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과 절의의 큰스승 하서 김인후 선생의 고향 필암서원·붓바위·통곡단·御賜梨 등 체취 서려
2017. 12.20(수) 13:49
필암서원
11월의 끝이다. 추수를 끝낸 가을들판은 황량하다. 옛날 같으면 허수아비라도 남아 벌판에서 졸고 있을 터인데 그 마저 사라진 농촌의 가을은 그래서 더욱 쓸쓸함이 더하다.
필암서원이 있는 장성군 황룡면 필암마을로 향하면서 절의(節義)를 생각해본다. 필암서원의 주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는 옥과 현감으로 있다가 인종이 서거하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며 올곧은 선비로 살았다. 그리하여 ‘공자의 노벨상 수상자’로 일컬어지는 문묘의 18현 가운데 한분으로 배향되었다.
특히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마을 앞 난산(卵山)에 통곡단(痛哭壇)을 만들고 인종의 제삿날인 음력 7월 1일이면 이곳에 올라 북향하여 하루 종일 통곡했다고 한다. 난산이란 산의 모양이 마치 달걀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난산의 통곡단은 맥동마을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생가터에서 바라보면 바로 앞쪽에 있다. 입구에 난산비각과 ‘난산지비’라고 적힌 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20여개 돌계단을 오르면 가로 세로가 1.5m 크기의 돌단이 있는데 바로 통곡단이다. 매년 이곳에 막걸리를 들고 올라가 ‘그리운 임’을 향해 한잔을 따르고 또 한잔은 하서가 마시며 슬픔을 감내했을 것이다. 이곳의 난산지비의 비문은 “1793년 무렵에 윤행임이 지었으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1843년 아들 교리 윤정현이 추기(追記)를 쓰고 광주목사 김철영이 비를 세웠다.”라고 적혀 있다.
난산의 통곡단
하서 김인후와 인종이 어떤 인연이 있기에 그토록 못 잊어 했으며 젊은 나이에 벼슬을 버렸을까? 하서와 인종(1515~1545)이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543년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 정7품)에 임명되면서다. 세자시강원은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관청이다. 김인후의 나이는 33세, 인종은 28세였다. 그리고 나이 30세 때 세상을 떠났으니 오랜 인연도 아니다.
인종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인종은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 윤씨의 소생이다. 이름은 호(), 자는 천윤(天胤)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나 문정왕후 밑에서 자랐다. 문정왕후는 처음에는 인종에게 극진했으나 경원대군을 낳은 뒤로 인종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종은 더욱 부왕인 중종에게 의지했다. 중종 역시 어미도 없이 자라는 세자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실록에는 인종이 “성품이 매우 고요하고 욕심이 적으며, 인자하고 공손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실천이 독실했으므로 동궁(東宮)에 있은 지 25년 동안에 어진 덕이 널리 알려졌다.”라고 씌어 있다. 특히 인종은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직접 중종의 병수발을 하는 바람에 도리어 본인의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인종의 효성에 대해서는 인종의 묘지(墓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병환이 위독해지니, 조신(朝臣)을 나누어 보내어 종사, 산천에 두루 빌고, 바야흐로 겨울철인데도 목욕하고 분향하며 한데 서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늘에 비셨다. 훙서(薨逝)하시게 되어서는 미음까지 전연 드시지 않은 것이 엿새이고,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으신 것이 다섯 달이었으며, 죽만을 마시고 염장(鹽醬)을 드시지 않았다. - 《인종실록》 부록, 묘지문 중종이 죽고 왕위에 올랐으나 자신도 병이 깊어 8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인종이 사망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즉위했는데 야사에는 계비인 문정왕후의 독살설이 있다. 인종의 능은 고양에 위치하며 생전 그의 지극했던 효심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를 효릉(孝陵)이라고 부른다.
인종이 내려준 묵죽도에 칠언절구 시를 쓰다.
인종은 3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고 5세인 1520년(중종 15)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522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는데 매우 검약한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인종은 김인후를 극진히 사랑하여 묵죽도를 그려주었다. 이 묵죽도는 바위가 하나 있고 주변에 대나무 네그루가 있는데 한 그루는 너무 휘어져 넘어지려 하는 모습이다. 이 묵죽도는 판각되어 원본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다음은 김인후가 묵죽도 아래에 쓴 칠언절구의 시다.
뿌리와 가지마디와 잎새가 모두 정미하니 바위를 친구삼은 정갈한 뜻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임금님의 조화를 바라는 마음 비로소 보았나이다. 온 천지가 어찌 어김이 있겠습니까. -신(臣) 김인후
인종은 하서에게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 한 질을 주었으며 술도 같이 마셨다고 전하고 있다 인종이 하서에게 주자대전을 하사한 것은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하서 김인후가 인종을 다시 가까이에서 본 것은 국상(國喪)의 자리에서다. 명나라 사신이 국상의 조사(弔使)로 서울에 오자 조정이 김인후를 제술관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맥동마을 입구에 있는 필암
사실 하서는 인종 생전에 곁에서 모시고자 하였다. 문정왕후가 한 궁궐에 있으면서 임금의 약 처방까지 한다는 것도 불안했다. 그래서 자신이 인종의 약 처방에 동참하겠다고 약원(藥院)에 청하였으나 소임이 다르다고 거절당했다. 임금의 거처를 옮길 것을 건의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그리하여 옥과현감으로 내려가 있을 때 변을 당한 것이다. 하서 김인후에게 인종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김인후는 이후 옥과 현감에서 물러나와 장성의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명종이 벼슬을 여러 번 하사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고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에 “내가 죽으면 옥과현감 이후의 관작은 기재하지 말라”란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인종이 떠났던 그해 하서는 ‘그리운 사람(有所思)’이란 시를 썼다.
임의 나이는 서른이 되어 가고 / 내 나이는 서른여섯이 되는데 /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 / 한 번의 이별은 활줄 떠난 활 같네. / 내 마음 돌이라서 굴러갈 수도 없는데 / 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 같아 / 한창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마저 희었네 / 묻혀 살면서 봄가을이 몇 번이던가. / 오늘까지 아직도 죽지 못했소 / 잣나무 배는 황하 중류에 있고 / 남산엔 고사리가 돋아나는 데 / 도리어 부러워라 / 주나라 왕비가 / 생이별 하며 도꼬마리를 노래하다니
하서 김인후는 인종의 1주기인 1546년 7월 1일에 난산(卵山)에서 그를 그리며 종일토록 통곡하였다. 제자인 송강 정철(1536~1593)이 그 모습을 시로 남겼는데 그 편액이 필암서원 청절당에 있다.
東方無出處 동방무출처 獨有湛齋翁 독유담재옹 年年七月日 년년칠월일 痛哭萬山中 통곡만산중
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 (하서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송시열이 지은 김인후의 신도비에도 “7월 인종이 승하하자 김인후는 부음을 받고 놀라 통곡을 하여 거의 기절하였다가 깨어났으며, 이로 인해 병을 얻어 감의 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한 매년 7월1일에 집 남쪽 산골짜기에 들어가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다.
정조의 어필로 새긴 경장각 현판
한편, 인종은 14살 때 박용(朴墉)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인종과 인성왕후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며 세 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이들에게서도 소생을 보지 못했다. 인종은 30세에 즉위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부활하고 기묘사화 때의 화를 입은 사림의 거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하였고 개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계모인 문정왕후의 권력욕에 시달렸다. 조정은 권신정치가 한창이었다. 특히 세자(인종)의 외척(장경왕후 윤씨의 친정)과 문정왕후 윤씨의 친정 집안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전자를 대윤이라고 하고 후자를 소윤이라 부르는 권력다툼이 벌어지면서 나라는 대혼란에 빠진다. 인종의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다시 필암서원의 주인 하서 김인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서는 1510년 장성군 황룡면 맥동에서 부친 김령과 모친은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맥동마을 입구에는 ‘필암(筆岩)’이라 새겨진 붓 모양의 바위가 서있다. 붓모양의 산이나 바위가 있으면 큰 선비가 태어난다고 하는데 하서 선생을 두고 이르는 말 같다.
하서의 생가는 터만 남아 있고 바로 곁에는 백화정이 있다. 백화정은 하서 선생이 1552년 지은 외헌(外軒)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생가 입구에는 어사리(御賜梨)로 불리는 배나무 한그루가 남아 있다. 연대를 따지면 400년이 넘는 나무다. 취재에 동행한 울산김씨 문정공대종중 김인수 도유사는 “임금께서 보내주신 배를 먹고 그 씨앗을 심었는데 배나무가 자라 어사리라고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서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 5살이 되던 해 정월 보름날에 지었다는 한시를 보면 그 총명함이 느껴진다.
필암서원 청절당
高低隨地勢(고저수지세) / 早晩自天時(조만자천시) 人言何足恤(인언하족홀) /明月本無私(명월본무사)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요 /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라 사람들 말이야 무슨 험 되랴. / 밝은 달은 본래 사심이 없도다.
8세 전라도 관찰사로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삼촌인 조원기(1457~1533)로부터 ‘장성신동 천하문장’이라는 칭찬을 받고 9세 때는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기준(1492~1521)으로부터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될 만하다’는 칭찬을 들으면서 붓을 선물받기도 하였다. 10세 때는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우고 18세에는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에서 유배중인 최산두를 찾아가 공부했다. 그리고 19세 때 성균관 백일장에서 칠석부로 장원을 했는데 당시 시관이었던 대제학 이행(李荇)은 글이 너무 좋아 남이 써 준 글이라고 의심해 다시 7가지 제목을 주어 테스트했다고 한다. 김인후는 22살 때(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3년에 성균관에 입학해 퇴계 이황과 만나 함께 공부하게 된다. 31살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현재의 외무부 외교문서 작성관격인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고, 홍문관 저작(弘文館 著作)이 되었다. 독서당 시절 퇴계 이황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독서당 동문은 나세찬(1498~1551)·임형수(1514~1547)·정유길·송기수 등 13명이었다.
세종의 이모 민씨부인이 세 아들 데리고 맥동으로
여기서 잠시 울산김씨가 장성에 터를 잡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 김인후의 5대조인 양주목사 김온(金穩 1348~1413)이 태종 때 세자 책봉 문제에 연루되어 1413년에 사사(賜死. 행불이라는 설도 있음)되자, 부인 여흥 민씨(1351~1421)가 3형제 (달근·달원·달지)를 데리고 장성 맥동으로 내려와 정착한 것. 바로 하서의 생가는 민씨 부인이 잡은 터이다. 민씨부인은 태종의 왕후인 원경황후 민비의 친척으로 세종의 이모이다. 김인후는 민씨 부인의 둘째아들인 김달원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김의강, 조부는 금구 훈도 김환이다. 울산 김씨들은 이들 3형제를 파조로 하여 큰아들 달근의 후손을 장파(長派), 둘째 아들 달원의 후손을 중파(中派), 막내 달지의 후손을 계파(季派)라고 부르고 3파를 아우르는 대종회(회장 김달수) 아래 장파, 중파, 계파종회가 따로 있다. 장파는 주로 경상도 울산, 진주 쪽에 많이 분포해 있으며 종가는 장성군 북이면 신평리에 있다. 김온의 부조묘(不祖廟)가 북이면 신평부락에 있다. 부조묘란 4대가 넘은 뒤에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서 기제사를 지내는 불천지묘(不遷之廟)를 일컫는다. 본래는 국가에 큰 공을 세웠을 때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사부조라 하여 문중에서도 부조묘를 두기도 한다. 김온의 아내 여흥 민씨 부인의 묘는 장성군 북이면 밀등부락 (돗재로 207-19)에 있는데 천하명당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 유명한 풍수학자 가운데 이곳을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풍수에 밝지 않는 사람도 묘를 쓰기 위해 만들어진 산 같다. 큰 산맥이 흘러내려오다 걸음을 멈추고 기를 모아 세운 땅 같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 모두 ‘일자(一字)형태’로 평온감이 든다. 이 자리는 민씨 부인이 직접 잡았고 타계하기 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말을 탄 후손들이 이 평야에 가득하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지금은 멀리 고속철도가 놓여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명당의 위풍은 여전하다. 김온의 시신은 찾지 못해 제단(祭壇)만 만들어 놓았다. 묘소 아래에는 여흥 민씨를 제사하는 명정재(鳴鼎齋)가 있는데 1930년께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필암서원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김진산(67)씨는 “명정(鳴鼎)이란 솥뚜껑이 울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실제로 산소가 가마솥 형국을 하고 있다.”면서 “말을 탄 후손들이 벌판에 가득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하서는 중파의 후손으로 많은 인물 배출
하서 김인후 신도비
울산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인 덕지 왕자이다. 학성(울산)을 식읍으로 하는 학성군으로 봉해져 울산김씨의 시조가 되었으나 아버지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에 양국하자 처자를 버리고 개골산에 입산, 해인사에서 범승이라는 승명으로 일생을 마쳤다. 입산하기 전 김운발(金雲發)이라는 아들이 있어 그 후손이 울산김씨와 나주김씨로 큰 문중을 이뤄 살아가고 있다. 김온은 시조로부터 17세에 해당되나 이전의 종보(宗譜)를 찾지 못했다. 김온을 중시조로 하여 1세가 달원, 달근, 달지 등 3형제이고 2세(의강)- 3세(환)- 4세(령)- 5세(인후) 등으로 항렬이 내려가기도 하고 김온을 시조로부터 17세로 보고 세 아들이 18세-손자 의강 (19세)-증손 환(20세)-고손 령(21세)- 인후(22세)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파에서는 하서를 중시조로 하여 다시 세계(世系)를 잇고 있으며 9개의 소문중으로(小門中)으로 나눈다. 종파, 중평파, 신평파, 회암공파, 화산공파, 맥동파, 각재공파, 자연단파, 월평파 등인데 주로 서울과 전라도에 거주하며 그 수는 2만여명에 이른다. 근현대 인물로 2대 부통령을 지내고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를 창설한 인촌 김성수(하서의 12세), 산업입국의 선구자 삼양사 김연수(12세) 고려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13세), 동아일보사장 김상만(13세), 대한민국 초대대법원장 김병로(14세)등이 중파의 후손들이다. 예술인으로 조각가 김영중, 한국화가 석성 김형수 등이 하서의 후손이다.
계파는 유명한 의병장 김경수,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녹영 등이 있는데 김경수(金景壽)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년) 기효간(奇孝諫)·윤진(尹軫) 김홍우(金弘宇) 이수일(李守一) 등과 함께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11월 초단(草壇)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았는데 1902년 호남의 유림들이 건립한 남문창의(현 북일면 오산리) 에 77선열(승려 9명, 노복 1명) 이 기록돼 있다.
도학과 절의와 문장의 선비, 하서 김인후
고봉과 송강의 시판
인종이 승하한 뒤 옥과현감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하서는 이후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명종이 벼슬을 여러 번 하사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그때의 나이가 36세이고 50세에 세상을 떴으니 그 이후의 행적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벼슬을 떠나 낙향한 선비에게 제자 또한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향에서 지내면서 퇴계와 학문적으로 논쟁하고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 도의 지교를 맺었다. 면앙정의 누정을 중심으로 당대의 유명한 송순을 비롯한 호남의 많은 사림계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호남 시단 형성 및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선비였던 우산 안방준(1573~1654)은 죽천 박광전(1526~1597)의 행장을 쓰면서 하서 선생은 비교할 수 없는 분으로 올려놓은 바 있다. 호남성리학의 큰 스승임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기대승 백광홍 김천일 고경명 등과 시를 나누고 교유했지만 학문적 깊이는 훨씬 더했다. 큰사위 조희문과 둘째사위 양자징, 송강 정철(鄭澈), 고창의 변성온(卞成溫)·변성진 형제, 기효간(奇孝諫) 오건(吳健) 등을 제자로 두었다. 둘째 사위 양자징은 양산보의 아들로 현재 필암서원에 배향돼 있다. 하서는 1558년 퇴계 이항(李恒)과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태극음양설에 대해 논쟁을 벌이자,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여 기대승의 주정론(主情論)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또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이기호발(理氣互發)’설에 대해서도 명쾌한 논변으로 해석함으로써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하서 김인후는 도학(道學)·절의(節義)·문장(文章)을 겸비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며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도학에 관한 저술은 사라져 많지 않으나 10여권의 시문집과 『하서집』·『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백련초해』등의 저서가 있다. 하서는 사후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정조 20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명부조묘(장성군 북이면 중평리 582) 백양사 입구마을에 있으며 씨족 제향은 음력 정월 16일, 춘향은 2월 중정(中丁), 추향은 8월 중정에 드려진다.
묘소 입구에 우암 송시열의 쓴 신도비
문정공 김인후 부조묘
난산에서 맥동마을을 지나 좌회전하면 원당산 자락에 하서 김인후 묘소가 있다. 묘소 입구에는 2개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742년에 세운 원래의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82년에 지은 것으로 명문장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비의 안내문에는 “ 본문은 중추부사 이재가 쓰고, 전서는 대사헌 김진상이 써서 원당산 묘소 아래에 세웠다.”고 써 있다. 신도비문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선생을 태어나게 했고,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쓰여 있다. 2003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신도비에서 5분거리 원당산 등성에 김인후의 묘소가 있고 바로 뒤에 부모 묘가 있다. 묘비에는 “문정공 하서 김선생지묘, 증 정경부인 여흥윤씨부좌”라고 적혀 있다. 묘비명은 숙종시절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영수였던 김수항(1629 1689)이 지었다. 김수항은 숙종시절 영의정에 올랐으나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나중에 경종)로 책봉하려는 것에 반대하다가 진도에서 사사(死賜)되었다. 제주도에서 유배중인 송시열도 서울로 올라오다가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과 김수항이 김인후의 신도비문과 묘비명을 지은 것이다. 한편 하서 김인후는 말년에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노래한 ‘화표학(華表鶴)’ 이란 칠언고시와 ‘병든 학’이란 시를 남긴 바 있다. 자신을 학에 비유한 것이리라. 끝없는 벌판 갈 길 멀다 / 천길 화표주(華表柱), 하늘로 솟았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어디로 가는 길손일까. / 표연히 날아든 하늘 신선
원래 화표학(華表鶴)은 중국 한나라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라는 선비가 신선이 되었다가 천년 만에 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았다가 시를 읊고 다시 하늘로 날라 갔다는 고사가 있는 학이다.
병든 학(病鶴) 산언덕에서 슬피 울어도 알아줄 사람 그 누구랴 / 날개를 드리운 채 마른 가지에 기대었네. / 하늘가를 돌아다보니 구름은 아득한데 / 만리를 돌아갈 생각 부질없이 지녔구려. 山畔哀鳴知者誰 산반애명지자수 還堪垂翅倚枯枝 환감수시의고지 回看天際雲猶逈 회간천제운유형 萬里歸心空自持 만리귀심공자지
필암서원 세계문화유산 등재 준비 한창
사액 필암서원 현판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 23년) 호남의 유림들이 하서 김인후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처음에는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로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지방의 유림들의 청원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황룡면 필암서원로 18번지)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양자징(梁子渟)을 추가 배향(配享)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재 필암서원은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서원의 유네스코 등재 서원의 하나로 지정돼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서원의 입구의 확연루(廓然樓)에서 사우-청절당-확연루-삼봉산이 확 트였으나 나무가 시야를 가려 이를 옮기고 잔디를 심는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경내의 시설로는 확연루(廓然樓) 청절당(淸節堂) 진덕재(進德齋) 숭의재(崇義齋) 경장각(經藏閣) 우동사(祐東祠) 장판각(藏板閣) 한 장사(汗掌舍) 계생비(繫牲碑) 전사청(典祀廳) 고직사(雇直舍) 홍살문 하마석(下馬石) 등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필암서원은 다른 서원들과는 달리 제실이 앞쪽이 있지 않고 학문을 논하는 청절당이 앞에 배치돼 있다.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수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학문을 중시했던 하서의 뜻을 기리기 위함으로 알려진다. 맨 앞쪽에 있는 확연루는 서원의 출입문과 유생들의 휴식 공간 역할을 하는 문루(門樓)이다. 현판은 “김인후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확 트여있고 크게 공정하다는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따왔으며 글씨는 송시열이 썼다”고 적혀 있다. 그 안쪽에 위치한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선비학당이 개설돼 ‘중용’ ‘논어’ 강좌가 계속되고 있다. 청절당은 옛 진원현의 객사 건물을 옮겨지었다고 한다.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김인후 선생의 신도비문중 ‘청풍대절(淸風大節)’에서 인용했으며, 글씨는 송준길(1606~1672)이 썼다. 기둥과 벽에는 송강 정철(1536~1593)과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시판(詩板)을 비롯해 왼편에는 제봉 고경명(1533~ 1592), 석주 권필(1569~1612), 김진옥(1659~1736), 유근 (1549~1627), 추담 김우급(1574~1643), 김창흡(1653~1722), 윤봉구 등의 시판이 걸려 있다. 장판각에는 『하서집(河西集)』 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보물 제587호인 노비보(奴婢譜) 외 문서 69점이 소장되어 있다. 경장각은 인종 임금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를 보관한 곳이다. 원본은 판각하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이곳에는 사본이 있다. 경장각 편액은 정조의 어필이다. 임금이 쓴 글씨는 직접 볼 수가 없어서 망사로 씌워져 있다. 정조는 1796년(정조 20년)에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한 임금으로 하서를 동방의 주렴계(주돈이, 1017~1073)와 같은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우동사는 김인후를 모신 사당이다 ,명칭은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에 ‘하늘이 동방을 도와 하서 선생을 낳게 했다.’고 극찬한 데서 비롯됐다 한다. 사우의 중앙에는 김인후의 위패가, 왼쪽에는 고암 양자징(1523~1594)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양자징은 하서의 둘째 사위이자 제자로 하서의 행장을 지었다. 양자징의 위패는 1786년 2월 26일에 정조의 허락을 받아 김인후 신위 왼편에 추배되었다.
유물전시관·평생교육센터 갖춰
필암서원 앞쪽 정원에는 원진관(元眞館)이라 이름 붙여진 유물전시관과 장성평생교육센터가 있다. 유물전시관은 2008년 개관했는데 하서의 유물 29종, 3,794점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로는 벼루와 기준(奇遵)이 방문 기념으로 기증한 붓 등이 있다. 원진(元眞)은 공자와 주자를 잇는 하서의 위업을 기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외에도 하서의 흔적은 옥과현감을 그만두고 은거한 전북 순창군 점암촌(쌍치면 둔전리)에는 훈몽재와 대학암이 있고, 담양 소쇄원에는 소쇄원 48영 시 편액이 걸려 있다. 또한 광주광역시 중외공원에는 하서 김인후 동상이 세워져있다. 원진관 바로 뒤편에는 장성평생교육센터가 있다. 2013년 10월 문을 연 이곳 평생학습센터는 장성군이 대한민국 청렴교육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지은 것이다. 이곳에서는 전국 지자체나 기관·단체의 예약을 받아 청렴교육이 진행된다. 일주일에 2~3회의 강좌가 열린다.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장성아카데미도 평생교육센터 주관 사업으로 이관돼 매주 목요일 장성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 교육 참여대상을 아시아권가지 확대하고, 부패, 반부패 사례를 연구하는 등 ‘청렴의 고장 장성’의 브랜드가치를 높여간다는 구상이다. 또 평생교육센터에서는 매주 수요일·목요일 오전 ‘선비학당’이 개설돼 한학자 노강 박래호 선생이 중용과 논어를 강의하고 있다. 필암서원 청절당에서 이뤄지고 있는 교육이 겨울철 장소를 옮겨 진행되고 있는데 장성은 물론 광주에서도 수강생들이 찾아오는 유명학당이다. 센터 내의 청백리전시실에는 장성군이 배출한 지지당 송흠선생과 아곡 박수량 선생을 비록, 조선시대 청백리와 예의와 염치를 아는 국내·외 현대 청렴인물들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주변 가볼만한 곳 쫸
▶축령산 편백숲 = 장성군 서삼면, 북일면 일대 문의(061-393-1777~8) 축령산(621.6m)은 전남북의 경계를 이룬 산으로 삼나무·편백·낙엽송·테다·리기다소나무 등 수령 40 50년생의 숲이 779ha 가량 펼쳐져 있다. 주변엔 천연림인 상수리·졸참나무·떡갈나무 등이 둘러싸고 있어 더욱 툭 뛰어난다. 인공수림 사이의 편백이 요즘 각광받고 있는 산림욕을 즐기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축령산 산행의 기점은 광주에서 갈 경우 서삼면 추암리 괴정마을, 서삼면 대덕리 대곡마을, 서삼면 모암리 모암마을 혹은 북일면 금곡마을 등 네 방면으로 접근한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장성톨게이트에서부터 길이 갈라지므로 미리 유념해야 한다. 괴정마을 코스는 필암서원과 추암계곡의 철철폭포 등을 구경할 수 있다.
▶박수량 백비 =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의 묘소 앞에 있는 비석이다. 이 비에는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아 백비(白碑)라 불리고 있다. 비석에 글을 새긴다는 것 자체가 청백한 삶에 우을 범할 수 있어 아무 글도 새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박수량은 자(字)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我谷),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벼슬은 예조참판,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종에 나가 38년이나 일하고 재상에 이르는 직위에까지 올랐지만, 조그만 저택도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 “사후에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했으며 그가 죽은 후 장례 치를 비용도 없을 정도로 곤궁해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명종에게 아뢰어 겨우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