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힘으로 사는가?
2024. 7. 7.(맥추감사주일) 이사야 40;27-31
제가 어릴 때 뽀빠이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블루터스라는 악당이 뽀빠이를 사랑하는 올리브를 좋아하여서 납치한다. 그때 올리브는 뽀빠이 도와줘요 하고 고함치면 뽀빠이는 달려가지만, 덩치 큰 블루터스와 싸워서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들겨 맞던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힘을 내어서 블루터스와 싸워 이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영상 뽀빠이>
그런데 정말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날 수 있겠는가? 뽀빠이가 방송된 이후 미국에서는 시금치 소비가 30% 증가하였고, 텍사스 크리스털 시티의 시금치 재배 마을에는 뽀빠이 동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뽀뽀이가 상영된 이후 많은 아이들은 힘이 세어지고 싶어 시금치를 먹었다.
그런데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는 설정에는 숨겨진 비화가 있다. 뽀빠이의 작가인 엘지 크라이슬러 시거(Elzie Crisler Segar)는 건강에 좋은 괜찮은 식품을 찾기 위하여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시거는 시금치에 철분이 많이 포함되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서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시거가 읽은 책은 시금치의 철분량을 기록할 때 소수점을 잘못 찍어서 10배나 더 많게 기록한 것이다. 결국 시거는 잘못된 정보로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나는 뽀빠이를 만들었는데, 지구촌 사람들은 그 뽀빠이를 보고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나는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정말 사람에게 힘을 주는 특별한 음식이 있는가? 미디안 광야에 있는 모세를 하나님이 불렀다. 그리고 애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또 이스라엘 백성이 너를 보내신 자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기 3장 14절로 말씀하신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람은 코로 호흡하여 산소를 공급받고, 또 밥을 먹어야 힘을 내어 일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외부에서 산소, 음식, 정보가 공급되어져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만물이 다 그렇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외부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고 스스로 자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자동차도 기름을 넣어야 움직일 수 있고, 식물도 햇빛을 받아 광합성하여 성장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그 무엇인가?를 통하여 만들어졌고, 또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있는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시고, 또 스스로의 에너지로 존재를 유지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존재가 놀랍지 않는가? 그래서 이사야 40장은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분(21-26)임을 말씀하고, 또 하나님은 힘과 능력을 가진 전능하신 분(28-29)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포로생활에 지친 유다백성에게 하나님은 소망을 약속한다.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이 무엇인지 오늘본문 이사야 40장 31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앙망하다는 말의 의미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새벽을 기다리는 모습을 말한다. 이다. 포로생활에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소망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그 고통을 이길 새 힘을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환란과 고통을 이길 에너지를 공급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그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고 있는가?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남자가 삶이 너무 어렵고 힘들면 지갑에 있는 아내 사진을 꺼내어 든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가 이 사람과도 사는데,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있겠나?
여자도 살다가 힘이 들고 어려울 때면 지갑에 있는 남편의 사진을 꺼내어 본다. 그리고 여자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가 이것도 사람 만들었는데,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나? 세상살이 맘만 먹으면 못할 게 없지.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 지난 6월 24일 한국일보에 에르메스 버킨백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탐나는 핸드백은 에르메스 매장의 버킨백<사진1>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에르메스 버킨백을 사기만 하면 5분 만에 2배로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만 1천 4백달러(약 1천 6백만원)하는 버킨백25를 산다. 그리고 그 가방을 재판매업자에게 가지고 가면 2만 3천달러(약 3천 2백만원)에 팔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에르메스 버킨백의 원가는 1천달러(약 140만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140만원 원가의 가방을 1천 6백만원에 사려고 줄을 서고, 또 그것을 되팔면 중고가 되었는데 3천 2백만원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인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의하면 에르메스 가방이 잘 팔리는 이유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데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유명한 인사들은 거의 에르메스를 들고 다닌다. 그래서 더 글로리, 태양의 후예에서 연기한 송해교 씨와 기생충이라 영화에 출연한 조여정 씨가 이 가방을 들고 다닌다.<사진>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사람들은 내가 이것도 사람 만들었는데, 라고 하면서 자신의 그동안 해 온 업적을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니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성공을 드러내는 것이 삶의 에너지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다. 아니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랑할 것이 없어 삶의 의미가 없다고 낙심하는 분도 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찾아간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과 또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았지만, 믿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생선 한 토막을 먹는 것을 보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이제 말씀을 다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곧바로 복음을 전하러 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제자들에게 누가복음 24장 48-50절로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였는지 함께 읽기 바란다.
(눅 24:48-49)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 기다려야 하는가?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본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함으로 복음이 어떻게 증거되었는지를 기록한 역사서가 사도행전이다. 그런데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한 것이 기다림이었다. 사도들은 이미 모든 것을 보았고, 또 말씀을 깨달아 알았지만 자신이 보고 깨달은 것을 가지고 나가지 않고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았을 때 사도들은 복음을 들고 나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3천명, 5천명,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힘은 사도들의 경험과 깨달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사도들이 에너지는 무엇이었는가? 지난 주 이찬수 목사님은 설교 중에 대구서문교회에서 은퇴한 이성헌 목사님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은퇴한 이성헌 목사님은 후배목사들에게 은퇴하고 보니 목회에 아쉬움이 너무 많다는 말씀을 자주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합리적인 사람이라서 목회마저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만 목회를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새 술에 취하여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에 이끌리어 목회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논리와 합리적인 이치로 목회하였다. 그 결과 나는 머리가 커진 교인은 길렀어도 가슴이 뜨거운 신자는 못길러 내었다. 이것이 내 목회의 결론이다.
그런데 이것이 저의 모습이 아닌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다 아는 내 경험과 지식으로 초대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그런 모든 것을 가진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기다린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에너지로 삼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에너지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고, 또 어떻게 회복되어져 가야 하는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는 찬양의 가사처럼 주가 주신 능력으로 세워지고, 또 일어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격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능력으로 세워져 가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