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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8 - 오시는 예수님(2) : 역사에 임하시는 예수님
다니엘 7:13-14 / 마태복음 1:16-17
네덜란드 레이덴이라는 대학의 수업은 굉장히 유명합니다. 토론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또 강의가 오픈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 학생이 아닌 분들도 와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학교 정문 옆에 있는 구두를 수선하는 늙은 구두 수선공이 라틴어로만 토론을 하는 그 수업을 참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수업을 참관하고 나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교수가 그 구두수선공을 불러서 묻습니다. '선생님, 오늘 수업은 참 알아듣기 어려우셨을텐데 왜 수업을 끝까지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수선공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토론 수업보다 알아듣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그 토론에서 누가 옳았고, 누가 틀렸는 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구두 수선공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먼저 흥분하고 먼저 얼굴이 빨개지고 먼저 화를 내는 쪽이 틀린 사람이겠지요.'
제가 가끔 부부싸움을 합니다 그러면 제 딸이 어렸을 때 저희들이 한참 싸우려고 막할 때, 제 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엄마 아빠 싸우다가 소리지르면 지는 거래요. 그 얘기를 듣고 저희들이 부부싸움을 막하려고 해도, 소리를 지를 수가 없습니다. 흥분했는데 소리를 지르면 진다고 하니 소리를 지를 수 없어서 자연스럽게 부부싸움이 저절로 없어집니다.
여러분 이제 2019년도 몇 주 남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화가 나는 일도 있고 억울한 일도 있고 참으로 후회가 된 일도 있지만 그것을 웃음으로 회상하고 기쁨으로 돌아보면 다 감사와 은혜요 추억이 되는 한 해가 되리라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웃음으로 이번 한해를 마무리 하시는 여러분과 저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하기 원합니다. 웃음으로 한해를 마무리 합시다. 웃음으로 한해를 마무리 합시다. 이거 얘기하는데 인상 쓰시면서 하면 안됩니다. 웃으면서 얘기하셔야 됩니다.
우리 웃으면서 한해를 마무리 합시다. 여러분 물론 억울하고 또 화나고 힘든 일들이 있었지만 웃음으로 한해를 마무리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로 채워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한 해를 정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시는 예수님 두 번째, 역사에 임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저는 대학 때 공대 출신이라 실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숙사에 살아서 늦게 끝나는 실험은 제가 도맡아서 다 실험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저녁 늦게 실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결과를 저 혼자 남아서 그 결과를 가지고 제가 실험 레포트를 쓰고 그 실험 레포트를 실험실 테이블 위에 놓고 가면 그 다음날 조원들이 일찍 새벽 일찍 와서 제가 쓴 레포트와 결과 실험 결과를 가지고 다시 자기들이 베껴서 실험 레포트를 쓰는 겁니다.
저는 저녁 늦게 실험 결과를 기다렸다가 피곤한 몸으로 실험 레포트를 쓰니 길어봤자 10줄이 되지 않습니다 보통 3줄, 4줄, 5줄 쓰면 저도 귀찮아서 그냥 대충 써 놓고 기숙사에 갑니다. 그런데 아침에 오는 실험 조원들은 제가 한 열 줄도 안 되는 그 실험 레포트를 가지고 두 세 배로 뻥튀기 해서 레포트를 씁니다. 어떤 조원은 실험을 직접하지 않고 결과도 보지 않았는데, 거기다 그림도 붙이고 사진도 붙이면서 마치 실험을 진짜로 한 것처럼 그렇게 합니다. 실험을 해 보지도 않았지만 레포트는 정말 잘 썼습니다.
그럼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요? 가장 먼저 실험을 직접 하고, 늦게까지 그 결과를 보았던 저는 B나 C가 나오고, 실험을 한 번도 하지않은 채 레포트를 그대로 베껴서 두세 배로 확대해서 쓴 그 친구들은 A플러스가 나옵니다. 제가 매번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 땡땡이를 칠까 라는 생각도 했는데, 그러면 안되지 생각하고, 정말 엄청난 희생을 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열심히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하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데, 제 실험 레포트를 베껴쓴 다른 조원들이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참으로 억울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번 저는 그 반대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화학 실험이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상의 시료를 섞어서, 하나로 모아서 그것을 거름 종이에 거릅니다. 그리고 그걸 말려 가지고, 그 안에 어떤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는 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녁 늦게까지 실험을 마치고 혼자서 레포트를 써야 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거름 종이에 걸러서 아주 작은 알갱이로 된 그 물질의 성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거름 종이에 묻어 있는 화학성분에 알갱이들을 칼로 긁어서 모아가지고 성분을 조사한다. 딱 이렇게 두세줄 쓰고 피곤해서 기숙사로 갔습니다.
와 보니, 다른 조원들이 제가 두세 줄 쓴 것을 20줄, 30줄로 불려서 두 세 장으로 레포트를 쓴 것을 봤습니다. 제가 쓴 내용은 그 친구들의 레포트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친구들은 제가 그 거름 종이에 알갱이들을 칼로 긁어야 한다는 얘기가 원초적이고 1차원적이며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자기들이 어디서 사진을 붙이고 그림을 넣어서 레포트를 썼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야, 이번엔 나는 B나 C가 아니라 D를 받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십니까? 저만 A+ 를 받고 그 친구들은 B와 C를 받았습니다. 제가 두 세 줄로 적어낸 거름 종이 알갱이를 칼로 긁어내는 그 원초적인 방법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아, 하나님이 이렇게도 살아계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일을 경험하면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해도 사실에 근거하고, 분명한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겠구나'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실에 근거하고 사실에 입각하면 떳떳할 수 있고, 당당할 수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림절 기간에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여러분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의 아기 탄생 이야기가 진실에 근거하고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고 따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여러분 아기 예수 탄생의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많은 신들의 탄생 신화와 전설을 보면 어떤 성인은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고, 일장 연설의 설교를 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신화적인 존재는 알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니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북쪽이든 남쪽이든 유명한 정치 지도자, 국가 지도자들 탄생 시에 또 탄생한 그곳 그리고 그 생각 등등을 지나치게 기념화 하고 우상화 하는 모습이 있기도 합니다.
저는 참 그게 싫습니다. 우리 연동교회 1대 목사님인 제임스 게일 목사님 생가를 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제가 그 곳에 가서 제임스 게일 목사님에 대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게일 목사님이 태어난 곳이란 표지도 없습니다. 그 분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비석 하나 없습니다.
그냥 제임스게일 목사님이 사셨던 집 두 곳이 여기입니다 라고 가이드 해주는 목사님이 손가락 지침을 해주지 않으시면, 그곳을 가르쳐 주지 않으시면 모르는 그런 곳입니다.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 터는 불타서 터만 남아 있습니다. 키 만한 수풀이 자라있는데 그것을 뚫고 들어가야만 아, 이곳에 우리 연동교회 목사님이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가 여기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표지, 기념관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그곳에 다녀와서 제임스 게일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조금만 유명해져도 신격화 우상화 시키면서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치장하고 과장해서 마치 태어날 때부터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입니다. 그것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 예수님도 그렇지 않은데 우리 인간의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렇게 자기 태어난 날과 자기가 자라난 곳을 성지화 시키려고 할까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칼빈이 존 칼빈이 왜 내가 죽거든 비석 하나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했는지 공감이 됩니다. 존 칼빈 그는 우리나라의 국가지도자 몇 몇 보다도 훨씬 뛰어난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산소는 지금 보시다시피 저렇게 그냥 한 사람 누워있는 정도 밖에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놓고 본다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도리어 예수님을 신격화 시키고 대단한 탄생 이야기처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곧 아기 예수는 이솝 우화와 같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 속에 실재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탄생은 교훈, 득도, 해탈, 신비적 체험을 위한 종교적인 판타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팀켈러 목사님은 '예수 예수' 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주된 관건은 수양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지 삶의 감화나 지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은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근본 메시지는 당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며 그 구원이 털끝만큼도 당신의 행위에서 나지 않고, 그분이 이루신 일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길은 윤리를 받아들이거나 개과천선 하거나 심지어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일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성경에서 말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은 결코 종교의 수양을 하기위한 목적으로 또는 삶의 감동을 주고 교훈을 주는 목적으로 꾸며지고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그저 탄생 이야기일 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성경의 교훈과 영적인 감동을 받아 인간이 그 성경의 얘기하는 어떤 주제, 감동, 어떤 신비적인 체험 그것으로 내 마음의 결단을 하고 그 결단의 행동을 하면서 선행을 하는 것으로 그렇게 구원이 이루어집니까? 아니지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간적인 공로, 선행 행위, 그것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진한 감동이 생겨서 영적인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무엇인가 내가 행동하는 것으로 공로를 이루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성경은 이솝우화나 어린이 전래동화 처럼 교훈과 깨달음 때로는 판타지와 같은 환상과 신비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케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셨던 그의 사역, 십자가 보혈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거지 그 이야기 속에서 교훈을 얻고 신비를 깨닫고 판타지 환상 속에 빠져서 무언가 해야겠다 라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 다시 아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돌아와서 생각해봅시다. 만약 성경이 교훈과 수양, 감화, 지침으로 구원을 주는 목적이 아니라면 아기 예수 탄생의 이야기는 굳이 더 꾸미거나 더 종교적인 자극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실제로 성경이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은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예수님을 종교적으로 신격화 시키고 매우 신비적인 감동을 줄 수 사건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 두 개의 복음서에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다른 종교들은 그 탄생을 어떻게든 꾸미고 신격화 시키고 우상화 시키려고 노력하는데, 두 개의 복음서에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아예 없습니다. 왜 그럴까? 마가복음과 요한복음 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아기 예수 탄생의 교훈과 신비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사건 자체 그 역사적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탄생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 앞부분에 있는 마태복음의 예수의 족보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탄생을 더 잘 꾸미고 더 좋게 만들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감동을 줄 목적이라면 그래서 예수 탄생을 신화처럼 전설처럼 소설처럼 만들고자 했다면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나오는 예수 족보에는 시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다말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기생으로 살았던 나합도 나오지 말아야 하고요, 이방인 룻도 예수 족보의 정통성에 해가 되는 여인 아닙니까? 나오지 말아야죠.
그리스도 인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는 다윗의 가장 추하고 더러운 죄를 상기시켜주는 우리야 아내 밧세바도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부장적이고 가장 혈통과 정통성을 강조하는 마태복음서에 왜 이게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 족보에 5 여자를 기록했을까? 신사임당 같이 현숙하고 정숙하고 누구나 존경할 수있는 여인을 넣어야 예수의 족보가 더 거룩해 보이고 더 신성해 보일텐데, 마태복음 복음서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오히려 우리가 멀리 하고 싶은 얘기 하고 싶지않은 다섯 명 여자가 예수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기록했을까?
아기 예수의 탄생을 더 종교적으로 신격화 시키는 이야기를 꾸미고자 했다면 이 다섯 명의 여자는 모두 사라져야지요. 성경에서 삭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경에 그들을 있는 그대로 놔두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목적은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 영혼에 감동을 주고, 교훈을 주고, 판타지와 환상을 주고자 하는 목적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현실과 역사, 시간과 실제 속에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입니다.
이처럼 우리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교훈과 감동을 목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야기는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실이고, 실제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그렇담 이렇게 우리 인간의 역사와 현실 그 자체로 임하시는 아기 예수의 탄생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종교적인 교훈, 종교적인 신비와 종교적인 판타지 이전에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라는 실제와 역사 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다니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기 전에 수 백년 전에 다니엘 선지자가 그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권세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 말씀은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한 환상, 계시, 신비와 더불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환상과 계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현실과 역사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 14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환상이죠. 13절 말씀대로 하늘의 구름 타고 이곳에 인자같은 이가 내려온다는 판타지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14절 구절에서 뭐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판타지처럼 구름타고 인자같은 이가 내려왔지만 이 땅에서의 통치는 매우 구체적이고 역사적이고 사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물론 우리가 느끼기에는 하나님이 이곳에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이기 때문에 환상과 신비지만 이 땅에서는 역사 그 자체요, 실제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저와 여러분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 그 자체는 신비요 계시요 환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의 탄생은 환상과 계시로만 이해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임재는 역사 속으로 오시는 인간의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저 멀리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있는 신화 속에 있는 하나님, 구름 속에 있는 하나님 우리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산꼭대기에 있는 신화의 그런 우상이 아니라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내 눈물을 이해하시며 우리의 고민을 알아주시는 친구와 같은 하나님으로 아기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우리는 믿고 받아들이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알려진 예화 중에 하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예인 교회 지금은 예능교회가 된 그곳의 장로님이신 구봉서 장로님께서 후배 코미디언들의 전도에서 새가족 반에서 성경공부를 하게 됬습니다. 한참 공부를 하는데 동정녀 마리아 아기 예수를 잉태한 얘기를 하는데 한 후배 코미디언이 계속 목사님을 힘들게 질문합니다. 아니 어떻게 남자도 모르는 여인이 아이를 낳습니까?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습니까? 성경이 진짜 이상한 거 아닙니까 라고 계속 따져 묻자, 성경공부반 분위기가 아주 이상해졌습니다.
바로 그때 구봉서 장로님께서 벌떡 일어나서 후배 뒤통수 때리고는 이렇게 소리치셨습니다. 야 임마! 예수 엄마 마리아도 믿었는데 네가 뭔데 안 믿어! 제가 구봉서 장로님을 쫓아했는데 비슷하나요? (좌중 웃음)
1부때 제가 이걸 했더니 성도님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 엄마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 아빠 요셉이 진짜 예화라고요. 요셉이면 어떻고 마리아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이야기도 이렇게 서로 논쟁이 되는데, 아기 예수님 탄생에 대해서 여러분 그 사실을 유명한 신학자가 유명한 목회자가 와서 강의하고 설교하고 세미나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저는 한 때 그곳에서 그런 분들께 아기예수 탄생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아기 예수 탄생을 당대 최고의 학자, 당대 최고의 전문가, 당대 최고의 권력가들을 통해서 증언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더 신뢰가 되고 더 믿음을 줄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면 성경의 더 권위가 올라갔을 텐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아기예수 탄생을 증언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은 마굿간의 동물들이 먼저 알았습니다. 그리고 목동들, 이름이 무언지도 모르는 목동들, 그리고 이방의 동방박사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피난 가시잖아요. 애굽이라고 하는 다른 나라의 그곳에서 아기 예수 탄생이 사람들에게 증언됩니다. 왜 그럴까요? 최고의 권력자, 최고의 전문가, 최고의 학자를 통해서 아기 예수 탄생이 이곳에 왔다 라는 것을 증거하면 성경의 권위가 올라갈 텐데, 예수의 신격화가 더 올라갈 텐데, 왜 이런 이름없는 목동과 동물들과 이방의 동방박사를 통해서 증언하게 하셨을까?
저는 예수의 탄생이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 속에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이 시간 공간 속에 2000년 전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실 그대로 믿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당당하고 떳떳하게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대림절 두번째 주간을 더욱 깊이 예수 묵상으로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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