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의 아픔 "
저는 엄마입니다. 현재 병역의무를 치르는 아들이 있기에 뒤늦게 파헤친 윤 일병 사망 과정 보도에 날마다 가슴이 아린 현역병의 부모입니다.
올해 들어 두 번째. 세월호 대형 참사에 자칫 묻힐 뻔 했던 억울한 죽음이 토네이도처럼 하늘로 솟구치고서야 비로소 저는 알았습니다.
히틀러의 생체실험 때도 이런 고문이 있었겠습니까. 학대 행위 아래 원하지 않는 사정을 강요당했던 청춘. 얼마나 혹독한 치욕이었을지 상상만으로도 세상 모든 여성은 눈이 감기고 치가 떨립니다. 그러나 저는 무능한 국민입니다. 소견도 좁은 평교사입니다. 안타깝게도 확산되는 청소년 생명 위기를 고민하여 부지런히 글도 썼고 올해 책도 냈지만 허탈합니다. 변했다는 병영 내에 이토록 잔인한 사고가 불거질 줄은 몰랐습니다. 김 일병 사망은 국방부보다 더 무능한 작가인 제가 짚어내지 못한 13월의 지독한 아픔입니다.
윤 일병은 죽어서도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를 만들었고 군 사망 유가족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습니다. 무책임한 수뇌부의 어깨에 번들거리는 계급장을 떼어냈고 정치인들이 숨을 곳을 찾게 했습니다.
사회 방방곡곡이 끓는 팥죽처럼 들썩거립니다. 철통 국방부 상황실이 불타는 집이 되었습니다. 오죽 다급하면 핸드폰 허용 방안까지 강구한다지만 전 국민의 원성은 급처방으로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윤 일병은 일개 내무반만이 아니라 탐욕과 패덕이 판치는 이 나라를 혁명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 그 자체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의 군복무를 지켜본 현직교사인 저도 이 순간, 전 국민과 정책 개선에 영향을 미칠 언론인, 정치인들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통의 진앙과 문제의 근원을 파악했으면 이제 대오각성, 새로워져야 합니다.
한국의 청소년 교육, 특히 남학생 교육에 싱크홀이 생겼습니다. 현직교사의 이 문제 제기에 주목해주십시오. 이것이 근원적으로 우리 아들들을 생명 위기에서 보호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올 6월에 낸 「SOS!생명스토리12」라는 자살예방 계몽 책에는 이런 문구의 꼭지가 있습니다.
“성차별, 학교는 왜 남학생에게 유독 매몰찬가?”
남성의 염색체가 유전학적으로 질병이나 장애에서 불리하다는 것은 다 아는 상식입니다.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태생 자체가 위기를 맞을 확률이 여성 쪽보다 높습니다. 특수학급을 담임해본 특수교사는 다 압니다. 장애학생 중에 남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를. 게다가, 최근에는 교실마다 집단생활 적응에 실패하는 ADHD 남학생이 늘고 있습니다. 유독 남학생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공동체 조직에서부터 우리 아들들은 이렇게 열세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학급 반장, 학교 대표도 대부분 여학생이 점유합니다. 교직자들의 성비율뿐 아니라 국가 사법, 외무고시까지도 여성의 비중이 어느 정도로 높아졌는지 국민들은 알고 있습니다.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애써 온 국가정책이 에너지를 여성 쪽으로 부어주었기 때문에 얻어낸 결과입니다. 이 덕분에 부모세대의 고질적이던 여성 홀대의 악습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제 세상은 변했습니다. 사회 여기저기서 역차별을 호소하는 남성들이 늘었습니다. 지난해에 의도적인 퍼포먼스 끝에 남성인권연대 대표가 자살을 한 사건도 아웃코너로 몰리는 한국 남성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했던 성평등 개선 정책의 무게 비중은 이 시점부터 재조정되어야 합니다. 평형 저울추가 여성 쪽으로 너무 기울어 한국의 보통 남성들이 너무 주눅 들고 무력해졌습니다. 특히 여가부는 이곳저곳에서 툭툭 불거지는 남성 역차별의 상황을 주시해야 합니다. 윤 일병의 억울한 죽음은 선임 몇 명에 대한 살인죄 적용과 수뇌부 사퇴로만 끝내고 말 일이 아닙니다. 한국의 신세대인 전 남성에 대한 격려와 배려 정책이 보완 수립되어야 합니다. 이 끔찍한 사건을 처벌 수위 논쟁으로 일관하다가 끝내면 한국 남성은 더 크게 무너집니다.
잘잘못 따지기에만 급급하면 안 됩니다. 그 아들의 부러진 갈비뼈, 터져버린 내장, 뇌와 골육에 선명한 발자국에 모스부호처럼 씌어있는 한국 남성의 현주소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분명, 어린 남성들에게 힘을 실어줄 기본정책 입안이 거론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교육제도도 남성성의 특질을 감안한 성 평등 배려 세부계획이 가미되어야 합니다. 한 자리에서 30분을 착석하기도 힘든 남학생들의 특성을 알면서도 여학생과 똑같은 교육과정으로 가두는 학교가 폭력의 온상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수렵시대부터 유전자에 잠재된 공격적이고 역동적인 생체에너지는 가두고 억압하면 생성된 심리적 독소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산합니다. 학교가 폭력 학습, 폭력 온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독소, 정체되어 변질한 에너지 덩어리는 집단이 될수록 광폭해져서 공동체를 겨냥하고 생명을 위협합니다.
한국 남성교육은 대전환을 모색해야 합니다. 남성의 생태에너지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교육은 결국 파멸을 초래합니다. 정체되어 억눌린 에너지는 풍선효과처럼 결국 어디선가 터지고 말 것입니다.
자녀교육의 경험은 없는 박 대통령도 이미 병영 문제의 근원을 간파하셨습니다.
‘군대가 수용 공간이 아니라 생활공간이 되게 하라’에는 한 마디로 ‘억압의 요소를 최소화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집단 유지와 통솔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매뉴얼을 ‘생명존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원칙만 남기고 모두 권리는 생명 주인에게 환원하라는 말입니다.
억압은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독소입니다. 생명은 누구나 자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짐승보다 비천한 구성원들에게 시달리다 갈기갈기 찢기고 터져서 끝내 숨진 꽃봉오리 청년. 부모세대들은 그 억울한 죽음에 맞는 응분의 보답을 치러내야 합니다. 고개 숙인 국방부를 송두리째 변혁하고 남성성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새삼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내야 합니다. 국가 존속 때문에 출산율 저하를 걱정한다면 당장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참 순량하던 한 아들이 골병들어 차갑게 식은 주검으로 어머니의 안방마다 내던져지는 요즘입니다.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보다 더 끔찍하게 희롱당하고 더 참혹히 찢기어, 끝내 전 국민을 ‘얼차려!’ 시킨 한 가정의 소중한 아들입니다.
바지에 마지막 오줌까지 싸는 극한까지 버티었던 모진 생명. 능욕에 만신창이 된 몸을 뒤늦게 확인하고서야 이 땅의 어머니들은 분노로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피에타 그림 속의 성모가 되었습니다. 또 한 생명을 놓치고 애타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쓴 이 글이 억울한 넋 떠나는 길을 닦는 요령소리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