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별, 바람, 윤동주!
靑松 장 병 학
함경북도 동북단 끝자락과 마주하는 중국 연변에서 연변문화예술위원회와 연변포석회 주최, 대한민국 생거진천이 낳은 민족문학가 포석 조명희 작가를 기리는 ‘제1회 포석 조명희 문학제’에 초청 받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진천포석회원들과 함께 참여했다.
먼저 남의 나라 땅인 중국 연변에서 충북 진천이 낳은 포석 조명희 작가를 위하는 문학행사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까 내 가슴은 설레었다. 타국에서 진솔한 마음으로 중국 땅에서 첫 번째 포석 문학제를 성대하게 마련해준 연변 조선족 추진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한아름 드렸다.
이튿날, 연변 땅에도 찬연한 마알간 햇살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나라 문학 선구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윤동주 시인이 잠들고 있는 용정시로 향했다.
오전 내내 그곳으로 줄곧 달려가는 길목에는 우리가 육칠십년 못 살던 처절했던 건물들이 버스의 차창 가에 영화 필름처럼 스쳤다. 이곳의 작은 집들은 모두가 일정한 틀의 단출한 규격의 단독 건물에 붉은 색으로 칠해져 사회주의 국가로 빈민 생활의 영속을 피부로 느꼈다.
도로 가에는 옥수수와 과일 등을 판매하는 중국 아낙네들이 간간히 시야에 잡히었다. 가이드는 버스에서 내려 옥수수와 감자를 구입하여 타국에서 맛보지 못한 이국땅 향수에 내 마음은 녹아 드는 듯 했다. 고된 삶을 에워가는 아낙네들의 가눌 길 없는 초췌한 모습에 마음 한 쪽이 시리었다.
승차하기 전 커다란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구입하여 찾아가는 곳곳마다 생생한 곳을 보듬어 가며 맞춤형 관광을 작정했다. 이곳들은 모두 태고의 시대, 고구려 때 우리나라의 영토였었는데 하는 아쉬움도 컸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오전 내내 목적지를 향해 달리더니 어느 새 항일투사의 문학가 윤동주 시인이 고이 잠든 용정시에 도착했다.
윤시인의 고향인 용정시는 제법 큰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조선족 사람들이 많아 건물 간판도 한글로 된 곳이 눈에 많이 띄어 낯선 외국 같지 않으면서 따스한 온정의 숨결어린 정감 도시의 감흥을 받았다. 조두남 작곡인 선구자 노래를 자주 불렀던 노래 중에 일송정 푸른 솔, 용두레 우물가, 용주사의 저녁 종, 한 줄기 해란강, 용문교의 노랫말이 나의 머리를 스치면서 낯빛이 제법 차갑고, 코끝이 매운 용정시를 감싸주었다.
비록 이국땅이었지만 이곳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윤동주 시인의 불타는 애국심이 서려 있음을 체감하면서 한 순간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애국심 등 만감이 교차했다.
고대했던 용정중학교에 도착했다. 아! 바로 이곳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불어 넣어 주었던 윤동주 선생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대성중학교의 옛터가 아닌가?
설레는 가슴을 에우면서 일행과 함께 버스에서 하차했다. 윤동주 선생이 다녔던 대성중학교의 옛 교정,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윤 시인의 시비가 눈에 번득여 곧장 시비로 다가섰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 사랑해야 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 겠다/ 오늘밤에도 별/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
시비에 또렷이 새겨진 서시를 음미하면서 이국땅에서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하다 잔악한 일본인에게 참사당한 선생께 묵념과 함께 넋을 기리었다. 옛 대성중학교 2층 윤동주 선생 기념관에 들어섰다. 이곳에 살아가는 많은 조선족들은 잔악한 일본인들의 폭압 식민정책을 붓끝으로 저항했던 윤동주 시인을 삶의 좌표로 삼는다는 가이드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오직 나라사랑으로 묻어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용정 시민의 실증적 체험수련장이며, 모국에서도 국민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애국명소이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자마자 선생께서 생존 시 일본군과 투쟁하면서 문학을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 왜놈들에게 무참하게 처형당했던 당시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윤 시인은 독립운동을 하다 1943년 7월 14일 도쿄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의 죄명은 일제형사의 심문결과 ‘독립운동’으로 기록되었으며, 체포 당시 많은 분량의 작품과 일기장까지 압수당했다고 한다.
윤 시인은 이듬해 절친한 친구 송몽규와 함께 규스 후꾸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형을 받았다. 이듬 해, 2월 16일 동주 사망의 비보를 뒤늦게 받은 가족들과 수많은 동포들과 회색빛 하늘도 슬피 울었다고 한다. 파렴치한 일본인들은 모진 학대와 고통을 가함은 물론, 시신을 생체실험 자료로 사용했다는 비인간적인 생활에 더욱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방명록에 내가 사는 대한민국 주소를 또렷이 적고 서명했다. 성금을 모금함에 두 손으로 정성을 다해 넣으면서 윤 시인의 불타는 애국심에 눈물이 솟으며 명복을 빌었다. 일행 모두는 기념관 밖으로 나와 선생의 시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남기려고 분주했다.
선생께서 고이 잠들고 있는 묘소를 참배하려고 발길을 돌렸다. 버스로 한참을 가다 좁고 험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소형차만 다니는 아주 좁고 험한 길로 우회전하여 들어가려고 했으나 대형 버스라 도랑에 빠져 도저히 지날 수 없게 된 진퇴양난의 기로였다. 일행 모두 하차, 버스를 밀어 가까스로 도랑에서 빠져나왔으나, 목적지를 외면한 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윤 시인이 고이 잠든 묘소를 참배치 못하는 마음이 몹시 서걱서걱했다. 되돌아오는 버스 차창에 기대면서 윤동주 항일시인의 명복을 빌었다.
일제는 어디 이뿐이랴. 대한민국 금수강산 산천 곳곳에 쇠말뚝을 마구 박아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시켰던 일제 강점기의 식민정책을 규탄했지만, 온 국민은 하늘이 울었고, 윤시인 붓끝의 힘은 삼천리금수강산에 피울음의 애국정신에 조국이 감동했다. 용정시 서점에서 윤시인의 문심을 골 깊게 터득하고, 이해하기 위해 윤동주 시집을 구매, 탐독할수록 윤시인의 시심이 내 가슴에 뚝뚝 녹아내리는 듯 했다.
좋은 씨앗은 먼 훗날,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애국열정이 온 몸에 묻어난 오늘밤에도 별, 바람, 윤동주 시인의 나라사랑 정신과 그의 빼어나고 올곧은 작품들이 늘 푸른 이 땅의 후예들에게 오래오래 사랑받을 것이다.
------------------------------------------------------------------------------------------------------------------------------
* ‘시와 의식(문예한국) 수필(1986), ‘한국아동문학연구’ 동시(2002) 등단
* 국제PEN충북위원장, 충북수필문학회장, 청주문인협회장, 한국아동문학연구회 부회장 역임
* 충북수필문학상, 충북문학상, 운초문화상(문학상), 박화목아동문학상, 한국아동문학창작상,
충북아동문학상, 청주문학상, 진천문학상, 문예한국 작가상, 한국교육자대상
* 별님도 덩실덩실(동시집), 늘 처음처럼(수필집), 칼럼집, 교육학집 외 다수
현)국제펜 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문협 전통문학연구위원, 한국아동문학회 중앙위원장,
수필의 날 조직위원, 고문 :국제펜 충북위원회, 진천문협, 충북글짓기지도회, 충북아동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