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공(文純公) 후조당(後彫堂) 연시(延諡) 연관(聯關)
오천(烏川) 및 계상간(溪上間)
주요(主要) 왕래문서(往來文書) 촬요(撮要)
2. 오천변명단자(烏川卞明單子)
계상(溪上)의 문중이 소위 변파(辨破)라는 이름으로 우리 오천(烏川)으로 보낸 각종 문서에 대하여, 오천이 답변한 많은 문서들이 종택(宗宅)에 전하는데, 그 목록 대략을 필자의 『문순공(文純公) 후조당(後彫堂) 시호(諡號) 시비(是非)와 종계변무(宗系辨誣) 전말(顚末)』에서 정리하였다. 후조당을 위한 연시(延諡) 연관으로 발단한 시호 시비에 처음으로 생성된 문서가 진성이씨(眞城李氏) 측(側)의 『연 시시이씨문중여오천단자(延 諡時李氏門中與烏川單子), 1826, 純祖 26年, 丙戌 六月?』였는데, 이 문서를 또한 『연 시후이씨문중여오천서(延 諡後李氏門中與烏川書)』와 함께 번역 소개한 바 있다.
위 문서의 답글이면서, 이씨들의 언설을 소위 무함(誣陷)이라 하고, 그 바로잡음을 변명(辨明), 변무(辨誣, 卞誣), 변정(辨正, 卞正) 등으로 일컬었는데, 오천에서의 변무(辨誣)와 연관하여 가장 먼저 이루어진 문서가 아마 『오천답이씨단자[烏川答李氏單子], 1826, 純祖 26年, 丙戌 七月』인 것 같다.
그런데 초서(草書)로 된 이 문서가 침습(浸濕)의 흔적으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데가 많고, 탈초(脫草)되지 아니한 채로 아주 작고 가는 글씨체로 된 복사물(複寫物)로 전하고 있어 현재 필자의 능력 형편으로 그 번역은 불가능하다. 정상적인 자체(字體)라면 문집(文集) 7∼8 면(面) 분량인데, 대충 살펴본 그 주요 내용은 후조당이 지으신 소위 산운시(山雲詩)의 화증(和贈)과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의 지음이라는 일설(一說)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변정(卞正)한 바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시비(是非)의 초기 시점(時點)에 양(兩) 문중에 왕래한 문서 중 이씨 문중이 후조당 가장(家狀)에서 두찬(杜撰) 등 명목으로 여러 조목을 뽑아 변파(辨破)한 바에 대하여, 오천(烏川)이 답한 글 오천변명단자(烏川卞明單子)를 초역(抄譯)코자 하였다. 이 글은 물론 두 문중(門中)의 변파(辨破)와 변무(辨誣)의 핵심에 접근하는 데에서도 중요한 문서라 할 만한 것이다.
▣ 烏川卞明單子
■-伏以生等十數,殘命朝夕莫保持而無恐者,三百年依仰有地,八九世分誼靡替,自古門性拙訥,素乏涉世之才,不知事大之道,然而大度包容,誅斥不加,矜眷愈摯盛德事也.豈敢忘之而一,自諡 命之下,得重罪於巨室,此鄙等覆亡之秋也.
□-엎드려 아뢰옵건대 저희들 십수인(十數人)은 남은 생명을 조석(朝夕)으로 부지(扶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거니와 삼백년(三百年)을 우러러 의지하였고, 팔구세(八九世)에 걸쳐 정의(情誼)를 나눔이 쇠퇴하지 않은 처지이지만, 스스로 살펴 보건대 저희들 문성(門性)이 볼품없고, 본래부터 세상을 경영하는 재주가 모자라서 사대(事大)하는 도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고 넓으신 도량으로 감싸 주시면서 크게 꾸짖음을 더하지 않으시고 긍휼(矜恤)히 돌보시며 성덕(盛德)을 두텁게 베푸시니 어찌 감히 그 일을 하나라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에서 후조당(後彫堂)께 문순(文純)의 시명(諡命)이 내리신 이래, 귀문(貴門)에 대하여 중죄(重罪)를 얻게 됨으로써 저희들은 지금 뒤엎어져 패망(敗亡)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窃伏惟念師弟同 諡,雖非嫌逼,其在陽濯江曝,不可尙己之義,實有所縮縮不寧于心者,濟寧正初一行所以作也.而自 天成命不容私爲則,月前迎 諡之擧欲己而得乎.李氏之前後以言以書,窘迫日甚,間或有悖慢辭說,而鄙等處義,但有兢惶黙然自訟而已. ▶濯-빛날 탁. 曝-볕쪼일 폭.
□-가만히 홀로 생각하옵건대 스승과 제자가 같은 시호(諡號)를 받는 일이 비록 그 누구를 핍박(逼迫)하였다는 혐의를 쓸 일이 아니지만, 햇볕에 쪼이어 강물이 모두 말라버린다 해도 결코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므로 실로 몸을 움츠려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바이라 저 제녕(濟寧)이 정초(正初)에 잏행(一行)하였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습니다. 임금으로부터 시명(諡命)이 내리는 일이 사사롭게 용납되는 일이 아니므로, 월전(月前)에 연시(延諡)의 의례(儀禮)를 거행한 일이 저희들 자신만의 욕심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겠습니까? 이씨(李氏) 문중의 전후(前後)의 말과 글로 공격당하여 괴로움이 날로 더하였으며, 간혹은 어그러지고 거친 말씀조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의 처신은 단지 두렵고 황송(惶悚)하여 말없이 스스로를 하소연할 뿐이었습니다.
■-頃者本院聚會之日,仄聞李氏以尊師討罪爲名,而聲響所及勢若風雨,生等懍凜恭竢以爲全門滅亡,不暇私憂自歎,及因參會仗生,獲見通草後數日,又聞一二條改出,而改出本萬無獲見之勢,雖不知道內輪行本之何如,然必與生等所見之草,大槩一般矣,通草不言無非打破先師文集中語,侵及先祖平生,譏貶之愚弄之誣衊之罔有餘地,若是者方是尊師討罪之道乎,淵坮上一枯柴尙可愛護,而况先師之四百年完書乎,而况先師之至親切賢弟子乎,生等之不能體念先祖,其勢未由而僉尊之體念先祖果安在哉,尊賢親親其義一也,且聞罰不及嗣,未聞罪及祖先,憎疾後人之故,凌逼先輩者,安知非聖門所稱非吾徒類也.
□-근자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모임이 있던 날은 귀를 기울여 듣건대 이씨(李氏) 문중이 선생을 존숭(尊崇)하고자 토죄(討罪)한다는 명목이었고, 저희들에게 도달한 바 말씀의 위세가 풍우(風雨) 같았다 하므로 저희들은 무서워 떨면서 공손(恭遜)히 기다리되, 전(全) 문중이 멸망하더라도 사사로이 근심할 겨를이 없음을 자탄(自歎)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모임에 참여하였던 장생(仗生)으로부터 통문(通文)의 초본(草本)을 얻어 본 후 수일(數日)에 한두 조목 개출(改出)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개출본을 얻어 볼 형세가 만무(萬無)하였고, 비록 도내(道內)에 두루 돌린 초본(草本)도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필경에 저희들이 본 바 통초(通草)는 대개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통초는 퇴계 선생 문집 중의 말을 타파(打破)하여 말함이 없도록 하고자, 저희 선조(先祖)의 평생을 나무라 폄하(貶下)하였으며, 우롱(愚弄)하고 모멸(侮蔑)하여 여지(餘地)가 없었는데,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바야흐로 존사토죄(尊師討罪)의 도리였습니까? 못 둑 위 한 그루 땔나무라도 오히려 애호할 터인데, 하물며 선사(先師)의 사백년(四百年) 완서(完書)이겠습니까? 그리고 하물며 선사(先師)의 지친(至親)이며 어진 제자(弟子)를 끊음입니까? 저희들이 선조(先祖)를 깊이 생각하지 못함은 그 형세가 첨존(僉尊)께서 선조를 깊이 생각함이 과연 그 어디에 있는가 하는 바에 연유하지는 않습니다. 현성(賢聖)을 존숭(尊崇)함과 어버이에 유친(有親)함은 그 뜻이 같습니다. 또한 형벌은 자손에 미치지 아니하고, 자손의 죄가 선조께 미치지는 않는다 들었습니다. 그 후손들을 증오하는 까닭으로 선배를 능멸(凌蔑)하고 핍박(逼迫)하는 자는 성문(聖門)이 우리와 같은 무리가 아니라고 일컫는 것임을 어찌 알겠습니까?
■-先祖文純之 諡,在先祖何加榮,在先師有何抑損,以先師之弟子,當先師之美諡者如何,云則如何過重,云則過重其如何,其過重之閔于情而迫于心者,先師本孫爲甚乎,先祖本孫爲甚乎,杜撰疑眩若果有之,始發疏論者李氏也,胡不言之,儒疏疏頭者李氏也,胡不言之,儒所堂疏者亦李氏也,又何不言乎,未敢知 諡號之前則無杜撰,而其爲杜撰於 諡號之後者何也,成 命之後則爲欺罔之,不爲欺罔於 成命之前者何也,用心機變圖得同 諡之張本, 諡號成命之前,李氏見而不知也,知而不言邪,知而不言則與生等固均也,而見不知則,生等亦豈知必得文純乎,酷吏手段可見,其按法文沈而巨室情,用今知其不在尊衛也,生等値此罔極,生無以立於當世,死無以見我祖,豈欲費辭以卞,而但通草中誣及於先師與先祖者,非止一二,此則不得不卞正焉.
□-선조(先祖)의 문순(文純) 시호(諡號)가 선조(先祖)께 어떤 영예(榮譽)를 더하였으며, 또 선사(先師)께는 어떤 억손(抑損)이 있었습니까? 선사(先師)의 제자(弟子)에게 당연히 선사의 미시(美諡)를 내린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어떠냐고 일컬은즉 과중(過重)하다 하였는데, 과중하면 또 어떻습니까? 그 과중함에 대해 인정(人情)으로 민망(憫惘)하고 마음속으로 압박(壓迫)을 당하는 바가 선사(先師)의 본손(本孫)에게 심할까요? 아니면 우리 선조(先祖)의 본손에서 더 심할까요? 근거가 확연하지 못하고 틀린 데와[杜撰], 의혹(疑惑)이 과연 있었다면 당초 소론(疏論)을 시작하였던 분들이 이씨(李氏)인데, 어찌 그 말은 없으며, 유소(儒疏)의 소두(疏頭)가 또한 이씨인데, 어찌 그 말은 없으며, 선비로서 당소(堂疏)를 올린 분이 또 이씨인데 또 어찌 그 말은 없습니까? 감히 시호(諡號)를 알기 이전에는 두찬(杜撰)이 아니었는데, 시호가 내린 후에는 두찬(杜撰)이 된 것은 또 어찌 그러합니까? 시명(諡命)이 내린 후(後)인즉슨 기망(欺罔)이라 한 것들이 성명(成命) 이전에는 기망이 아닌 것은 또 어찌 그러합니까? 마음을 써서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도모하여 얻었던 것이 동시(同諡)의 장본(張本)이라면 시호(諡號)의 성명(成命) 이전에 이씨(李氏)들께서는 그 사실을 보고서도 몰랐던가요? 혹은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는지요. 알고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저희들과 서로 같을 터인데, 보고서도 몰랐다면 저희들 또한 꼭 문순(文純)으로 시명(諡命)이 내릴 지를 어찌 알았겠습니까? 저희들 역시 바로 이 점을 망극(罔極)히 여기어 살아서는 당세(當世)에 설 수가 없고, 죽어서도 우리 선조(先祖)를 뵈올 수가 없는지라, 어찌 여러 말로 변정(卞正)을 하겠습니까마는 다만 통초(通草) 가운데 선사(先師)와 선조(先祖)를 무함(誣陷)함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부득불(不得不) 변정(卞正)코자 합니다. 위
▣ 초역1(抄譯1)
■-一通文中以先祖山雲詩,無 先生和贈,而其詩與 先生所和勉進齋琴公詩,兩韻貫通一般命意,遂語之臆決移屬云云,謹按先祖詩則曰,爲向山雲寄一語,何心藏壑又升空,雲言舒卷維由我,亦在神龍變化中,先生和贈勉進齋琴公詩則,錯道山雲能成澤,山雲終不願升空,升空豈是能成澤,來往徒勞指笑中,先祖詩初不言澤物二字,則先生詩所云,錯道山雲能澤物者,一般意命乎,先祖詩只言卷舒之義,則先生詩所云升空,豈是能成澤者,一般命意乎,况徐栗亭贈 先祖詩註,擧先祖字而云,呈退溪詩以雲比出處云,則據此可知先祖之有雲詩矣,今若以無 先生和贈,而先祖遺稿中所載之詩,屬之勉進可乎,至於盖寓諷三字,諡狀初無見處,作家本意未知如何,而原詩中無諷意,則此何與於先祖,而侵辱若是乎,七進七退數行以下,徒見其僉尊之自作未安語於先生也,家狀所無之文字,勒歸之家狀者,抑未知有何機變之然耶.
□-한 통문(通文) 가운데에서 선조(先祖)의 산운시(山雲詩)에 대하여는 선생과 화증(和贈)한 바가 없었다 하고, 그 시(詩)는 선생과 면진재(勉進齋) 금공(琴公)과 더불어 화증하신 바 있었는데, 그 양운(兩韻)에 관통하는 명의(命意)가 서로 같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억결(臆決)로 이속(移屬)시켰다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조(先祖)께서 지으신 시(詩)는 『산에 있는 구름에게 한 마디 묻노라, 골짜기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감이 무슨 마음이런가? 구름이 답하기를 펴었다 말았다 함이 내 자유이지만, 신룡(神龍)이 부리는 변화 속의 일이라네.』라 하였습니다. 선생께서 면진재(勉進齋) 금공(琴公)과 화증하신 바 시에서 일컫기를 『산운(山雲)이 사물을 윤택(潤澤)하게 한다고 잘못 말하네. 그러나 산운은 종래 하늘로 오르기를 원하지 않았다네. 하늘로 오름으로써 어찌 능히 사물을 윤택케 하리요, 오며 가며 헛고생하면서 손가락질 비웃음 당하는구나.』라 하셨다. 선조(先祖)께서 지은 시는 처음부터 택물(澤物) 두 글자는 말씀하지 아니하신 터였다 해서 선생께서 지으신 시에서 『錯道山雲能澤物』이라 한 것이 일반적인 명의(命意-생각을 나타냄)라 할 것입니까? 하물며 서율정(徐栗亭-諱克一)이 선조(先祖)께 증시(贈詩)한 바 시주(詩註)에서 선조(先祖)의 자(字)를 일컬으면서 퇴계선생께 올린 시(詩)에서 구름(雲)을 출처(出處)에 비유(比喩)하였다 하였으므로 이에 근거하여 선조께 산운(山雲)의 시(詩)가 있었음을 가히 알도록 합니다. 지금에 이르러 만약 선생과 화증한 바 시(詩)가 없었다 한다면 선조 유고(遺稿) 가운데 실은바 시(詩)는 가히 면진재(勉進齋)의 시(詩)라 할 것입니까? 개우풍(盖寓諷) 세 글자가 처음에는 시장(諡狀)에 들어 있지 아니한 것이었는데, 지은이의 본의(本意)가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없지만 원시(原詩)에 본래 풍의(諷意)가 없었다 하면서 선조(先祖)에 대하여 침욕(侵辱)한 바가 어찌 그러할 수 있겠습니까? 칠진칠퇴(七進七退)라 한 몇 줄[數行] 아래로 뚜렷이 나타내 보인 첨존(僉尊) 자작(自作)의 선생께 미안(未安)이란 말은 가장(家狀)에 없는 문자(文字)인데, 억지로 가장가(家狀家)에게 돌리는 일은 대체 무슨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그리하였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 초역2(抄譯2)
■-一通文中以朋友之三字,雜引諸賢之事,愚弄侵辱無所不至,窃念古人朋友之道,不比今人之交際,則凡在相從講學之地,通語之朋友故,家狀中所云,實出於此之命意,歸軸重在,知聖人三字,則有何未安於 先師之有此云云乎,謹按洪恥齋日錄中,始稱官諱,再稱令某公,後稱某先生,而本院之開刊恥齋集時,吾鄕先輩未嘗言有歸師門, 僉尊亦無一言分流,而今於鄙家文字乃爾耶.
□-한 통문(通文) 가운데에서 『벗으로 삼았다(朋友之)』한 세 글자에 대하여 제현(諸賢)의 일을 잡다하게 인용하여 우롱(愚弄)하고 욕을 보이기(侵辱)를 무소부지(無所不至)로 하였는데,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사람이 벗을 사귀는 도리가 요새 사람들의 교제(交際)와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 곧 범상(凡常)히 상종(相從)하여 강학(講學)하는 처지를 통상 말하여 붕우(朋友)라 하였으므로 가장(家狀) 중에서 일컬은 바는 실로 그와 같은 명의(命意)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성인(知聖人-선생은 처음에는 퇴계선생(退溪先生)과 벗으로 지냈지만 이어 어른과 젊은이로 지내다가 마지막에는 제자(弟子)의 예(禮)를 갖추어 그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문(學問)을 닦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대개 노선생(老先生)의 도학(道學)이 더욱 높고 그 덕망(德望)도 더욱 온전함을 보고서 점차 그 도덕(道德)에 감복(感服)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식자(識者)들은 ‘성인(聖人)을 알아볼 만한 지혜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 했지만[非智足以知聖人不能也], 선생은 매양 늦게 깨닫게 된 것을 한스러워 했다.』라 한 가장의 글 부분 참조) 세 글자가 어찌해서 선사(先師)께 미안(未安)한 것으로 일컬었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홍치재(洪恥齋-洪仁祐) 일록(日錄) 가운데에서 처음에는 관직(官職)과 휘자(諱字)로 부르다가, 다음에는 영모공(令某公)으로 일컬었고, 다시 훗날에는 모선생(某先生)이라 하였는데, 본원(本院)에서 치재집(恥齋集)을 개간(開刊)할 때에 오향(吾鄕)의 선배 중에서 아무도 일찍이 사문(師門)에 대하여 말한 바가 없었고, 첨존들께서도 역시 한 마디도 흘린 바가 없었는데, 저희들 집안의 문자에 대해서먼 어찌 이와 같아야 합니까?
▣ 초역3(抄譯3)
■-一通文中,侃侃守己見, 先生舍己從之之語,謂之不有師訓膠守,己見又曰舍己從之,未之前見云云,謹按 先生與禹秋淵書曰,啓蒙原卦畫下爲說,大誤不自覺,烏川諸人看得,出修改幸甚,盖後彫公上先生書,論啓蒙而擧雪月公字曰,某之見同鄙見云云,所以有諸人字,據且則先師之舍從,先祖之守己可見,而又如先生答李艮齋書,及與先祖書類此者多,僉尊果未之前見邪,講論時侃侃爭辯,自是孔門以後由來,家法盖義理無窮,所見不同故也,若爲與僉尊所言,則誾誾之閔子,可謂不有師訓,而侃侃之子貢,亦爲膠守己見乎,近始齋所撰,遺事墓誌中,雖不言問學二字,而一言一行,皆是問學中由出,當時先輩,豈以學問二資,爲茶飯事裘褐故,狀碣中多有此類,李氏之爲此言者,不過侮弄轉拖以之侵及於近始公也,生等不欲多卞,而以當時先輩推重之語視之,則艮齋贈先祖詩曰,方直追羲易,明誠慕子思,松巖祭先祖文曰,功就直方,志篤沈潛,此則言學問之功也,鶴爺與月川書,後彫已作古人,吾道之不幸,何至此極,金勿庵悼先祖詩曰,天欲喪斯文,誰復救斯世,朴健齋輓先祖詩曰,先生門下有先生,吾道相傳可主盟,祭文曰,山崩一慟,擬望崇深,此則歸之以斯文之責也,今乃以遺事墓誌之不言之,必欲打破其學問也, ▶拖-끌어당길 타.
□-한 통문(通文) 가운데에서 ‘侃侃守己見-굳게 자신의 견해를 지킴’과 선생께서 ‘舍己從之-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남을 따름’하셨음 등 말이 사훈(師訓)을 철저히 지키지 아니함이라 하였고, ‘己見’ 및 ‘舍己從之’ 등을 전에 보지 못하던 말이라 하였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께서 우추연(禹秋淵-禹性傳)께 보낸 서찰에서 가로되, “계몽원괘획(啓蒙原卦畫) 아래의 말은 큰 오류(誤謬)가 있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천(烏川)의 제인(諸人)이 알아내었으니, 고쳐 주면 크게 다행하겠다.”라 하셨습니다. [대개 후조공께서 스승께 올린 편지에서 계몽원괘획(啓蒙原卦畫)을 논의(論議)하시되, 설월공(雪月公)의 자(字)를 거명(擧名)하시면서 모(某)의 견해(見解)가 저의 견해와 같다 운운하였는데, 거기에 제인(諸人)의 자(字)가 보인다.] 이를 근거로 삼아 선사(先師)의 사종(舍從)과 선조(先祖)의 수기(守己)를 가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이간재(李艮齋-李德弘)에게 보낸 답신 및 선조께 내린 서찰류 같은 것이 많은데, 첨존들께서 과연 전견(前見)을 하지 못한 것입니까? 강론(講論) 때 굳건히[侃侃] 쟁변(爭卞)을 하거니와 이는 공문(孔門) 이후로 유래하는 것이요, 가법(家法)은 대개 의리(義理)가 무궁(無窮)하고 소견(所見)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첨존들을 위하여 말하는 바인즉슨 ‘은은(誾誾-평온하게 토론하는 모양)’의 민자(閔子)는 사훈(師訓)을 따르지 않았다 하고, 자공(子貢)이 ‘간간(侃侃)히 아뢴 바를 또한 ‘己見’을 단단히 지킨[膠守] 것이라 하겠습니까? 근시재(近始齋)께서 지으신 유사(遺事)와 묘지(墓誌) 가운데에 비록 ‘學問’이란 두 글자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一言一行’ 모두가 다 학문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며, 당시의 선배 모두가 ‘학문’이란 두 글자를 다반사(茶飯事)요 의복(衣服-裘褐)처럼 삼았으므로 장갈(狀碣) 중에 그러한 부류(部類)가 많았으니, 이씨(李氏)들의 그와 같은 말씀은 모롱(侮弄)에 지나지 않으며, 굴리고 끌어당기어 근시공(近始公)을 침해(侵害)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다변(多卞)을 원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당시 선배들께서 추중(推重)하신 말씀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간재(艮齋)께서 선조께 드린 시(詩)에서 가로되, “방정하고 곧음은 복희씨(伏羲氏) 따라 쉬웠고, 밝고 성실하기는 자사(子思)를 사모(思慕)하였네.”라 하였고, 송암(松巖-權好文)께서는 제문(祭文)에서 가로되, “공력(功力)은 바른 도(道)에 나아갔고, 뜻을 세워 독실하게 침잠(沈潛)하니.”라 하셨으니, 이는 학문의 공력(功力)을 말씀하긴 것이었습니다. 학봉(鶴峯-金誠一) 선생은 월천(月川) 선생에게 드린 편지에서 가로되, “후조당이 이미 작고(作故)함에 이르니, 우리 유학(儒學)의 불행이로세, 어찌 이처럼 망극함일까?”라 하셨고, 김물암(金勿庵-金隆)은 선조(先祖)를 애도(哀悼)하신 시(詩)에서 가로되, “하늘에서 우리 유학(儒學) 망쳤도다, 누가 있어 이 세상 구제할까나.”라 하셨고, 박건재(朴健齋-朴遂一)께서는 만사(輓詞)에서 가로되, “선생의 문하에 또한 선생이 계시어, 우리 도(道)를 전해 주어 맹주(盟主)라 할 만하네.”라 하셨고, 제문(祭文)에서 가로되, “스승께서 돌아가신 뒤에, 의망(擬望)됨이 높고 깊었네,”라 하셨다. 이는 곧 사문(斯文)에서의 책무(責務)로 귀속될 것인바, 유사(遺事), 묘지(墓誌)에서 불언(不言)한 바를 가지고서 그 학문까지를 타파(打破)코자 합니까?
▣ 초역4(抄譯4)
■-一通文中以 先生贈先祖詩所云,義同自直蓬麻植,樂似相宣金石聲,愧我久昏神鑑炯,憑君新澡玉淵淸,語之贈參講十一員諸賢云云,設如其言先祖旣參於十一員之座,則引用狀中固無不可况乎,先生詩集中,旣有通十一員所贈詩,其下又有此詩之以追次前韻,寄金某上舍爲題,則此詩之爲贈先祖詩,僉尊旣不知之,而乃急於攻斥先輩,至於改換先師詩集題,何其無難也,久昏神鑑炯,乃 先生自謙之辭,而僉尊所語當此何如,看五字豈非僉尊之自作未安語乎.
□-한 통문(通文) 가운데에서 선생께서 우리 선조께 증시하셨다는 시(詩)에서 일컫기를 『삼밭에 서 있는 쑥대 저절로 곧아지고, 쇠와 돌이 어울린 풍악마냥 즐거웠네. 내 밝던 정신이 오래 혼미해져 부끄럽더니, 그대가 새로이 옥연처럼 씻어준 데 힘입었네.』라 하셨는데, 이는 참강(參講)한 십일원(十一員) 제현(諸賢) 전원에게 증시(贈詩)한 바라고 운운(云云)하였습니다. 가령 그 말은 선조(先祖)께서 이미 십일 원의 자리에 참여하셨다면 가장(家狀) 중에 인용이 불가(不可)한 정황(情況)이 진실로 없었다는 말입니까? 선생의 시집(詩集) 가운데에서 이미 십일 원(十一員)에 통(通)하여 증시(贈詩)를 하셨고, 그 아래에 또한 이 시(詩)의 전운(前韻)을 차례로 좇아 『기김모상사(寄金某上舍)』라고 제목을 붙인 시(詩)가 있었으니, 이 시(詩)가 선조(先祖)께 증시(贈詩)하신 것임을 첨존들께서는 아주 모르시고 선배를 공격하고 배척하기 급급하였으며, 심지어 선사(先師)의 시집(詩集) 가운데의 시제(詩題)를 고치려 하였는데, 그 일이 어찌 무난(無難)하겠습니까? 『내 밝던 정신이 오래 혼미해져서(久昏神鑑炯)』는 곧 선생(先生)의 자겸지사(自謙之辭)인데, 첨존들께서는 말하시는 바가 이와 같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다섯 글자를 보면서 ‘미안(未安)’이라는 말이 어찌 첨존들께서 자작(自作)한 말이 아니라 할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