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내 취향에는 안 맞는 영화 TV Drama 보다 못해...ㅎㅎ
* Dinosaurs Before Dark/Mary Pope Osborne
* The Knight at Dawn/Mary Pope Osborne
* The Magic School Bus- Electric Storm
* 정글만리-2/조정래
* 정글만리-3/조정래
소설이지만 중국문화 이해하기가 된다
*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태원준
* 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
Couch Surfing 남의집 소파를 파도타기 하며 여행하는 것, 쉽게 말해 일반 숙소가 아닌
현지인의 집에서 숙박을 하는것. 전 세계의 배낭여행자들의 비영리 온라인 커뮤니티.
대부분 '신뢰'와'배려'를 무기로 국경을 초월한 새로운 '우정'을 만들고 싶다는 것.
이방인을 초대하는 사람을 '호스트' 초대받는 사람을 '서퍼'라 부른다.
* 명작순례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유홍준 계속
27. 몽인 정학교 : 괴석
조선 말기, 괴석을 잘 그려 '정괴석'이라 불렸다. 글씨를 잘써 광화문 현판을 쓰기도 하고. 장승업의 그림에 화제를 대필해
주었다. 생활이 넉넉지 못해 글씨를 가르치가도 했는데. 윤치호는 열네다섯 살 때 정학교에게 글씨를 배운 적이있다.
추사의 절친인 황산 김유근은 바윗덩어리를 그려 그림 장르를 이끌었고, 당시에 실내장식으로, 정원을 장식하던 태호석의 괴석이 크게 유행하던, 괴석은 정학교가 김유근 뒤를 이어 그렸다.
몽인의 괴석그림은 구도와 필치 모두에서 신선한 감동을 준다. 괴석은 생김새 자체가 기이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공허공간이 있어 대단히 조형적이다. 정학교는 괴석을 그리면서 수묵화의 여러 기법을 동원, 돌의 모양새에 따라 구륵법으로 형태의 윤곽을 잡기도 하고, 절대준 같은 준법으로 돌의 주름을 잡기도, 파묵법으로 질감을 나타내기도 하며, 태점법으로 생명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드물지만 채색 괴석도 그렸다. '남나비'는 채색화의 극사실주의 화가, '정괴석'은 문인화풍의 수묵 추상주의 화가였다.
영조시대-겸재 정선와 관아재 조영석....정조시대-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철종.고종시대-남나비와 정괴석이 짝을 이루다.
28. 오원 장승업 : 쏘가리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설적이 화가. 주어진 소재를 거침없이 잘 그려내 명성을 얻었지만 작가 정신을 발현한 화가는 아니다. 그럴만한 소양이 없었고 작가적 고뇌도 없었다. 장승업은 조실부모한 일지무식이 비렁뱅이로 부잣집 머슴으로 조인집 도련님이 글공부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사랑방 손님들과 함께 중국의 명화를 감상하는 것을 보다가 그림의 이치를 터득하여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장안에 퍼진 소문으로 졸지에 인기 화가가 되어 급기야 궁궐 치비대령화원이 되었다.
술과 여지를 몹시 좋아했으며 특히 얽매이기를 싫어흐는 통재불능의 인물. 돈을 벌면 주색으로 탕진, 42세에 장가를 들어 하릇밤을 지내고 처를 버렸다. 구속되는게 싫어 왕실 병풍 제작하라는 명을 받고 궁월을 두차례나 도망쳐 큰 벌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민영환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를 면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오원의 작품은 걸작과 졸작이 뒤엉켜 어떤 작품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명작으로 <수리-일명 호취도> <꿩>, <고양이>, 필묵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활려기 솟아난다. 다른 화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싱싱함이 가득, 기운생동의 공간이었다. 오원이 유명화가가 된 까닭은 단원 화풍의 매너리즘과 추사 아류의 문인 화풍에서 홀연히 벗어난 화가의 그림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데 있다.
오원은 배운 것이 없어서
'오원 장승업' 다섯 글자만 질질 끌리는 글씨로 겨우 써넣고 화제는 정학교, 안중식, 김영 같은 시화가들이 대필해주곤 했다.
장승업은 화가로서 자기 관리를 못해 쏟아지는 주문에 일일이 응하면서 절작을 남발. 오원의 '수리'. '고양이', 쏘가리' 같은 명작이 없었다면 조선 말기의 회화가 얼마나 쓸쑬했을까.
29. 석파 이하응 :난초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1820~1898)은 난초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독특한 난초는 '석파난'이라고 불릴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30세 때 난초 그림을 추사 김정희에게 배웠다. 초기의 난은 추사의 것과 아주 비숫하다. 섯파가 남초를 배운지 불과 2년도 안되어 추사 귀향, 유배지에서 풀려 과지초당으로 돌아홨을 때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지만 1%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열심히 노력하여 마지막 1%까지 열성을 다했다.
석퍼의 난은 대단히 개성적. 난초 그리는 법에 의하면 잎은 사마귀 배처럼 불룩하다가 쥐 꼬리처럼 뻗으라고 한다. 이를 '螳頭에 鼠尾' 라고 하는데, 석파의 난초 잎은 당두가 짧고 야무진 반면에 서미가 맵시 있게 뻗어 나가는 게 턱징. 참으로 흉내 내기 힘든 난법으로 어찌보면 성깔있어 보이고, 어찌보면 요염하다.
추사의 말대로 본래 난초에는 대가가 따로 없다. 화법 또는 서법에 따라 그리면서 자신의 서정을 넣으면 된다.
탄은 이정의 난초는 전아한 기품이 있고 잎새가 어여쁘기 그지없다. 능호관 이인상의 난초는 강직하기만 하다. 수월헌 임희지의 난초는 츰을 추는 율동이 느껴진다. 석퍼와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던 운미 민영익의 난초는 기개 넘치는 건란이다. 난초에서 굳셈을 본 것이다. 추사의 난초에는 서예미가 있다.긴 난초 잎을 그릴때는 붓이 바닥을 세번 누르는 삼전법을 그래서 추사난초에는 서예의 멋이 있어 긴난초 잎에는 긴장감 있는 리듬이 있다.
석파는 추사에게 배운 대로 예서법으로 시작하여 (당두) 서미는 추사의 삼전법이 아닌 초서를 쑤ㅡㄹ때 길게 뻗치는 장벌법을 구사. 그래서 석파의 난은 까슬까슬한 예서 맛도 있고 유려한 초서의 리듬도 있다. 긴장김이 아니라 서정이 살아난다.
30. 심전 안중식 : 백악춘효
조선왕조 500년 회화사의 첫머리 장식하는 것은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면 마지막 작품으로는 심전 안중식이 그린(1915)년 <백악춘효>이다. 즉 '백악산(북악산) 봄날의 새벽'이라고 했다. 빼앗긴 조국에 봄의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인 것이다.
제목은 백악산이지만 실제 그림의 주제는 경복궁이다. 백악산이 우뚝하고, 그 아래로는 새벽안개가 걷혀가는 경복궁의 근정전, 경회루, 광화문 그리고 해태상이 보인다. 청빈 육조거리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아 적막감마저 감돈다. 1915년 일제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며 궁궐의 전각을 허물어내고 있을 때였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설 계획도 이미 세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린 그림이기에 심전은 경복궁을 더욱 앞으로 내세운 것이다. 호악한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백악춘휴'라고 했을 뿐.
조선왕조의 마지막 화원으로 오원 장승업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외에는 알려져 있느게 많지 않다. 1918년 최초의 근대적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 민족서화가들의 모임이었다. 근대사회를 헤쳐나갈 아무런 준비도 지식도 없었으나 새시대를 열어갈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잃어버린 왕조의 애달픈 마음을 담은 <백악춘효>를 남겨 조선왕조 500년 회화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화가가 되었다.
31. 김관호 : 해질녁
1916년 조선인으로는 두번째 도교미술학교 유학생인 김관호가 졸업 작품인 <해질녁>으로 문부성 전람회에서 영예의 특선을 차지하자 언론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대적으로 이사실을 보도했다.
이 작품을 통해 조선인도 얼마든지 서양화를 소화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샘이다. 현재 이 작품은 모교에 소장되어 있다. 도교미술학교 졸업생들은 자화상을 제출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 그의 자화상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평양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근대미술의 기린아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우리 근대미술계를 이끌어 가는 화가로 성장하지는 못했다.그는 근대의 문턱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샛별 같은 존재였다.
32. 수화 김환기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현재 국보로 지정되 그림의 주인공은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 다섯 명 뿐.
20세기 화가로는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를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박수근과 이중섭은 서양화라는 새로운 조형어법을 한국적으로 토착시킨 화가이고, 김환기는 모더니즘을 구현한 화가다.
전라도 신안군 안죄도 섬마을 태생으로 서울 중동학교를 마치고 니혼대학 미술학부로 유학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다.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피난 열차>같은 작품을, 전쟁이 끝나고는 파리로 건너가 현대미술의 현장을 체험하고 한국적 서정을 바탕으로 한 세련된 모더니즘을 추구했다. <항아리와 매화가지>마음속으로 포착한 한국적 이미지는 매화와 백자 달항아리 등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또 다른 예술세계를 보여주게 된 계기는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앤날레에 한국작가로 출품(대상)하면서 였다. 고향의 별을 생각하며 찍은 무수한 점. 점에는 서정이 들어있어 서구모더니스트들의 냉랭하고 물질뿐인 올 오버 페인팅 색면파 추상, 미니멀 아트와는 다른 따뜻함이 서려 있다.
33. 고려사경 : 법화경 보탑도
일본 교토의 도지(東寺)에 소장된 '법화경 보탑도'느 고려시대 때 사경 제작에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잘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작품. 얼핏 보면 감지에 금물로 7층탑을 그린것 같지만, 실제로는 <법하견> 전7권의 내용을 글씨로 써서 7층 보탑도를 그린 것이다. 여백에는 흩날리는 꽃, 비천, 공양보갈 등으로 장식하고 탑신부에는 화불을 그렸는데 고려불화의 유려한 필치가 그대로 상아 있다. 후대로 가면 280자로 이루어진 <반야심경>같은 짧은 경문을 탑의 윤곽선을 따라 쓴 것이 나오지만 이처럼 탑신부는 물론 상륜부와 기홧골까지 모두 글씨로 새긴 엄청난 겅력의 작품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기유년은 몽골과의 전쟁이 치열할 때다.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마음이 거렇게 글자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것이다.
34. 숭례문 현판 : 사람들은 양녕대군 글씨로 맏고 싶어 했다.
남대문인 숭례문은 태조5년에 서울성곽 건설과 함께 창건, 세종 20년과 성종 10년에 고쳐 지은 것.
2008년 2월 방화사건 와중에 한 사려 깊은 소방관이 현판의 대못을 뽑아내고 바닥으로 떨어뜨려 놓았고, 이것을 당시 문화재청 직원이던 강임산 씨가 밖으로 끙어내 살린 것이다. 현판 길이 3.5미터, 폭 1.5미터 무게 150키로그램이나 된다. 이현판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데 경찰이 10여명이나 동원 되었다.
현판 글씨는 참으로 장대, 한 획의 길이가 1미터나 된다. 당대의 명필이 쓴 정중하면서도 품위 있는 글씨다. 현판의 글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확실치 않다. 여러설을 종합하면 본래는 양녕대군 글씨였던 것을 중건하면서 유진동 글씨로 교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150여년 전,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는 경복궁 영건도감의 제조를 맡았을 때 그 일을 기회로 삼아 숭례문 현판을 탁본해도었다. 지금도 서울 상도둥에 있는 양녕대군 묘소의 사당인 지덕사에 보관되어 있다. 숭례문 현판을 복원할 때 지덕사 탁본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번 복원에서 숭례문 동쪽에 53미터, 서쪽에 16미터 구간의 성곽이 복원됨으로써 성곽의 대문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 숭례문이 원래의 바닥을 다시 찾았다는 점이다. 서울 현재 지반은 한양 천도 또는 흥선대원군 경복궁 복원 당시에 비해 30~50cm 정도 높아져 있었다. 그런데 복원 때 500여년 동안 대문을 지나다닌 사람들의 발자국에 닳고 닳아 반들거리는 바닥돌이
나왔다. 그야말로 역사를 간직한 유물이었다. 이 바닥돌에 맞춰 숭례문의 지반 높이를 낮추었다.
이렇게 원 모습에 많이 가까우진 숭례문을 보면서 다시는 그런 불행을(방화사건) 겪지 않기 바란다.
35. 봉래 양사언 : 비자설
"대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로 유명한 봉래 양사언(1517~1584)은 안평대군,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시대 4대 명필로 꼽히고 있다. 안평대군은 유려하고 격조 높은 行書, 한호는 정확하고 또렷한 偕書, 김정희는 강렬한 개성의 추사체라면, 양사언은 거칠 것 없는 호방한 草書가 특기다.
아버지 양희수는 산수 유람을 좋아했고, 유람길에서 인연이 된 어머니(후처)는 아버지가 타계하자, 전처 소생들에게 아들(이복동생)을 부탁하고 자결을 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양사언은 낭만적 도피증이 생겼다고 한다. 금강산을 자주 유람하고 호를 봉래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금강산 주변에서만 근무를 했고, 회양군수로 재직시 내금강 만폭동 너럭바위에 그 유면항 '逢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다. 한때 벼슬을 버리고 외금강 삼일포에서 지낼 때 즐겨 앉았던 바위를 지금도 '봉래대'라고 부른다.
48세 때 금강산 아래쪽 감호에 직은 집을 짓고 飛來停이라는 현판 글씨를 쓰는데 '飛'자는 잘되어 飛자만 달았다. 후에 귀양을 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잘 지켜달라고 부탁. 객사를 하여 돌아오지 못한 집에 돌풍이 불어 집이며 족자가 흩어졌는데 '飛'자 현판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바로 양서언 객사날 이었다. 이 전설이 말하고 있는 예술론은 '예술은 혼이다' 유식하게 '예술은 에스프리(esprit)다'하는 것이다.
36.홍랑 : 절유시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세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이별의 마음을 간절해 담은 이 시조는 선조 때 함경도 기생인 홍랑이 임과 헤어지면서 지은 시조다.
홍랑은 이 시조 한 수로 황진이, 매창과 한께 조선시대 삼대 여류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시한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최셩창 북평사를 함관령 고개에서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 주민의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양계의 듬'이 있었다.-)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담아 바친 이벌의 시다. 최경창 사망 소식에 홍랑은 파주에 있는 묘소 앞에 움막을 짓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홍랑은 최경창의 집으로 달려가 그의 글과 글씨를 거두어 잘 보관, 後에 최씨 집안에 전달. 죽은후 최씨가문에서는 홍랑을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 묻어주고 시제도 올린다고 한다.
이 시조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씨가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본래 한글 서예작품은 드문 편이고 특히 임진란 이전 한글 글씨는
아주 귀해 목판 인쇄본으로나 볼 수 있었다. 여성의 한글 글씨는 언문 내간체, 그리고 궁체라고 해서 멋지게 공글린 글씨도 있다. 홍랑은 글씨는 그 어느 것과도 다르다.
37. 선조의 한석봉 사랑
선조 때 여말 선초부터 유행하던 송설체를 당대의 명필 한석봉은 왕휘지체로 전환시킨 장본인이다. 송설체는 균정미가 있는 대신 유약한 면이 있는데 하나의 서체가 근 200년간 유행하다 보니 글자들이 판에 박은 듯 변화가 없어, 서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시점에서 한석봉이 등장한 것이다. 선조의 한없는 사랑과
지원이 있었다. 석봉은 수많은 비문을 썼다. '서경덕 신도비', 사명대사 석장명비'. '행주대첩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명비. 현판 글씨는 大字이면서도 단아하고 중후한 멋을 간직 <구인당>,<계정>이 있다.
서예사적으로 가장 큰 의의를 지닌 것은 <천자문>. 다섯 차례나 중국 사행에 동행하여 중국에서도 명필로 악려짐.
38.왕교 이광사 : 천금첩
조선 후기 회화는 진경산수, 글씨는 고유색이 강한 조선풍의 동국진체가 출현. 東國眞體는 옥동 李서와 그의 벗인 공재 윤두서가 시작하여, 공재의 이질인 백하 윤순이 이어받았고, 백하의 제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에서 완성. 동국진체는 미술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예술적 경지가 진경산수에 서 겸재 정선이 보여준 높은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평가. 추사가 혹독한 비판을 했는데 이는 원교보다도 원교의 여야역에 대한 비판이었다. 추사는 원교가 죽고 20년이 지나서야 태어났다.
원교의 글씨는 모양새 뿐만 아니라 획 하나하나에도 울김과 기세가 등등하여 때로는 '계곡물이 줄줄
흐르는 듯' 친근하고 때로는 '겨울눈이 쏟아지는데 사냘꾼이 말을 치달리는 듯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백하는 전적으로 글자의 구성을 위주로 하고 원교는 전적으로 획을 위주로 하였다. 백하의 글씨는 자태가 좋고 원교의 글씨는 기세가 좋다. 그래서 백하는 비록 초서라 하더라도 온화하고 단정한데, 원교는 비록 해서라도 반드시 우울한 심기를 떨치듯 삐뚤다. 원교는 20년 귀양살이 동안 무수히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다. 벙풍, 족자, 서첩 등은 물론이고 비문과 묘지를 써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전라도 지방 사찰에서도 현판으로 대흥사, 천은사, 백련사 등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다. 원교의 글씨는 각체가 들어 있는 <천금첩>이 명작이다.
블우한 삶 속에서 동국진체의 마지막 서예가가 되었지만 글씨의 본질을 뚫고 들어가는 탐구와 피눈물 나는 수련을 계속하지 못하고 울적한 심사를 실어내는 데 더 마음을 썼다. 그것이 그의 예술적 한계였다. 더욱 불행한 것은 자신도 세상도 그의 예술에 만족하고 더 높이 끌어올리는 비평도 없었다는 점이다.
39. 다산 정약용 : 매조도
실학적인 자세와 <여유당전서> 500여권은 남긴 학문적 업적. 유배 초기에 '주역'.'중용'등에 주석을 달았고, 유배 마지막 5년에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이른바 1표2서를 저술. 18년 유배기간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다산은 아주 깔끔한 사람으로 일상생활도 글씨도 정갈하다. 강진 유배지에서 제작한 <매조도> 시화축은 다산 그림과 그씨의 백미다. 유배객의 외로운 삶이 다 담겨 있다. 유배 13년째 되는 해에 동암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매화가지에 앉아 있는 한 쌍의 새가 조용한 필치로 단정하게 그려져 있다. 붓으 쓰임새가 단조럽고 먹빛과 채색의 변화도 구사되지 않았건만 그림에는 애잔함이 감돈다. 덧붙인 시에는 처연한 고독감이 서려 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으로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
유배지에 홀로 사는 외로움을 달래고자 날아든 새에게조차 함께 살자고 조르는 다산의 심사를 알 만도 한데 글씨는 단정하면서 빠르게 흘러 써서 애절한 마음이 절절이 흐르는 것 같다.
40. 추사 김정희 :운외몽중 시첩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기구한 인생을 살았지만 인복은 많아 교류 범위는 아주 넓었다. 당대 문인.학자는 물론이고, 중인 출신의 서화가 제자들이 집단을 이루고, 초의선사를 비롯한 스님들과도 깊이 교류했다. 추사의 삶과 예술은 귀양살이 후 말년에 초점이 맞춰져 잘나가던 40세 전후에 장안의 명사들과 어울린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추사의 벗들과 예술은 <운외몽중 시첩>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시첩은 총 26면이다. 42세 늦가을에 쓴것으로 40대 추사 글씨의 최고 명작. 大字로 쓴 '운외몽중' 넉자는 예서체의 골격에 해서체의 방정함이 곁들여 있어 글자 자체의 울림과 무게가 동시에 느껴진다. 추사의 글씨에 怪가 들어가지 않을 경우에는 이처럼 단아하면서도 굳센 멋을 풍긴다.
41. 추사 김정희 :해붕대사 화상찬
세상을 떠난 것은 71세 되는 1856.10.10 이다. 다계하기 5개원 전 병든 몸으로 과천 과지초당에서 썼다.
호운이라는 모르는 스님이 해붕대사의 문도로 스님의 영정을 만들면서 거기에 추사의 화상찬을 싣고 싶다고 부탁하는 편지다.
40년 전 수락산 학림암으로 해붕선사를 찾아 불교에 대해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때 초의가 해붕을 모시고 있어 만나는 인연되었다. 해붕대사가 이를 기념하여 선게를 한 수 지었다.
그대는 집 밖으로 행하고
나는 집 안에 앉아 있네
집 밖엔 무엇이 있던가
집 안에는 원래 불기운이 없다네
<해붕대사 화상찬>은 초의선사의 뛰어난 장황 솜씨를 역력히 보여주는 깔끔하고도 예쁜 서첩으로 꾸며져 있다.
해붕대사의 영정은 지금 순천 선암사에 있는데 영정 오른편 위쪽에는 추사가 지은 화상찬이 그대로 적혀있다. 누군가
추사의 화상찬을 옮겨썼는데 예의 그 차사체를 방불케 한다. 사람들은 추사를 존경했던 위당 신솬화의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42.일월오봉도 : 산처럼 위엄이 높고 해와 달처럼 세상을 비추소서
조선시대의 사회구조로 보면 양반 위로는 왕실, 아래로는 서민이 있었고, 왕실과 서민은 양반문화와 비숫하면서도 또 다른 미감의 문화를 나타냈다. 왕실문화는 궁중미술에, 서민문화는 민화와 민예품. 특히 왕실문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시대 문화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양반문화와는 구별되는 권위가 구현되어, 건축, 공예, 회화 등에서 형식, 소재, 크기, 색깔 등에 차별과 가장 좋은 재료와 높은 기술이 동원됐다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왕의 상징으로 임금의 내실도 장식하고, 의궤에서 옥외행사 때 왕의 자리를 상징하는 표시로 쓰였다. 심지어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의 제작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점검할 때도 가리개로 만든 일월오봉도 삽병에 어진을 정중히 모셔놓고, 검토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한 각 궁궐 정전의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지금도 설치되어 있다. 일월오봉도에는 해, 달, 산봉우리 다섯 개, 넘실거리는 파도, 폭포 한쌍 그리고 소나무 한 쌍이 좌우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채색도 담담한 수묵담채가 아니라 광물성 재료의 진채를 사용하여 화사한 분위기가 감돈다. 여기에서는 나라의 태평성대가 느껴진다. 같은 문화권이라도 다른나라에는 없는 조선왕조에만 있는 독창적인 창안이다. 일월오봉도는 궁중의 장식화로 끊임없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초부터 제작된 오래된 일월오봉도는 전하지 않고 왕조의 마지막에 장식되었던 19세기 것만 남아 있다. 그것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제대로 보존된 것은 현재 20폭 정도 만이 전하고 있다.
43. 십장생도 : 장생은 어디에나 있지만 십장생은 조선에만 있다.
십장생이란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열 가지 경물과 동식물로 자연에서 해,달,산,내,식물로는 대나무,소나무,영지, 동물로는 거북,학,사슴 등을 말한다. 때로는 돌,물,구름을 껍기도 하고 신선이 먹는다는 천도를 그려 넣기도 한다.십장생 그림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아주 널리 사랑 받았다. 중국과 일본에는 십장생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장생은 있어도 십장생이라는 개념은 없었던 듯하다. 십장생 도상의 기본은 궁중에서 사용된 십장생도 병풍이었다. 진채로 그려진 장엄한 청록산수화이다. 화가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고 주어진 도상을 그린 것이지만 강렬한 예술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왕살에서는 십장생도 병풍을 많이 제작하여 왕과 왕비의 내전을 장식했고, 붙밭기창이 있는 것도 있다. 옥외 행사를 비롯하여 왕실의 혼례나 환갑 같은 큰 잔치 때는 벌도의 십장생도 병풍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낡으면 새로 제작하여 계속 교체했기 때문에 왕조 말기에 남아 있던 것만이 전한다. 30점 정도.
44. 해학반도도 : 꽃이 피는 데 삼천년 걸리는 천도복숭아
궁중 장식화에은 일월오봉도,십장생도,궁모란도,책가도,요지연도,해학반도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요지연도는 중국의 서왕모 전설을 그린 것. 요지연도는 서왕모가 주목왕에게 연회를 베풀어주는 장면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신비로운 복숭아를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여러 신선들이 요지를 향해 바다를 건너오는 모습을 그렸다.
조선왕조의 궁중 장식화에는 요지연도에서 서왕모 이야기는 제외하고 신비로운 복숭아 이야기만 환상적인 장식화로 그린 <해학반도도>라는 것이있다. 해학반도도는 십장생도와 좋은 짝을 이룬다. 청록진체를 기본으로 하면서 바다에는 흰 물결이 일고 하늘에는 붉은 해와 수십마리의 학이 날고 있다. 같은 전설에 기반한 그림이라도 해학반도도가 요지연도보다 더 인기있고 감동적이다.
45. 궁모란대병 : 축제의 현장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부귀의 상징
궁중 장식화의 제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모란병풍. 가례가 있을 때면 십여 틀씩 새로 제작하여 연회장을 장식. 갸례뿐만 아니라 임금의 50세 축하연, 왕대비의 환갑연 또는 종묘제례 같은 길례 때도 모란병풍을 야외에 설치. 전해져 내려온 것이 거의 100틀 소장. 그렇다고 모란 그림이 왕실의 전유물이거나 상징은 아니었다.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왕실부터 민간까지 널리 사랑받아왔다. 문헌상으로는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나타나며 고려 상감청자와 고려불화, 조선 분청사기와 청화백자에서 화려한 무뉘로 장식되어왔다. 민가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는 거의 반드시 모란병풍을 치고 심랑심주가 맞걸을 했다. 각 마을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모란병풍이 있었다. 양반들이 혼례 때면 제용감에서 제작해둔 궁모란대병을 빌려 쓰기도 한다.
46. 책가도 : 여가가 없을 때는 칙가도를 보녀 생각했다.
책가도는 서가에 책이 가득 놓인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책거리병풍'이라고도 한다. 정조이래로 크게 유행. 문인인 이규상은 <일몽고>에서 단원 김홍도를 얘기 하면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당시 화원의 그림은 새로이 서양의 사면척량화법(투시도)을 본받고 있는데 이런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는 한쪽 눈을 감고 바라보면 그려진 길물들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우뚝 서지 아니함이 없다 세속에서 이를 가리켜 책가도라고 하며 반드시 채색을 했다 한시대 귀인중에 이런 그림으로 장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김홍도는 이러한 재주에 매우 뛰어났다.
책가도에는 화가의 낙관이 없다. 순조때 장한종과 철동때 이형롣은 책가도 속 돌도장에 자신의 이름을 살짝 새겨 넣어 화가의 이름을 밝히기도 했다.
47. 창덕궁의 현판과 주련
창덕궁 1405년 태종5년에 창건. 경복궁의 별궁이 아닌 離宮으로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역대 왕을 거치면서 뒷산은 정원으로 계속 개발. 인조는 옥류천에 인공 고수를 만들고 정자를 지었다. 정조는 부용정에 규장각을 세웠고, 순조는 99칸 양반가를 재현한 영경당을 지었으며, 현종은 자신이 기거한 낙선재를 새로 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왕궁으로 사용되지 않으면서 창덕궁 전체를 비원이라고 부그며 이를 관리하는 비원청을 두었다. 왕실의 의식을 행하는 외조공간으로서 인정전 권역, 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희정당과 대조전 권역, 국정 자문을 위한 학술기관으로서 규장각 권역, 사대부 생활공간을 본뚠 연경당과 낙선재 권역 그리고 옥류천, 부용정을 비룻한 후원5권역으로 나뉜다.
돈화문 "교화를 돈독히 한다"라는 뜻의 돈화문은 현판글씨를 보면 장중핟. 주구의 글씨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현판은 영조가 쓴 천당대의 <영화당>현판이다. 옥류천 육중한 바위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이라는 글씨와 숙종이 지은 오언절구가 새겨 있다. 청덕궁에는 십여 개의 정자가 있는데 제각기 이름을 갖고 있으며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낙선재라는 현판은 추사의 친구 섭지선의 글씨고 주련은 추사의 스승인 용방강의 글씨다. 작선재 정문에 걸린 <장락문>은 훙선대원군이 끈 것으로 중후함과 멋이 감동적이다.
48. 영조의 : 효손
영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2월7일 집경당에 나가 왕세손과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숭정원일의 기사를 삭제해달라고 요청한 효심에 감동하여 직접 '효손'이라 쓰고 은도장을 만들어주겠다고 공표.
국립고궁박물관에 이 은도장과 관계된 일괄 유물이 있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효손'이라는 은도장을 담은 상자와 <유세손서>를 넣은 나무퉁을 항시 지니고 다녔다. 정조 때 그린 의궤도를 보면 옥좌 앞에 도장함과 나무통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게 한 아비의 한과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정총이 지켜져야 한다는 늙은 왕의 간절한 소망이 절절히 다가온다.
49. 조선왕실의 어보와 국새
어보는 왕실에서 제작한 의례용 도장이다. 기록상 조선왕실 어보 366과를 제작하였고 그중 324과가 전한다. 어보는 기본적으로 거북이나 용 모양의 손잡이에 끈이 달려 있는 도장이다. 대개 높이 9cm 무게 4kg 옥돌로 만들거나 은과 구리를 섞어 만든 다음 금으로 도금하였다. 글씨는 적게는 4자,
많게는 116자. 어보는 보자기에 곱게 싸서 내함에 넣고 내함을 다시 보자기로 싼 뒤 외함에 넣고는 한약재로 된 방충제를 넣어 자물쇠로 잠가서 보관했다.
어보와 국세는 엄연히 다르다. 국새는 왕명과 외교문서에 찍는 인장으로 국왕의 상징. 국새를
받았다는 것은 곧 왕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뜻. 중국은 국새를 통해 주변부 국가를 외교적으로 통제. 주변부 국가에 국새를 내려줌으로써 동아시아의 리더로서 각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외교적 형식을 취한것이다.
고려는 송,요,금,원,명에서 금인을 받아 국새로 썼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 국새를 명나라에 돌려주고 새 국새를 받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종3년에야 비로소 '조선국왕지인'이라는 금인을 받았다. 그런데 국새는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국왕지인'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만 사용, 국내 분서에는 그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금인을 사용했다.
1894년 갑오개혁 후에는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끝내면서 대조선국보가 만들져 사용.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는 大韓國璽,皇帝御璽라는 도장을 만들어 사용했다. 1910년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다시는 국새가 사용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분실되었다. 근100년간 행방을 모르다 2008년 12월 문화재청이 미국의 한 수장가로부처 고종황제가 사용한 '황제어새'라는 국새를 구입.
어보는 왕실 의례용 도장이고 국새는 제국의 상징이니 형식은 같아도 의미는 전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