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봉긋한 윗입술을 벌렸다. 뜨거운 타액이 흐르는 납작한 혀 끝으로 음절을 따라 굽이치는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굴려본다.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아랫배가 울린다. 애정, 사랑, 사랑, 애정, 애정…… 그것은 아득한 태초부터 인간사이의 뜨겁고 질척한 관계를 정의한 가장 원초적인 신성함이요, 우리가 발 붙이고 살아갈 근본을 만드는 생명의 젖줄이었다. 삶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감정. 활자를 통해 내가 배운 애정의 정의는 그러하였다. 사실, 지난 19년동안 나는 그러한 애정이란 막연함에 무지했다. 함께 살아봐야 불행할 뿐이라던 얼굴도 모르는 나의 엄마는 아빠가 다른 언니에게 탯줄을 자르자마자 나를 버리고 떠나버렸다. 불행하기에 버린다. 참으로 피학적인 애정이었다. 어린나이에 핏덩이까지 떠맡은 언니는 그때부터 배움을 포기하고 동네를 돌며 구걸을 해서라도 살림살이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19년간 그런 일련의 모습만을 지켜봐온 내게, 애정. 그것은 참으로 내게 매몰찬 감정이었다. 온전히 받아 본 적이 없어 불신했고, 가여운 나의 언니를 동정했을 뿐이었다.
그랬던 내 세계에 난데없이 오세훈이 끼어들었다. 도무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속내를 가지고 뜬금없이 내게 고백했다. 덧붙인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것 뿐이야> 좋아하지만 단순히 그것 뿐이라는 모순적인 그의 고백은 내 신경에 침투하여 모든것을 뿌옇게 흐려놓았다.
미술시간이 파하자마자 단숨에 교실로 내려갔다. 오세훈이 미술실 책상에 남겨둔 시를 아무 공책에나 급하게 옮겨 적었다. 이렇게 호흡이 가빠질만큼 정신없이 뛰어 본 적이 언제였더라?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교실 문을 열었다. 상기된 두 볼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쇳소리가 나는 목을 가다듬고 오세훈의 책상 앞에 섰다. 깨어나 있었지만 눈에 초점이 없었다. 번잡한 교실에서 오세훈만 도태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규격에 맞지않아 도려낸 지도의 한 부분 같았다.
“..이거 봤어.”
급하게 공책에 휘갈겨 온 시를 오세훈 앞으로 들이밀었다. 나와 내가 내민 본인의 시를 확인한 오세훈이 불량스럽게 앉아있던 자세를 고친다.
「나의 맹목을 도려내 미운 너
네가 스친 그리움을 비운 나」
해석도, 번역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오세훈의 시였다. 그의 시는 그만 안다. 제목도, 담고 있는 내용도. 잠시간 미술실 책상에 자신이 썼던 시를 감상하듯 바라보던 오세훈이 고개를 든다.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한다. 찰나간, 평소엔 그리 박하게 느껴지든 그 눈동자가 우수에 젖어 있다는 생각를 했다.
“그럴 것 같아서.”
“…”
“궁금해서. 알고 싶어서.”
“…”
“올 것 같았어.”
그러면서 선선히 웃는 얼굴을 내비친다. 창백한 길쭉한 손 끝이 까슬한 종이 위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오세훈의 웃는 얼굴은 두번째로 보는거라 나는 약간 놀라웠다. 누구나 짓는 미소가 그에게 덧씌워지자 아주 생소한 모습으로 바뀌어버린다. 마술처럼.
“내가..오길 바라고 쓴거야?”
“꼭 그런건 아니지만.”
“그럼 뭔데.”
“…”
“네 진짜 생각이 뭔데.”
마지막 말을 읊조리는 목소리가 가녀리게 떨렸다. 오세훈은 여전히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변 배경이 온통 흑색으로 난도질 되었다. 검은 사각 공간에 나와 오세훈 단둘만 마주보고 있었다.
“내 시는 여전히 네 거고.”
“…”
“나는 네가 좋아.”
“그럼 이 시는 무슨 뜻이야.”
“…”
“이번건 정말 모르겠어. 내가 뭘 도려냈는지. 네가 뭘 비우겠다는건지.”
노련한 연극배우처럼 오세훈의 손 끝이 빚어내는 말들은 천의 얼굴이었다. 오세훈은 도대체 무슨 시상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기는걸까. 온통 나에게로 향해있다는 그가 써내려가는 시의 끝은 과연 둥글까, 아니면 날카로울까. 얄팍한 종잇장 위에 적어내려가는 오세훈만의 활자들은 생동감 넘치는 활어같았다. 그의 비유가 아가미가 되어 팔딱팔딱 숨을 쉰다. 그런 몸짓이, 그런 그의 시들이 도무지 눈을 뗄 수 없게했다. 참으로 신선하고 요망한 흡입력이었다.
알 수 없는 시의 해석을 요구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세훈이 드디어 동굴처럼 깊게 다물어져있던 입을 뗀다.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넌 날 피했지. 도려내고 싶은 것 처럼.”
“…”
“사실 난 너 미워할 수 없는데. 그건…그냥 글에서라도 그렇게 말해봤어.”
“비운다는 말은.”
“…”
“널 포기한단 말이 아니라.”
“…”
“말 그대로 일방적으로 나만 널 그리워했던 시간을 비운단 말이야. 그 말은 그러니까……”
친절하게도 그가 나를 향해 쓴 시의 자세한 설명들을 줄줄이 나열하던 오세훈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래로 처박혔던 나의 시선이 순식간에 위에 솟아올랐다. 그에 맞물려 다음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혼자 좋아했던거 비우는건 이제 그만 하고.”
“…”
“너랑 만나고 싶어.”
“…”
“우리 사귀자. 윤미성.”
생애 첫 고백이었다.
* * *
“그러니까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하필이면 바로 이어지는 시간이 윤리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 나는 비관적인 운명론자였다. 운명과 우연. 고작 한 끝 차이인 그것들이 지금만큼은 유난히 원망스러웠다. 윤리시간에 오세훈의 기름기 없는 고백 후에 배우는 게 하필이면 사랑에 관련된 챕터라니. 여직 망아지처럼 날뛰는 가슴을 채 진정시키지도 못했는데. 이럴 순 없는 것이었다. 자꾸만 중요한 내용들이 내 머릿속을 온전히 거치지 못하고 휘발된다. 억지로 펜을 놀려 필기를 했다.
“그 중에서 부모님이 너희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뭐라고 하지?”
“…”
“그래. 흔히들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들 하지.”
“…”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아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순간 언니의 마른 얼굴이 눈 앞으로 흘러갔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참으로 언니에게 지당한 말이었다. 그 아름답던 손톱이 전부 깎이고 깎여 어두운 물밑으로 침식될때까지의 세월을 안다. 본인도 어렸을 나이에 나를 껴안고 이웃집을 전전했을 그 설움들. 그렇기에 나를 위해 희생하는 언니의 수고를 당연하게 생각할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알지만 마음 속 한켠에서 대학을 갈구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잡고 언니를 호강시켜주고 싶었다. 둘이 살면서 받은만큼 갚아주고 싶었다. 언닌 나의 부모가 아니지만 그 이상의 애틋함을 가진 감정의 표상이었다.
“참. 이반에 오세훈이 있나. 오세훈?”
“…”
“그래 너. 야, 너 문학 선생님이 그렇게 널 칭찬하더라.”
“…”
“나도 읽어봤는데. 깜짝 놀랐어. 너한테도 그런 재주가 있구나 하고.”
“…”
“그니까 재능 쫌 그만 썩히고 정신차려라 임마!”
익살스러운 윤리 선생님의 농에 오세훈은 말없이 뒷목을 쓸어넘겼다. 주변이 미미한 웃음을 띄웠다. 나는 또다시 내 대각선에 앉아있는 오세훈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전과는 약간 달라진 시선이었다. 책을 교탁 위에 내려둔 선생님이 인터넷에 무언가를 검색한다. 그리고 한 사이트에 들어가 어떤 시의 일부분을 떼와서 한글창에 붙여넣는다.
“오세훈도 있고, 사랑에 관련된 파트도 배우고 있으니까.”
“…”
“시 하나 안보고 갈 수가 없겠지?”
“…”
“이건 선생님이 좋아하는 시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야.”
“…”
“다들 한번 읽어봐.”
제각기 조화되지 않은 목소리들이 엉성하게 스크린에 띄워진 짤막한 시의 일부분을 노래한다. 입술과 혀 끝에 감겨오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나른했다. 나는 시를 보면서도 말할듯, 말하지 않을듯 입술을 달싹이는 오세훈을 흘끔거렸다.
어쩌면 네가 내게 우산을 건넨것도, <미성, 숙>이라는 시를 쓴 것도, 내게 사귀자는 고백을 한 것도 전부 허상이 아닐까. 나의 내면의 고독과 불안이 창조한 허구는 아닐까. 선생님의 띄워준 시와 오세훈을 번갈아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참 부질없는 생각 속에서 홀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내 뒤에 앉아있던 남자애가 짜증스럽게 내 어깨를 쳤다. 무슨 일인가 하며 뒤돌아보았더니 불쑥 쪽지 하나를 내민다. 누가 보냈냐는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자 무신경하게 대각선 쪽을 턱짓한다. 턱짓한 쪽을 오차없이 정확한 각도로 좇았다. 그러자 빨려들어갈 것 같은 오세훈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눈을 마주친 오세훈이 엉겁결에 받아든 쪽지와 나를 한번씩 번갈아본다. 그제야 나는 아. 하는 소리를 작게 냈다. 이건 오세훈이 보낸 쪽지였다. 시선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쪽지를 펼쳤다.
[사실, 너한테 대답을 재촉한 건 아닌데.]
담백한 서두였다. 나는 더 빠르게 밑을 읽어내려갔다.
[적어도 방금 선생님의 띄워준 이 시처럼 되진 말았으면 좋겠다.]
쪽지를 지탱하던 손이 경련했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선생님이 소개한 시를 바라보았다. 스크린에 띄워진 시와 그의 글자를 담은 망막이 여리게 흔들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지금, 윤리 선생님이 띄워준 시는 바로 저것이었다.
내 고백이.
윤미성 네가 스치기만 했던 일방적인 그리움을 비운 내가.
또다시 내 옆을 지나가는 너를 백치같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튼 나는 진심이야.]
오세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 *
오늘부터 본격적인 야간자율학습의 시작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언니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운동장 근처에 있는 전화박스까지 걸어갔다. 평소에는 종종걸음으로 가볍게 걷던 길이 험난하고, 심란하게 느껴졌다. 저녁시간이 되어 거의 해가 하늘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외진 곳에 있어 약간 스산한 공중전화 안으로 들어섰다. 교복치마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을 넣고 익숙한 언니의 번호를 꾹꾹 찍어눌렀다. 수화기를 귓가에 가까이 댔다. 맹물같은 컬러링이 흘러나왔다.
─ ..여보세요?
“아. 언니 나 미성이.”
─ 웬일이야..?
어쩐지 언니의 목소리가 부스스했다. 마치 자다 깬 사람처럼. 저녁이긴 했지만 아직 잠자리에 들기는 이른 시간이었다.
“나 오늘부터 야자한다고. 언니한테 아침에 말 못하고 나온 것 같아서.”
─ 밤에? 안돼. 위험해. 이제 내가 데리러 가지도 못하는데……
“그래서 다 하는 건 아니고. 1교시만. 막차 바로 전에 있는 버스타고 가면 10시 전에 집에 도착해.”
─ 그래도...
목소리의 볼륨이 점점 더 작아졌다. 마치 숨어서 몰래 소근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수화기를 두드리며 언니를 불렀다. 언니, 언니? 듣고 있어? 나, 잘 안들려.
─ 어어...언니 지금 일하는 중이라 지금 길게 통화 못해!
갑자기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나는 수화기를 조금 더 귀에 밀착했다. 고요하던 수화기 너머 언니의 주변이 급작 시끄러운 노랫소리로 꽉 찬다. 째지는 목소리의 고함도 간간히 섞여들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언니. 뭐야. 이상한 소리 들려. 거기 어딘데. 거기 어디야.”
─ 저어, 미성아...
“..소리 너무 이상해. 뭔데. 거기. 일하는데야? 언니? 언니!!”
본능적인 적의감이었다. 질척거리는 수상한 소음이 더욱 세차게 윙윙댔다. 나는 경미한 현기증이 이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니겠지. 그런건 아니겠지. 아니. 아닐거라고. 제발 아니라고 이따금씩 불쑥 치밀어오르는 상상을 주체할 수 없을때마다 그러길 바라고 또 바랐다. 내 애닳는 부름에도 돌아오는 언니의 대답은 없었다. 한참 후에 수화기 너머로 울린 소리는 기다린 언니의 목소리 대신 천박하고 높다란 음성이었다. <얘 새 손님 들어오신다.> 순간 까맣게 아웃된 눈동자가 허공에서 방황했다. 나는 천천히 전화통을 붙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윽고 잔뜩 힘이 빠진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만 인지할 수 없는 눈물이 베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 ...미성아 미안해. 집에 가서 얘기하자.
그리고 통화가 끊겼다.
* * *
회색계열의 구름들이 뭉쳐있던 하늘에서 천둥이 정확히 두번 울렸다. 천둥소리를 신호탄으로 구름이 점점이 몰려있던 하늘에서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져내렸다. 그 틈을 어떻게 뚫고 왔는지 기억도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홀딱 젖은 채 중앙현관에 우뚝 서 있었다. 저녁시간의 끝물이었고 갑작스러운 폭우의 여파로 운동장 주변에는 개미새끼 한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교복이 반쯤 젖어있었다. 공중전화부스에서 정신빠진 사람처럼 걸어오고 있을 무렵 하늘에 수천개의 지하굴이 뚫는 것 마냥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 뛰어가야겠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잔뜩 젖은 머리에서 빗물이 튕겨져 나왔다. 파리하게 젖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겹뿐인 셔츠가 젖어서 끈적였다. 그 틈으로 파고든 빗물이 몸 구석구석을 유린했다. 빗물과 스미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현관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거울 속에 우습게 젖은 내 몰골이 보였다.
“윤미성.”
“…”
“너. 비 맞았어?”
답지않게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훑던 시선이 왼쪽에서 멈춘다. 현관에 있는 거울 뒤 계단에서 눈에 익은 풍채가 보였다. 오세훈이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거울 앞에 서서 혼자 떨고 있는 나를 오세훈이 기가막히다는듯이 바라본다. 계단가에서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달라온 오세훈이 망설임없이 재킷을 벗어 내 어깨 위에 둘러준다.
“미쳤다.”
“…”
“진짜 미쳤다 너.”
앵무새처럼 미쳤다는 말을 반복한다. 커다란 손을 들어 젖은 머리를 마구 털어낸다. 그 순간 어깨에 매달린 모든 무거운 짐도 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 왜 맞았는데.”
“…”
“왜 맞았냐고.”
비난인지 걱정인지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추궁이었다.
그러고보니 처음 오세훈의 시 제목을 들었던 날도 지금처럼 비가 내렸다. 그때는 오세훈이 잔뜩 젖어있었는데 우습게도 오늘은 나였다.
“윤미성.”
내가 대답하지않자 오세훈이 내 어깨를 쥐고 흔든다.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이미 힘이 말라붙어버린 어깨는 속절없이 이끄는대로 휘둘렸다.
“너...”
“오세훈.”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눈동자 안으로 툭. 떨어진다. 망가진 내 마음도 떨어진다. 오세훈이 다시 나를 본다. 내 어깨를 그러쥔 손목을 내렸다. 그가 둘러진 재킷을 좀 더 꽉 부여잡았다. 달큰한 섬유향이 주변을 휘감았다.
애정. 19년간 유일한 피붙이인 언니가 내게 쏟았던 것. 더없이 외로운것. 그래서 구역질나게 덧없는 것.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우리 사귀자.”
“…”
“나도 네 말대로 하고 싶어. 우리 한번 만나보자 오세훈.”
“…”
“원래 사람은 한번씩 만나보면서 알아가는거잖아.”
“…”
“안 그래?”
“…”
“네가 그랬잖아. 어떻게 생각하는데 넌.”
빗물에 섞여 차가워야하는데 오세훈의 손이 스친 자리가 뜨겁게 느껴졌다. 자뭇 담담한 내 말에 오세훈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비죽 서 있던 눈꼬리가 서서히 밑으로 내려앉는다. 긴 숨을 쉰다.
“윤미성.”
“나 지금 힘들어.”
“…”
“묻지 말고 그냥.”
“…”
“네가 먼저 나 좋아한다며, 사귀고 싶다며.”
“…”
“그럼 여기서 더 캐묻지말고 넌 그냥. 너는 그냥...”
“좋아.”
“…”
“알았어.”
“…”
“그러니까.”
“…”
“울지마.”
비로소 애정을 향한 불신의 껍질을 탈피(脫皮)했다. 겨우내 냉랭하게 얼어붙은 땅 끝에서 움츠리는 벌레처럼, 그간 불신과 유년을 방패삼아 두꺼운 표피 아랫목에 숨겨둔 감정의 마그마가 터져버렸다.
어느 시점부터 울고 있었는지. 벌겋게 짓무른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는 나를 오세훈이 안았다. 천천히 맞닿은 품에 미열이 오른 이마를 기댔다. 눅눅한 옷깃이 스쳤다. 채 삼켜내지 못한 울분의 감정들이 조금씩 공기 중으로 승화되었다. 열어둔 유리문 사이로 여전히 비는 세차게 내렸다.
그렇게 열아홉의 초입이었다.
너와 내가.
기어코,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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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언니ㅠㅠㅠㅠ불안했는데 맞았구나 하 ㅠㅠㅠㅠㅠㅠㅠ 언니도 미성이도 너무 안타깝고, 세훈이 너무 판타지적이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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