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시창작방1, 2』, 『시창작방3』, 및 『시창작방4』의 디카시에 올라 온 총 54편의 작품 중 신이비 작가의 <포식의 시간>, 송하 시인의 <등>, 다솔 정경임 시인의 <시간의 변종>, 노수현 시인의 <폐업> 등 총 4편을 추천한다.
포식의 시간 / 신이비
부모 형제 사촌을 무참히 살해한 건 사피엔스였어. 네안데르탈인도 에렉토푸스도 그렇게 사라졌지. 그러고도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명명했지. 원래가 이기적 유전자라잖아. 그 속성은 절대 사라지지 않지. 아주 대놓고 외치잖아. // 나는 왕이로소이다! // 사자는 몇백만 년에 걸쳐서 최상위층 포식자가 됐어. 우린 그걸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불러. 이 별이 적응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피엔스 종은 단숨에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올랐어. 태어나고 불과 7만 년도 안 되는 시간에 말이야. 그들은 직립했고 창을 던졌고 무엇보다 집이 있었지. 집이 있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어딨겠어.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집만큼 위대한 게 없잖아. 이 열기는 이 별도 포기하게 했지. 거대한 온실을 만들고 만 거야.// 아, 이 패거리 집단을 어이할꼬! //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종을 넘고 속을 넘고 과에 도달하면 결국 영장류를 만나지. 침팬지나 오랑우탄과 한 형제자매란 말이야. 크크.// 거리의 개들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둘레를 두리번거리며 먹이를 찾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거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규칙이고 서로에 대한 예의고 존중이잖아. 아무리 배고파도 그들은 다른 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예의를 지킨다는 말이야. 알 수 없는 어떤 위대한 힘, 어쩌면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니까. 그들은 모두 그 힘을 따르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니까. // 아, 이 개만도 못한 독재의 포식 행위는 언제 끝날까? // 아무래도 깃발을 들어야겠지.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의 횡포에 대한 비판을 자유연상을 따라 드러낸 산문시다. 특히 이 작품은 맬서스의 학설을 확대시켜 모든 동식물계에 적용한 다윈의 진화론, 즉 생존 앞에서 같은 종의 다른 개체나 물리적이나 생활환경과 목숨을 담보로 경쟁을 벌이는 적자생존 의식에 바탕을 둔다. 전반부에서 작가는 사피엔스가 다른 종과 달리 직립보행과 전쟁, 그리고 주거안정이라는, 다른 종과는 다른 변별적인 강력한 무기로 단 시간 내에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올라선 배경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의 말대로라면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기성을 유전적으로 대물림해 오늘에 이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 중에서도 '만왕의 왕'이 되고자하는 인간의 살벌한 본성의 유전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후반부에선 다른 종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인간이 같은 종 내에서 질서를 하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포식 행위를 인간끼리의 동종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한다. 그래서 작가는 결국 이를 어기고 있는 독재의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깃발’을 들 의지를 세우고 있다. 적자생존과 억압, 경쟁이 동종을 향하지 않아야한다는 기본 윤리를 배반한 독재에 대해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성격의 주제를 전달하는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은 단순한 비판의식을 넘어 행동의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보하게 된다. 다만 산문시라고해도 운율까지는 아니어도 임팩트 있는 한 문장이나 문구, 또는 반복 어절 같은 걸 사용함으로써 장문이 주는 지루함을 덜게 하고 시의 텐션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의견을 보태어 본다.
등 / 송하
내 눈이 닿지 않는 그 곳
내 손도 닿지 않는데
말없이 등을 내보이면
내 몸 가장 가려운 곳 시원하게 긁어 주던 고마운 손
무심한 등짝에 그 무슨 예민함 있으랴 싶지만
가물거리는 시간
가만가만 더듬어 보면
말없이 무거웠던 아버지 손
가시처럼 아렸던 어머니 손을
등은 본능처럼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등 긁어 주는 품앗이를 하면서
볼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내 안의 가려움을, 답답함을
헤아려 주는 그 손이 참 고맙기만 한데
보드라운 아내의 손 말고
무겁고
아렸던
그 손길이 가끔은
눈물 나게 그리운 것을
보드라운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구석진 가려움이 있는 것을
등은 알고 있다.
몸의 증세에 맞는 가장 적절한 핀셋 치유법을 갈망하는 작품이다. 시의 주 재료인 ‘등’은 발이나 귀와 함께 사람들에게 관심을 덜 받는 곳이다. 특히 등은 발이나 귀와는 달리 애써 거울을 놓고 어려운 자세로 돌아보아야 겨우 보이는 신체의 일부분이다. 하물며 가려움증이라도 올라오면 소처럼 기둥에 비비거나 바닥에 볼록한 물체를 놓고 뒹굴어야 하는 고난도의 치유과정을 요한다. 이런 고난도의 증세를 접한 화자는 아내와 품앗이로 치유를 하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부드러운 손을 가진 아내의 스킬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석진 가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치유법은 ‘말없이 무거웠던 아버지 손’과 ‘가시처럼 아렸던 어머니 손’처럼 강약을 갖고 핀셋처럼 콕 집어 해결할 수 있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화자에게 ‘가려운 등’은 요즘 말이 많은 초고난도 킬러문항과도 같다. 어설픈 깨작거림이 아니고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요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작품은 혈연으로 맺어진 수직적인 가족관계 안에서의 위로와, 다소 서운한 얘기일지 모르나 인생 중간에 만난 수평적 관계인 아내의 위로가 서로 사뭇 다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화자가 보기에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원래는 남이었던 사람이 보내는 ‘헤아리는’ 정도의 위로와는 다른 차원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본능’과 부재하는 ‘그리움’ 사이에서 화자는 그 간극을 최소화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다. 아주 쉬운 문체로 어렵지 않게 읽히는 작품이지만 독자들에게 각자의 등 가려움증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끄덕임을 주기에 충분한 시적 구성력을 갖고 있다. 다만 작가가 제시하고 싶은 주제를 반복을 통해 강조하지 않고 ‘실루엣’으로 가리는 정도로 했으면 훨씬 능동적으로 주제를 찾아가는 보람이 독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보태어 본다.
시간의 변종 / 다솔 정경임
절벽에 매달린 시간을 응시하다
누가 시간을 강물이라 했나
거꾸로 가는 시간도 있더라
시간의 성질은 복제를 한다는 것
유전은 질기고도 독해 변종을 낳기도 한다
미래를 전복하는 일은 언제나 달콤해
눈금을 상실한 저울이
태엽을 되감으면
삼십년이 훌쩍 순간이동을 한다
자이로드롭을 태운 듯 몇 십 년 전 오늘을 소환하는
기술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절경이지
손발을 묶고 재갈을 물린
패잔병의 시간은 언제나 창백해
몸에 새겨진 연어의 기억을 방심했던 거지
어쩌면 우리는 바다로 가는 길을 잊을 줄도 몰라
아무리 배신에 길들어진 종이라지만
백지 뒤집듯 섭리를 거스르는 일마저
웃을 수 있나
누가 시간을 흐른다고 했나
비가역적 非可逆的인 시간 개념에 대한 역설적 인식을 통해 부정적 현실을 성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간은 본시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직선으로 뻗어가는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화자는 본인이 처한 현실을 보며 시간의 회귀나 퇴행을 생각한다. 이를 화자는 유전적 변종으로 인식한다. 30년 전 세기말을 떠올려보면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물린 억압과 통제의 시간들이었지만, 물길을 거스르는 저항 본능을 가진 ‘연어’였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화자의 인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강’을 넘어 ‘바다’를 향해 확장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역사적인 흐름이 모순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돌연변이'의 의미가 유전정보가 기록된 DNA의 분자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하여 원본과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에서 문제 삼은 시간의 본래적 속성인 진보성의 상실은 섭리를 거스르는 현실에 눈감은 채 저항정신을 상실한 우매하기 짝이 없는 ‘배신에 길들여진 종’때문일 것이다. 사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진보하는가, 퇴보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꽤 오랜 전부터 이어져왔다. 독일 관념론 철학자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에 따르면 폭압, 전쟁, 독재 등과 같은 부정적인 사건들은 결국 자유를 향해 진보하는 역사의 흐름에 기여한다고 보는 변증법에 기초하고 있다. 변증법적 역사의 전개란 끊임없는 진보와 반동의 반복을 통해 더욱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나선형의 발전 과정을 거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핵심은 ‘배신에 길들여진 종’이 아니라 이성의 지배를 따르며 자유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시가 주는 울림이 크다 아니할 수 없다.
폐업 / 노수현
오늘 어느 삶을 폐하기에
서랍장을 연다
유효기간이 오래 지난 독감약
알뜰살뜰 모아놨던
이젠 쓰레기가 된 통장, 잔액 38원
아내와 찍은 빛바랜 사진
비광을 잃은 화투와
다이아몬드 세븐을 잃은 카드
무척이나 아꼈던 가죽장갑
그리고 삶이 아등바등 힘겨울 때
오롯이 들었던 이문세의 늘어진 테입
어차피 인생은 마지막에 뒤집는
어디까지나 장난 같기도 한
삼단서랍장 같은 폐업
폐업 같기도 한 삼단서랍장
아니 잠깐, 깊숙이 박혀
이제야 숨 쉬는 벌거벗은
내 돌 사진 같은 우스꽝스러움
이건 또 보너스
폐업廢業이란 화두를 통해 참신한 발상을 갖고 삶을 조망한 작품이다. ‘폐廢’는 '치워 없애다, 중도에 그만두다, 버리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다. 또 '업業'은 화자에게 수입을 보장하거나 삶을 영위하게 하는 원천으로서 직장이나 사랑, 또는 인생 등 포괄하는 범위가 넓다. 화자가 이 상황에서 마주한 서랍장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건강 회복을 위해 복용해온 약품, 잔돈 밖에 안 남은 통장, 짝이 맞지 않는 화투와 카드, 품위 유지에 기여했던 가죽장갑, 감각을 일깨운 이문세까지, 한때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썼던 생존alive과 생활life의 흔적들이지만 이제는 '폐업'이란 대전제 앞에 별 것들이 아닌 게 된다. 이렇게 화자가 '업'을 유지하는 동안 욕망 성취를 위해 하나씩 채워왔던 것들이지만, 이제 화자에게 있어 무엇을 멈추거나 그만둔다는 것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도 함께 의미를 잃는 일로 다가온다. 중심이 해체될 때 주변도 같이 소멸된다는 얘기다. 장자철학에서는 화자의 서랍장 뒤집기와 같은 마음 닦음을 해체적 성격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장자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해체의 방법을 진실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인식한다. 이렇게 장자가 말한 해체가 존재 그 자체의 완전한 멸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시의 말미에 등장하는 돌사진이 주는 보너스 웃음은, 그래도 끝까지 잃지 않은 화자의 진실함이나 순수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삶은 이렇게 가장 바탕이 되는 자기만족적인 세계를 통해 극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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