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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성전 앞 앉은뱅이의 치유 사건 및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
구속사적 개관
실로 태초 아담의 타락 직후 제 1위 성부 하나님(God, The Father)이 세우신 구속(救贖)의 법은 구약을 관통하여 각종 예언과 예표로 주어져 오다가 제 2위 성자 하나님(God, The So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수난으로 일단 성취되었다. 그러나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택한 성도들이 주의 구속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을 충분한 시간의 확보를 위하여 주의 구속 사역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세상 끝날 주의 재림과 전우주에 대한 심판 이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천국으로 유보되도록 섭리되었다. 그리하여 구속의 법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구약의 성취로 초림하신 주님은 일단 구약(舊約)의 말씀대로 성취된 구속 사역의 실현으로서 세상 끝날에 이루어질 당신의 재림과 그 이후의 천국 구원에 대한 새 약속 곧 신약(新約)을 남기시고 일단 승천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의 강림으로 개시된 같은 신약시대이기는 하되 예수께서 직접 세상에 계시던 때와도 달리 주께서 일단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숭천하신 이후 그리고 구속 사역이 최종 실현되는 역사 종말까지의 장구한 중간기의 구속사가 전개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는 비록 구속 사역의 결과가 온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사역으로 구속 사역이 이미 성취되기는 하였는 바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하던 죄의 문제가 법적으로는 해결되어 인간과 하나님이 교제할 길이 트였다(히 4:14-16). 그리하여 제 3위 하나님(God, The Holy Spirit)이신 성령께서 오순절 강림 사건으로 역사속에 임하였으며 향후 각 성도의 심령속에 내주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성도는 택한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본장을 포함해 제 1-7장까지 이어지는 일련 기사가 바로 모든 구약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 오사 신약을 여신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으로 일단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신 직후 오순절 사건으로 강림 하신 성령의 인도로 구약 선민(選民)의 수도였던 예 루살렘(Jerusalem)에서부터 향후 세상 끝날까지 신약 선민의 생활 중심이 된 교회가 주께서 공생애(公生涯) 동안에 미리 훈련시키신 사도들을 통하여 내외의 핍박과 역경을 이겨내고 이제 막 태동되던 격변기의 역사를 보도하고 있다.
보다 상술하자면 먼저 제 1장은 십자가 수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구속 사역이 온전히 실현되는 때인 당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대한 거듭된 약속과 동시에 향후 당신의 재림 때까지의 구속사를 주도하실 성령 강림의 약속을 주시고 승천하셨던 대전환기적 상황을 보도한다. 그리고 다음 제 2장은 주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이루어져 먼저 주의 사도와 120문도(門徒)가 크게 변화되어 예루살렘에서부터 초대 교회가 태동되게 된 역동적 사건을 보도한다. 다음 제 3-5장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이 전날 예수를 처형시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과 내부의 갈등을 무릅쓰고 성령의 인도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급신장시켰음이 보도된다. 그리고 제 6-7장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사도들 외에 교회의 실무를 관장할 집사(deacon)들을 선출하는 등 기본적 조직을 정비할 정도로 발전하였음과 아울러 그에 따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박해도 더욱 거세어져서 마침내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殉敎) 사건인 스데반 순교 사건이 발생하였음이 보도된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일단 예루살렘에서부터 초대 교회가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의 대표적 실례로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 의한 성전 미문(美門)에서의 앉은뱅이의 치유 이적(1-10절) 및 이에 즈음한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11-26절)가 보도되고 있다.
전반부 1-10절에 보도된 앉은뱅이가 일시에 일어나 뛰었던 치유(治濾) 이적은 구속사적으로는 죄에 묶여 신음하는 인간의 영혼이 일시에 자유와 영생의 구원을 얻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특히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그를 치유하고 고칠 능력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베드로나 요한이 처음부터 이런 사랑과 능력(Love and power)의 사도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별다른 학식이나 재능이 없는 자였음은 물론 성급하고 능력은 없으면서 야심만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수난당하시는 주를 배반하고 도망하거나, 아예 주를 부인하기까지 했던 자들이다(마 26:56,69-75; 막 14:53-65; 요 18:15-18,25-27). 그러나 이제 주의 부활 숭천과 성령 강림 사건을 체험한 그들은 이처럼 놀라운 사랑과 능력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주의 구속의 복음이 인간에게 확신과 능력을 주는 참 진리이며 우리 안에서 이를 깨닫게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도우시는 성령(聖靈)이 살아계신 제 3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단 두 사도뿐만 아니라 오고오는 세대의 참 성도는 이 두 사람처럼 큰 사랑과 능력을 소유할 수 있으며 또 하여야만 한다(엡 3:16-19).
두 번째 사실은 앉은뱅이를 치유하면서 베드로가 그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절)라고 선포했고 또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실로 이 앉은뱅이에게 있어서 인생 최대의 문제와 희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이 상징적 사건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전해준다. 실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도움밖에 주지 못하는 금이나 은과 달리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구원(救援)을 주시는 분임을 깨닫는다. 또한 사도들이 이러한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걸으라고 선포했고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실이 증명하듯이 우리가 절대적인 구원을 보장하는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한다면 그의 구원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이웃에게 이루어져 우리의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임을 깨닫는다(마 11:28-30).
후반부 11-26절의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앉은뱅이 치유 이적을 보고 놀라는 유대인들에게 행한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의 내용은 아직 초대 교회가 예루살렘에 국한되었던 이 당시에 설교의 대상자가 일단 유대인이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먼저 자신이 방금 그의 이름을 의지하여 놀라운 이적을 행했던 구주 예수를 전날 무고하게 죽였었던 유대인의 범죄를 지적했다(11-16절). 그리고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으신 구속주가 되심은 자신이 방금 그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한 사실로써만 입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를 위시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한 예언을 통하여 증언한 사실로도 입증됨을 지적함으로써 거듭 예수의 그리스도직을 확증하였다(시 2:7; 16:10; 45:6,7; 68:18; 사 61:1,2; 슥 9:9). 동시에 이런 구주 예수를 죽인 유대인의 범죄조차도 하나님의 예언(시 22:7; 41:9; 69:21; 사 50:6; 53:9; 슥 11:12) 속에 포함되어 있던 섭리의 결과임을 지적하면서 과거에는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범죄하였으니 예수의 그리스도직을 깨달은 이제라도 회개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17-26절).
결국 이를 종합하면 베드로의 설교 요지(要旨)는 전날 유대인이 불의하게 처형시켰던 예수의 그리스도직을 자신의 이적과 구약의 예언으로 입중하며 회개를 촉구한 것으로 축약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전날 예수의 탄생에서 십자가 수난까지의 모든 사역과 부활 및 승천 그리고 인간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초라하던 그의 사도들이 주가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이토록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 사실들, 그리고 더욱이 이 모든 것이 역사를 초월하여 거듭 주어졌던 예언들의 성취라는 사실에서 예수를 그리고 예수만이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이심을 새삼 확중받는다(행 4:12). 이런 소위 기독론(Christlolgy)의 핵심 사항들은 단순하고 진부한 교리(敎理)의 반복같으나 실로 이것들이야 말로 우리의 구속사적 신앙의 기초이다.
또한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를 불의하게 처형하는 그토록 잔혹한 범죄를 자행했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거듭 회개를 촉구하신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실로 사랑의 하나님은 태초 아담의 범죄이래 세상 끝날이 오는 그 순간까지 죄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시고 끝없이 당신의 종들을 세상에 보내사 진리의 확중을 통하여 이성(理性)에. 그리고 정의의 각성을 통하여 양심에 호소하심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신다(겔 33:11). 그러나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그 옛날 출애굽 광야 시대 이래 거듭 그러하였듯이 이 당시의 유대인들도 회개한 일부 백성을 빼고는 민족 전체적으로는 도무지 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과 오늘날까지의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초대 교회를 극도로 핍박한 것은 물론 계속 예수를 부인하고 있다. 이는 실로 완악한 인간의 죄성의 한 전형적인 중거라 하겠다. 한편 이런 선민 이스라엘 백성의 예수 부인(否認)과 오히려 이로 인해 주의 복음이 더욱 빨리 그리고 더욱 멀리 이방인에게로 전달되게 되어 오히려 구속사의 지평이 확장되게 된 과정 전체에 담긴 구속사적 섭리에 대해서는 롬 제 11장 연구자료 '이스라엘에서 세계 만민에게로의 구속사의 확장'을 참조하라.
외울 말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베드로와 요한의 앉은뱅이 치유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
11 ○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3:1-16 베드로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이 주는 교회의 모습에 대한 교훈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졌던 베드로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용장(勇將)이 되어, 나사렛 얘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이는 오늘날 예수의 사랑과 권위, 진리와 정의의 대리인으로 세움받은 교회 역시 이제 세상을 향해 큰 일을 행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러면 이러한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교회에 필요한 모습은 무엇인가 본 사건의 교훈을 통해 상고해 보자.
1. 교회는 주의 말씀과 기도로 항상 무장해야 함(1절)
2. 교회는 언제든지 베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1-3절)
3. 교회는 소외되고 멸시받는 자에게 더 연민과 긍휼을 가져야 함(2-7절)
4. 교회는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겸손하게 선을 행해야 함(2-6절)
5. 교회는 당장 물진적 도움보다 궁극적인 구원 문제를 도와야 함(2-6절)
6.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기다리기보다 그들을 찾아가야 함(3-7절)
7. 교회는 선행과 복음 전파의 일을 편중됨이 없이 병행해야 함(6,13-16절)
8. 교회는 모든 선한 일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야 함(12-16절)
9. 교회는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 불신자들로 하나님을 찬미케 해야 함(8,9절)
10. 교회는 그리스도의 종된 자로서 신분을 잊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함(1-10절)
보감-3:6-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도가 얻은 것
1. 죄 사함(눅 24:47; 행 10:43)
2.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요 1:22)
3. 영원한 생명(요 20:31; 요일 5:13)
4. 구원(행 2:21; 4:12)
5.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고전 6:11)
6. 최후의 승리(롬 8:37-39)
7. 삶의 문제 해결(행 3:6-8)
원어연구-3:21, 회복
'회복'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포카타스타시스'인데, 이 단어는 동사 '아포카디스테미'에서 파생되었다.
'아포카디스테미'는 '~로 부터(분리)'를 뜻하는 '아포'와 '카디스테미'의 합성어인데, '카디스테미'는 '세우다'(눅 12:14). 또는 '만들다'(되게 하다, 약 4:4)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카디스테미'는 '아래에'라는 뜻의 '카타'와 '서다' 또는 '세우다'라는 뜻의 '히스테미'로 나뉘어진다. 그러므로 '카디스테미'의 원어적 의미는 '기초를 세우는 것'을 가리키며, '아포카디스테미'는 '기초로부터 시작하여 기초 위에 다른 건물을 세우는 것' 또는 '무너진 건물을 복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일반적인 용법에서 '아포카디스테미'는 '(빌린 돈을)갚아 주다' 또는 '건물 등을 복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병든 자가 치료되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막 8:25; 눅 6:10). 또 이 단어는 점성술이나 또는 천문학에서 별자리들이 계절이 바뀜에 따라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키는 전문 술어로도 사용되었다.
한편 성경적인 용법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퍼조물들의 창조 당시의 본래 모습으로서의 회복, 그리고 병자들의 회복 등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롬 5:18; 고전 15:22; 골 1:20). 본문에서 '아포카타스타시스'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들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도표-3:1-26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변화된 모습
모든 인간이 다 그렇듯이 예수님을 따르며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목격한 사도들도 아담 안에서 죄인되고 연약한 인간의 성품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주 안에 거함으로 그들의 삶과 인생, 인격이 변화되었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과 인격의 변화는 그들 자신의 자의적인 노력이나 행위로 말미암온 것이 아니라 애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을 기점으로 변화되었다. 즉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과거의 유약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놀라우리 만큼 그 모습이 변모하였다. 다음 도표에서 이들의 삶과 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자.
1. 변화 전
1) 주의 사역에 무지함(마 16:21-23)
2) 높아지를 힘씀(마 20:20-28)
3) 주를 버리고 도망함(마 26:56)
4) 주를 부인함(마 26:57-75)
5) 주를 믿지 못함(요 20;24-29)
6) 소명을 망각함(요 21:3)
2. 변화 후
1) 주님을 바로 깨달음(빌 1:9)
2) 겸손해짐(벧전 5:5)
3) 목숨을 버리며 주를 따름(눅 14:33)
4) 자신을 부인함(마 16:24)
5) 오직 순종함(행 5:29)
6) 소명에 충실함(행 6:4)
도표-3:12-26 본문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묘사
1. 하나님의 종(13절)
2. 거룩한 자(14절)
3. 의로운 자(14절)
4. 생명의 주(15절)
5. 그리스도(18절)
6. 예수(20절)
7. 모세 같은 선지자(22절)
도표-3:19 성도가 돌이켜야 할 것 10가지
1. 우상 숭배(삼상 12:21; 겔 14:6)
2. 허탄한 것(시 119:37)
3. 악한 길(잠 4:14,15; 렘 18:11)
4. 악행(렘 25:5)
5. 교만(마 18:3)
6. 방탕한 생활(눅 15:17)
7. 죄악(행 3:19,26)
8. 도적질(행 4:28)
9. 불경건(롬 11:26)
10. 회롱의 말(엡 5:4)
도표-3:25, 성경의 주요 언약
출 서론 특별자료 참조
원어연구-3:19 죄
눅 13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3:20 그리스도의 재림
성경교리 '종말론' 참조
도표-3:20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한 자들
1. 그리스도 자신(요 14:3)
2. 예수 승천 시의 천사(행 1:11)
3. 사도 베드로(행 3:20)
4. 사도 바울(살전 4:13-18)
5. 예수의 형제 야고보(약 5:7)
6. 사도 요한(요일 3:2; 계 1:7)
7. 에녹(유 1:14)
3:1-10 앉은뱅이 치유 이적
본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특히 본문은 그러한 성령의 역사의 한 실혜로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론 일으키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의 내용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능력이다(6절). 성령의 능력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게 했던 자연인 베드로를 변화시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게 하였다. 이런 베드로의 변화는 결국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제자들 전체의 변화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체험하는 모든 성도들의 변화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앉은뱅이의 치유와 구원이다(7,8절). 이 앉은뱅이는 육체적인 불구자였을 뿐 아니라 날마다 성전 문곁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하루의 필요한 물질만을 구하는 영적 불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었을 때에 윽신의 질병을 치유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여 영흔의 질병까지 치유받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인격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것으로 인격을 변화시키고 영적 무지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는 초자연적인 이적까지 일어나게 한다.
셋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6절). 베드로의 치유 능력은 온전히 예수님의 이름을 힘 입은 데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중에 치유의 이적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야되심을 드러내셨는데 베드로도 이런 치유 사역의 연속성을 통하여 예수님만이 구원자되심을 보여준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지명물 붙임으로 역사적으로 실재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성을 확중하고 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으로 그의 수난과 죽음 등 인간의 고난을 담당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뚜각시키고 있다.
한편 이상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한다. ①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치유한 것은 우리 신앙 행위의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눅 8:16). ② 멸시와 천대 속에 소망없이 살아가던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살게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소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롬 6:4). ③ 복음의 사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유일하게 소유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뿐이었다는 사실은 물질 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복음 전도자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 유대인들의 경우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는 하루를 24시간으로 구분하는 시간 개념이 없었다. 다만 그들은 하루를 낮과 밤으로 구분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포로기 이후에 24시간 개념을 도입하였는데 그것도 해지는 시각을 기점으로 다음날 해지는 시각까지를 하루로 계산하였다. 그리하여 오후 6시가 곧 0시이며 오전 6시가 곧 12시에 해당하였다. 본서 1권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그러므로 본절에서 제 구시는 오후 3시를 가리키는데, 이때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기도 시간이었다. 행 2:15 주석 참조. 한편 이러한 본절은 당시 초대 교회가 아직 유대교의 절기와 관습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준행했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환원하면 초대 교회 사도들 및 성도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느 정도 유대교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는 베드로가 처음에는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매우 꺼려했고, 당시 성도들도 이를 문제 삼았던 사실에서도(행 10,11장) 뒷받침된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의 신학은 아직도 유대교에서 환골 탈태(換骨奪胎) 하여 독자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반 위에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가 유대교를 떠나 독자적 기독교의 성격을 확립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예루살렘의 멸망(A.D. 70년)이다. 하지만 이것이 초대 교회를 비난할 만한 요소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가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던 시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유대교의 관습과 성전의 규례를 준수했던 사실을 이해함에 있어서 단순한 잘잘못을 시비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를 수납함에 따라 유대교에서 기독교에로라는 변화의 추이를 어떤 진통을 겪으면서 적응했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 - 이들은 야고보와 함께 예수의 3대 제들로,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승천 이후 초대 교회의 태동에서부터 초기 발전단계에 있어서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베드로에 대해서는 벧전 1장 연구자료를, 요한에 대해선 요일 2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성전에 올라갈새. - 여기서 '올라갈세'(아데바이논)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습관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즉 이것은 당시 초대 교회 사도들이 성전에 기도하라 가능 행위가 파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매일 규칙적으로 수행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직은 그들이 유대교와의 완전한 구분을 시도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는 다른 측면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 전파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였던 장소인 성전을 복음전파의 상소로 삼고자 성전에 올라갔다고 볼 수도 있다.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 이는 이 앉은뱅이가 선천적 불구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그는 성한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사고로 인해서 불구가 된 후천적 앉은뱅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8절에서 보듯이 그가 걷게 되었을 때 보였던 반응, 즉 걷는다는 사실에 대한 세심한 확인과 감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앉은뱅이는 선천적인 불구자였기 때문에 걷는다는 경험과 그 기쁨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었는 바 자신의 불구 자체를 운명으로 생각하면서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대면했을 때 여태껏 했던 습관대로, 자신의 불구가 치유되려고 하는 소원보다 동전 몇 닢을 더 갈망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메고 오니. - 이처럼 이 앉은뱅이의 생계는 타인의 동정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그는 성전에서의 기도 시간에 맞춰 이곳으로 옮겨진 것 같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 - 여기서 말하는 미문(the Beautiful Gate)의 위치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즉 ① 니가노르의 문(Nicanor's Gate)이라는 견해가 있다(Knowling, Alexander). 이 문은 성전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향하여 있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②수산 문(Susan's Gate)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문은 솔로몬 행각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Meyer, Alford), 11절의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하다. ③ 성전에서 예루살렘 성읍을 향하여 서쪽으로 열려진 두 개의 문이라는 견해가 있다(Lightfoot). 그런데 이들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이 미문이 어떤 문이던 간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던 문이라는 추정을 할 뿐이다. 왜냐하면 남의 동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앉은뱅이의 입장에서는 분명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쪽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미문은 그 외관이 황동으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졌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아름다운 문)이 붙여졌다고 한다(Bruce, Hervey).
3:3 그가…구걸하거늘. - 이런 행위는 앉은뱅이에게는 늘 반복되었던 일상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성전 미문에서 순례객들의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동전 몇 닢에 의존하면서 생명을 연명했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의 최대의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에게는 영혼의 갈급함을 느낄 여유조차 전혀 없었을 것이다.
3:4 주목하여. - 이는 행 1:10의 '자세히 쳐다보다'(아테니조)와 동일한 낱말로서,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이다(12절; 행 6:15; 7:55) 그 의미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의 육체적 불구 뿐 아니라 영적 암매(暗昧) 상태를 간파했던 것 같다(Calvin).
우리를 보라. -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지금 앉은뱅이 걸인은 타인의 동정을 얻기 적절하도록 자신의 처지를 더욱 불쌍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있었던 것 같다.
3:5 무엇을 얻을까. - 이는 앉은뱅이 걸인의 최대의 관심사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영생과 치유의 은혜를 베풀고자 했지만, 그는 동전 몇 닢을 원할 뿐이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은 소중한 하늘의 만나를 주려고 했던 반면, 앉은뱅이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지상의 양식만 바랬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사람이 미처 소망하기도 전에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실례로 앉은뱅이는 자신의 불구가 선천적이었기 때문에 걸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 본적도 가져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러한 불구의 앉은뱅이를 치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앉은뱅이의 입장에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명백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은이나 금과 같은 것은 세상의 생활에서는 가장 요긴한 것으로서 앉은뱅이걸인이 바라던 바였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버린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는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마 10:9). 그러므로 이러한 사도들은 앉은뱅이 걸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효용성이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역학 관계를 간파한 베드로는 먼저 자신들이 앉은뱅이 걸인이 요구하는 바 물질적 동정을 줄 수 없는 사람들임을 미리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자신의 가난함을 떳떳이 설명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형편을 알리고자 하는 것보다는 물질이 삶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없음을 은연 중에 암시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베드로가 앉은뱅이 걸인이 바라는 바 금과 은이 없어도 그에게 대화를 건넬 수 있었던 참된 이유인 것이다.
내게 있는 것. -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이 없이 앉은뱅이 걸인에게 당당히 접근할 수 있었던 원천인데, 그들은 앉은뱅이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요긴한 것을 줄 것이 있었던 것이다. 즉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그들이 주고자 하는 것이 앉은뱅이가 요구하는 것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비할데 없이 소중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 걸인에게 금과 은을 대신하여 준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부분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고 둘째는 '걸으라'고 한 부분이다. 전자는 후자의 이적(sign)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고, 후자는 전자의 결과이다. 즉 후자의 이적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이고 자존적인 의미를 갖기 못하며, 오직 이것은 전자를 믿게 하기 위해서 동원된 방편의 있다. 따라서 이를 감안할 때 베드로가 앉은뱅이세세 진정 주고자 했던 바는 전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앉은뱅이가 세상의 마법에 의해서 견제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의 권능을 증거해 주지 못하는 한 앉은뱅이에게 인류의 참된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베드로가 치유의 이적을 베풀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존한 것은 단지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주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온 우주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역사할 줄로 확신하고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뒤이은 베드로의 증거에 의해 명백해진다(12,16절). 한편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 앞에 부기된 '나사렛'이란 지명의 의미에 대하여 행 2:22 주석을 참조하라.
3:7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본절에서는 앉은뱅이 걸인이 치유되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세밀한 묘사는 본서의 저자인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음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발'은 발바닥을, '발목'은 복사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장의 앉은뱅이의 불구 원인이 발과 발목 부위의 근원적인 무력(無力)에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3:8 뛰어 서서 걸으며. - 이런 행동들은 앉은뱅이의 상태에서 치유를 받은 걸인의 감격과 기쁨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즉 출생 이후 평생 앉아서 지냈던 그로서는 자신이 걷고 뛰게 되었다는 것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로서는 이같은 환희의 날들이 오리라고 기대를 해보지 않았던 것이라서 뜀박질이나 보행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니, 지금 그 현실을 확인해 보고 있는 것이다.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 이처럼 치유받은 앉은뱅이가 제일 먼저 성전으로 향한 것은 그곳이 자신이 앉아 있었던 곳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었기도 하겠지만(2절) 그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았음을 깨닫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을 찬미하니. - 이는 베드로의 이적이 낳은 합당한 결과이다. 즉 앉은뱅이 걸인은 자신이 걷게된 사실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개입되었음을 깨닫고서 하나님께 찬미를 드린 것이다. 물론 앉은뱅이는 배후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보다 도구로 사용된 인간 베드로에게 더 감사할 수도 있었다(행 14:8-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만 온전히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이적과 관련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한 것(6절)과 그 사실을 믿은 앉은뱅이 걸인의 믿음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3:9 모든 백성이…보고. - 앉은뱅이 걸인에게서 발생한 이적의 파급 효과가 대단히 광범위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는 아마도 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알리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3:10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이는 평소 앉은뱅이 걸인에게 조금이라도 면식이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이다. 여기서 '기이함'(담보스)은 보통 충격적인 감정을, '놀람'(엑스타시스)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황홀경에 빠진 것을 가리킨다(막 9:15; 14:33; 16:5,6; 눅 4:36). 과거 예수님께서 귀신을 축출하고 불치의 병자를 치유하셨을 때에도 사람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였는데(막 9:15; 눅 4:36),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절에서의 사람들의 반응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Hervey).
3:11-26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
본문은 베드로가 앉은뱅이 치유 이적을 보고 놀라는 무리에게 행한 설교로,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행한 설교에이어 그의 두번째 설교 장면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두번째설교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행한 첫번째 설교와 그 내용이나 구조가 비슷하다(행 2:14-36). 즉 구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선포하고 회개를 통한 영접을권고하고 있다.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유대인의 범죄를 지적함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선포한다(12-16절). 즉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치유를 보고 놀라 솔로몬 행각에 모인 일단의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치유의 능력은 베드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무고하게 죽인 예수가 바로 구주되심을 강조한다.
둘째는 유대인의 회개를 요청한다(17-19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행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이 또한 구약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므로 회개하여 구원을 얻으라고 권고한다. 비록 유대인들이 영적인 무지로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받아들이면구원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20-26절). 즉 유대인들이 무고하게 죽인 예수가 바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된 언약의 자손이며(창 12:1-3) 모세와 같은 선지자임을 강조하여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다시 증거한 것이다(신 18:15,18,19).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적 배경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의 대상이 유대인이며 이때까지는 아직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한편 베드로의 설교는 그 중심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됨을 선포하는 것으로, 당시 대부분의 설교가 신앙고백적이고 선포적이라는 사실은 스데반의 설교(행 7:253)와 바울의 설교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설교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요 11:25; 14:6; 롬 5:21; 딤후 1:10). 이외에 본문은 ① 복음 전도자는 나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밝히 증거되도록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노력을 부단히 해야 한다는 것과 ②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를 주라 밝히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류해 준다.
3:11 나은 사람이…붙잡으니. - 본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올 때의 상황인 것같다. 즉 앉은뱅이 걸인은 치유를 받은 후 그 기쁨에 도취되어 성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8절)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치유 과정과 치유자를 밝힐 필요성에처해 있던 차에 마침 성전 밖으로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을 발견하자, 그들에게 달려 갔던 것 같다(Bruce).
솔로몬의 행각. - 헤롯 성전 경내의 동편에 위치했던 주랑(柱廊)으로 이곳은 당시 랍비들이 제자들이나 민중들에게 종종 교훈을 베풀었던 장소였다. 솔로몬의 행각에 대해서는 눅 21장 연구자료, '헤롯 성전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예수님 역시 이같은 전례에 따라 이곳에서 교훈을 베풀기도 하셨다(요 10:23). 이렇게 볼 때 백성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솔로몬의 행각으로 데려간 것은 그곳에서 앉은뱅이 걸인을 치유한 경위에 대하여 듣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3:12 이것을 보고. - 여기서 베드로가 본 것은 외면적으로는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으로 운집한 것이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앉은뱅이 치유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놀라며 기이히 여긴 것이다(10절).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베드로의 이러한 반문으로 미루어 볼 때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앉은뱅이를 치유한 베드로의 개인적인 능력에 많은 호기심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베드로는 먼저 이 능력이 자신에게서 연유된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런 일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여행 때에도 비슷하게 일어났는데(행 14:8-18), 주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항상 경계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무엇인지를 잘 깨우쳐 주고 있다. 그것은 곧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취해서는 안되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된다는 점이다(고전 10:31).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성경에서 이 칭호는 보통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음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출 3:6 주석 참조. 여기서 베드로가 이를 사용한 것도 역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25,26절).
종.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파이스'( )는 '소자'란 뜻으로 '아들'을 가리키는 '휘오스'( )와는 분명히 구별된다(Hervey, Bruce). 베드로는 이 호칭을 사 52:13에서 따온 듯한데 거기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고난 받은 종이 종국에는 하나님에 의해 영화롭게 될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 정확히 들어맞는다(Longeneker).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여기서 먼저 베드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언약의 완성자로 세우셨던 사실을 천명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영화롭게 되었던 사건, 즉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일에서 증거되고 있다(엡 1:20). 한편 본절은 베드로가 앉은뱅이 걸인에게 단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6절)로 간단하게 소개한 것과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가 청자(聽者)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함에 있어 효과있게 장·단(長·短)을 조절했음을 보여 준다. 특별히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경건성이 투철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을 것임을 감안할 때 본절에서 베드로가 언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관련시켜 설명한 것은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로마 당국에 고발한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언약적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이고 예수는 언약의 완성자인데, 그 예수를 언약의 파트너가 살해했다는 사실이다.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 - 유대인들의 고소를 당해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된 예수에 대하여 심문한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함을 알고서 놓아 주려 한 것을 가리킨다(마 27:1,2,11-18). 그러나 유대인들의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빌라도가 결국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함으로써 예수께서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된다(마 27:20-26).
너희가…부인하였으니. - 이는 이방인인 빌라도가 예수를 방면하려 했던 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아우성 친 죄상을 가리키고 있다(마 27:15-26; 눅 23:13-25).
3:14 거룩하고 의로운 자. -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비록 세상의 법정에서는 죄인으로 판단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자로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늘과 땅에 속한 만물을 통치하시는 의의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같은 예수를 죄인으로 취급했던 불의한 이스라엘인들의 행위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살인한 사람. - 예수 대신에 유대인들이 놓아주기를 요구했던 바라바를 가리킨다(마 27:16,21). 즉 빌라도가 유월절 전례에 따라 죄수 한 사람을 방면하고자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대신 바라바를 요구했는데(마 27:17-21) 여기서 '살인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거룩하고 의로운 자'와는 명백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택이 '얼마나 불공정했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 본절 역시 대조의 명암이 뚜렷하다. '생명'과 '죽음'이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께서(요 1:4; 14:6)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한 것은 인류 타락의 결과 집적(集積)된 총체적인 죄악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건일 것이다. 이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 것이요(요 1:5;3:1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요 1:11).
하나님이… 살리셨으니.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가리킨다. 주 완악한 이스라엘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죽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심으로써 저가 온 세상의 주요 그리스도 되심을 만천하에 공표하신 것이다. 행 2:24 주석 참조. 그러므로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이 죄인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메시야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됨과 동시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인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입증한다.
증인이로라. - 베드로는 이와 동일한 말을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도 했다(행 2:24,32).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증인이란 자격은 베드로 자신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역적 자격이다(행 1:8).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이르는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이를 온 천하에 증거하도록 명하신 것이다(마 28:19,20). 따라서 제자들에 의해서 증거되는 복음의 진리들은 신적인 권위에 기반한 것으로서, 청자(聽者)들은 제자들에 의해 증거되는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받아야 한다. 그런즉 복음의 증인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선지자의 역할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 히브리 사고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특성을 대변한다. 대상 4장 자료노트, '이름에 대한 성경적 이해'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 사역들의 효력까지를 확실하게 믿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름이…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 이는 베드로가 앉은뱅이 걸인이 낫게 된 이유로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치 않은 점은 과연 누구의 믿음이 앉은뱅이를 낫게 하였는가이다. 이에 관해 혹자는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으로 보며(Alford, Meyer), 또 다른 이는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으로도 본다(Calvin, Bruce). 그러나 우리는 이중 어느 한 견해를 취할 것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수용해야 할 것이다. 땅에서 권능을 행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도 역사하실 줄로 믿은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이 앉은뱅이를 치유하는 역사를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6절 주석 참조. 그렇지만 고침받은 앉은뱅이가 자신의 회복을 하나님의 역사로 믿은 것도 사실이니 결과적으로 양자의 믿음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이다. 8절 주석 참조.
3:17 형제들아. - 앞서 '이스라엘 사람들아'(12절)라고 한 호칭이 이처럼 바뀐 것은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 변화를 시사해 준다. 이런 형식은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때 행한 설교에서도 발견된다(행 2:22,29). 즉 베드로는 본절 이하부터 더 이상 이스라엘의 죄과를 나열하지 않고 오직 회개와 돌이킴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 일조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제는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형제로 맞이하겠다는 의지가 이 용어 안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그리한 줄 아노라. -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 준 이스라엘의 과오를 무지 탓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은 전혀 뜻밖의 일이다. 즉 이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14절)를 부인하고, '생명의 주'(15절)를 죽였다고 질타한 앞서의 신랄한 책망과 뚜렷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으니 곧 유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즉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죄악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지적한 후 그렇다고 해서 절망과 낙담 속에서만 거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드러운 말로 저들을 위로한 것이다(19절). 물론 베드로의 이런 관대함은 그의 개인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보다는 예수의 전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눅 22:61).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복음의 관대함' 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 관원. - 대제사장 가야바와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를 대적하여 죽이고자 궤계를 도모하였으며 백성들을 선동하여 끝내는 예수를 죽이는 데 성공하였다(마 26:3,4,57-8; 27;1,2,20-26).
3:18 하나님이…이루셨느니라. -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하에 되어진 것임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즉 이전 절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이스라엘과 관원들의 야합으로 인해서 발생했던 사건임을 밝혀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강조했던 반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경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십자가는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서, 비록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 취하신 길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었지만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자발적으로 고난을 감내하신 것이다(마 26:39,42).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사람들의 악한 계획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알게 하신 것. -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셨던 메시야 수난 예언을 가리킨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유대인들의 증오 및 배척(시 35:19; 118:22,23), 십자가상의 수난(시 22:1-21), 고난당하는 종(사 53장) 등이 있다.
3:19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 하나님의 용서 앞에서 사람이 취할 것은 오직 회개임을 보여 준다. 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미 구약에 예언되었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인들이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던 그 죄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용서의 복음을 죄인들에게 제시하신 때에 사람은 지체하지 말고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이런 최소한의 회개마저 거부한다면 그는 필경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다.
유쾌하게 되는 날. - 이 날이 구체적으로 어떤 날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문맥상 이것이 미래에 속한 어떤 날임에는 분명하다(Alford, Bruce). 따라서 이 날은 단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과 관련된 현재적 시간은 아닌 것이다. 가장 적합한 해석은 메시야가 도래하실 재림 때라고 볼 수 있는데(Calvin), 이때는 성도들의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만물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성도들은 하늘의 복락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21절; 계 21:5; 22:1-5).
3:20 예정하신 그리스도. - 재림 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치하시고 계신다(엡 1:20-23). 그런데 그가 다시 세상에 오실 때에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만 충만해질 것이다.
보내시리니. - 이 동사의 주어는 '주' 곧 하나님이신데, 베드로는 이 사실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미래의 어떤 한 날에 이루어질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마치 과거에 이루어진 것을 보고 말하듯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베드로의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전의 그의 불신앙과 회의에서 벗어나게 해준 절대적 사건이었다(요 21:12,15-19). 그래서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그러한 믿음 안에서 미리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 - 이는 문맥상 '유쾌하게 되는 날'(19절)과 일맥 상통하는데(Toussaint), 바울은 이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다(엡 1:10). 즉 이때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교회 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 미치게 될 재림의 날이라고 하겠다.
하늘이…그를 받아두리라. - 해석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Alford, Meyer, Bruce, Knowling).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은 그의 지상에서의 사역이 정당했다는 증거로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누룩과 같이 퍼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이 세상에서의 통치를 포기했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3:22 모세가 말하되. - 신 18:15의 인용이다. 여기서부터 마지막 절까지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세 사람의 조상들, 즉 모세와 사무엘과 아브라함의 증언을 통해서 자신의 증언의 역사성을 입증하고 있다.
나 같은 선지자. - 여기서 '나'는 모세를 가리키고 '나 같은 선지자'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한편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서 그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 중 하나로 생각했었다(요 1:21,25; 6:14). 그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권위를 최고로 생각하면서 예수를 모세에 버금가는 정도의 권위자로만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가 모세의 권위에 비할 바가 아니며, 모세 역시 자신을기다렸던 한 선지자였음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밝히셨다(마 5:17-48; 17:1-8).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당부인데, 그것은 오직 메시야의 모든 말씀에 대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 역시 오실 메시야의 권위가 자신보다 월등함을 인정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해 주는 선지자에 불과했지만 오실 메시야 곧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로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할 자였다. 따라서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반응은 순종뿐 다른 길이 없음을 모세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3:23 듣지 아니하는 자는…멸망받으리라. - 모세가 예언한 오실 메시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이다.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계신 자로서 만물이 그가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크신 하나님이시다(요 1:1-3). 따라서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이 저를 거역하는 것은 곧 나귀가 발굽으로 제 주인을 차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 결국이 어떠할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말이다. 이는 구약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말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자리에서부터 추방당한다는 의미이다. 창 17:14 주석 참조. 이는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니 실상 영원한 죽음을 예고하는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다(Hervey).
3:24 사무엘 때부터. - 사무엘은 모세 이후 일어난 선지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지자로서 이후 본격적인 선지자들의 활동이 역사상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사무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 왕에게 기름을 부었고(삼상 16:13), 메시야 왕국의 전조였던 다윗 왕국의 실현을 예언한 선지자였다(삼상 15:28; 28:17). 삼상 25장 자료노트, '사무엘의 삼중직' 참조.
모든 선지자. - 사무엘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했던 수많은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임무도 사무엘의 그것과 동일했으니 곧 메시야의 도래와 기타 관련 사실들에 대해서 예언했다. 보다 자세한 선지자에 대한 이해는 본서 10권 선지서 개론을 참조하라.
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 이스라엘 사람이 계통상 선지자 자손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단지 혈통상의 관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 임무의 연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모세와 여러 선지자가 예언한 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해야 할 사람들로서만이 그들의 위대한 조상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과의 관계를 논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언약의 자손. -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속한 자들임을 말한다. 아브라함 언약의 주된 내용은 땅 위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창 12:2,3; 17:4-8),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세상의 천하 만민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으로서 결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범주에 한정시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너의 씨. -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약속되어 있듯 땅위의 모든 족속에게 영생의 축복을 가져올 자였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한 복 주심을 자신들의 민족에만 한정시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깨어지고 말았다. 즉 예수의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도 증거되었으니 그들 역시 영생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행 11:1-18).
3:26 종. -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13절 주석 참조.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에 의하면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 그들을 통해 이방인에게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롬 1:16; 2:10; 11:1). 이런 관계에 대해서는 로마서 9-11장의 해당 주석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같은 구원의 경륜을 베푸실 때 당신의 신실하심에 어긋남 없이 행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롬 11:13-24).
너희로 하여금 ⋯하셨느니라.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다. 즉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함으로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다(마 9:13; 요 3:16). 본서 14권 마 18장 자료노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참조. 그러므로 이에 의거하여 베드로는 거듭거듭 자기 형제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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