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결에 대한 오해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은 '성결' 또는 '완전'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면 성결에 대한 오해나 반대는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전에서 완전에 대한 정의를 읽어보고 그것을 웨슬레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같은 것으로 단정한다든가, 철학에서 논의되는 절대적 완전을 성서가 가르치는 완전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역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의 완전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성결할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성결', '성화', 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성서가 가르치고 제시하는 범위 안에서의 완전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단어의 개념이나 본질을 그 주어진 상황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빨리 가려다가 빨리 간다"는 경고판이 보인다. 여기에서 "가려다가, 간다"는 두 단어는 국어사전에는 모두 뜻이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고속도로 경고판에서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이것을 "빨리 달리면 빨리 도착한다"라고 읽을 수도 있으나, 이는 오역이다. 바른 해석은 "과속하면 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같은 단어라도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성결 또는 완전도 마찬가지이다. 사전이나 철학에서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서가 가르치는 범위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웨슬레도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은 주로 그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성결은 그 출발점이나 표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 위험성이 나타난다.
하나는 성결의 표준을 너무 높이 둠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아예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포기하거나 절망케 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그 표준을 너무 낮게 둠으로써 성결을 경시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무시하여 아예 성결을 사모하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위험성에 대하여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만일 내가 표적을 너무 높이 놓는다면 사람들을 불편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 되며, 또 그것을 너무 낮게 놓으면 그들을 지옥의 불로 몰아넣는 일이 될 것이다.
웨슬레는 성결을 가르칠 때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성서적 성결'(scriptural holiness) 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고 하였다. '성서적' 또는 '그리스도인의' 라는 제한사가 붙어있는 것이다. 즉 성서가 가르치는 성결 또는 그리스도인이 이룰 수 있는 완전을 뜻한다. 이 범위를 넘어서는 성결은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웨슬레가 주장하고, 오늘 우리가 강조하는 성결은 바로 이런 범위 안에서 이해 된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제한적 완전'(limited perfection)이며 '불완전한 완전'(imperfect perfection)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완전(절대적 완전)이 아니라, 인간의 완전 즉 상대적 완전을 뜻한다. 우리가 가진 문제점은 불완전한 완전을 어떻게 해석하고 주장하는가라는 것이다.
성결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이전에 먼저 성결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나 편견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결 아닌 것을 먼저 설명하고 나서, 그 다음에 성결의 개념과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대문이다. 오해를 먼저 풀고나면 진상은 쉽게 밝혀지는 법이다. 다음에 제시되는 것들은 전부 성결에 대한 오해 즉 성결 아닌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성결이라고 생각하니까 자연히 성결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A. 절대적 완전이 아니다 :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성결하시고 완전하시다. 그 외의 모든 피조물들은 상대적(제한적)으로만 성결하고 완전할 뿐이다. 절대적 완전이란 더 이상 성장이나 발전의 여지가 없으며, 모든 완전을 실제적으로 소유한 것을 뜻한다. 이러한 완전은 지상에서나 천국에서나,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도 피조물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오직 무한자이신 하나님만이 절대적 완전자이시다. 하나님의 완전은 개선이나 성장의 여지가 없는 완전한 완전이다. 그러나 유한자인 피조물은 성장하고 발전하든가 퇴보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들의 완전은 더이상 성장할 수 없는 정도의 완전이 아니다. 또 퇴보하거나 상실할 수 없는 완전이 아니다. 변할 수 있는 완전 즉 상대적 완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할 때 완전의 표준이 중요하다. 이것은 인간의 피조성과 제한성을 뛰어넘은 아주 높은 표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 현세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 완전이지, 성취가 불가능한 절대적 완전이 아니다. 성서가 요구하고 제시하는 수준에서의 완전이요, 그 기준에서의 성결을 뜻한다. 이 점에 관해 웨슬레는 동생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한다.
완전을 지나치게 높이 올려 놓는 일에 관하여 한마디 한다... 나는 네가 언급하는 것처럼 여기에(땅위에) 그런 완전은 없다는 의견에 정중히 동의한다. 나는 최소한 그런 사례를 본 적도 없고 또 장차 그럴것 같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완전의 표준을 지나치게 높게 두는것 : 필자주) 완전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B. 천사적 완전이 아니다 : 천사는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천사는 순전히 영적 존재이지만, 인간은 영과 육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천사의 완전과 인간의 완전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천사들은 그들의 상황과 기준에서 완전한 영적 존재들이다. 천사들은 시험을 받았으나 범죄하여 타락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처음의 거룩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타락한 천사가 바로 사탄, 마귀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험을 받고 범죄하여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인간은 속죄함을 받아야 하며, 성결을 회복해야 하지만, 천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천사들은 정결한 영역에서 살지만, 인간은 유혹과 죄가 있고 슬픔과 고통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웨슬레 당시에도 맥스필드(Thomas Maxfield)와 벨(George Bell) 두 사람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그리고 천사처럼 완전해 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웨슬레는 이러한 절대적 혹은 천사적 완전에 대하여 계속 경고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피조적 실존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장 때문에 열광주의자로 규정되었고, 웨슬레는 책망의 편지를 썼다.
당신은 인간이 천사처럼 완전할 수 있고, 절대적으로 완전할 수 있고, 무오하거나, 유혹을 초월할 수 있고, 또한 믿음이 순결해지는 순간 완전에서 타락할 수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은 좋아하지 않는다.
육체에 거하는 한 어떠한 인간도 천사적 완전을 얻을 수는 없다.
이러한 천사주의(angelism)에 대하여 우리가 바로 알아야할 점은 인간이 천사보다 더 나은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천사는 창조 때부터 종으로 창조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일꾼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받았으며, 타락하였으나 속죄함 받음으로 다시 양자된다는 점이다. 천사적 성결을 목표삼지 말아야 할 것은 자녀가 종의 상태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도들에게는 천사보다 더 나은 자녀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다.
C. 타락전의 아담과 같은 완전이 아니다 : 전통적인 신학과 같이 웨슬레도 타락 이전의 인간의 상태는 거룩하였다고 믿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직접 창조되었으며, 그의 피조성 안에서는 완전하였다. 웨슬레는 타락 이전의 아담은 전적으로 무흠한 존재, 이해력이나 사랑과의에 있어서도 완전한 존재, 다른 피조물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던 존재, 거기다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과 같이 거룩한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속에서 완전한 교제를 할 수 있었던 의롭고 거룩한 존재였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아담은 거룩성을 상실하였으며, 원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전적으로 타락(total depravity)하였다. 인간이 오늘날 성결의 은혜를 통하여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완전성과 같지 못하다. 웨슬레의 신학적 논리에 의하면 인간이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은 모두 상실되었으나, 자연적 형상과 정치적 형상은 선행은총으로 어느 정도나마 회복되어 있으나, 도덕적 형상은 완전 상실 되었다. 성결의 은총은 상실된 도덕적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지만, 나머지 형상은 영화의 단계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핵심적이지만, 자연적 형상이나 정치적 형상은 나와 이웃, 나와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를 이미한다.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전히 회복할 수 있지만, 그 외의 관계의 회복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야 가능하다(롬8:19-22, 계21:1-5). 그러므로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같은 완전은 현세에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성서가 약속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을 믿고 있는 것이다.
D.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에서의 완전이 아니다 : 다니엘 스틸(Daniel Steele)은 그의 책 [이정표] (Mile - Steele Paper)에서 네가지 완전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최고의 완전 즉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이며, 이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완전이다. 두번째는 에덴적 완전(edenic or paradisical perfection)으로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완전이다. 세 번째는 복음적 완전(evangelical perfection)이며, 이는 사랑의 완전이요, 현세에서 가능한 완전이다. 네번째는 부활의 완전(resurrection perfection)이며, 이는 장차 도래할 낙원에서의 완전이다. 인간은 에덴적 완전과 부활의 완전 사이에서 복음적 완전을 경험하며 산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영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영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이루어진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살지만,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성의 제한성 안에서 살아야 한다. 웨슬레는 이것을 잘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이 세상의 삶을 영유하는 동안 인간 속에 있는 악마의 역사 전체를 파괴하지 않는다. 그는 혈육의 부패적인 육적 나약성, 질병, 고통 및 무수한 약점을 아직 말살하지 않는다. 그는 영혼이 부패할 육신에 거류하신 데서 오는 자연적 결과인 이해의 모든 약점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지와 오류는 모두 인간성에 속한다'... '너는 흙이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3:19)라는 심판이 내릴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이 모든 약점과 특히 이성의 나약함에 얽매어 두는 것이다.
E. 무죄적 완전(Sinless Perfection)이 아니다 : 소극적 의미의 성결은 "죄를 안 짓는 그 만큼 거룩"한 것이다. 이는 신자가 하나님의 알려진 법을 고의적으로는 더이상 범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비고의적 죄(involuntary sin)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비고의적 죄가 고의적 죄(voluntary sin)와는 다를지언정 하나님의 완전법 앞에서는 죄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성결한 자라도 비고의적 죄는 여전히 범할 수 밖에 없다.
아니 심지어는 때때로 고의적 죄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순간순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한다.
무죄적 완전은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오용될 수 있다.
- 중생이나 성결 이후에는 범죄가 불가능하다.
-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부패성에서 해방되었음으로 언행에 실수가 있을 수 없다.
- 성화는 현세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완전을 획득한 것이다.
- 칭의와 성화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 성화되었음으로 더 이상 기도나 거룩한 경건 훈련이 필요치 않다.
웨슬레는 모든 말과 행동이 사랑에서 나오는 한, 무지, 실수, 판단 착오, 연약성 등은 본질상 죄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것 역시 하나님의 준엄하신 공의 앞에서는 설 수 없기에 속죄의 피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무죄적 완전에 대하여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죄라고 불러 마땅한 죄(즉 율법을 알고도 짐짓 범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당히 죄라고 불리는 것(즉 알고 모르고 간에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생각은 없이 범하는 것)도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한다.
나는 죽을 것으로 되어 있는 인간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무지와 잘못의 자연적 결과로 간주될 본의 아닌 범과를 배제하는 완전은 이생에는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기에"무죄적 완전"이라는 말은 내가 자가당착되어 보일까봐 결코 쓰지 않는 어귀이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본의 아닌 범과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범과를 죄라고 부르고 싶으면 부르라. 그러나 나는 이상의 이유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성결한 사람은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또는 고의적이거나 비고의적이거나 간에 일체 죄를 못 짓는 사람(impossible to sin)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도 마음만 먹으면 범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는 여전히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안짓는 사람(possible not to sin)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도 비고의적 죄에서조차 해방될 수는 없으므로 무죄적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
F. 연약성에서 해방되는 완전이 아니다 : 연약성과 죄는 구별되어야 한다. 죄는 인간의 의지의 결단에서 비롯되지만, 연약성은 의지와 관계없이 존재한다. 죄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훼손이지만, 연약성은 인간의 자연적, 육체적 제한성을 뜻한다. 칵스(Leo Cox)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이 창조시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상실되었다. 이때 도덕적 형상은 완전 상실되었으나, 자연적 형상은 선행은총으로 인해 부분적으로마나 회복되었다. 그러나 크게 훼손된 것은 사실이다. 연약성은 바로 그 자연적 형상의 결여를 의미한다. 도덕적 형상은 성결 혹은 성화의 은총에 의해 이 땅에서 회복될 수 있지만, 자연적인 형상은 현세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성결한 사람은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하겠지만, 그의 마음과 육체는 불완전하다. 이것이 연약성이다.
연약성을 죄라고 규정한다면 인간은 결코 죄에서 완전 해방될 수 없고, 그 결과 언제나 죄책감에 짓눌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약성이 죄가 아닌 것은 주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는 성서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신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죄와 연약성의 구별의 중요성에 대하여 우드(J. A. Wood)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생래의 죄와 타락한 인간 성질 안에 있는 죄없는 연약성을 구별하는 일은 중요한 일인가?
답)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한편으로 불필요하게 자기를 책망하며 괴롭힌다. 또 다른 면은 우리가 참으로 책망받아야 할 때에 우리가 스스로를 그 책임에서 면제할 수 있는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연약성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성결과 함께 존재한다. 웨슬레는 여러가지 육체적, 연약성 뿐만 아니라 도덕적 성질이 아닌 모든 내적 외적인 불환전은 성결의 삶에서도 있을 수가 있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까지는 이러한 연약성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G. 지식, 판단, 기억, 그리고 봉사 등에서의 완전이 아니다 : 웨슬레는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지 않은가?를 설명하면서 첫번째로 "그들은 지식에서 완전하지 않다. 무지나 오류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산 사람치고는 아무도 전지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만큼, 또한 무오하기를 바랄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썩을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까지는 때때로 "잘못 생각함"을 면치 못한다." 또한 "판단이 잘못됨으로써 실제 행동의 잘못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랑으로 완전해진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는 하나님과 그의 사역, 그리고 영적인 일들에 관해 더 잘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내세의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다. 우리의 지식이나 기억력은 증가될 수도 있고 감소될 수도 있다. 신앙인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는 권고를 받고 있다.
지식이나 기억의 부족이나 잘못은 판단 착오나 편견 또는 그릇된 선입관을 초래할 수 있다. 이것들은 나아가 행동에서의 실수나 봉사에서의 미흡을 초래하게 된다. 이럴 때에 중요한 것은 동기의 순수성이다. 그 동기가 사랑에서 출발하였다면, 그 잘못은 비록 율법적으로는 잘못일지라도 사랑의 법에서는 잘못이 아니다. 온갖 생각과 말과 행위가 순수한 사랑에 지배되는 사람도 동시에 무지하거나 실수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러나 성결한 신자는 봉사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게 된다.
H. 유혹이 없는 성결이 아니다 : 성결은 그리스도인이 유혹받는 것을 베재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도 에덴 동산에서 유혹을 받았으며,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다(마4:1-11, 히2:18, 4:15)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가지고 있는 한"(고후4:7) 여러가지 유혹을 받게 되어 있다. 토마스 쿡(Thomas Cook)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에는 우리가 어떠한 은총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을 유혹으로부터 면제해 주는 상태에 있게 해 준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유혹받는다는 것 그 자체는 아직 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혹은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히 죄된 것(sinful)이지만, 유혹의 존재나 활동은 아직 나의 책임이 아니다. 유혹이 죄가 되는 것은 내가 나의 의지로 유혹을 영접할 때 비로소 나의 죄 즉 내적인 죄가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즉 나의 의지가 유혹과 결합될 때 실제적인 죄(actual sin)가 되는 것이다. 다니엘 스틸은 이 점에 대하여 "의지가 양심의 충고에 대적하여 유혹을 즐기거나 받아들이게 될 때, 죄가 시작한다"고 하였다. 또한 콕스도 "유혹이 있을 때는 내적으로 잘못된 충동이 있게 되며, 의지는 이 충동에 저항하거나 항복하거나 하게 된다. 이 충동이 아무리 강하고 매혹적일지라도 그것은 도덕적 본성으로부터 허락을 받을필요가 없다. 그것이 허락받지 못하는 한, 진정으로 또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웨슬레도 유혹이 죄라거나 혹은 강한 유혹이 죄된 상태의 표식이라고 믿지 않았다. 실제로 마음의 부패와 유혹은 같지 않은 것이다.
유혹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존재하고 활동하지만, 내가 의지로 유혹을 영접할 때 죄가 된다. 그러므로 "유혹이 죄로 향한 유인인줄 알면서도 내적으로 동조하기 시작할 때는 언제든지 죄가 시작된다. 그 유혹을 격퇴하게 되면 내면적인 동조의 증거가 없으며, 따라서 죄가 없다.
그러므로 유혹을 받는다고 성결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죄는 유혹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유혹에 빠진 결과이다.
우리가 유혹을 이기면 유혹은 우리의 전리품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는 사자와 같이(벧전5:8) 도전하는 유혹을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 아니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님께서 약속하셨다(엡5:10-17, 요일5:4-5). 성결인은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확실하게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다.
I. 과실이나 실수도 없는 완전이 아니다 : 웨슬레의 죄관에는 의지적 죄와 무의지적 죄(고의적 죄와 비고의적 죄)가 있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성을 강조하는 웨슬레는 의지적 죄를 참된 의미의 죄라고 규정하였다. 즉 죄책이 따르는 죄는 의지적인 죄이고 무의지적 죄는 사망의 죄책이 따르지 않는 죄이다. 그러나 둘 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필요로 한다. 과실이나 실수는 무의지적인 죄에 속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죄책이 따르지 않는다. 다만 후회와 아픔이 따르게 된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알려진 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것은 마땅히 죄라고 칭하며, 또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법을 무의식 중에 범하는 것을 부적당하게 죄라고 칭하며, 모두 다 속죄의 보혈을 필요로 한다.
문) 이 완전은 모든 연약성과 무지와 과실(실수)를 배제하는가?
답) 나는 항상 그와 정반대를 주장해 왔고, 또 주장하고 있다.
문) 온갖 생각과 말과 행위가 순수한 사랑에 지배되는 사람이 어떻게 동시에 무지하거나 실수할 수 있는가?
답)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사람이 순수한 사랑으로 충만하고도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 실상 나는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까지는 실제로 실수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문) 순수한 사랑에서 어떻게 잘못이 생겨날 수 있는가?
답) 나의 대답은 이렇다. - 순수한 사랑과 양립할 수 있는 과오도 많다. - 사랑에서 부대적으로 발생하는 과오도 있다.
J. 상실할 수 없는 완전이 아니다 : 우리가 얻는 성결은 은행 예금과 같은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주를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될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이다. 웨슬레도 한 때는 성화된 자는 다시 타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1766년 그외 책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설명' 에서는 그것을 부인했다.
문) 그들이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는가?
답) 그럴 수 있다고 하는 충분한 확증이 있다. 사실을 보아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전에는 죄에서 구원된 자는 타락할 수 없다고 우리가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와 반대로 알고 있다... 성결의 정도가 아무리 높고 강하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실족할 수 없는 그러한 성결은 없다.
또한 성결의 은혜를 잃었다가 회복할 수도 있다.
문) 이 상태에서 실족한 자가 다시 회복될 수도 있는가?
답) 물론이다. 그러한 사례도 많다. 그렇다. 그렇다. 사람이 이 상태로 굳혀지기 전에 그것을 한번 이상 잃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범죄하지 않게 절대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없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범죄의 가능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해 둬야 할 점은 성결의 은혜야말로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지 않게 지켜주는 최대의 은혜라는 점이다. 성결인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유혹이나 연약성, 또는 자유의지에 의한 타락의 위험을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성결은 범죄의 가능성을 가장 적게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신앙인은 계속적으로 주님께 의지해야 한다. "주님을 의지하면 이기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면 넘어지게 된다."
K. 더 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는 완전이 아니다 : 성결은 단번에 영원히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적인 것도 아니다. 성결은 날마다 유혹과 시련 속에서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나 완전한 성결(entire holiness)이 질적으로 부족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결의 순간에 모든 죄는 정결해졌으며, 사랑으로 충만함을 온전히 얻었다. 그러나 양적인 면에서 또는 정도(degree)에서 더욱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의 분야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성결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은혜에서 은혜로 성장해야 한다. 성결은 믿음으로 얻는 은혜이다. 믿음에는 정도가 있다. 어린아이의 믿음이 있고, 장성한 어른의 믿음도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더욱 온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성결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에는 제한이 없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더욱 성장해야한다(엡17:19; 고후7:1).
우드(J.A. Wood)는 "질적인 완전은 양적인 증가를 배제하지 않는다... 완전히 성결한 영혼은 종류나 성질상 완전하겠지만, 정도나 분량에 있어서는 제한이 있다. 양적인 면에서 성결은 증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L. 광신이나 열광주의가 완전이 아니다 : 성결이 어떤 신비의 체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거나, 열광적인 신앙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웨슬레는 신비주의는 "사탄의 방법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허울 좋은 마귀의 올무", 혹은 "죄악의 신비" 라고 표현하였으며, "나는 내 신앙이 거의 난파할 뻔한 암초가 신비주의자들의 저서였다고 생각한다" 고까지 말하였다.
또한 웨슬레는 성결한 자에게 주는 두번째 충고에서 "교만의 딸 열광을 조심하라, 과열된 상상은 절대로 용납하지 말라,..., 음성, 인상, 환상, 묵시 등을 쉽사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상상하지 말라,...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인지 시험하라"고 경계하였다.
흔히 열광으로 가는 길 중의 하나는 방법없이 목적에 이르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연구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담도 하지 않고 지식 얻기를 기대한다든가, 꾸준히 께어 기도하지 않으면서 영력이 있기를 기대한다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은사를 기대하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성결은 신앙의 흥분상태나 은사 체험 등과는 구분된다. 은사 체험을 많이 한다는 것이 곧 성결은 아니다. 오히려 성결은 여러 은사 중에 "더욱 좋은 길"(The more excel-lent way, 고전12:31) 즉 사랑의 은사를 받는 것을 뜻한다. 또한 열광과 함께 지속적인 환희의 체험도 성결의 체험이라고 할 수 없다. 환희는 우리가 칭의되고 중생할 때도 따른다.
M. 성결이 금욕주의는 아니다 : 1900년에 미국의 개신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에서는 흡연, 음주, 카드놀이, 영화, 연극, 소설읽기, 댄스 등을 금하였으며, 심지어 콜라 과음, 스케이팅, 파마, 당구, 장기, 골프 등도 금지하였다. 이것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율법적인 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회사상 한 때 금욕주의를 통하여 완전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도피하고 자기 몸을 죽여서 완전하게 되고자 고행을 자청하였다. 이것이 제도화 된 것이 중세 수도원이다. 금욕적 생활이 기독교인의 최고의 수준으로 생각되었다. 뉴톤 플루(R. Newton Flew)는 "수도원 제도는 유구한 교회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고자하는 담대한 조직적 시도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금욕주의가 성결의 표시는 아니다. 훼슬레도 올더스케이트의 체험이 있기 전에 금욕주의 혹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완전에 이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은 절망하고 말았다. 성결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완전한 구원(full salvation)이다.
N. 완전이 육체적 본능이나 욕구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 성결은 인간의 육체적 본능이나 욕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 성숙되게 하고 순화시켜 준다. 본능이나 욕구는 인간성 자체에 속하며,, 도덕적으로 중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부여하신 성질이므로 오히려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고, 어떤 방법으로 표현되느냐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죄가 되기도 한다. 미국 훼슬레안 감리교회 총회장이었던 니콜슨(Roy, S. Nicholson)박사는 1951년 미국 에즈베리(ASBURY) 신학교와 1945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행한 성결에 대한 강의에서 성결과 육체적 본능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이것(성결)은 또한 생리적 능력, 식욕, 정서, 감수력을 폐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구성해 놓으신 것을 탓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규율하고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것(성결)은 개성을 파괴하는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악한) 육정을 제거함으로써 개인의 존재를 윤택하게 하고 숭고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셨으므로 육체가 가진 순수한 본능과 욕구는 지니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표현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모범을 보이셨다. 타락한 인간들은 그것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 성결은 우리의 악한 죄성을 제거하여 깨끗이 하는 것이지, 우리의 본능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비인간화(dehuma-nized person)되어 버릴 것이다.
O. 성결이 사람을 초인이나 또는 특수한 인간이나 우월한 신분으로 만들지 않는다 : 성결이 우리를 비인간화하지 않음과 동시에 우리를 초인간화(super man)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성결의 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흔히 제기하는 문제점이다. 즉 인간을 특수한 인간으로 만들어서 정상적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성결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 창조주의 뜻을 알고, 그를 닮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창조 본래의 의도에 가장 적합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결인은 물론 복음전도나 봉사에 능력이 더해지지만(행1:8). 그럴수록 더욱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가치성을 인식하게 된다(사6:1-13).
성화 혹은 성결을 속세로부터의 해탈이나 초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결의 은혜를 마치 신선이나 도사가 되는 단계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성결한 사람은 이 세계로부터 추월한 고고한 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성령은 우리의 자아를 폐지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자아를 초월하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자아를 정결케 하신다.
그러므로 성서적 의미에서 성화된다는 것은 해탈이나 초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곧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회되는 것을 뜻한다. 거룩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거룩한 인간 곧 성화되는 인간은 사랑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거룩도 그들의 사랑에 있다...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은 소위 속된 것으로부터의 자기분리에 있지 않고 그것에 대한 관심과 개입과 사랑에 있다.
P. 성결해도 환란이나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 단순하고 소박한 신앙인은 우리의 신앙의 정도나 단계가 높아지거나 깊어지면 그와 비례해서 축복이 따라 온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주 인용하는 성구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1:2)라는 것이다. 물론 성서는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축복의 약속이 동시에 환란이나 시련이 면제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욥의 경우처럼 훌륭한 신앙인에게도 환란이나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벧전4:12-14; 고후1:3-4; 시34:19; 46:1; 약1:2; 5:11, 13).
신앙인은 물론 더욱 건강할 수 있으며, 더욱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서에 약속하셨다. 그러나 신앙인도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으며,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가정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으며, 난치의 질병으로 고통당할 수도 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모든 의심이나 불안 염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도 마음이 상할 수 있으며, 걱정하고, 신경이 예민할 때도 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환란이나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이긴다. 시련 중에 오히려 "주의 고난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고 고백할 수 있다. 신앙인은 폭풍을 잠잠케 하실 주님을 희장 중에 바라보면서, 믿음에 굳게 서서, 더욱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
Q 성결이 인격의 성숙성을 단번에 이루어 주지 않는다 : 성결이나 온전한 성화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정결케 하여 순결한 영혼을 가지게 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준다. 그러나 그것이 인격의 성숙성이나 완숙미를 당장에 이루어 주는 것은 아니다. 인격의 성숙은 시간에 따라 점진적으로 훈련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무리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하더라도 그 사랑의 표현은 서툴거나 잘못될 수도 있다. 사랑도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성숙하게 표현되어져야 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성장을 강력히 가르치고 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릿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 "완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15).
완전히 성화된 사람도 그의 완전에 필연적으로 제한을 가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행위에서는 불완전할 때도 있다. 결점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완전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가지는 상대적인 완전은 인간 생활의 여러가지 제한을 받기 쉬운 완전이다.
성결은 인격을 정화시키지만 다른 기질(temperament)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기질이 가진 여러가지 약점이나 미숙함은 은혜 안에서 개선되고 성숙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화는 성장의 종점이 아니고, 무한한 성장의 출발점이다. "성화의 경험은, 비록 고귀한 것이지만, 졸업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보다 높은 교육을 위한 입학이다. 거기에서 사랑으로 온전해진자들이 점진적으로 하늘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R. 성결의 경험은 사람마다 동일하지 않다 : 성결을 주장하는 웨슬레안들은 대체로 성령세례를 완전한 성결의 체험과 동일시하여 왔다. 대부분의 웨슬레안들은 오순절적인 체험을 신자가 중생한 후에 이차적으로 체험하는 온전한 성화와 연관하여 이해하려 한다. 성령세례와 성결을 동일시하는 웨슬레안의 견해는 성령세례에 대한 해석에서 기인한다. 즉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받은 신자가 받는 이차적 체험이요, 순간적 체험이며, 정결케하는 체험이라고 이해한다(마3:10-12). 따라서 전통적인 웨슬레안의 입장에서는 성결의 체험을 강조할 때 성령세례가 강조되며, 이는 다시 불세례를 의미하게 되어, 뜨거운 불의 체험을 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경험을 정형화하여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성령은 불로도 상징되지만, 그 외에는 물, 바람, 이슬, 비둘기 등으로도 상징되는데, 이는 성령의 사역의 특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각 개인의 인격적 특성에 맞게 역사하신다. 우리의 개성과 기질이 다르므로 신앙 경험도 다르게 되며, 성결의 체험도 다양하다. 무조건적인 도식화도, 그리고 모방도 위험하다. 성령이 우리를 성화케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면서 나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 웨슬레의 성결론(II)
그리스도인의 성결(성광 - 한영태 지음) 중에서...
첫댓글 귀한 글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항목에 아멘입니다!!!
성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더욱 큰 자유와 믿음과 성장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