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익(南履翼)
[문과] 정조(正祖) 13년(17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6위(16/6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0A8C774C775B1757X0
자(字) 공려(公勵)【補】(주1)
생년 정축(丁丑) 1757년 (영조 33)
합격연령 33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음관] 문음보(文蔭譜)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이조참의(吏曹參議)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경연(經筵)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홍문관(弘文館)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함경도(咸鏡道)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1823[계미(癸未)] 6월 17일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1815[을해(乙亥)]
[관인정보]
제수년월 1830 [경인(庚寅) 11월 초10일] 전병조판서(前兵曹判書) 계하(啓下: 임금의 재가)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병조판서(兵曹判書)
[관인정보]
제수년월 1827 [정해(丁亥)]
[품관 정보]
품관 정2품
[출전]
『비변사선생안(備邊司先生案)』(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6005])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이력사항]
선발인원 60명 [甲3‧乙7‧丙50]
전력 유학(幼學)
문과시험답안 어제(御題) 명(銘):관풍각(觀豐閣)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경로(南庚老)
[생부(生父)]
성명 : 남현로(南玄老)
관직 : 참판(參判)
과거 : 문과(文科)
[조부 - 조부1:부의 부]
성명 : 남태제(南泰齊)
호 : 담정(澹亭)
관직 : 판서(判書)
과거 : 문과(文科)
[증조부 - 증조부1:조부1의 부]
성명 : 남필명(南弼明)
관직 : 도정(都正)
관직 : 음관(蔭官)
[4대 - 4대조1:증조부1의 부]
성명 : 남치훈(南致薰)
호 : 지산(芝山)
관직 : 참판(參判)
과거 : 문과(文科)
[5대 - 5대조1:4대조1의 부]
성명 : 남훤(南翧)
호 : 창명(滄溟)
관직 : 감사(監司)
과거 : 문과(文科)
[6대 - 6대조1:5대조1의 부]
성명 : 남두첨(南斗瞻)
관직 : 참지(參知)
과거 : 문과(文科)
[7대 - 7대조1:6대조1의 부]
성명 : 남이신(南以信)
호 : 청고(靑臯)
관직 : 참판(參判)
과거 : 문과(文科)
[8대 - 8대조1:7대조1의 부]
성명 : 남호(南琥)
관직 : 도사(都事)
관직 : 음관(蔭官)
[외조부(外祖父)]
성명 : 엄구(嚴球)
관직 : 동추(同樞)
관직 : 음관(蔭官)
본관 : 미상(未詳)
[생외조부(生外祖父)]
성명 : 임수관(任守寬)
관직 : 군수(郡守)
관직 : 음관(蔭官)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송영(宋鍈)[文]
관직 : 판서(判書)
과거 : 문과(文科)
본관 : 恩津【補】
[주 1]자 : 『문음보(文蔭譜)』2‧4(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929.4-M923])를 참고하여 자를 추가.
[주 2]생외조부 : 『문음보(文蔭譜)』2‧4(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929.4-M923])를 참고하여 생외조부를 추가.
[주 3]처부 : 『문음보(文蔭譜)』2‧4(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929.4-M923])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문음보(文蔭譜)』 2‧4(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929.4-M923])
남현로(南玄老)
[문과] 영조(英祖) 32년(1756) 병자(丙子) 정시(庭試) 병과(丙科) 26위(25/35)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0A8D604B85CB1729X0
자(字) 동보(同甫)
생년 기유(己酉) 1729년 (영조 5)
합격연령 28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진사] 영조(英祖) 30년(1754)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7위(12/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5명 [甲1‧乙3‧丙31]
전력 생원(生員)
관직 옥당(玉堂)
문과시제 어제(御題) 부(賦):일감재자(日監在玆)
타과 영조(英祖) 30년(1754)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二等) 7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태제(南泰齊)[文]
[조부(祖父)]
성명 : 남필명(南弼明)[生]
[증조부(曾祖父)]
성명 : 남치훈(南致熏)[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박시원(朴始遠)[生]
본관 : 고령(高靈)【補】
[처부(妻父)]
성명 : 임수관(任守寬)[進]
본관 : 풍천(豊川)【補】
[주 1] 거주지 : 『숭정3갑술증광사마방목(崇禎三甲戌增廣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4])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十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남태제(南泰齊)
[문과] 영조(英祖) 3년(1727) 정미(丁未)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1위(21/4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0A8D0DCC81CB1699X0
자(字) 원진(元鎭)
생년 기묘(己卯) 1699년 (숙종 25)
졸년 병신(丙申)【補】(주1) 1776년 (정조 즉위)
향년 78세
합격연령 29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경기감사, 홍문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진(元鎭)·관보(觀甫), 호는 담정(澹亭)·학야(鶴野).
할아버지는 도승지 남치훈(南致熏)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남필명(南弼明), 어머니는 한성판윤 신후재(申厚載)의 딸이다.
1723년(경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영조 3)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8년『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 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죄인 국문 등에 신속히 대처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 뒤 전적·예조좌랑·지평·병조좌랑 등을 거쳐, 1734년 정언에 이르러 당시 영상인 심수현(沈壽賢)을 탄핵하다가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좌천되었다.
뒤에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1735년 장악원첨정을 시작으로 필선·장령·정언·지제교·헌납·집의·수찬·교리 등의 대각(臺閣)을 두루 역임했다. 당시 기강퇴폐(紀綱頹廢), 재용 낭비, 풍속 괴패,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논쟁 등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유배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으며, 1743년 병조참의·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형조참의·강화유수·형조참판·호조참판·한성부윤·대사헌·대사성·개성유수를 역임했다.
그 뒤 1760년에 자헌(資憲)으로 승계해 지돈녕부사·한성판윤·내의원제조를 거쳐 정헌(正憲)으로 승계, 형조판서·예조판서·세자우빈객·도총관·경기감사·홍문관제학을 거친 뒤, 1767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나이 70이 되자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숭록(崇祿)으로 승계한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성품이 단정하고 스스로 행동을 잘 지켜 관직 생활 50년 동안 파당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문장이 우아하고 시문에 화실(華實)이 구비되었으며, 제자백가에도 통달했다.
저서로는 『담정유고』가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태제(南泰齊))]
[생원] 경종(景宗) 3년(172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47위(77/100)
[진사] 경종(景宗) 3년(172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진사] 1등(一等) 2위(2/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43명 [甲3‧乙7‧丙33]
전력 진사(進士)
관직 옥당(玉堂)
문과시제 표(表):의송이급사유이청신미상망유소거기언가신특이소천인장석제감찰어사(擬宋李及謝諭以淸愼未嘗妄有所擧其言可信特以所薦人張錫除監察御史)
타과 경종(景宗) 3년(172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三等) 47위
경종(景宗) 3년(172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1등(一等) 2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필명(南弼明)[生]
[조부(祖父)]
성명 : 남치훈(南致熏)[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남훤(南翧)[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신후재(申厚載)[文]
본관 : 평산(平山)【補】
[처부(妻父)]
성명 : 임달원(任達元)[進]
본관 : 풍천(豊川)【補】
[처부(妻父)2]
성명 : 박시원(朴始遠)[生]
본관 : 고령(高靈)【補】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옹정5년정미윤3월증광별시문무과전시방(雍正五年丁未閏三月增廣別試文武科殿試榜)』(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83])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十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남필명(南弼明)
[생원] 숙종(肅宗) 25년(1699) 기묘(己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15위(45/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0A8D544BA85B1672X0
자(字) 사해(士諧)
생년 임자(壬子) 1672년 (현종 13)
합격연령 28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치훈(南致薰)
품계 :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 지제교(知製敎)
[안항(鴈行)]
형(兄) : 남보명(南輔明)
형(兄) : 남우명(南遇明)
[출전]
『금상25년기묘단종대왕정순왕후복위부묘증광별시사마방목(今上二十五年己卯端宗大王定順王后復位祔廟增廣別試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24])
남치훈(南致薰)
[지방관] 조선중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1713[계사(癸巳)]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0A8CE58D6C8B1645X0
자(字) 훈연(熏然)
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미상)1645년(인조 23)
졸년 미상(未詳) (미상)1716년(숙종 42)
시대 조선중기
왕대 숙종(肅宗)
본관 의령(宜寧)
활동분야 관료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형조참판,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훈연(熏然), 호는 지산(芝山).
할아버지는 사도시정 남두첨(南斗瞻)이고, 아버지는 남훤(南翧)이며, 어머니는 권현(權晛)의 딸이다. 함경도관찰사 남익훈(南益熏)의 아우다.
1678년 선교랑(宣敎郎)의 신분으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검열이 되고 1681년 홍문록에 올랐다.
삼사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698년 승지를 거쳐 1707년 도승지가 되었고,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2년 형조참판으로 승진하여 형제가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713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는 원자정호문제(元子定號問題)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평탄한 길을 걸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치훈(南致薰))]
[문과] 숙종(肅宗) 4년(1678) 무오(戊午)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1위(31/42)
[생원]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62위(92/100)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호조참의(戶曹參議)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호조참판(戶曹參判)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홍문관(弘文館)
[관인정보]
관직명칭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관직등급 관찰사(觀察使)
관직이칭 동백(東伯)
부임년월 1713 [계사(癸巳)] 임(任)
[도 정보]
도명칭 강원도(江原道)
[비고]
비고 임(任)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남훤(南翧)
[문과]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丙子) 별시(別試) 을과(乙科) 2[探花郞]위(03/11)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B0A8D6E4FFFFB1609X0
자(字) 백도(伯圖)
호(號) 창명(滄溟)
생년 기유(己酉) 1609년 (광해군 1)
졸년 병신(丙申)【補】(주1) 1656년 (효종 7)
향년 48세
합격연령 28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609년(광해군 1)∼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도(伯圖), 호는 창명(滄溟).
증조부는 남호(南琥), 조부는 남이신(南以信)이고, 부친은 감사(監司) 남두첨(南斗瞻)이다. 외조부는 한응인(韓應寅)이고, 처부는 권현(權晛)이다.
1630년(인조 8) 경오식년사마시(庚午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별시문과(丙子別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였다. 1641년(인조 19) 정언(正言)이 되고 이듬해 지제교(知製敎), 부수찬(副修撰),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1651년(효종 2)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승지(承旨)를 지낸 후 1655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창명집(滄溟集)』이 있다.
[생원] 인조(仁祖) 8년(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7위(87/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1명 [甲1‧乙2‧丙8]
전력 생원(生員)
관직 감사(監司)
관직 옥당(玉堂)
문과시제 책문(策問):요무(要務)
타과 인조(仁祖) 8년(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57위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補】(주3)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두첨(南斗瞻)[文]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사도시정(行司䆃寺正)【補】(주4)
[조부(祖父)]
성명 : 남이신(南以信)[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남호(南琥)[進]
[외조부(外祖父)]
성명 : 한응인(韓應寅)[文]
본관 : 청주(淸州)【補】
[처부(妻父)]
성명 : 권현(權晛)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남증(南䎖)【補】
제(弟) : 남굉(南翃)【補】
제(弟) : 남율(南𦒑)【補】
제(弟) : 남번(南翻)【補】(주5)
[가족과거]
자(子) : 남익훈(南益熏)[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병자별시문무과방목(丙子別試文武科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대학원 B8 A2 163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구존 : 『병자별시문무과방목(丙子別試文武科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대학원 B8 A2 163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모 구존을 추가.
[주 4]부관직 : 『병자별시문무과방목(丙子別試文武科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대학원 B8 A2 163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 관직을 추가.
[주 5]안항 : 『병자별시문무과방목(丙子別試文武科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대학원 B8 A2 163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十(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남두첨(南斗瞻)
[문과] 광해(光海) 8년(1616)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0위(20/41)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0A8B450CCA8B1590X0
자(字) 여앙(汝仰)
생년 경인(庚寅) 1590년 (선조 23)
졸년 병신(丙申)【補】(주1) 1656년 (효종 7)
향년 67세
합격연령 27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호조참의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여앙(汝昻), 호는 성와(醒窩). 할아버지는 남호(南琥)이고, 아버지는 병조참판 남이신(南以信)이며, 어머니는 정윤복(丁胤福)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서(蔭敍)로 금부도사가 되었다.
1616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거쳐 형조정랑·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628년(인조 6) 진휼청종사관으로 경상도에 파견되어 굶주리는 도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식량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 뒤 사섬시정(司贍寺正)·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배천현감·남원부사·충주목사 등 10여 고을을 다스려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1637년 사복시정을 거쳐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두첨(南斗瞻))]
[생원]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1위(81/100)
[진사]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7위(57/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41명 [甲3‧乙7‧丙31]
전력 현감(縣監)
관직 첨지사(僉知事)
문과시제 책문(策問):적전(籍田)
타과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51위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27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이신(南以信)[文]
[조부(祖父)]
성명 : 남호(南琥)[進]
[증조부(曾祖父)]
성명 : 남응운(南應雲)[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정윤복(丁胤福)[文]
본관 : 나주(羅州)【補】
[처부(妻父)]
성명 : 한응인(韓應寅)[文]
본관 : 청주(淸州)【補】
[처부(妻父)2]
성명 : 김경량(金景亮)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자(子) : 남훤(南翧)[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40년임자3월13일사마방목(萬曆四十年壬子三月十三日司馬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B8 A1 1612A])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九(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남이신(南以信)
[문과]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5위(25/4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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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자유(子有)
호(號) 직곡(直谷)
생년 임술(壬戌) 1562년 (명종 17)
졸년 무신(戊申)【補】(주1) 1608년 (선조 41)
향년 47세
합격연령 29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경기도관찰사, 안변부사,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자유(自有), 호는 직곡(直谷).
할아버지는 대사헌 남응운(南應雲)이고, 아버지는 참판 남호(南琥), 어머니는 신사헌(愼思獻)의 딸이다. 이조판서 남이공(南以恭)의 형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593년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었으며 주서·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예조정랑을 지냈다.
1596년 사간원헌납이 되었는데, 이 때 삼척부사 홍인걸(洪仁傑)이 왜적 포로 가운데 우리 나라 사람이 있으므로 이를 관찰사에게 압송하려 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아우 홍인간(洪仁侃)이 동족을 해친 자들이라 하여 살해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마치 공상(功賞)을 탐낸 나머지 참살한 것처럼 무고한 의금부당상(義禁府堂上)·색낭청(色郎廳)의 파직을 건의했다.
또한, 행정 능력이 없는데다가 아들 혼사에 민간으로부터 재물을 징렴한 덕천군수(德川郡守) 정대길(鄭大吉)과 매사를 하리(下吏)들에게 물어서 처리해 하리들의 조롱을 받고 민간을 침학해 피해를 입힌 서산군수 박규영(朴葵英)의 파직을 상소했다.
1597년 사헌부지평이 되어 조운(漕運)에 태만한 군자감정(軍資監正) 유사원(柳思援), 사사로운 가정일에 역마(驛馬)를 사용한 통제사종사관(統制使從事官) 윤동로(尹東老)의 파직을 상소했다.이어서 장령·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집의(執義)를 거쳐 이듬해 사간이 되었다. 이 때 경상도관찰사에 30세의 연소한 이시발(李時發)이 임명되자, 병란으로 피해가 클 뿐만 아니라 왜적과 대치한 중요한 곳임을 들어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 바꿀 것을 건의했다.
1599년 승지·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그 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양주(楊州)·광주(廣州) 일대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 피해가 크자 이를 포획하지 못한 책임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01년에 안변부사, 1604년에 동지중추부사에 이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606년에는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뒤 1608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이신(南以信))]
[진사]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3위(43/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40명 [甲3‧乙7‧丙30]
전력 진사(進士)
관직 병조참판(兵曹參判)
문과시제 표(表):송조보청물선하태원(宋趙普請勿先下太原)
타과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13위
기타 연벽(聯璧[兄弟同榜]):弟 南以恭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호(南琥)[進]
[조부(祖父)]
성명 : 남응운(南應雲)[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남세건(南世健)[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신사헌(愼思獻)[文]
본관 : 거창(居昌)【補】
[처부(妻父)]
성명 : 정윤복(丁胤福)[文]
본관 : 나주(羅州)【補】
[안항(鴈行)]
형(兄) : 남이인(南以仁)【補】
제(弟) : 남이공(南以恭)[文]
제(弟) : 남이순(南以順)【補】(주3)
[가족과거]
숙부(叔父) : 남근(南瑾)[文]
자(子) : 남두첨(南斗瞻)[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16년무자2월24일사마방목(萬曆十六年戊子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8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안항 : 『만력16년무자2월24일사마방목(萬曆十六年戊子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8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남호(南琥)
[진사] 선조(宣祖) 1년(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3위(73/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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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중헌(仲獻)
생년 병신(丙申) 1536년 (중종 31)
합격연령 33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별좌(別坐)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응운(南應雲)[進]
품계 :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안항(鴈行)]
형(兄) : 남관(南琯)
제(弟) : 남위(南瑋)
제(弟) : 남근(南瑾)[進]
[출전]
『융경2년무진년증광사마방목(隆慶二年戊辰年增廣司馬榜目)』(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고350.48 융01])
남응운(南應雲)
[문과] 중종(中宗) 30년(1535) 을미(乙未)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2위(04/07)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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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치원(致遠)
호(號) 국창(菊窓)
생년 기사(己巳) 1509년 (중종 4)
졸년 정해(丁亥)【補】(주1) 1587년 (선조 20)
향년 79세
합격연령 27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승정원주서, 길주목사,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치원(致遠), 호는 국창(菊窓)·난재(蘭齋)·관원(灌園).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삭령군수 남변(南忭), 아버지는 참판 남세건(南世健), 어머니는 이윤식(李允湜)의 딸이다.
1535년(중종 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537년 교서관검열, 이듬해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이때 춘당대의 시예에서 제술로 입격해 반숙마(半熟馬) 한필을 하사받았다.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춘추관기사관을 겸하면서 사관직(史官職)을 소홀히 한 잘못으로 탄핵을 받고 추고(推考)되었다. 이어 외직인 강계판관이 되었다.
이때 변방의 야인들이 자주 침범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경험하고 뒤에 내직으로 돌아와서 야인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1545년(인종 1) 사성으로 참교를 겸직했고,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46년(명종 1) 장령이 되어 다음 해 을사사화 이후에 남아 있던 대윤 세력의 근절을 주장하기도 했다.
1549년 장령으로서 양사(兩司)의 관원과 함께 이기(李芑)·윤인경(尹仁競)·정순붕(鄭順朋) 등의 국정 천단을 탄핵하다가 실패했다. 마침 북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임명되었다.
1551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장례원판결사·좌부승지·우부승지·참찬관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554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 뒤 1557년 형조와 병조의 참의, 1559년 우승지·함경도병마절도사, 1561년 동지중추부사, 1564년 경기도관찰사, 1565년 경상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1584년(선조 17)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일찍이 서총대(瑞葱臺)의 시예에서 문과·무과에 모두 합격하는 등 문무를 겸비해 남병사(南兵使)를 세 번이나 역임하는 등 북방의 전략에 밝았다.
상례에도 밝아서 선조 초년 복상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세종 때 제정한 『오례의(五禮儀)』에 따를 것을 주장했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전서와 주서에 능해 많은 비에 전서를 썼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개성에 있는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과천의 허엽신도비(許瞱神道碑), 장단에 있는 허종신도비(許琮神道碑) 등의 전서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응운(南應雲))]
[진사]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9위(89/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07명 [甲1‧乙1‧丙5]
전력 진사(進士)
관직 예조참판(禮曹參判)
타과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59위
기타 연벽(聯璧[兄弟同榜]):弟 南應龍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세건(南世健)[文]
[조부(祖父)]
성명 : 남변(南忭)[進]
[증조부(曾祖父)]
성명 : 남칭(南偁)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윤식(李允湜)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신세량(辛世良)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남응룡(南應龍)[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가정10년[중묘26년]신묘8월방목(嘉靖十年[中廟二十六年]辛卯八月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6])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남세건(南世健)
[문과] 중종(中宗) 19년(1524) 갑신(甲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16위(20/3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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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백순(伯順)
생년 갑진(甲辰) 1484년 (성종 15)
졸년 임자(壬子)【補】(주1) 1552년 (명종 7)
향년 69세
합격연령 41세
본인본관 의령(宜寧)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대사성,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순(伯順).
할아버지는 내섬시부정 남칭(南稱)이고, 아버지는 군수 남변(南忭)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이훈(李塤)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참봉으로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9년 지평·부수찬·부교리·시독관을 거쳐 이듬해 교리가 되었다.
1531년 응교·전한을 역임하고 이듬해 시강관이 되어 기강이 해이해짐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1533년 직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서 1535년 우승지가 되었다.
1536년 병조참판에 이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호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고 1541년 전주부윤, 1542년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44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인종이 즉위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호조참판이 되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 겸 주문진하사(謝恩兼奏聞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46년 형조참판에 이어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다.
1548년(명종 3) 경기도관찰사로 나가 흉년으로 인해 곤핍해진 민생을 돕고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또한 충효한 사람 및 절개를 지킨 부녀자들을 포상할 것을 왕에게 상소하였다.
1549년 공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성·호조참판이 되었다.
1551년 특진관이 되어 저화(楮貨)를 사용하자는 당시의 의논에 대하여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으며 이전에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세건(南世健))]
[진사]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6위(86/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0명 [甲1‧乙3‧丙26]
전력 참봉(參奉)
관직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관직 직제학(直提學)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56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변(南忭)[進]
[조부(祖父)]
성명 : 남칭(南偁)
[증조부(曾祖父)]
성명 : 남지(南智)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훈(李塤)(주3)
본관 : 한산(韓山)【補】
[처부(妻父)]
성명 : 이윤식(李允湜)(주4)
본관 : 성주(星州)【補】
[안항(鴈行)]
형(兄) : 남세웅(南世雄)[文]
형(兄) : 남세형(南世衡)【補】
형(兄) : 남세평(南世枰)【補】
형(兄) : 남세준(南世準)[文]
형(兄) : 남세칙(南世則)【補】
제(弟) : 남세언(南世彦)【補】(주5)
[주 1] 졸년 : 『동원집(東園集)』 卷之2, 墓碣文,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남공묘비명(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南公[世健]墓碑銘)]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 거주지 : 『정덕2년정묘9월초7일사마방목(正德二年丁卯九月初七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07)])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 외조부 : 『정덕8년계유9월○일문무잡과방목(正德八年癸酉九月○日文武雜科榜目)』(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보물 제60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4] 처부 : 『선원록(璿源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47]) 권18, [太宗大王宗親錄](23b쪽)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주 5] 안항 : 『모재집(慕齋集)』 卷之13, 墓碣銘, [고통훈대부 삭녕군수 남공묘갈명(故通訓大夫朔寧郡守南公墓碣銘)]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남변(南忭)
[진사]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5위(30/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B0A8BCC0FFFFB1454X0
자(字) 숙구(叔懼)
생년 갑술(甲戌)【補】(주1) 1454년 (단종 2)
졸년 기미(己未)【補】(주2) 1499년 (연산군 5)
향년 46세
합격연령 27세
본인본관 의령(宜寧)【補】(주3)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선교 예빈봉사(宣敎禮賓奉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남이(南儞)(주4)
품계 : 중직대부(中直大夫)
관직 : 전행형조정랑(前行刑曹正郞)
[처부(妻父)]
성명 : 이훈(李塤)【補】(주5)
본관 : 한산(韓山)【補】
[주 1] 생년 : 『모재집(慕齋集)』 卷之13, 墓碣銘, [고통훈대부 삭녕군수 남공묘갈명(故通訓大夫朔寧郡守南公墓碣銘)]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 졸년 : 『모재집(慕齋集)』 卷之13, 墓碣銘, [고통훈대부 삭녕군수 남공묘갈명(故通訓大夫朔寧郡守南公墓碣銘)]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3] 본관 : 『모재집(慕齋集)』 卷之13, 墓碣銘, [고통훈대부 삭녕군수 남공묘갈명(故通訓大夫朔寧郡守南公墓碣銘)]을 참고하여 본관을 추가.
[주 4] 부 : 『모재집(慕齋集)』 卷之13, 墓碣銘, [고통훈대부 삭녕군수 남공묘갈명(故通訓大夫朔寧郡守南公墓碣銘)]에는 부가 "남칭(南偁)"으로 나옴.
[주 5] 처부 : 『모재집(慕齋集)』 卷之13, 墓碣銘, [고통훈대부 삭녕군수 남공묘갈명(故通訓大夫朔寧郡守南公墓碣銘)]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성화16년경자3월초3일사마방목(成化十六年庚子三月初三日司馬榜目)』(『세촌선생실기(細村先生實紀)』 卷之下, 李文佐, 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618])
남지(南智)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좌의정(左議政)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B0A8C9C0FFFFU9999X0
자(字) 지숙(智叔)
시호(諡號) 충간(忠簡)
문무구분 문관
생년 경진(庚辰) 1400년(정종 2)
졸년 계유(癸酉) 1453년(단종 1)
시대 조선전기
왕대 세종(世宗)
본관 의령(宜寧)
활동분야 관료
항목 좌의정(左議政)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호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지숙(智叔).
할아버지는 영의정 남재(南在)이고, 아버지는 병조의랑 남경문(南景文)이다.
음보로 감찰이 되어 부정·지평을 거쳐 의성군(宜城君)에 책봉되었다.
1428년(세종 10) 집의, 이듬해 동부대언이 되었다.
1435년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鑑)』 1질을 받아왔다.
1439년 대사헌·호조참판을 거쳐 경상도도관찰사로 나갔다.
이어 형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446년 소헌왕후 심씨가 폐비로 승하하자 자청하여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449년 판원사로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문종이 즉위하자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451년(문종 1)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단종을 잘 보필해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1452년 풍질(風疾)로 사직을 청하였다.
1453년(단종 1) 영중추원사로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계유정난 때 사돈인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사위 이우직(李友直) 부자가 죽음을 당하였으나 병으로 화를 면하였다.
죽은 뒤 1489년(성종 20) 손자 승지 남흔(南炘)의 상소로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지(南智))]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경상도(慶尙道)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1439[기미(己未)]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경기도(京畿道) 개성유수(開城留守) 1436[병진(丙辰)]
[관인정보]
제수년월 1449 [기사(己巳)]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배(拜)
[품관 정보]
품관 정1품
[과거 정보]
과거 음서(蔭敍)로 등용(登用)
[관력 정보]
관직 좌의정(左議政)
[가족 관계]
부 남경문(南景文)
조부 남재(南在)
[비고]
비고 소년입각(少年入閣: 젊어서 재상이 됨) : 40(四十)
미등제이배(未登第而拜: 대과에 급제하지 못했으나 임명)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남재(南在)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영의정(領議政)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B0A8C7ACFFFFB1351X0
초명(初名) 남겸(南謙)
자(字) 경지(敬之)
호(號) 귀정(龜亭)(주1)
시호(諡號) 충경(忠景)
문무구분 문관
생년 신묘(辛卯) 1351년(충정왕 3)
졸년 기해(己亥) 1419년(세종 1) 12월 14일
시대 조선전기
왕대 태종(太宗)
본관 의령(宜寧)
활동분야 관료
항목 영의정(領議政)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도병마사, 경기도관찰사,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초명은 남겸(南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
할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 어머니는 최강(崔茳)의 딸이다. 남은(南誾)의 형이다.
1371년(공민왕 20) 진사시에 제5등으로 합격했다.
아우 남은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에 가담해 고려 조정의 신진 사류로서 구 세력과 대립했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 우사의(右司議)가 되었다.
1390년 판전교시사 겸 집의(判典校寺事兼執義)가 되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윤소종(尹紹宗)과 함께 비록 행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사직(社稷)의 대계(大計)를 의논하고 계책을 도왔다. 그 공으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봉해지고, 곧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로서 양광도(楊廣道)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전지(田地) 170결(結)과 노비 20구를 하사받았다. 1392년 중추원학사로 대사헌을 겸했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1393년(태조 2)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사이가 좋지 않던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해 명나라 태조로부터 3년에 한 차례씩 조공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공으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고, 다음 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다.
이 해에 다시 진주사의 부사로 명에 다녀왔다.
1395년 아버지의 상을 당해 은거하니, 동생 남은과 함께 기복(起復)되어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에 임용되고,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의 판사를 맡았다.
1396년 예문관춘추관태학사(藝文館春秋館太學士)로서 도병마사가 되어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 김사형(金士衡)을 따라 이키도(壹岐島)·대마도를 정벌했다.
1398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하륜(河崙)과 함께 정안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태종이 즉위하자 세자의 서연관(書筵官)에 빈객(賓客)이 되었다.
1403년(태종 3) 경상도도관찰사가 되어 시무를 조정에 보고하니 그대로 시행했고, 1404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1408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1414년 우의정·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제배(除拜)되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서 과거를 관장해 권도(權蹈)·성개(成槩) 등을 시취(試取)했다. 또 하륜(河崙)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했다.
그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1415년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수문전대제학 겸 세자부(修文殿大提學兼世子傅)가 되었다.
1416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사면했다.
1419년 12월 14일에 죽으니, 나라에서 조회(朝會)와 저자를 정지하고 부의를 내리고 세종이 직접 조문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장이 평정(平正)하고 아름다웠으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약천집(藥泉集)』 등에 의하면 산술에 능하였으므로 ‘남산(南算)’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태조의 묘정(廟庭)에 추가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재(南在))]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이조판서(吏曹判書)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대제학(大提學)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경상도(慶尙道)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1403[계미(癸未)]
[지방관] 고려후기 지방관 전라도(全羅道)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386[병인(丙寅)]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경기도(京畿道) 개성유수(開城留守) 1404[갑신(甲申)]
[관인정보]
제수년월 1412 [임진(壬辰)] 전찬성(前贊成) 배(拜)
[품관 정보]
품관 정1품
[과거 정보]
과거 공민왕(恭愍王) 신해문(辛亥文)
[관력 정보]
관직 영의정(領議政)
[가족 관계]
부 남을번(南乙蕃)
조부 남천로(南天老)
증조부 남익저(南益㫝)
[비고]
비고 공신(功臣) 1회[一勳]
조손연상(祖孫連相: 할아버지와 손자가 연이어 재상이 됨) : 손 남지(南智)
[주 1] 호 : 구정유고(龜亭遺藁) 묘표(墓表)를 참고하여 호 구암(龜巖)을 구정(龜亭)으로 수정함. 청선고 원본에는 구암으로 나온다.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남을번(南乙蕃)
[지방관] 고려후기 지방관 전라도(全羅道)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372[임자(壬子)]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0A8C744BC88B1320X0
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미상)1320(충숙왕 7)
졸년 미상(未詳) (미상)1395(태조 4)
시대 고려후기
왕대 고려(高麗)
본관 미상(未詳)의령(宜寧)
시호(諡號) 경렬(敬烈)
활동분야 관료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320년(충숙왕 7)∼1395년(태조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부친은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이다.
형제로 남을진(南乙珍)과 남을경(南乙敬)이 있다.
이들 형제는 조선왕조를 지지하는 참여파와 반대하는 충정파로 나뉘어 졌는데, 남을번은 참여파로 조선 정권에 적극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고려 때에는 관직에 진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에 나아갔다.
아들로 남재(南在), 남은(南誾), 남실(南實), 남지(南贄)가 있다. 그 중 남재와 남은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조 개국공신 1등이 되었다.
특히 남은은 이방원(李芳遠)과 정도전(鄭道傳) 등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활약했으나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주살되었다. 그러나 남재는 태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여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손자 남지(南智)가 우의정이 되었다.
활동분야 문신 > 문신
[관인정보]
관직명칭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관직등급 관찰사(觀察使)
관직이칭 완백(完伯)
부임년월 1372 [임자(壬子)] 임(任)
[도 정보]
도명칭 전라도(全羅道)
[비고]
비고 임(任)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남재(南在)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영의정(領議政)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B0A8C7ACFFFFB1351X0
초명(初名) 남겸(南謙)
자(字) 경지(敬之)
호(號) 귀정(龜亭)(주1)
시호(諡號) 충경(忠景)
문무구분 문관
생년 신묘(辛卯) 1351년(충정왕 3)
졸년 기해(己亥) 1419년(세종 1) 12월 14일
시대 조선전기
왕대 태종(太宗)
본관 의령(宜寧)
활동분야 관료
항목 영의정(領議政)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도병마사, 경기도관찰사,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초명은 남겸(南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 할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 어머니는 최강(崔茳)의 딸이다. 남은(南誾)의 형이다.
1371년(공민왕 20) 진사시에 제5등으로 합격했다. 아우 남은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에 가담해 고려 조정의 신진 사류로서 구세력과 대립했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 우사의(右司議)가 되었다.
1390년 판전교시사 겸 집의(判典校寺事兼執義)가 되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윤소종(尹紹宗)과 함께 비록 행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사직(社稷)의 대계(大計)를 의논하고 계책을 도왔다. 그 공으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봉해지고, 곧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로서 양광도(楊廣道)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전지(田地) 170결(結)과 노비 20구를 하사받았다. 1392년 중추원학사로 대사헌을 겸했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1393년(태조 2)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사이가 좋지않던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해 명나라 태조로부터 3년에 한 차례씩 조공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공으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고, 다음 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다.
이 해에 다시 진주사의 부사로 명에 다녀왔다. 1395년 아버지의 상을 당해 은거하니, 동생 남은과 함께 기복(起復)되어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에 임용되고,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의 판사를 맡았다.
1396년 예문관춘추관태학사(藝文館春秋館太學士)로서 도병마사가 되어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 김사형(金士衡)을 따라 이키도(壹岐島)·대마도를 정벌했다.
1398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하륜(河崙)과 함께 정안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태종이 즉위하자 세자의 서연관(書筵官)에 빈객(賓客)이 되었다.
1403년(태종 3) 경상도도관찰사가 되어 시무를 조정에 보고하니 그대로 시행했고, 1404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1408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1414년 우의정·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제배(除拜)되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서 과거를 관장해 권도(權蹈)·성개(成槩) 등을 시취(試取)했다.
또 하륜(河崙)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했다. 그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1415년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수문전대제학 겸 세자부(修文殿大提學兼世子傅)가 되었다.
1416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사면했다.
1419년 12월 14일에 죽으니, 나라에서 조회(朝會)와 저자를 정지하고 부의를 내리고 세종이 직접 조문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 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장이 평정(平正)하고 아름다웠으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약천집(藥泉集)』 등에 의하면 산술에 능하였으므로 ‘남산(南算)’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태조의 묘정(廟庭)에 추가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재(南在))]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이조판서(吏曹判書)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대제학(大提學)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경상도(慶尙道)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1403[계미(癸未)]
[지방관] 고려후기 지방관 전라도(全羅道)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386[병인(丙寅)]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경기도(京畿道) 개성유수(開城留守) 1404[갑신(甲申)]
[관인정보]
제수년월 1412 [임진(壬辰)] 전찬성(前贊成) 배(拜)
[품관 정보]
품관 정1품
[과거 정보]
과거 공민왕(恭愍王) 신해문(辛亥文)
[관력 정보]
관직 영의정(領議政)
[가족 관계]
부 남을번(南乙蕃)
조부 남천로(南天老)
증조부 남익저(南益㫝)
[비고]
비고 공신(功臣) 1회[一勳]
조손연상(祖孫連相: 할아버지와 손자가 연이어 재상이 됨) : 손 남지(南智)
[주 1] 호 : 구정유고(龜亭遺藁) 묘표(墓表)를 참고하여 호 구암(龜巖)을 구정(龜亭)으로 수정함. 청선고 원본에는 구암으로 나온다.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남을번(南乙蕃)
[지방관] 고려후기 지방관 전라도(全羅道)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372[임자(壬子)]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0A8C744BC88B1320X0
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미상)
졸년 미상(未詳) (미상)
시대 고려후기
왕대 고려(高麗)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320년(충숙왕 7)∼1395년(태조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부친은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이다. 형제로 남을진(南乙珍)과 남을경(南乙敬)이 있다.
이들 형제는 조선왕조를 지지하는 참여파와 반대하는 충정파로 나뉘어 졌는데, 남을번은 참여파로 조선 정권에 적극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고려 때에는 관직에 진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에 나아갔다.
아들로 남재(南在), 남은(南誾), 남실(南實), 남지(南贄)가 있다. 그 중 남재와 남은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조 개국공신 1등이 되었다.
특히 남은은 이방원(李芳遠)과 정도전(鄭道傳) 등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활약했으나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주살되었다. 그러나 남재는 태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여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손자 남지(南智)가 우의정이 되었다.
[관인정보]
관직명칭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관직등급 관찰사(觀察使)
관직이칭 완백(完伯)
부임년월 1372 [임자(壬子)] 임(任)
[도 정보]
도명칭 전라도(全羅道)
[비고]
비고 임(任)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