육신으로 좇아 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라는 보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의 육적인 자손되는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오로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 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롬 4:12,16).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여기서 '돌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요한의 발밑에 있는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Carr, Vincent)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부하는 유대인들을 제외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는 견해(Chrysostom)가 있으나 여기서는 두 견해가 모두 타당하다. 특별히 '돌들'과 '자손'은 히브리어에서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세례 요한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풍유적으로 묘사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지금 이스라엘로 하여금 선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과 같이 내팽개쳐 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의 교만함을 꺾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이 돌과 같이 여기는 이방인들을 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드실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한의 말에는 상당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요한의 말에는 하나님께서 돌 같은 마음들을 혈통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과 구원의 대상에 관한 구약 시대의 차별이 사라져가고 있음이 포함되어 있다. 영원부터 계획된 구원의 순서는 분명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행 13:46; 롬 1:16; 3:1,2; 9:1-5)지만 이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게 될'것이 분명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경건한 신앙적 유산이나, 종교적인 교육이나, 신앙상의 연조가 깊다할지라도 구원에 이르는 참다운 회개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요 15:6; 행 9:1-20).
3:10 이미‥‥놓였으니. - 나무뿌리에 도끼를 갖다놓은 것은, 곧 그 나무를 찍어버리겠다는 표시로, 이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 것이다. 특별히 도끼가 '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할 것을 암시한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불에 던지우리라. - 성경에서 심판은 종종 완전히 소멸시키는 불로 언급된다(말 4:1; 마 13:40; 18:8,9; 막 9:43; 요 15:6). 특별히 구약 성경은 악행 하는 사람을 나무에다 비유하여(시 1:3; 사 24:13; 56:3; 렘 17:8) 악인의 심판을 나무를 찍어 불에 던지우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사 10:33; 렘 46:22). 결국 세례 요한은 지금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회개'할 뿐 아니라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므로 자신의 회개가 진실한 것임을 보이는 열매가 있어야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11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마가나 누가는 '회개케 하기 위하여'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마태가 여기서 특별히 '회개케 하기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령 세례와 요한의 물세례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으나' 그리스도인의 성령 세례는 죄 사함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증표이다(고전 12:13; 갈 3:27). 행 8장 연구 자료 참조. 한편 이와 관련하여 세례 요한의 '물로'(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께서 베푸시는 속죄 사역을 위한 준비의 작업으로 이해된다.
내 뒤에 오시는 이. -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시간적 순서로 대조를 보임으로 자신과 메시야 사이의 개인적 관계를 진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이미 세례 요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다(눅 3:15; 요 1:19,20; 3:25-36). 세례 요한은 실제로 자신이 메시야를 위해 남은 자를 예비하며 물로 세례를 베푸는 선구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눅 3:15)을 염려했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감당치 못하겠노라. -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자신보다 뒤에 오는 자인 그리스도를 가리켜 자신보다 능력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신발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처럼 발전체를 덮는 것이 아니라 끈으로 발과 연결되어 거의 발이 노출되는 일종의 샌들이었다. 그래서 신을 신거나 벗을 때는 끈을 풀러야만 했다. 그런데 신을 벗거나 신을 때 끈을 푸는 것은 원래 종들이 하는 일이었고. 또 종들은 주인의 신을 종종 들고 다니기도 했다(Williams). 그러므로 본절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자신을 천박한 종들이 하는 일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비천한 존재로 낮추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요한 자신이 메시야를 위한 선구자적 사명을 지닌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지극히 겸손한 모습이다.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실 것이요. - 세례 요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으나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은 '물'(휘돌)과 '성령'(프뉴마)을 날카롭게 비교 대조함으로써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실 성령 사역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태와 누가는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덧붙이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들이 있다. 즉 ① '성령'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거룩한 바람에 의해 불려가고 남은 자들은 심판의 불에 의해 소멸된다는 해석이다(Bruce, Carr). ② 본절을 전적으로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석하여 불이 성령의 사역적 측면을 강조한 표현이라는 견해이다(Alford, Bengel, Olshausem). ③ '너희에게'를 두 가지 대상으로 해석하여 '성령'을 신자에게 주실 은사로, '불'을 불신자 위에 임할 심판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De Wette, Meyer, Erdman). 이 가운데 ③의 견해는 다음 절과 연결이 잘된다. 그러나 구약에서 '불'이 천국에 들어갈 자의 '정화'(淨化)와 관련하여 사용된 점(말 3:2-5)에 비추어 볼 때 ②의 견해가 가장 적합하다(Barbieri).
3:12 손에 키를 틀고‥‥타작마당을‥‥태우시리라. - 본절은 10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상 통치의 개시로 말미암아 진행될 심판의 임박성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즉 여기서 '키'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기구로' 그것이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은 심판이 임박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알곡'은 '의인'을, '쭉정이'는 '악한 자'를 상징하며 '타작마당'은 '세상'을, '키를 손에 든 자'는 메시야를 상징한다. 또한 '곡간'(곳간, 庫間)은 의인들의 영원한 피난처를 상징하며, '꺼지지 않는 불'은 '종말론적 심판', 또는 악인들의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을 상징한다. 이로 보건대, 본절의 중심 내용은 메시야의 강림으로 말미암은 의인과 악인의 분리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3:13-17 세례를 받으신 예수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소개한 앞 단락에 이어서. 본문은 드디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을 서술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만남을 통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었는데, 결국 이렇게 하여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태어난 자신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사람들의 이목 밖으로 점점 사라져 간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그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고 은 인류를 항한 구속사역의 첫발을 내딛게 되셨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는데 죄나 죄의식이 전혀 없으셨던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세례 받으심은 그의 사생활을 끝내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표적이었다. 즉 요한의 세례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죄인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을 상징하는 바,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의 이전까지의 사적 생활을 청산하고 구속 사역을 수행할 메시야의 공적 생애가 시작되었음을 알리신 것이라. 둘째, 예수의 세례 받으심은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루기 위한 절차였다(15절). 즉 예수께서는 회개의 세례를 받을 만한 죄가 전혀 없으신 의로운 분이셨지만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기까지 낮아지셨고(빌 2:6-8). 이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과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할 죄인들을 동질화시켜 그들을 대신해 율법의 저주를 홀로 감당하사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의 상징인 물세례를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죄성(罪性)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요 1:29) 온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실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이유에 대해서는 막 1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 위에 임했다(16절).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메시야로 직접 인정하셨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예수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동시에 받으심 으로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동시에 메시야로서의 인정을 받으셨으며 그의 공생애를 시작할 1단계 준비를 마치셨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행 8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3:13 이 때에. - 본절에 사용된 시간 접속사 '이 때'(토제)라는 말은 본절을 전절에 연결시키기 위한 접속사로서 세례 요한이 예수의 오심을 한창 준비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등장하셨다는 점을 부각시켜 준다.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마태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상황을 기록함에 있어서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가는 분명하게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 에서'(요 1:28)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성장하셔서 요한이 사역하던 유대 지방으로 오심으로, 드디어 메시야와 그의 선구자가 상면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본절에 사용된 '이르러'(파라기네타이)라는 말인데 이는 '공적으로 나타나다'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여기서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Hendriksen).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사복음서와(막 1:9-11; 눅 3:21,22; 요 1:31-34)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한 설교(행 10:24-48)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는데 죄나 죄의식이 전혀 없으셨던(고후 5:21; 히 4:15; 7:26; 벧전 2:22; 요일 3:5)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려 했는 가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구한 해석이 있으나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① 예수의 세례는 그의 사생활을 끝내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표적이었다(Bruce, Erdmann). 즉 세례가 일반 사람에게는 죄인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을 상징하는
바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의 이전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애의 시작을 알리셨다는 것이다. ② 예수의 세례는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루시기 위한 절차였다는 것이다(Lenski). 즉 예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셨지만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기까지 낮아지셨고' 이제는 자신과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할 죄인들을 동질화시키기 위하여 세례 받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훗날 죄인들이 회개하고 성도가 되는 교회의 예식이 된 세례의 모범을 보이셨다. 세례란 과거를 청산하고(씻음) 새로운 모임과 신앙에 가입(연합)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참 효력은 물세례가 아닌 성령 세례에 의해서이지만 물세례는 성령 세례의 외적 의식의 가치를 지닌다. 이에 예수는 자신이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직후에 성령 세례도 체험하심으로써 결국 훗날 성도들이 세례를 통하여 당신과 연합하게 되는 근거를 마련하신 것이기도 하였다(롬 6:3-11). 따라서 예수의 세례 받으심은 구속사역에 여러모로 필요한 의를 이루신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신분이나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실로 모든 일을 구원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만 진행하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예수의 세례 받으신 곳에 대해서는 막 1장 자료 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3:14 요한이 말려. - '말려'(미완료 과거 시제)와 반의적 접속사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로 강한 거절의 행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요한은 그저 한번 말려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자 한 것을 만류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이처럼 예수의 세례 받으심을 만류한 것은 그가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종교적 ․ 윤리적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자신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초월 초라해 보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Williams).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그가 세례를 베풀고 난 후 성령 강림 사건이 있기까지는 예수가 메시야인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요 1:31, 32).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본절은 요한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절은 다만 요한이 예수께서 죄 있음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과 요한 자신 또한 회개해야 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3:15 이제 허락하라. - '이제'(알티)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본절에만 사용된 매우 독특한 단어로 특별한 시점을 나타낸다(Williams). 즉 예수에서는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나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역을 이제 개시하려는 특별한 시점인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셔야 했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13절 주석을 참조하라.
3:16 예수께서‥‥곧‥‥올라오실 새. - '곧'(유두스)이란 말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즉시 물에서 나오신 사실 뿐만이 아니라 뒤이어지는 성령의 확실한 위임도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 새'라는 언급을 가지고 침례교에서는 세례의 형식에 관해서 세례 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세례를 준다'(밥티조)라는 말은 '잠그다'의 뜻 외에 '씻는다'(막 7:4; 딛 3:5)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의 형식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판단하기란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례의 형식이 아니라 세례가 지니는 의미, 곧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참된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는 행 8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하늘이 열리고. - 헬라 원문에는 감탄사 '볼지어다'(이두)가 첨부되어 있는데, 이는 요한이 자연적인 시각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하늘에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행 7:56).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자기 위에 임하심을. - 본절은 성령의 강림 방식이 비둘기 같았다는 뜻인지,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을 하고 강림했다는 말인지 모호하다. 다만 병행 구절인 눅 3:22에는 '형체로'라는 말이 첨가되어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을 하고 강림했다는 인식을 하게 한다. 하여튼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으며(사 11:2; 요 1:32-34),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성자 예수께서는 지상 사역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았다(Williams, Barbieri). 즉 예수께서는 공개적인 절차를 통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선지자와 인류의 죄를 대속할 대제사장과 진정한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 혹자는 이 소리에 대해 '우뢰'와 같은 자연적인 현상이 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Weber, Edersheim). 그러나 이 소리는 단순히 '소리' 그 자체가 아닌 분명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에게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지상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다. 즉 이 소리는 메시야를 통해 하나님의 지상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적이었던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본절은 시 2:7과 사 42:1을 배경으로 한 구절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증거이자' 하나님의 지상 통치권이 그리스도 예수께 위임되었음을 확증해 준다(Weiss). 한편 하나님의 이 음성은 변화 산상(마 17:5)에서와 수난 주간(요 12:28)에 다시 들렸다. 즉, 하나님의 이 음성은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시작된 지점과 중간, 그리고 결말에 다시 들린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과 메시야에 대한 인간의 환영, 또는 배척과는 무관하게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이 성자의 일생을 지배하셨음을 나타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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