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강이 너울거린다.
눈이 감긴다. 딜레마에 빠진다.
최영과 권문세족을 필두로 한 세력이 그에게 요동을 정벌하라 내몰았다. 한국사에 유례없던 시련인 고려 말 홍건적 침략과 왜구의 난립을 함께 종식시켰던 어제의 동지 최영도, 고려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어느새 그에게 서슬퍼런 칼날을 세우고 있는 적수로 변해 있었다.
불세출의 명장 최영.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전공을 세웠으며 위풍당당한 거한이기도 했던 이성계는, 최영에게 갖는 감정이 꽤나 미묘했다. 그가 곱씹는 것은 그와의 기억인가, 추억인가. 지난날 자신의 선배이자 상관이었던 점 그 이상으로, 참으로 그는 사내 대장부로서 우러러볼 만한 인간이었다.
지금 명 황제가 된 주원장이 한때 몸담았던 백련교도 무리(홍건적)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고려는 개경까지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하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신했다. 저들 무리는 개경에서 산모의 젖을 잘라 불에 구워먹었던 놈들이지 않나. 극렬 반원파였던 공민왕도 이 홍건적을 격퇴하기 위해 원에 도움의 손을 내밀고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 개경수복 당시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전 고려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참 오래된 일이다.
고려판 라스푸틴이었던 요승 신돈의 충격이 한 차례 고려를 휩쓸고 지나간 것도 생각이 났다. 병사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온몸을 떨던, 끝도 없는 대군을 거느린 채 휘황찬란한 오오요로이를 걸치고 나타난 왜구 수괴 아기발도를 화살 한 발로 제압한 일도 생각나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최영도 알 것이다. 그동안 고려 백성들이 얼마나 도탄에 빠져 있었는지를. 그가 나에게 맡긴 이 4만의 군사는 현재 고려의 전부다. 내가 무너지면 이 4만의 군사가 무너지고, 이 4만의 군사가 무너지면 고려가 무너진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나라 없는 민족이 된 것에 그쳤던 저 옛날과는 달리, 이번엔 그에 그치지 않고 명과 왜구에게 전 고려 백성이 도륙되고 윤간될 것이 뻔하다. 그래, 조정이 나에게 고려의 전부를 맡긴 것은 정치적 견제라기보단 그만큼 정말로 날 절실히 믿고 있다는 것이야.
그렇다, 따지고 보면 먼 옛날 한신이나 훗날의 원숭환처럼 수도로 불려 극형으로 토사구팽 당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 옛날 저 멀리의 카이사르도 원로원의 견제를 받고 자살과 다름없던 갈리아 원정길에 오르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연이어 대승전을 거두고 개선하지 않았던가. 역시 훗날 저 멀리의 나폴레옹도 총재정부의 시기를 받고 이집트 원정길에 올라 트라팔가 해전에서 대패를 당하고 원정도 실패로 끝났음에도, 파리로 입성한 그의 인기는 오히려 더욱 높아져 있었다.
이성계 그 자신은 어떤 역사적 사례를 떠올렸는진 알 수 없지만, 위와 같은 사례는 모두 나라가 부강했을 때의 일이었다. 고려는 너무나도 병들어 있고 노쇠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뇌인다. 그러나 이번엔 다소 분노에 차 있었다. 최영도 알 것이다, 그동안 고려 백성들이 얼마나 도탄에 빠져 있었는지를!
화를 추스르고 다시 한 번 침잠한다. 얼마 전 그는 조정에 사불가지론 서신을 보내었고 이를 거절당한 바 있었다. 요동을 정벌하면 안 되는 이유 4가지였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어폐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옛날 수 양제의 200만 대군 중 30만 별동대든, 예전 거란이나 홍건적의 수십만 대군이든, 모두 압록강을 잘만 도하해 왔었다. 4만에 불과한 우리가 이런저런 핑계로 못 넘어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명은 북원과 대치 상황이므로 요동을 어부지리로 손쉽게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방에서 왜구가 침략해 온다 한들, 자신과 최영이 이미 세를 완전히 꺾어 놓은 상태였으므로 최영 혼자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순간 그의 마음속 깊이 있던 욕망이 불쑥 고개를 든다. 새파랗게 젊은 시절 동북면에서 무학 이 작자에게 해몽을 청한 일이 생각난다. 불타 무너지는 집에서 서까래 3개를 등에 지고 나온 꿈이었다. 무학은 불타 무너지는 집은 고려를 뜻하고, 서까래 3개를 등에 졌으니 그 모양이 왕(王)이라 하였다. 즉 내가 왕이 된다는 꿈이었다. 무학은 해몽값과 비밀유지비 명목으로 하루같이 자기 절에 와서 공양을 드리게 하는 것도 모자라 막대한 돈을 들여 절 건물을 왕창 짓게 했었지. 옛 생각에 웃음 짓는다.
왕이라. 사실 무학의 해몽이 이따금씩 떠오른 적은 있었으나 지금처럼 강렬하게 맴돈 적은 없었다. 중압감 탓일까.
요동 정벌에 실패하면 고려가 그야말로 끝이다. 정벌에 성공한다 한들 지속적으로 방어하려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야 한다. 권문세족의 배만 부르게 하는 짓이다. 요동 방어를 명분으로 수탈을 일삼을 것이다. 즉 내가 정벌에 성공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정치에 어두운 최영은 권문세족의 횡포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들의 수장 이인임은 대체 왜 살려놓은 것이냐! 게다가 불교계는 이미 예전부터 권력집단의 개가 되어 수탈을 도와온지 오래다.
몽골 침략 이전 서유럽을 제외한 많은 나라들은 풍속이 유례없이 문란했다. 중동은 천일야화의 고장이었고 고려는 수많은 남녀가 한 데 어울려 목욕을 즐길 정도였다. 불교는 이를 방조했다. 절의 탑돌이 행사는 오늘날 등산 동호회나 스크린골프처럼 불륜이나 스폰의 장이었을 것이다.
성개방이 되면 남자들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당위성과 절실함이 무너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누가 창녀들을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겠나? 정주민족의 이런 상태는 항시 마초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를 간직한 가난한 군사문명에 의해 조정당해 왔다.
아무리 징기스 칸과 휘하 참모들의 귀신들이 파워가 셌다 한들, 전 세계가 이들에게 갈려나간 것은 그만큼 성관념이 개판이었음을 말해준다 생각한다. 몽골 침략 이후 전 세계가 성에 있어서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스스로도 성개방 때문에 여자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정신적 무장이 해제된 탓에 몽골군에 무참히 패한 것을 인정한 것 아닐까. 이슬람은 극도로 보수화되었고, 고려에서도 유교보이 신진사대부가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성계의 심복이었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들의 눈에 불교는 오늘날의 개독이나 개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무학이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인 것과 별개로 이성계도 이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춥고 거친 동북면에서 나고 자란 과거를 생각한다. 그의 집안은 원나라뿐만 아니라, 과거 예맥과 동업자 민족이었던 여진(말갈)에도 세력이 뻗쳐 있었다. 부관 이지란도 여진사람 아닌가. 사람들은 이성계가 사실 여진족이라고도 하는데, 아무렴 뭐 어떤가. 그는 자기가 정말 왕이 된다면 원나라 세력과 여진족 세력까지 규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다음 요동 정벌에 나서 명과 대립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이것이 정녕 최선인가를 자문한다. 청사진을 그린다.
내 무학대사와의 연이 깊다 해도,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불교계엔 희망이 없다. 국정철학 정립은 정도전과 그 일파에게 맡길 것이다. 물론 이리 될 것을 알고 있는 무학대사라 할지라도 서운해할 것은 내 알고 있다. 머리에 피도 안 말랐으면서 무학에게 다짜고짜 시비부터 거는 방원이 놈만이라도 어떻게 해야겠지.
부관 이지란이를 필두로 여진족 세력은 쉽게 규합할 수 있을 것이다. 선조 대부터 쌓아온 원나라와의 인연은 북원과의 동맹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일단 권문세가 놈들을 쓸어버리고 고려 국내의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난 뒤 명나라가 안정을 취하기 전 요동을 치겠다. 주원장 이 홍건적 놈을 내 어찌 용서할 수 있겠나.
최영. 이 대쪽 같은 분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최영 장군은 어떻게든 설득하겠다. 내 기필코.
좋다, 회군이다.
첫댓글 내용 정정합니다.
1. <고려사>,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에 공통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이성계가 쏜 화살이 아기발도 투구의 턱끈을 맞추어 투구가 벗겨지자, 부하가 즉시 헤드샷을 날렸습니다.
2. 이집트 원정 도중 나폴레옹 함대가 영국 넬슨 제독에 의해 대패했던 해전은 트라팔가 해전이 아닌 나일 해전입니다.
3. 꿈 내용 중, 불에 타 무너지는 집이 아니라 그냥 낡아서 무너져 내리는 집입니다. 물론 이건 야사라서 꿈 내용이 다들 조금씩 제각각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