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의 사실 답①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사건'은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868년 이후 역사적 사실을 고르면 된다.
오페르트는 두 차례의 통상 요구가 모두 거절되자 미국인 자본가와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선원들을 데리고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 했으나 덕산군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하였습니다(1868).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서양에 대한 반감이 더욱 고조되었고, 흥선 대원군도 서양 세력에 대해 더욱 강경한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침입(신미양요, 1871)으로 통상 수교 거부 의지는 더욱 강화되어 흥선 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어요.
ㄱ - 흥선 대원군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ㄴ -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을 빌미로 미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1871) 당시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항쟁하였으나 패하였습니다. 이때 미군은 수(帥)’자기(어재연 장군 깃발)를 전리품으로 노획해 갔다가 2007년 장기 임대 형식으로 국내에 반환하였어요.
ㄷ -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 의궤(조선왕조의궤)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했다가 2011년 임대 형태로 반환되었습니다.
ㄹ -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부대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ㄴ으로 묶인 ①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