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과 평화로 가는 가운데 큰 길』 나눔사 2024. 4. 박재순
목차
머리말
1장 성경의 말씀(‘나’의 진리)과 그리스철학의 로고스(이성의 진리)와 동아시아의 도(생명 관계의 진리)가 하나로 되는 길
2장 예수의 가운데 큰 길
3장 분노와 다툼 속에서 생명과 평화에 이르는 예수의 길
4장 용서와 화해의 길
5장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예수와 교회가 걸어간 길
6장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예수와 가난한 자들이 걸어간 길
7장. 오늘의 길을 묻다(창작과 비평 특별 좌담: 백낙청, 김용옥, 박맹수) 논평
8장 동북아평화와 한국의 갈 길
머리말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가운데(중심)가 없는 사회다. 우리 사회에는 갈등과 다툼을 넘어서 서로 공감하고 합의하여 협력할 수 있는 가운데가 없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길을 잃은 시대다.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큰 길을 잃어버렸다. 자연생태계의 파괴와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로 문명의 큰 전환과 사회의 근본적인 혁신을 요구하는데 문명의 전환과 사회의 혁신을 이루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할 때면 곧 세상이 바뀔 것처럼 보이지만, 선가가 끝나면 변화의 실마리도 잡지 못한다. 여당과 야당 모두 헌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헌법개정을 위해서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교사를 모욕하고 때리며 학부모가 교실에서 교사에게 폭행을 저지르고 교사들은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병들어간다. 무한경쟁의 입시교육과 학원 교육의 굴레에 묶여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새롭게 하는 인간교육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학교 교육을 혁신하는 방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새로운 교육에 대한 전망과 철학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모두 저마다 바쁘게 달려가는데 실제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 우리는 지금 꿈속에서 사는 것인가?
가정과 지역사회의 공동체도 가운데가 없고 길을 잃었다. 가운데와 길을 잃은 가정과 마을공동체도 속에서부터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세계의 정치경제도 가운데 구심점을 잃고 갈 길을 모르는 듯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도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잃고 인종차별과 극우 이념이 활개를 치고 있다. 패권 국가인 미국과 새로운 경제 대국인 중국이 충돌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란)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는 식민지 쟁탈 전쟁과 제국주의 패권전쟁을 벌이던 19세기와 20세기로 돌아가려는가?
오늘 인류사회는 인간이 함께 가야 할 가운데 큰 길을 잃었다. ‘살림과 평화로 가는 가운데 큰 길’을 찾기 위하여 나는 서양문명의 정신적 핵심인 히브리 기독교 전통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탐구했고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족의 주체적 자각으로 전개된 한국근현대의 시대정신에 주목했다. 히브리 기독교의 초월적 하나님 신앙과 하늘을 우러르며 강인한 생명력을 길러온 한민족의 ‘한’사상이 결합됨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이 확립되고 한민족의 생명력과 정신력이 크게 분출되었다. 나는 동서문명이 만나고 한민족의 생명력과 정신력이 분출한 한국 근현대의 시대정신 속에 인류가 나아갈 가운데 큰 길이 숨겨져 있고 가운데 큰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다고 믿는다.
이 책에는 최근에 쓴 글들과 여러 해 전에 쓴 글들이 함께 묶여 있다. 8개의 글 묶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머리말을 대신하려고 한다. 1장에서는 성경의 말씀(주체인 ‘나’의 진리)과 그리스의 로고스(과학적 이성의 진리)와 동아시아의 도(생명 관계의 진리)를 한민족의 ‘한’사상으로 융섭하여 통합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2천 년 전에 지중해 서쪽의 정복자 그리스·로마제국은 헬레니즘을 바탕으로 위로부터의 세계화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때 지중해 동쪽의 작은 식민지 국가 유대 나라의 예수와 초대교회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추진함으로써 기독교와 그리스철학이 만나서 유럽 문명을 형성하는 두 기둥이 되었다. 오늘의 세계화는 세계의 정복자 유럽 문명이 주도한 것이며 태평양 동쪽의 작은 식민지국가였던 한국이 동서문명을 통합하는 정신과 철학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2장에서는 선과 악, 앎과 모름, 죄인과 의인을 구별하는 바리새파의 율법 지식이 차별과 분열을 낳는 폭력적인 흑백논리이고 당파논리라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한 예수의 복음은 차별을 넘어서 살림과 평화의 진리임을 밝혔다.
3장에서는 예수의 분노 감정을 생명 철학적으로 논구함으로써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생명의 진리에 충실하여 역동적이면서 통합적인 진리임을 드러냈다. 예수는 분노의 감정을 서슴지 않고 드러냈으며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 ‘위선자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성전의 장사치들을 위력으로 쫓아냈다. 그런가 하면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박해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였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을 주라고 하였다. 또 맘속으로 미워하면 이미 살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서로 다른 예수의 이러한 야누스적인 모습은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생명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통해서만 제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 분노 감정과 복음을 생명 철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생명이 가르치는 가운데 큰 길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3장은 계간 「불교평론」 67호 2016년 가을호 특집에 실린 “예수의 분노에 대한 생명철학적 이해”를 개정한 글이다.)
4장에서는 갈등과 다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길을 생명과 인간의 자리에서 국가 문명을 넘어서 ‘서로 주체의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길을 모색하였다. 정복자, 승리자의 관점이 아니라 패배자, 희생자의 관점에서 용서와 화해를 모색하면서도 희생자의 관점에 매몰되지 않고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생명의 자리, 서로 주체로서의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가운데 큰 길을 탐구하였다.
5장에서는 가난한 병자들을 고치는 행위와 밥상공동체 운동으로 다시 말해 생명 회복 운동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해하였다. 여기에 실린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과 교회’는 1985년에 한국신학연구소의 평신도 신학 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예수운동을 치병행위와 밥상공동체 운동으로 파악한 이 글은 1987년에 『예수 운동과 밥상공동체』로 간행된 후 곧 재판을 찍을 만큼 뜨겁게 받아들여졌고 신학도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그러나 이 논문은 표절의 대상이 되었을 뿐 학문적으로 평가되거나 존중되지 못했다.
미국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주도한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1991년에 발표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 San Francisco: Harper & Row, 1991)에서도 예수가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역사적 핵심을 ‘치병행위와 밥상공동체 운동’으로 보았다. 내가 1990년 9월에서 1991년 5월까지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지냈을 때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소개했는데 이 논문을 가지고 학생들이 세 차례나 세미나를 할 만큼 영향을 주었다. 또 내가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의 관점에서 ‘성만찬’에 관한 짧은 설교를 했는데 유니온 신학교의 폴 틸리히 석좌교수였던 톰 드라이버(Tom Driver)가 높이 평가하여 이 설교문을 그의 책 『제의(祭儀)의 해방하는 힘』(Magic of Rituals)에 수록하였다.
6장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가난한 자들의 신학’은 예수 운동에서 가난한 자들이 중심에 있음을 논증하고 설명하였다. 가난한 자들과 예수가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이 부자들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예수 운동을 거부하고 박해했다. 예수와 초대 교회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중심에 있었음을 이 글에서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가난한 자들을 기독교 신앙과 정신의 중심에 놓는 것은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와 성경과 기독교의 진실임을 받아들여야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과 힘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7장에서는 동학과 원불교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에 관한 백낙청, 김용옥, 박맹수의 특별좌담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면서 이에 대한 나의 논평을 실었다. 한국 근현대의 시대정신과 기독교에 대해서 이들과 다른 생각을 나는 솔직하고 분명하게 밝혔다. 한국 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발전되기를 바란다.
어쩌면 한국 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에 대한 바른 논의와 성찰이 없었으므로 오늘 한국의 정치권과 사회가 시끄럽기만 하고 힘이 없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역사와 사회에 대한 바른 철학과 정신이 확립되어 있다면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가운데 큰 길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와 80년대 지식인들과 청년 학생들을 이끌었던 사상들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이 없었던 것 같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모택동주의, 북한 주체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논쟁 같은 담론에 대한 분명한 평가나 비판도 없었다. 또한 그 시대를 이끌었던 사상가들 리영희, 박현채, 김지하, 장일순에 대해서도 존경과 감사를 표할 뿐 비판과 논쟁은 없었던 것 같다. 중국의 사회주의와 문화혁명을 미화했던 리영희는 1990년경 사회주의 사회들이 붕괴할 때 자신의 사상적 과오를 인정하면서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젊은 철학자들이 80년대 철학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리영희는 직접 참여하여 자신의 사상적 과오를 분명히 밝혔다. “만일 내가 인간의 이성을 완전히 부정하면 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사상적으로 과오를 범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리영희의 말을 듣고 그의 진솔한 인격과 지성에 감탄했고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 학자와 사상가로서 리영희 자신이 그의 과오에 대하여 깊은 성찰을 담은 글을 쓰고 그 대안을 제시하기를 나는 기대하였다. 아쉽게도 리영희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다. 제자들과 후학들도 그런 성찰과 논의를 하지 않았다.
과거의 사상과 철학을 반성하고 비판하지 못하면 오늘의 정신과 사상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70~80년대의 사상과 정신을 비판하지 못하는 이들은 2~3천 년 전의 주역 팔괘, 음양오행, 풍수지리, 사주명리, 유교, 불교, 도교도 비판하지 못하고 서양의 기독교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니체, 포스트모더니즘도 비판하지 못한다. 그러면 한국 근현대의 새로운 정신과 철학을 말할 수 없고 우리 시대의 정신과 철학을 가질 수 없다. 민주화, 과학기술화,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우리 시대의 정신과 철학을 갖지 못한 인간들이 우리 시대와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8장에서는 정치·경제·군사적 긴장과 대립 속에 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한국의 갈길을 다루었다. 정치·경제·군사적 긴장과 대립 속에 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평화를 이루려면 평화를 위한 생명철학을 확립해야 한다. 이 글에서 나는 평화에 대한 씨ᄋᆞᆯ생명철학을 논하였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과 ‘이치로써 교화하는’ 재세이화(在世理化)의 건국이념과 삼일독립선언의 평화 이념을 바탕으로 한국의 갈 길을 제시하였다. 2024년 박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