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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과 경배의 기도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행 13:1-4).
여기서는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라고 강조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행 13:2).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한 가지 기도라면 아마도 청원 기도, 즉 상황을 변화시키는 기도를 떠올리기가 쉬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 역시 믿음의 기도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어떤 것을 해 달라고 하나님께 늘 청원합니다. 청원기도를 하며 그분께 우리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분명 성경적인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3:1-4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아무것도 간청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주를 섬겨 금식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기도가 찬양과 경배의 기도입니다.
지역 교회의 많은 모임은 대부분 서로를 섬기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대부분의 예배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주님만을 섬기며 올려 드리는 찬양은 많지 않습니다. 찬양조차도 우리 자신을 섬기는 찬양이 많습니다. 때로는 특송 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조차도 주님을 섬긴다기보다는 서로를 섬기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기도 가운데 주를 이루는 것은 청원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임하셔서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찬양 시간이 끝나고 설교자가 말씀을 전할 때도 설교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회중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오히려 주님이 설교자를 통해 회중으로서의 우리를 심겨 주시면서 우리 가운데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배를 마칠 무렵이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기도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때도 우리의 기도는 많은 경우, 여전히 청원 기도에 머무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간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어떤 필요를 채워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또 서로의 필요를 섬기곤 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기도를 받으려고 앞에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바라기는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강단 앞으로 나오면 무엇 때문에 나왔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86 성경적 기도
회심의 시간에 어떤 사람이 반응을 보이면 사람들이 그 주위로 모여 곧 기도를 시작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나온 사람들을 대신해 덮어놓고 영적인 폭격부터 하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 옆으로 가서 몇몇 사람에게 왜 앞으로 나왔는지 물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앞으로 나온 이유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회심의 시간에 응답해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나,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들은 나온 이들이 주님을 영접하려고 나온 것인지, 성령 충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특별한 축복이나 은혜를 원해서 나온 것인지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후에라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따라 나온 이들을 어떻게 인도할지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들을 위해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기 위해 교회에 오거나,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기도는 청원기도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지켜본 바로는 청원 기도가 우리 기도의 주를 이루지 않는가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는 주님을 경배하는 면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하지만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경배 기도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쪽만 열심히 이야기를 해대는 일방통행식 기도를 넘어서는 기도가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행 13:2).
이것이 경배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군가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수 있습니다(요 16:23-24).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가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 우리의 필요를 구해야 한다고도 이르셨습니다(마 6:5-8; 요 16:23-24).
한 번은 어떤 소년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이 아이와 다를 바 없이 기도할 때가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년의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주님, 내 이름은 지미예요. 그리고 이제 주님이 주겠다는 건 다 내꺼예요.”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기도가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기도에 넌덜머리를 내시지는 않을까 혼자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는 요구가 우리 기도의 전부라면 다시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적으로도, 또 개인기도 시간에도 주님만을 섬기는 기도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달라고 조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을 섬길 뿐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기도가 개인적으로 그룹으로 교회 전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사람 이상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
7장 찬양과 경배의 기도 87
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를 섬겨 …”(행 13:2).
당신이 한 가지 더 눈여겨 보았으면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께 드려지는 찬양과 경배를 통해 성도들에게 더 큰 역사를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큰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께서 자신을 드러내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던 것을 기억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얻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기 때문입니다(벧전1:23). 나는 이 한 가지를 확신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와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이 땅의 어떤 부모보다도 자신의 아들, 딸들과 교제하는 것을 더 기뻐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은 시간을 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분이 사도행전 13장에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성도들에게 더 많은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전에 가졌던 특별한 모임 하나가 생각이 납니다.
모임이 약 6주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좀 다른 느낌의 예배를 함께 드려 보려고 합니다. 마지막 두 주 동안은 한주에 세 번 교회로 나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잠깐 읽고는 짧게 말씀을 전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가르침이나 긴 설교를 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 달라고 부탁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함께 모여 그룹으로 하나님을 받들고 섬길 것입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10분을 주님 앞에 경배하며 기다리겠다는 생각으로 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적어도 한 시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주님을 섬기며 기다리겠다는 생각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단지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하는지, 또 얼마나 그분을 찬양하기 원하며 사랑하는지, 주님께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생각이 없다면 이 예배에 안 오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집에서 쉬세요. 오신다 해도 나머지 사람들에게 방해만 되기 때문입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와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참석자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와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분위기 가운데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의 사역 가운데는 그분을 받들고 섬기던 그 시간을 통해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들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많은 것을 놓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바른 경배의 마음을 가지고 바른 경배의 처소로 나아가는 시간을 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오순절 교단의 부총회장 중 한 분도 젊은 목사 시절에 공감 가는 일을 겪었다며 이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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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열네 살 무렵부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한 번은 담임 목사님이 외유 중인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빌자면, 반에 갑자기 목사관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들은 담임 목사님이 안 계신 것을 알고는 목사님의 아내에게 자기들의 집으로 와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집에 있는 갓난아이가 경기(驚氣)를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아내는 목사관에서 목사님 가족과 함께 머물고 있던 당시 십대의 복음전도자였던 이분을 깨웠습니다. 그래서 이분도 사람들과 함께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려고 그 집에 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나는 영적으로 어린 사람이기는 했지만 함께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도착해서 사단을 꾸짖으며 목청껏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오순절 교회 사람들이 하는 조치는 다 취해보았습니다. 한 30분에서 40분 동안은 계속 씨름하는데도 어린아이의 경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았던 것까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봤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런 회복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을 멈추자, 함께 기도하러 왔던 사람들 역시 잠잠해졌습니다. 나는 그때 목사님의 아내가 했던 일을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
사모님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다 다음과 같은 말로 입을 열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찬양과 경배가 사모님의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0분이 지나도록 사모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마침내 한 사람씩 그것을 받기 시작하더니 결국 그곳의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는 경련을 멈추고 잠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찬양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잠에서 깨어 다시 경련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놀라서 악한 영을 꾸짖으며, 다시 함께 기도에 돌입했습니다. 우리는 갓난아이에게 기름을 바르고 손을 얹었습니다. 평소에 알고 있던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아이는 전혀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좀 진정되었을 때, 사모님은 다시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모님은 주님만을 섬기는 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함께 연합했습니다. 그런데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경련을 멈추더니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아이에게서 경기가 완전히 떠나간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더 이상 경련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전혀 해결할 길이 없었는데 찬양과 경배의 기도는 다른 대상을 위해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무력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필요가 채워질 수 있도록 기도의 수단과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라고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행 13:2).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섬길 때 성령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셨다.”
경련을 일으킨 아이에게 일어났던 일이 바로 이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자 아이에게 필요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7장 찬양과경배의 기도 89
주님을 섬길 때 구원이 임한다
주님을 섬기는 것과 시험과 시련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사도행전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바울과 실라를]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밥을 사고에 든든히 채웠더니”(행 16:22-24)
사도행전 16장에는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실라가 어떻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던져졌는지 보게 됩니다. 감옥 간수에게는 그들을 든든히 지킬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24절은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바울과 실라의 행동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바울과 실라는 서로에게 힘이 되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유의할 만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의 선지자들과 교사들도, 사도행전 16장의 바울과 실라도 합심기도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데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2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이것은 그들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나는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
바울과 실라의 찬송과 기도가 합심기도의 좋은 예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오늘날 교회 예배에서 많이 듣게 되는 그런 찬양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하는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거나 그분의 광대하심을 높이는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을 향해 올려드리는 찬송이라기보다 불평처럼 보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찬양 가사 중 많은 부분이 “불쌍한 내 신세”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찬양 가운데는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따라 걷는 부족하고 짓밟힌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는 노래들도 있습니다.
이런 찬양들은 많은 부분, 우리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나 인생살이가 얼마나 험난한지 등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관한 찬양을 불러도 우리가 그곳에 이른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노래합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의 선하심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떤 영광과 찬송도 돌려드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6:25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할렐루
90 성경적 기도
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5절은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구절은 한밤중, 실제로 캄캄한 밤중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밤중” 우리 인생의 캄한 밤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한밤중”은 우리 인생의 시험과 시련의 시간, 어둡기만 한 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악한 적의 공격에 대항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뿐더러,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구하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한 후에 하나님을 찬송했던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행 16:25).
어느 누구든 어려움에 처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인생의 한밤중에 놓일 때 찬양까지 요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의 등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고, 발은 차꼬에 매여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한밤중에 일어난 일인 동시에, 시험과 시련 앞에 놓인 캄캄한 밤중에 놓이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동안에도 등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심한 통증이 그들을 괴롭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발 역시 차꼬에 매여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깊은 감옥 안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밤은 여전히 깊었습니다. 상황은 절박했고,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도 도움이나 구원의 손길은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쯤해서 내가 확신하는 것 한 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런 비슷한 상황 아래 놓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 반복하던 기도를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면, 얼마 안있어 응답이 찾아올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으로 인해 오래지 않아 그들의 “한밤중”의 어둠, 그들이 맞닥뜨리고 있던 시험과 시련이 떠나갈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찬양과 경배가 일을 성취시킵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나서 자신들의 힘든 처지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터뜨리거나 한바탕 수선을 피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처한 상황에 대해 계속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으면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응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린 모습은 당장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기도하며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을 때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본질적으로 의심과 불신앙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한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참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히 4:3).
기도하고 진정으로 믿을 때,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하고 믿을 때 불안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당
7장 찬양과 경배의 기도 91
신이 기도하고 믿을 때 걱정과 동요 혼란과 낭패 근심에 빠질 거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을 때 인식에 들어간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사도행전 16:25에서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믿는 자들이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믿음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하고서도 믿는 것 대신 걱정과 의심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의심과 불신앙의 말만 하면서 원망과 불평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들의 기도가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한 후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제는 다른 한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16:25에서는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 침묵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지 않았다면 주변의 죄수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과 실라는 조용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마음속으로 하는 찬송을 들으시기 때문에 큰 소리 내지 않고 조용하게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2:34).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마음속에 있다면 밖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그 한밤중에 그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있다면, 인생의 어두운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바로 지금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데, 어떻게 감옥에 던져져 등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6:25 에는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곳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런 기도를 거의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아마도 바울과 실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고난당하는 특권에 대해 감사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구절에서 기도와 찬송을 했다고 하는 사이의 행간에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 기도하고(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행16:25).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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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는 접속사입니다. 이것은 기도와 찬송을 함께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구절을 확대번역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한밤중 쯤 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는 기도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불렀고…”(행 16:25, 확대번역성경).
나는 이 구절이 참 좋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가, 즉 진정한 찬송을 그들이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성경이 말씀하시는대로 바울과 실라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러는 동안, 죄수들만 그것을 듣고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놓임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6)
이미 말한 바 있듯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놓임을 받도록 기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가지는 성경에 따르면 구원은 그들이 기도하는 동안에 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은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6:25-26).
이것을 보면 열심히 기도하지만 왜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는 데는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같았다면, 어쩌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성경 말씀 역시 이렇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울분을 터뜨리며 불평을 쏟아놓은지라.
실라가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바울.”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나 실라?”
실라가 물었습니다. “자네 거기 있나?”
바울이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어디 있겠는가?”
실라가 말했습니다. “이 정말로 심하게 아프군.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일 아닌가, 바울,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도록 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겠네. 우리가 그분을 섬기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한 것을 아실 텐데 말야.”
하지만 그들이 그런 말로 기도의 입술을 채웠다면, 문제에서 멀어지는 대신 더 깊은 문제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태도를 취했다면, 실라는 이렇게 말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바울,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 때는 이렇게 감옥에 던져지는 일 따위는 당한 적이 없다네.”
나는 12년 가까이 교회 목회를 해오고 있는데, 성도들이 시험이나 시련을 당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이런 어려운 일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모릅니다.
당신이라면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시겠습니까? 그저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7장 찬양과경배의 기도 93
“하나님이 그렇게 말한 것을 용서해 주실 겁니다. 회개하신다면요.”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에게서 귀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 한가지는 바울과 실라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등에서는 피가 흘렀습니다. 아마도 심한 고통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을 뿐 아니라 발까지 차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깊은 감옥에 던져진 상태였습니다. 참으로 막막한 광경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매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이 그들을 가둬두도록 허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는 대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자신들을 몰아가는 대로 허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시험과 시련은 사실 어느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각각에게 자신들만이 감내하는 나름의 시련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시험과 시련을 맞닥뜨리게 된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련을 당하더라도 이후에 큰 차이를 낳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험과 시련의 기간 동안에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혹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의 여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 16장에는 우리가 한밤중에, 즉 시험과 시련을 당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빛과 교훈뿐만이 아니라 진정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한밤중”에 놓일 때 바울과 실라가 했던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폭풍이 몰려와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리는 것 같을 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괴롭고 답답할 때 우리 역시 바울과 신라처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해서 순적한 상황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바울과 실라는 휴가를 즐기러 빌립보에 갔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래, 내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무슨 끔찍한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는 걸까요?”라고 나에게 묻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당한 시험이나 시련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자는 다름 아닌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
바울과 실라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채찍으로 두 사람을 내리친 자들은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악한 자들을 충동질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충동질한 것은 바로 사단이었습니다. 가끔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허용하신 거잖아요. 내가 대체 무슨 끔찍한 죄를 지었길래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신 걸까요?”
하지만 주위의 모든 일이 잘 돌아가는지 아닌지를 보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려고 하면 잘못된 판단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견뎌야 할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다거나 희생을 치러야 할 고충이
94 성경적 기도
없는 평탄한 인생을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사역 기간 내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던 적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놓친 셈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험과 시련을 당하거나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복음 전도자로 사역하고 있을 당시, 여러 목사님들이 하는 말을 듣고 놀라게 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일학교 출석률이 가장 높았던 때만큼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나는 떠나겠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는 주일학교가 침체되고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는 기미가 없자, 마음이 상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일학교가 기대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나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목사님들도 있었습니다. “교회 재정을 내가 부임할 때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사임하고 떠날 겁니다.” 재정 상태가 악화된 것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아서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각각의 개인들로 구성된 곳이고, 각자가 나름대로 인생의 부침(浮沈)을 겪는 것처럼, 교회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고 해서 목사는 자신이 뭔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라고 결론지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상황이 순적하게 흘러가는지를 보고 그 여부에 따라 내가 하나님의 뜻안에 제대로 서 있는지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영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사도행전 13:2에서 그들이 한 것처럼 나도 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분별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내 영으로 깨닫게 될 때까지 주님을 받들어 섬기곤 했습니다.
나는 바른 교회 목양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했던 적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특정한 교회를 선택하는 데 있어 하나님께 증거를 구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된 경우였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주 오랫동안 오순절 교단 모임에 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내가 성령 세례를 받고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나는 그 전까지는 응답으로 어떤 증거(표징)를 구하는 것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전 교회의 어딘 사람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몇몇 설교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증거를 구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도 그렇게 해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내게는 교회를 바꿔 다른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교회로 가는 문제를 결성할 때 어떤 표정을 구했습니다.
한 교회가 세워지면서 나는 설교 목사 청빙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표정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어떤 표징을 보여주시면 새로운 목사직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확증으로 삼겠다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구한 이 표징에 따라 교회
7장 찬양과 경배의 기도 95
를 선택할 참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했고, 결국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그 교회를 떠나게 됐을 때 어딘가에서 떠난다는 것이 그렇게도 행복하게 느껴진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훨씬 전에 그곳을 나갔어야 할 일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한 번 자기 궤도를 이탈하면 궤도에 다시 진입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부흥 집회를 위해 그곳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그 집회는 그 교회 역사상 가장 놀라운 부흥회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의 명령과 뜻을 따라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하나님을 받들고 섬기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는 대신 어떤 양털 같은 증거를 찾느라 주의 뜻을 놓쳤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떤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고 해서 늘 만사가 형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해서 주일마다 출석수가 배가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해서 매주마다 헌금액이 더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러한 교회들을 섬기면서 바르게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하나님을 받들고 섬기는 시간 가운데 내 영 안에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기를 바라시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면 나는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주님, 상황이 기대하는 대로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주님이 이 일을 해결해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사단의 소리에 귀를 열기 시작하면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상황을 통해 당신을 파국으로 몰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어떻게 악한 영을 대적해야 하는지 배우게 된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 때문에 결국 압도당하고 말 것입니다. 사단이 당신의 마음 언저리라도 차지하게 되면 더 집요하게 파고들어 당신을 걱정 가운데 사로잡히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악한 영의 쉬운 먹잇감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데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2은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금식을 믿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 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식을 할 때 역시 바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 아래서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것은 패배와 불신의 고백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것 대신에 금식을 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가운데 행하는 금식은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막막한 상황에 놓일 때, 나는 악한 영 앞에 이렇게 선언하곤 했습니다.
“나는 식사를 거르거나 잠 못 이루지 않을 것을 선포한다. 나는 믿음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
이것으로 문제에 대한 조치를 벌써 취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주님의 손에 그 문제를 위탁해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끌어안고 걱정하지는 않을 참이었습니다.
나는 주님께 이런 말로 아뢰곤 했습니다. “주님, 제가 이 곳 목사이니만큼 제게 책임이 맡겨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말씀을 선포할 것이고, 모든 사람을 바르게 대하고 아픈 사람을 심방하며, 제가 할 수 있
96 성경적 기도
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교회는 계속해서 부흥했습니다. 매주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병든 사들이 치유되었으며, 성령으로 충만하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처한 상황만 보았다면 마음이 요동하고 신속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 가운데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그분을 섬기는 연습을 시작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유익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시험과 시련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릴 때 요동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패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초대 교회
이제는 찬양과 경배에 관한 몇 가지 구걸을 유의해서 살펴보길 원합니다. 여기서는 초대교회의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에 주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압하고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24:50-53).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6-47).
여기서 “날마다 마음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말한 구절에 유의하기를 바랍니다(행2:46-47).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어쩌다 한 번 이따금씩 하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그야말로 그들의 생활양식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47절 말씀 또한 성도들의 끊임없는 찬양과 경배의 결과를 기록된 말씀이 아닌가합니다.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 중에는 반년에 한 번쯤 “기도가 되면서”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할 마음이 드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혹시라도 누가복음 24장이나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도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바꿔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가끔씩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했다.”
또 여러 성도들에 대해서는 “반년마다 한 번씩 주님을 찬양했다”고 하거나, 또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는 “연례행사로 일년에 한번씩 주님을 찬양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도들은 늘 주님을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경배의 기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 역시 초대교회가 경험한 동일한 결과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 목사님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탄복을 했던 부분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에 처음으로 하는 일은 침대에서 일어날 때 벌며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일어나기
7장 찬양과 경배의 기도 97
싫어 몸을 질질 끌며 나오지 않습니다. 튀어 오르듯 침대를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발이 바닥에 닿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매일 아침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하루를 시작하는 참으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까!
위글스워스 목사님을 잘 아는 어떤 분은 나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은 매일 아침마다 침대에서 나올 때 몸을 흔들고 춤을 추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하루를 시작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몸을 질질 끌며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신이 나서 날마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6에서 우리는 다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 “날마다”라는 말에 주목하세요. 그들은 날마다 함께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날마다 말입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며…”라는 구절 또한 마음에 새기길 원합니다(행2:46-47).
나는 제자들의 마음에 그런 기쁨이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가다 보면, 제자들이 주를 위해 하는 일들에 있어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으로 해서 마음에 차오르던 끊이지 않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사도행전 5:42의 “그들”은 구체적으로 사도를 지칭합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 주의 일을 효과적으로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도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2:46-47에 나오는 “그들”은 사도를 일컫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지역의 성도 전체를 두고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들 또한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계속 모임을 가졌고, 또 주님을 섬겼습니다.
찬양과 경배의 습관을 개발하기
우리가 말씀의 빛을 따라 걸으며 찬양과 감사의 태도를 계속 보여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 주님의 증인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성령 세례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거듭난 성도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 세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할 때 능력 있는 주님의 증인이 되게 만듭니다.
P. C. 넬슨 목사님은 찬양과 경배의 습관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 주님의 증인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주는 좋은 모범이었습니다. 나는 넬슨 목사님이 1920년대 초반에 목사로 있을 당시, 어떻게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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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 세례를 받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넬슨 목사님은 방언을 말하는 증거와 함께 성령 세례를 받았는데,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신학교 시절 한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넬슨 목사님의 경험이 진실한 것인지를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답장을 보내 자신이 실제로 성경의 오순절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친구 목사님은 다시 편지를 써서 직접 그것에 대해 듣고 싶다며 목사님을 초대했고, 주일에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를 해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던 때이니만큼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넬슨 목사님과 일행은 좀 지체하게 되었고 예배 시간 이전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교회 예배 때 만나기 전까지 목사님은 신학원 동기이자 룸메이트였던 동창생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눌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목사님이 일행과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예배가 이미 시작하고 난 후였습니다.
넬슨 목사님은 강단으로 올라갔고, 두 사람은 정말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채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았고, 특송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넬슨 목사님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 채 갑자기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친구 목사님은 움찔 놀라며 넬슨 목사님을 쳐다보았습니다. 넬슨 목사님도 그 반응이 약간 의식이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그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잠시 후 특송을 부르던 여자는 2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넬슨 목사님은 좋아하는 대목이 나오자, 별 의식 없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할렐루야!”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친구 목사님은 다시 움찔하며 목사님을 쳐다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그때서야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처음으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고 하는 버릇이었던 것입니다. 넬슨 목사님은 다시 찬송에 귀를 기울이다 “주님께 영광을!” 하고 외쳤습니다. 친구 목사님은 또 한번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친구 목사님은 넬슨 목사님을 회중에게 소개했고, 두 사람이 신학교 때 룸메이트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분이 넬슨 목사님과 그의 사역에 존경을 표한다는 말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넬슨 목사님은 또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하고 외쳤습니다. 친구 목사님은 놀라서 하마터면 소개하던 것마저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넬슨 목사님으로서는 그것을 의식하고 한 행동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자동적인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신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해 볼 때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마음의 기쁨이 넬슨 목사님의 마음에도 동일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저녁 예배를 드릴 때도 넬슨 목사님은 이따금씩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친구 목사님은 넬슨 목사님이 이렇게 할 때마다 놀라서 쳐다보았습니다. 넬슨 목사님의 마음에 있던 기쁨이 친구 목사님의 이목을 끌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친구 목사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넬슨, 이게 자네 버릇인가보네.”
“무슨 말인가?” 넬슨 목사님은 친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게 말야, 이따금씩 자네가 소리내어 이렇게 말을 하더군.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하거나 ‘할렐루야’
7장 찬양과 경배의 기도 99
라고 말야. 아니면 ‘주님께 영광을’ 혹은 ‘감사합니다. 예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게 자네 버릇이구나 생각했지.”
친구의 말을 듣던 넬슨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래,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버릇이라네!” 주님을 높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습관입니다!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넬슨 목사님이 지속적인 기쁨과 찬양으로 주님의 증인이 된 결과, 이 친구 목사님 또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넬슨 목사님의 찬양과 경배의 기쁨이 친구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입니다. 친구 목사님 또한 동일한 기쁨과 찬양의 영을 소망했습니다. 이런 찬양과 기쁨의 영이 없이 교회를 목회한다면 참으로 낙심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쁨의 영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당신이 찬양과 경배 가운데 주님을 섬길 때 성령은 당신 역시 증인이 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초대 교회 또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누가복음 24:53에는 제자들이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며 성전에 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기뻐서 날마다 계속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행2:46-47).
그리고 사도행전 5:42에는 그들이 날마다 복음을 선포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아울러 사도행전 16:2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앞의 말씀과 상응하는 구절들을 구약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에는 여호사밧 왕과 온유다가 암몬과 모압, 세일 산사람들과 대치하게 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들은 연합해서 유다를 치고자 했습니다. 객관적인 면에서 본다면, 여호사밧은 적군들을 물리칠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이나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사밧은 기도회를 소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구약을 보면,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이 어떤 사람들, 예컨대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을 쓰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 한 청년 야하시엘에게 임했고 그러자 그가 일어나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대하 20:15, 17).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 적과 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을 향해 나아갔고, 성경은 그때
100 성경적 기도
에 그들이 찬양(노래)하는 자들을 앞세우고 나갔다고 말씀합니다(대하 20:21).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고 쳐들어온 세 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한 상황입니다. 적의 군대는 칼과 창으로 잘 훈련된 정예병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그들을 상대하는 자로 찬양하는 자들을 선두에 세워 보냅니다! 말하자면, 찬양하는 자들이 온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진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에게는 칼과 창, 방패로 무장한 병력을 이끄는 장수 같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던 유일한 병력이라면 주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전부였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대하 20:21).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유의하여 본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던 바울과 실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주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찬송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대하 20:21).
그들은 분명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양을 드리며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행진한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찬양과 경배의 기도가 불러일으킨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들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대하 20:22-25).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적이 패배하게 된 것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찬양 예배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섬기는 대신 주님을 섬기며 받드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함께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고 그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결과로 인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다른 종류의 여러가지 성경적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 중 필수적인 한가지 기도가 바로 주님을 섬기는 찬양과 경배 가운데 주님을 반드는 기도입니다.
(캐네스 E. 해긴 『성경적 기도』 정승혜 옮김. 서울: 베다니출판사, 2014. pp. 85-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