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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th. Jan(금)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여기선 어울리지가 않는다. 무소식은 진짜 불안을 낳고 사람 잡는 게 된다. 연일 기다리는 이 심정들은 과연 알아주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Owner, Charterer. Shipper, Consigner? 천만이다. 그들은 그들의 선박, 그들의 화물 얼어붙은 고기를 기다리거나 걱정하지 우리를 염려해 주질 않는다. 가족을 아니면 마누라, 그것도 천만이다. 하루라도 건강하고 잘 있기를 바랄망정 그리고 제각기의 삶에, 생활에 빠져 필요한 시간이외는 잊어버리고 있을 망정 이 기다리는 세상의 동정을, 소식을 또한 우리들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켜줄 이 간절함을 알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대로 해는 뜨고 지고 많던 적든 대가가 걸린 하루는 지나갔고 빚진 사람의 하루분의 이자는 붙었고 집집의 전기와 수도의 치침은 돌았을 것이다. 그저 그런 하루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운수가 대통하여 1년 365일이 늘 이랬으면 하고 귀신한테 비는 사람도, 독하게도 재수에 옴이 덕지덕지 붙은 하루가 되어 침을 탁 받고 어서 가라고 외치는 작자도 있을 것이다. 새로이 세상에 태어난 복된 날이 되기도 하고 영원히 삶은 종지부를 찍고 저 세상으로 간 날이 된 사람도, 새로이 장가가고 시집가서 황홀하고 어리둥절하며 그저 거짓말 같은 날이기도 한 군상도 많은 하루임에 틀림없다. 완전히 지구 밖이 된 지금의 이 처지를 어떤 뉴스가 닥쳐도 그림의 떡처럼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말 것만 같다. 1마일 떨어져 함께 닻을 내리고 기다리는 선명도 국적도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배가 있어도 물길이 이어져 있어 걸어갈 수도 없고 헤어가지 못하는 이상 수천리 저쪽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냥 개새끼들이라고 욕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도 분명히 정상은 아니렸다.
Dock Order를 가급적 빨리 송부하라는 德丸의 Cable를 받았다. 일본 귀항하면 정기검사를 받을 것이란다. 이제 분명히 익어가긴 하는 모양이다만 아직은 운항권을 갖고 있는 용선자측에는 역시 아무런 연락도 지시도 없다. 마치 내 눈앞에 넓게 펼쳐진 대서양 태평양 아니면 인도양의 갈 길이 구상되어 오듯이 선주측도 무언가 새로운 계획과 시도를 하려하고 있다. 양하 일정도 타전하라고 했다만 아직 언제 입항은커녕 부근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어쩌면 Canpex에 일단 용선료의 지불이 늦어진 것 같고 그래서 德丸측은 새로운 거래처를 터고 재정비하는 인상도 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돼지는 않아야 하는데 -. Canpex에 일단 작업비 확인을 위한 그리고 급유 수배를 타전하다. 직접적인 전보연락이 없으니 무얼 궁리하고 생각하는 것인지 캄캄하다. 형인 Mr. Parso의 사팔이 눈에 비해 얇은 희색빛 안경 뒤에서 눈알을 반짝이며 입가에 뱅긋이 맴도는 뜻모를 미소의 Mr. Tikam녀석의 모습이 떠오른다. 1년 더 부탁하자는 그 계획에도 분명히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28th. Jan(토)
次航이 Las-일본간이라는 것을 아직 알리지 않은 체 일단 Docking Order를 작성토록 각부에 지시하다. 선주로서 해주든 안 해주던 그 결과는 나중 가서 현장을 보고 서로 의견을 조정, 실시할 테지만 우선 우리로서는 공사자체의 내용을 생각하지 말고 선박으로서 안전성 감항성 등을 중점적으로 참작하여 가급적 상세하게 빠진 곳이 없도록 하게 했다. 정기검사래야 별 것은 없을 테지만 자기에 나라에서 하는 이상 다소 까다로울거다. 본선측으로서는 다행이다. 지난해 7월 Las의 Astican Dock의 그 지질구질한 방식 때문에 혼이 난 일을 생각하면 천만다행이다. 久保감독도 잘 느꼈을 것이고 회사로서도 짐작을 했을 것이다. 10여일이면 끝내고도 남을 일을 한 달 걸리고도 제대로 못한데다 6만불 가까운 Charge를 물었으니 -. 새삼 손보고 정비하여 안심하고 1-2년을 다시 이쪽 방면에 배선을 하는 것이 장기적인 면에서 훨씬 경제성이 있는 일이다. 교대가 돼버리면 나는 그만이지만 사실상 Dock는 귀찮고 하기싫은 일이다.
냉동기 수리수당을 $2,000지불하라는 회신을 받다. 아마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보낸 것인데-. 그렇담 왜 진작 금액을 정하지도 않고 보냈을까? 또 어째서 1500불만 주라고 했다가, 재 요청하자 2,000불을 다 주라고 했을까? 얄팍한 속셈들이 눈이 보이는 듯하다. Main Deck의 All Painting이 두 번째로 시작되고 Funnel Mark도 깨끗이 칠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상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진 정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간 많은 일들을 했다. 일본 귀항까지 더 이상 보기 흉하게 녹이 나오지 말도록 하다.
오늘이 토요일, 역시 아무런 통보가 없는 걸 보면 내일까지는 안심(?)해도 좋을 성싶다. 하루가 如三秋라더니 -. 아직은 예정을 분명히 잡을 수 없지만 차항이 결정되다 싶이 한데다 우리의 Dead Line인 3월 10일은 자꾸 닥쳐오고 있으니 공연히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귀국일이 가까워지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식욕이 줄고 잠도 안 오고 - 하는 그 뻔한 귀국병 증세가 벌써 낌새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아직 남은 마지막 날까지는 그래도 할 일이 많다. 어쩌면 이번으로 물길을 그만두어도 될 가능성을 찾을지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을 걸어본다면 역시 이 좋은 시간을 무위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땅을 딛고 서는 이런 한가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곧 실업자임을 뜻하는 것이 된다.
三浦군이 준 ‘おかしな 死體(ホトケ)'을 읽다. 동경대학 법학부 출신의 海渡英祐씨가 쓴 단편추리소설집이다. 주인공들의 이름을 전부 역대 일본 수상의 이름으로 했다. 하나의 풍자이리라. 별로 배운 것이 없는, 그래서 20년간 형사노릇하면서도 겨우 경무보 밖에 못한, 그러나 동경시내의 강력한 살인 사건을 귀신같이 해결하는 고집쟁이고 심술궂은 吉田경부의 수사물이다. 시원스럽게 읽고 그 숨은 뜻을 척척 알아내지는 못해도 그런대로 뜻을 알 수 있으니 내 스스로 생각해도 많이 늘었다. 한권씩 비록 시껄한 책이나마 읽고 나면 단어 한 두어개라도 입 안에 남을 수 있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다. 영어가 그 정도로 되자면 얼마나 더하면 될꼬? 神德丸 Sapale 양하후 출항. Senegal로 간다며 본선 지날 때 VHF로 연락해 주겠다더니 거리가 너무 먼가 소식이 없다. 알려온 정오위치와 항로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더니 -. Sapale.의 항정을 참고로 들어두고 싶었는데 -.
29th. Jan(일)
실상 내 뿐만아니고 모두들 많이 그을렀다. 이곳 사람들이야 나보다, 아니 처음부터 비교할 수 없는 색깔이니 아무리 그을렀다고 해도 희게만 보인다. Africa는 처음이란 三浦군이 땀을 너무 많이 흘려 보기가 딱할 지경이다. 좀 구우라고 권해도 막상 집에 가면 애들이 몰라보고 ‘おじさん(아저씨)’이라 하겠다면 박장대소를 하더니 -. 실은 내 자신도 귀국하기로 작정한 이후에는 가급적 일광욕을 피하고 좀 하에지려고 애쓰는 편이다. 마누라도 너무 검으면 못 봐준다고 했다. 흰 살결의 놈들은 구우면 빨게지는데 우리네 살결은 검은색과 누런색이 더욱 조합을 하는가 누르티티 해져가는 데는 영 마음에 안 든다. 48가지 색중에 맞는 이름이 없을 것 같고 그저 알기 쉽고 하기 쉬운 말로 하면 그 예의 ‘똥색’이다. 거기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뭔가 좀 마음에 안 드는데다 강한 햇살이라도 받아 얼굴이라도 찡그리고 있을 땐 꼭 불독개가 치통이라도 참고 있는 표정이다. 무척도 많이 물리고 부지런히 약도 발라 문질렀다. 아마 내 얼굴에 그처럼 정성을 드렸다면 美男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덕분에 한군데도 덧난 데가 없는 것이 그만큼 구운 덕분인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다행한 일이다. 비록 살갗뿐만 아니고 지난해에는 크게 앓은 적도 없었다. 설사 몇 번, 그리고 콧물감기 두어 번 앓은 이외는 잘도 견뎠다. 식욕도 좋았고 배변도 극히 정상. 지금도 다소 그런 증상이 남아 있기는 해도 숙면이 안 되는 것이 걱정이다. 매일 정한 시간의 일정한 양의 더운 식사가 좋은 Condition을 유지하게 했을 것이다. 거기다 금주하다 싶이한 술! 과연 그놈이 안 들어가니 심신이 미칠 기회가 없었던가 보다. 출국 후 취기를 느낄 만큼 마신 것은 겨우 한 두번뿐이였으니 그만큼 정신적으로 여유를, 무거운 책임의식을 가졌다는 증거일거다. 술 때문에 선내에서 말썽이 숱하게도 있었기에 그 때마다 출국직전의 추한 모습이 떠올려졌고 결국은 그 때문에 마치 초봄의 많은 비가 1년 농사 망치듯이 한 해 동안 마누라한테 직싸게 당한 원인이 되었다. 어떤 때는 한 번씩 취해보고 싶기도 했고 충동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안주 없는 깡 양주. 아침에 당해야 할 쓰린 속을 생각하고 잘도 참아왔다. 앞에 술잔을 두고는 안달이 나서 참지 못하고 냅다 들이부은 그 버릇은 다소 고쳐졌을 상 싶다만 그놈의 부산바닥에 가면 아나고회나 소갈비 구워놓고 마시는 그놈의 쇠주맛, 아니면 얄팍한 계집애들의 아양에 못이겨 또다시 그 버릇이 대가리를 쳐들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술 때문에 몸이 아파 안 먹으니 다른 데가 아프다.’던 정기상 상무의 얘기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시원히 목욕을 하고 하루의 일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을 푸근히 느끼며 잘익은 한 컵의 맥주나 얼음채운 한 잔의 위스키가 제맛, 제멋인 것을 -. 곁에서 마누라가 오징어 다리라도 찢어 고추장에 찍어주면 그게 곧 금상첨화가 되려나.
말끔히 닦고 소제한지 겨우 1달 조금 지났는데 다시 선풍기에 먼지가 엉망이다. 그냥 먼지가 아니고 진흙 투성이다. Lagos의 부연먼지는 바로 사막에서 바로 날아오는 모래다. 그렇게도 강한 햇볕마져도 그 속을 뚫지 못하고 열기를 잃고 말 정도로 대기층을 이룬다. 막상 더우니 돌리고 왼 창문을 열어두지만 일상생활을 생각하면 보통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콧구멍이나 기관지에도 저처럼 흙먼지가 끼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삼 지난 한해 동안 받은 편지들을 훑어본다. 안동의 남군의 아들에 대한 얘기가 그럴듯하기도 하다. ‘안간힘을 써드래도 아들은 만들어야지. 돈 없어 허전한 것처럼 아들 없어도 마찬가지야. 몇 백년이 지나도 아들이 시집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중략) 우리가 자란 환경에서는 아들이 아직은 기둥이야, 늙어서 생활을 의존한다는 것보다 아들이 있다는 그 자체가 갖는 마음의 안정이 더욱 큰 것 같다.’
마누라도 꼭 아들을 갖고 싶다고 했으니 이번에 가면 꽤나 신경을 쓰겠군. 어쩐다? 흰놈이건 검둥이건 아들이 좋다고 하고 딸뿐이라니 ‘Oh, No!'라고 하긴하드라만- .그것이 꼭 있어야 겠다는 절실한 바램 보담 그저 없어 서운한 느낌은 사실이다. 거기다 아내가 마치 한아름 짐을 진 것처럼 하고 숱한 일에 시달려야 하는 데다 이미 셋인데 넷이나 제대로 키울 생각도 아득하다. 정주가 아들이였드라도 그만두었을 터인데-.
진짜 마누라 말처럼 정현이가 그래서 상처를 입었을까? 그렇다고 남군의 끝 구절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없는 그 자체야 서운하기도 하고 갖고 싶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허전한 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을 자꾸만 강행. 다섯이고 여섯이건 놓는 다는 것도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세 딸이, 정화가 다소 약하고 정주가 어물적 할 것 같고 정현이가 불행이도 상처를 입었지만 어느 누구 못지않게 가르치고 자라도록 해 줄 자신은 있다.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은가.
아들이 없어 노후에 설음을 당하는 경우도 보았고, 또 너무 많은 자식들 때문에 골치를 썩히는 부모들의 예도, 그런가하면 외아들한테도 무참히 설음을 당하는 부모도 보아온 터다. 모두가 각자의 경우이고 사람 나름이다. 심지어 딸 둔 사람이 먼저 비행기 탄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 않은가. 그것은 모두 시대의 한 흐름, 우리들 자신의 사고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내 스스로나 자식으로서도 부모로서도 느껴오는 것이 곧 그것이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동질성의 것이 아니다. 설사 같다고 해도 그것은 옛 어른들 말씀처럼 물처럼 내리 흐를 뿐이다. 얘들을 전연 갖지 않고 부모노릇을 못하는 것도 안 된 일이지만 알맞은 수의 자녀를 성실하게 가르치고 키우는 것이 최상의 길이 아닌가. 그것이 곧 아들이건 딸이건 우리의 아이들인 이상 다를 것은 없다. 차라리 아들이 기둥이고 마음의 안정을 준다는 남군의 얘기보단 언젠가 읽은 박인환씨의 수필 속에 있던 그 ‘調和’란 것이 훨씬 공감이 간다. 아빠, 엄마, 아들, 딸 이것이 가장 좋은 조화라는 것. 좀 더 아내를 설득 내지 이해를 구해보고 상의해볼 일이다.
30th. Jan(월)
월요일이다. 한 주일의 피로를 푸근하게 풀고 새로운 한 주일을 맞는 싱싱하고 분주한 날이기도 하다. 마누라와 얘들의 등살에 꼼짝없이 집에서 봉사(?)하는 친구도 있을 것이고, 등산이야 낚시야 해서 마누라가 찌푸리건 말건 훌렁 나선 사람도, 그래서 오늘 하루는 더욱더 풍성한 화제거리를 간직한 채 발걸음이 가벼운 친구도 있을 법한 날이다. 어쩌면 모처럼 벼르고 벼른 날이 우천이나 사고로 망쳐버리고 홧김에 마신 술이 골치를 팅 하게 해서 마치 식전에 취한 해장술 모양 찡그린 얼굴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누구에게나 한 주일의 첫날은 시작되어 지는 것이니까. 마치 개미 체바퀴 돌 듯하는 이곳 선상의 하루도 그런대로 기대에 찬 날로 시작한다. 어쩌면 오늘쯤은 무슨 소식이라도? 열심히 VHF 당직도 붙이고 무전실에도 귀를 기울인다. Canpex, 德丸, Arkay에도 타전. 그러나 역시 감감하다. 마치 잊혀버린 존재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여자는 버림받은 여자보다도 잊혀진 여자라고 누군가 말했다지만 우리가 정작 그런꼴이 아닌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 그래도 수십 수백만불의 재산이 떠 있는데-. 하기야 조용한 곳에서 이렇듯 편히 쉬고 있는데도 꼬박 월급을 받으니 더 좋은 곳이 있을까마는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다. 부득부득 교대일은 다가오고, 차항도 이미 정해져 있는데 아무런 일정이 없으니 신경질이 난다. 세상 모두가 변하는데 나 혼자만 갇힌 웅덩이 물처럼 멈추어 서있는 느낌이다.
느닷없이 Mino Star가 부른다. 그기도 문 국장이란다. 모처럼 외래객의 목소리가 신기로울 만큼 반갑다. 문삼택 국장은 같은 종씨끼리라 더욱 반가운 모양이다. ‘우짠일이오?’ 역시 Enternace No.가 없어 이 부근어디서 기다린다나. 그도 1년을 더 연장했단다. 무엇인가 수출선에도 서서히 장기계약의 바람이 불고 있다. 1년으로서는 현상유지밖에 안 된단다. 또다시 언제 나올지 모르고 몇 달을 쉬어야 하는 그 구멍 때문이다. 6개월을 연장하므로 만약의 경우 1년을 놀아도 괜찮다는 계산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갈수록 세상이 어려워져만 간다. 우선 경제적 여건만을 고려한다면 내 자신도 마찬가지다. 1년을 더하면 1년을 놀아도 좋을 만큼 여유가 생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 사람의 생활, 삶이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은 걸. 그것이 곧 마음, 가슴을 가진 인간으로서 동물이나 기계와 다른 특성이다. 적당한 여건만 갖추면 아무런 고장도 없이 계속 같은 일만 되풀이하는 기계가 만약 자신의 의지를 갖는다면 결코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1월분 수당을 지급하다. 냉동기 수리수당도 지급했다. 제법 용돈들이 될 것이다. 수출선으로서 본선처럼 용돈이 잘 생기는 배도 실상 드물다. 자기의 급료가불은 말할 것도 없고 야문 친구는 설합 속에 얼마씩이라도 챙겨 둘 수 있으니 그게 어딘가. 저번 Lagos 입항시 마치 수학여행가서 돈 떨어진 애들처럼 모두들 축 늘어진 꼴이더만 이번에는 꽤나 펄렁이겠군. 그러나 차항이 Las이고 일본이라면 더욱 열심히 절약하려고들 할게다. 분명히 돈의 가치를 절감하고 있으니 -. 그 재미에 8일간 계속해서 중노동을 해도 아무 불평없이 참았다. 차라리 Lagos에서도 우리 손으로 했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는 선원들도 있으니, 실상 부처님도 돈 보면 빙긋이 웃는다는 말이 정말일 것 같다. 시력이 많이 약해졌는가? 조그만 무리하게 책을 보면 영 침침하다.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차츰 악화되어가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귀가 침침한 것도 불편한데 -. 정말 수술 받아서 될 것일까? 아마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요즘 부산시내의 의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공했다는 소릴 듣지 못했다는 게 지금끝 단안을 못 내리는 원인이다. 막상 그것 때문에 사회생활에 많은 불편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도 시급해 해결해야 할 것 중의 하나다. 마누라가 들었으면 또 한번 핀잔을 줄 일이다.
31st. Jan(화)
금년의 첫달인 1월도 마지막 간다. 허허참! 잘도 간다. 이곳에 닻을 내린지도 한주일이 후딱했다. 초하루날 Lagos외항에서 윷놀이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남은 두달. 양하, Las. 일본행. 교대. 아무래도 3월 초순까진 Las에 가야한다. 지금의 상태로선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읽던 일본소설을 끝내다. 사실이 아니고 추리에 지나지 않는 일이지만 역시 완전범죄란 있을 수 없는가 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수사기준이 향상됐다 하더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추리, 영감의 바탕 위에서 행해지고 자료로서 이용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속은 이해하고 넘겨다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같은 마음뿐이 아니겠는가. 그간 몇 권의 일본책들을 읽었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또 한 권을 마칠 때마다 쉬워져 간다는 것에 흡족함이 남는다. 내용자체가 좋아서 보다 일일이 사전을 찾지 않아도 그냥 넘어 가면서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무슨일이든지 그렇지만, 알면 알수록 그 말이 가진 본래의 뉴앙스에 더욱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이 가끔은 짜증 나게도 한다. 역시 한 민족의 말이나 글은 그 속에서 생활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옳게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우리말을 보아도 해마다 새로운 유행어가 생기고 변해가듯이 외국어도 마찬가지다. 마침 일본인이 함께 있는 금년이 정말 좋은 공부가 된 셈이다. 그 놈의 영어도 이 정도쯤에서 그들과 1년 정도 함께 생활할 수 있다면 현저한 보람이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집 부근에 미국인들이 많이 산다고 했으니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배우는 것 보다 익히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기라고도 하겠다. 이 한해의 애씀이 결코 무위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귀국해서라도 하루 다문 한두 시간이라도 대화를 하는 사간을 가져야 할텐데-. 마누라나 얘들 보기에 주책이 없는 짓이 될 것이다만-. 해야 할 일들도 많다. 집도 지어야 하고, 운전면허도 따야 하고, 해기사면허도 따야 하고, Telex나 기관에 관한 공부도 해야하고-. 마누라도 한끝 사랑해줘야 하고 얘들과도 놀아주어야 한다. 친구를 만나면 가루꾸(輕く) 한잔도 해야 하니 참 바쁘겠다만 과연 얼마나 해 낼 것인고? 오후 Mino Star가 Lagos Road로 가다. 우리의 Agent Assaf은 무엇을 하시는가?
1st. Feb. 1978 (수)
종일 몸이 찌부득한 하루다. 며칠 전 급히 먹은 생선회 몇 점이 엊쳤는가 싶더니 기어이 속이 갑갑하고 머리까지 팅하다. 소금기를 덤뿍 담은 눅눅한 갯바람도 끈적끈적하게 온 몸을 잡고 누른다. 2월의 첫날인데-. 소화제도 먹고 음식도 조금 줄였다. 그래도 배가 고픈걸 보면 큰 이상은 없는 듯도 하다만-. 일찍 씻고 자리에 들어도 쉬이 잠이 들이 않아 다시 일어나 먼 곳을 향해 눈길과 마음을 달려보기도 한다. 제법 파고가 있어 10여도씩 橫搖를 일으킨다. 아무래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느끼면서도 한 번씩은 그러기를 기대하는 것도 역시 일종의 고약한 자극심리가 아닌지?
근간 땀을 비직비직 흘리면서도 뜀도 뛰고 줄도 당기는 것이 좋은 운동이 되는 것도 같다. 가뜩이나 검어진데다 버석하니 말라 비틀어져 가면 마누라가 무척도 마음아파 할 것이니 좀 더 건강해보고 싶은 것 또한 바램인 이상 꾸준히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은 신체 자체가 건강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몸이 건강하면 정신도 마음도 모두가 밝고 나아가서 한 가족전체가 보다 의욕적인 생기를 찾을 수가 있다. 모든 생의 원천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곧 강건한 체질과 체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러나는 욕망을 채우려는 강한 활동력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아파보니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지더란 마누라의 소리가 진정 마음에서 울러나는 절실한 것이리라. 원래 선천적으로 내 자신이 야무락지고 차돌같이 똘똘 뭉친 체질이 아니다. 내 기억에도 생생한, 뚱뚱하여 뱁새 걸음을 하시며 다혈질이시던 할아버지를 닮았었는지 그저 몸 곳곳에 상처를 늘 달고 다녔고 살갗에 뭐가 났다하면 곪아 칼을 데야하는 탈을 냈고, 누나가 약상자를 들고 따라 다녔다. 오죽했으면 별명을 ‘약빙’라고 했을까. 어릴 때부터 병원출입이 잦았던 것도 기억한다. 남들은 일부러라도 들어가 보기 힘들었던 대구 도립병원을 무상출입하다 싶이 했고 시큼한 소독냄새가 오히려 좋았을 정도였으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재미의 하나였다. 그러나 체질적으로 크게 앓아본 적은 없다. 자질구레한 상처는 많았어도. 좀처럼 앓지 않다가도 한 번 앓기 시작하면 마치 곧 죽을 듯 하기도 했으니 심지어는 엄살이라고 했다. 앓고 나면 눈이 쑥 들어가며 신체의 외적 변화가 심한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운동하고는 촌수가 아예 멀었다. 그 흔하던 평행봉 한 번 올라타고 흔들지를 못했고 철봉에 턱걸이 한 번을 못했으니까. 고3 때 이춘길 선생이 별명을 ‘거무’라고 달아준 것도 당연한 일. 100m를 19초에 짤랐다. 이제 와서 건강해지려고 역기를 들고 줄넘기를 하다니 좀 지나친 넌센스 같다만 이젠 나 혼자만이 아니고 내 가족과 함께 있으니 절실해져 가는 것이다. 내 몸의 상태를 내가 아는 이상 과로를 피하고 과음, 폭음을 삼가면 적당한 몸이 움직임을 곁들여 간다면 현상태는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먹고 숨조차 쉬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행위는 진짜 어리석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외적 조건보다 먼저 그럴 이겨낼 수 있는 내 자신과의 싸움이 관건을 쥐고 있다. 완전한 극기는 성인 도사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될지 몰라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조절은 할 수 있어야 한다. 빌어묵을! 1년을 더 않고 간다는 걸 그 녀석이 먼저 아는지 근간 부쩍 신경질을 낸다. 진짜 이번에는 Africa를 정복하는 뜻에서도 검은 아가씨를 한 번 시승(?)해야겠는데 제대로 될는지. 분명히 내 물건임에도 어찌 그리 내 마음대로 안 되는지 모르겠다. 마치 신경을 떠나 달려있는 것처럼.
2nd. Feb(목)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일이 시원찮은 모양이다. 장기대기 태세를 갖추어야겠다. 하필 마지막 항차가 이 모양인가. 사람 간 말리는 식으로 -. 작년에도 Last Voyage에 죽을 고생했다. 필립핀에서 동광석을 싣고 올라가다 대만 아래에서 죽을 맛을 봤다.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할 식량이 문제다. 비축이야 3월 중순까지 돼있다지만 도중에 야채정도는 다시 구입해야 하고 그보다 더 이상 날짜를 끈다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마치는 즉시 Las행이면 그런대로 대책이 나오지만 만에 하나 Canpex가 계속 Charter하는 경우에는 부득이 Las로부터 탁송해오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 시간이 해결해 주도록 기다리는 수 뿐이다만 뜻하는 대로 계획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여건이 안타깝다. 그저 그놈들의 손에 질질 끌려 다녀야 하는 System이 어느 사이엔가 습성화되고 자신의 창의력이나 의욕을 꺾어온 결과가 되어간다. 결국은 그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뱃짱이 편하기는 하다. 원래부터 선박의 운항방식이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것을 과학문명에 의한 통신시설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만든 것이다. 그나마 항해 중일 때는 또 덜하다. 그만큼 자신의 역량을 응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고 할 수 있으니까. 어제 이어 계속 소화불량. 미지근한 하루다.
3rd. Feb. (금)
Las에서 Telex오다. 입항허가 번화가 나왔음을 알려준다. 즉시 Lagos로 가란다. 무얼 그렇게 돌고 돌아서 오나? 여기서 바로 알려주면 될텐데. Issued Date가 1월 29일이랬다. 벌써 5일전에 나왔으면서도 바로 코밑에 있는 Assaf, Trans-con은 무얼하고 Las까지 갔다 오는가. 두 번씩이나 타전을 했는데도. 원참-.
15:00 Lagos외항에 닻을 내리고 East Mole에 신고를 마쳤으나 Assaf에서는 응답이 없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덜하다. Toko Maru, Uniq 그리고 Byron과 교신하다. Byron은 그전의 德丸의 明德丸이란다. 김두현 선장. 듣던 이름이다 전에 북양트롤을 탔던 기억이 있다. 이곳은 처음이라며 고충을 턴다. 여기서는 수산대학 나왔다는 알량한 자존심 버리고 몸뚱이로 부딪치지 않으면 코 다친다는 걸 불일간 깨달을 것이다. 동방호도 빈배로 대기. 교신이 안 되더니 겨우 닿았다. 역시 예상대로 MDO가 부족. 내일쯤 도착한다는 Apapa Reefer를 기다린단다. 이번으로 Sadis Fishing과는 용선완료. 차항이 미정이란다. Uniq은 일본선, 이배도 MDO가 모라자 Canpex에 연락하니 나와 상의하랬단다. 매 3일마다 보고하는 ROB Bunker는 그냥 Form으로 하는가? 뭘 보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도 근근하다. 일단 본선은 불가하니 재 타전해보라고 했다. 내일아침 Boat 내려 모두 함께 가보기로 하다. 제법 되겠군. 급한 것은 그게 아니고 편지다. 그리고 나서 Agent와 일정관계도 N/R도 받아야지. 예외없이 라고스외항은 만원이다. 전항차보다 더 많이 밀린 것 같다. 분명히 항만사정이 시원찮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戶田선장의 얘기도 그렇다. 연일 내일내일 하다가 결국 20일이 됐다고 -. 그러면서도 다음주일은 꼭 된다고 했단다. 그도 이번 항차를 마치면 Las경유 일본행이라 무척 들뜬 기분이다. Mr. Assaf이 Byron호를 찾아 달라고 연락한다. 겨우 Contact시켜 줬다. Byron호에서는 정말인지 거짓인지 모르나 Assaf의 수신이 안 된다고 아예 중계를 맡아 달란다. 미친놈들이다. 끝이 나고도 항만국. Mole. Tincan Port에도 신고해달라고 한다. 김선장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Kano Reefer 노선장보다는 한결 점잖은 편이다만 비교적 자세히 일러줬는데도 별로 믿는 표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별수 없고 잘 해보시오. 내일은 편지라도 찾고 또 대강의 일정이라도 알면 다시금 귀국을 위한 Plan을 점쳐 볼 수도 있다는 것 뿐인데도 종일을 서성대다 말았다. 마치 한여름 더위에 혓바닥 빼물고 그늘 찾아 다니는 개 모양.
Byron호 C/E가 본선 김성동 갑판장을 찾는다. 전에 Mino Star 김중오 기관장의 형님이라나. 역시 같은 전라도 어느 섬 출신이다. 이 부근에서도 많이 본 일이다. Kano Reefer 기관장과 Flo 기관장이 형제였고, 그저 알았다면 4촌이고 6촌이고 아제비 조카 사이다. 한국에서 수천리 떨어진 Africa가 무색할 지경이다. 어릴 적부터 온통 바다만을 상대로 살아온 그들에겐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것이 생활의 터전이였으니까. 같은 부자, 형제지간에 같은 배를 타지 말라는 터부가 있단다. 만일의 경우 한사람이 조난을 당하거나 사고를 만나도 그걸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덤비다가 둘 다 당하고 마는 예가 너무나 많았던 결과란다. 아직은 한국의 해운계가 그리고 선원간의 폭이 너무 좁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좋은 증거이다.
4th. Feb.(토)
아침부터 제법 파고가 있다. Byron, 동방, 東幸丸, かつじままる, Uniqe 등 6명의 선장이 모인 셈이다. 일본인 선장들은 대부분 50줄이다. 늙은 영감님들이 마치 소풍가는 얘들 모양 모자 쓰고 점심 봇따리 해들고 즐거운 듯이 험한 곡예를 이기고 Boat에 오른다. ‘遠足가는 것 같소.’ 했더니 그렇다고들 한다. 아마 20여일씩 갇혀 있다가 땅을 딛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인지도 모른다. Lansal에서 편지 일부를 찾고 Assaf에서도 일부를 찾았다. Mr. Assaf, 이번에는 반겨준다. 협조해줘서 고맙단다. 여섯 중 내가 그래도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하기야 서너차례 중계도 해주고 어려움을 해결해주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만-. Mr.Kishinani집에도 갔다. 아직도 20여일은 족히 기다려야겠다. 어쩌면 한 달을 기다리게 될는지 모르겠군. 여간 일이 아니다. Byron호 김 선장이 대 실수를 한다. 나도 사실 그것은 몰랐다. 그저 Agent가 같기에 소개했을 뿐인데 Manifast를 보니 Shipper가 다르다.
그게 무슨 망신이람. 화물의 수화주도 모르고 아무한테나 Manifast를 주다니-. 그래도 수대 나왔다고.? 다시 Assaf을 찾았다. 김 선장 때문이다. 사람을 옆에 세워두고 ‘Hiroshima 선장 이야기 좀 해주시오’ 하는 데는 미칠지경이다. 그 김 선장이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다. 처음 당하는 일에 자신을 잃은 탓이리라.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말이란 늘 시부리고 익혀 입에 길들이지 않으면 도리없다. 지금의 내 처지도 그렇다. 그저 입안에서 뱅뱅도는 데 술술 안 나오는 요것이 미치게 한다. 좀 더 숙련을 쌓고 이 기간을 넘기면 한결 쉬워지리라. ‘염려 말고 배나 잘 지키고 기다리라.’고 Mr. Assaf가 얘기한다. Trans-con에 갈려니 오늘부터 내일까지는 Texi가 파업 중이라 없단다. 별난짓 다하는군. 이게 모두 영국물 먹은 탓이리라. 귀선길에 휴지, 가루비누 등 우선 급한대로 소모품을 샀다. Las가거나 일본 갈 때까지는 아끼고 가서는 직접 Owner에게는 무리한 것까지도 청구하고 떼를 써드래도 할 수 없다.
해상이 더욱 거칠다. 강한 햇살이 한동안 감췄던 살갗을 바싹 달구어 버린다. 늦은 점심, 일본선장들이 갖고 온 둥글둥글한 주먹밥 두 개가 목을 메게한다. 저녁에 Saloon Class 및 직장들 불러 대강의 예정 및 선주측의 의도 그리고 용선자의 반응을 얘기하다. C/S에 대한 문제가 다시 대두된다. 결론적으로 그의 한해는 그의 대인관계에서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Las에서 진작 귀국시키지 않은 것이 잘못이다. 선원들측에도 일부 책임을 돌릴 건덕지야 있다고 하더래도-. 인정을 생각해서 그들의 의사를 받아들인 것이 一失이다. 그저 믿고 처리할 것은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결단에 달렸을 뿐이다. 좋은 경험을 얻었다기엔 값비싼 대가를 치루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를 남은 기간까지 끌고 갈 수 있도록 일종의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라리 내가 호통을 치고 싶은 정반대의 입장이 오히려 난처하다.
아내의 편지를 찾다. 1월중순경 보낸 것이다. 다행이 금년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았던 모양이다만 방학 중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고역이 많았나 보다. 신체적 고달픔 보담도 정신적인 부담이 더욱 컸을 것이다. 지난 한해는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고 진정 반가워하기 보다는 우울해진 것이 더 많은 느낌이다. 더우기 큰집 형님 예를 들어재치는 데는 영 진절머리가 난다. 어쩌면 그것이 내 스스로부터 형을 경멸하고 미워하게 하는 원인을 유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부러운가? 세상에 자가용 갖고 다니는 놈 어디 그 뿐인가? 원참! 안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하는 판이고 형편만 닿으면 차부터 사야겠다는 생각뿐인데 -. 그 욕심! 남편을 남에게 비교해가며 내리 깎는 바보같이 생각돼 모든 미움의 근원이 되고 속물처럼 뵈는 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우선 내 자신부터 심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이것이 귀국한 뒤에도 계속 되지 않기를 진정 빌 뿐이다. 집을 팔아치웠는지도 모른다. 가능하거든 해보라고 했더니-. 망미동 땅도 팔았을까? 벌써 마음 같았으면 여러 수십 번 팔고사고 했을 것이다. 그 집 산지가 이제 겨우 1년반인데-. 나는 석달남짓 밖에 살지 못했는데-. 어쩌면 그 잠 못 이루고 지루한 시간을 때우는 유일한 ‘殺煩劑’인지도 모른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너무도 똑같은 얘길 자주 들어야 하는 것도 분명 우울한 일이다. 집 얘기, 자기 탓이 아니란 얘기, 자신의 행동은 마땅히 합리성이 있다는 자신만만한 생각! 길은 하나뿐이다. 주저앉는 거다. 도둑질하던 남의 머슴을 살던 땅을 떠나질 않는 길이다. 그 말마따나. ‘월급쟁이도 아니고 땅을 딛고 살면서 고액의 수입을 갖질 수 있는’ 내가 설사 된다고 해도 그 오유월 하늘에 소나기 구름 부풀 듯 커져가는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면 끝이 없을 것이다. 주저앉은 체 채워주지 못하는 빈자리가 크다고 하면 더욱 뾰족한 칼을 들이대고 그어 댈는지 모른다. 전번 년말의 편지처럼 욕심을 줄이고 진정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해준다면 결코 허망한 삶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만큼 내 자신에게 힘을 주고 받쳐주는 내 한 부분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창 일의 보람을 느낄 이때. 1년 혹은 2년을 서로를 간절히 그리면서 떨어져서 보내야 한다는 그 고통스러움이나 실상의 생활의 한 조각들 마다의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차라리 내가 영영 없다고 한다면 덜 할런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애태움이 없으면 또 덜하리라. 하나의 형벌이라고 할까. 단순히 생활을 위한다는 하나의 전제를 위해서는 지나친 형벌임에 틀림없다. 우리 뿐만은 아니다. 배를 타던 뭣을 하던 함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여기 수백 척 떠 있는 저 많은 배들의 수많은 선원들도 모두 같은 심정이라라.
분명히 세상이 고르지 못한가? 아니면 고르지 못한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때문인가? 1년에 한 번씩 나들이해야 하는 시집, 그나마 벌레 씹은 얼굴의 권위덩어리 영감에, 백년가야 마음에 드는 말 한마디 없는 서모, 숱하지만 고르지 못한 형제들 때문에 가져지는 정신적 부담들. 차라리 내가 고아였더라면 한결 편할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곡 자가용타고 편안히 들락날락 함으로서 꼭 둘이서 왔다갔다 해야 즐거움이 있고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서는 태어날 수도 없다. 그것이 곧 삶이고 생활이고 현실이다. 모처럼 뜨거운 볕 때문에 그런지 몹시도 피로하다 일광에 약한 내 자신임을 다시금 느낀다.
5th. Feb(일)
Apapa Reefer도착하다. Tinkan Port Control에 Arrival Notice하는 중에 들었는가 부른다 Lagos를 10마일 남겨두고 있단다. 동방호와 곧 접선, 급유하면 오후 6시쯤 동방호는 Las로 출항한댔다. 어제 가져온 Film 10개를 갖다 주었다. 2개월만에 다시 만나는 셈이다. 별반 긴요한 얘기들은 없어나 그래도 지저분한 얘기들이래도 마음 놓고 지껄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Las의 근간소식을 그가 전했고 Wari의 현황은 허선장이 그리고 Lagos의 것은 내가 전했다. 그런대로 참고가 되기도 하고 도움도 된다. 김선장, 겨우 30을 넘은 젊은 나이에 어찌보면 다변인듯하나 폭넓게 대화를 갖는다. 물론 그만큼 말이 능하고 무엇보다 뱃심이 좋다고 할까? 남이 싫어하던 좋아하던. 친절이 지나칠 정도의 경우도 있지만 용한 재주다. 스스로의 별명같이 ‘Lagos habour Master’라 해도 족하리라. 이 부근에도 한국 국적선은 한 척 없으나 한국 선원이 승선한 배는 7-8척이나 된다. 정기적으로 더나드는 배가 있는가 하면 처음으로 입항해서 똥오줌 못 가리고 어리둥절 하는 배들도 많다. 이제 세계 어느 항구에 가던 한국선원들이 정박 중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얻을 만큼 넓게 뻗고 있다. 작년 Taiwan을 뛸 때 거의 반 이상이 한국선원이었듯이(그것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여건이 있기는 했지만) 여기도 그러한 분위기다. 이런 곳일수록 우리의 공간이 있어 어떤 편리가 제공되고 보호 및 지도를 할 수 있으면 무척 도움이 되리라. 선원들 자체로 봐서나 국가적 위신을 위해서도 -. 동방호 7시경 출항했다. 아마 10월경 그들이 귀국할 때까진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정남기기관장의 서운한 표정이 검게 탄 얼굴에 더 깊은 골을 페게한다. ‘아무턴 건강하게 있다 오시오.’ 그 이상 더 해줄 말이 없다. 공선으로 가긴 제법 욕을 볼 것이다만 우리도 어서 마치고 Las로 갔으면 좋겠다만 막상 그런 날이 오련가.
Blue Film에 대해 잠간 적어두자. 그것은 대개 北歐의 Denmark나 서독. 놀웨이 등지에서 性산업으로서 생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많이 보아온 것은 아니다, 어제 빌려 본 여남은 개와 그 전의 대여섯개 정도다. 그걸로서 어떤 결론을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직은 우리네 입장에서 볼 땐 흥미(?)도 있고 신기하기도 하다. 비록 적나나한 표현들이 말초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시사를 하는 듯도 하다. Sex가 결코 추한 것이 아니고 또 반드시 시간과 장소와 상대를 가려서 즐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하는 듯도 하다. 또한 그 방법도 다양하다. 반드시 삽입이 됨으로 환희와 절정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남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반드시 膣外射精을 한다는 것이다. ‘임신과 성병의 염려가 없으면 성은 더욱 넓게 개방되는 것이 좋다’는 어느 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어떤 의도에서 그러한 산업이 생겨나고 만들어 지는지? 런던의 피카디리 서커스에서 본 숱한 Sex Shop에는 비록 남자뿐이 아니고 여자들도 혹은 다정한 한쌍이 더나드는 것을 보기도 했다. 정영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을 위해서인가? 물질문명이 인간생활을 편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만들어낸 인간자체를 압도하고 위압함으로서 그 막힌 숨통을 인간자체에서 찾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해도 좋을까? 불과 10-15분간의 짧은 시간에 어떤 효과를 노린 것인지 아직 그 본뜻을 찾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저 시각적인 느낌이 있을 동안뿐. 마치고 나면 결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먼 환상 속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런 줄거리도 없는 단순한 행위자체만을 위주로 한데다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혼욕의 장면은 너무나 난잡스럽고 추잡스럽기도 하다. 역시 아직은 우리의 도덕이나 윤리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그러한 산업이 생겼다는 그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인류의 역사를 창조해 내고 이어오는 신성한 사랑의 행위라면 그 누구보다도 사랑으로 충만 된 부부사이에 가장 은밀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그처럼 열열이 밀착된 사랑을 나눈다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본 것들은 모두가 한갖 동물적인 행위들 뿐임을 느낀다. 오랜 기간 지루한 생활 속에서 조금은 위안을 주는 보탬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산 것이 오히려 후회스럽고 공해가 될 것만 같다. 적당한 값에 넘겨야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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