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외》 (책세상, 2002)를 옮긴 송병헌 박사에 대해 살펴보다가 이 기사를 발견했다. 한국사회민주주의 연구회 창립(2001.11.19)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특히 창립선언문을 보면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이고,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에 대한 연구회 창립 취지가 잘 나타난다.
이병호 남북교육연구소장· 교육학 박사
원문보기 : [남재희 기고] 기자로 비밀당원 된 정태영 씨 (pressian.com)
한국사회민주주의연구회의 2001년 11월 19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있은 창립대회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어 앞으로 혹시나 참고가 될까 하여 식순과, 창립선언문, 그리고 그 임원을 소개한다.
1. 식순
등록(6:00-6:30)
제1부: 창립대회(6:30-7:20)
진행: 송병헌(한성대 겸임교수)
-경과보고
-창립선언문 낭독
-창립총회
제2부: 창립 기념 토론회(7:30-9:30)
사회: 박영호(한신대 교수)
발표1: 왜 사회민주주의인가?
발표: 유팔무(한림대 교수)
발표2: 한국 사회민주주의의 방향과 과제
발표: 윤도현(현도사회복지대 교수)
토론: 윤건차(서울대 초빙 교수), 정범구(국회의원, 민주당),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주대환(민주노동당, 마산지구당 위원장)
2. 창립선언문
현재 세계는 위기를 겪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빈곤의 세계화를 낳고 있으며, 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보여주듯이 인류는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화로 인하여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아직도 한반도에는 평화체제가 구축되지 못하고 있다.
위기는 대안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으로 공산주의적 대안은 역사적 실패로 끝났다.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시장주의가 승리를 구가하고 있지만, 시장과 경쟁만능주의는 일국 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사회적 문제들을 방치해 놓고 있다.
냉전의 볼모로 반세기를 지낸 우리 한민족은 독립된 자주통일 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채 남북으로 분단되어 비극적인 분단체제를 지속해오고 있다. 그동안 이러한 냉전체제의 질곡 속에서도 민중들은 양극체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으며, 진보세력들은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해방된 삶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이후,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강화되고 있고, 내적으로는 명확한 대안과 장기적 전망의 부재로 인해 시민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이 표류하고 있다. 아직도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거시적 대안을 포기한 채 미시적 대안에만 몰두하는 현상들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추구하거나 관심을 가진 일단의 지식인, 활동가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이념과 정책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교육, 홍보하기 위한 연구회를 만들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고 불평등을 방치하는 자본주의는 장기적인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반면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는 많은 민중의 열망을 담은 혁명을 통해 형성되었고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해방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스스로 배반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19세기 및 20세기의 거대한 변혁이념을 나름대로 결합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론적 독단에 항거하면서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인간해방을 위해 헌신해온 이념이자 사회체제이며 실천적 노력이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가치는 확대된 민주주의와 연대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원을 포괄하며 오직 '더불어 살아가는' 연대적 삶을 지향한다.
우리 한국 사회민주주의연구회는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역사 속에 간직되어온 가치와 이상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옹호하고자 한다. 우리는 우익으로부터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고 규정받는 것을, 좌익으로부터는 수정주의 및 개량주의로 비난받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사회민주주의가 보편적 민주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 뿐 아니라 민중의 이해를 지속적으로 대변하는 민중적이고 진보적인 이념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보편적 원칙에 기초하는 동시에 여러 나라들에서 발전되어 온 사회민주주의의 특수한 측면과 정책적 차이에 주목하면서, 우리 사회에 역사적 당위성과 현실적 적합성을 가지는 한국적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정립하고 이에 따른 구체적인 정책들을 연구, 개발하면서 이를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그리하며 우리 한국 사회민주주의연구회는 한국의 진보세력들이 서로 아집에 사로잡힘이 없이 장기적인 공통의 전망을 중심으로 연대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며, 아울러 일반 국민의 여전히 두터운 냉전의식의 벽을 조금씩 허무는 데 일조 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유사한 연구단체들이 생성, 소멸되어온 역사를 알고 있다. 예상되는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말 없는 다수 인사들의 성원과 격려에 힘입어 생명력 있는 연구회로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감히 약속드리는 바이다.
뜻을 같이 하는 많은 분들의 성원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2001년 11월 19일
한국 사회민주주의연구회
창립 발기인 일동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년 1월 6일 ~ 1932년 12월 18일)은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SPD) 당원으로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창시자이다.
1850년 1월 6일 베를린에서 야코프 베른슈타인의 일곱째 자녀로 태어났다. 베른슈타인 가문은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 신앙에 냉담했으며, 집안 내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등 독일인 사회에 많이 동화되어 있었다. 아버지 야코프는 본래 배관공으로 일하다가 철도 기관사로 직업을 바꿨지만 수입이 많지 않았으며, 에두아르트는 그 때문에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김나지움을 중퇴해야만 했다. 16살부터 베를린에 위치한 은행의 수습사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며, 1869년 수습 경력을 마치자 베를린의 다른 은행에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을 떠나기 전까지 이 은행에서 계속 근무를 이어나갔다.[1]
말년1932년 12월 18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1872년 아이제나하파의 당원이 된다. 1875년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아이제나하파와 라살파의 결합을 결정한 고타 전당 대회를 준비하였다.
1878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자 스위스의 취리히로 망명하여 사회민주당의 후원자인 카를 헤히베르크의 비서가 되었다. 1888년 프로이센의 압력을 받은 스위스 정부로부터 국외 퇴거 명령을 받고 다시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이즈음 마찬가지로 런던으로 망명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접근하였다.
영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 활동
1880년에서 1890년까지 SPD의 비합법 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독일어: Sozialdemokrat)를 발행하였다. 1891년에는 에르푸르트 강령의 기초자의 일인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후 1896년부터 1898년까지 SPD 내부의 수정주의 논쟁에 이어지는 〈사회주의의 문제〉(독일어: Probleme des Sozialismus라는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다.
1899년에는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독일어: Die Vor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0년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독일어: Sozialreform oder Revolution)를 발표하여 격론을 펼쳤다. 아우구스트 베벨과 카를 카우츠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3인과도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독일에서의 사회민주주의 활동
1901년 비스마르크 시대에 만들어진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폐지에 따라 독일로 귀국하였다. 1903년 드레스덴 전당 대회에서 수정주의 부인이 결의되어 베른슈타인은 공식적으로는 패배하였으나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는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1902년에서 1918년까지 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1913년 사회민주당 좌파와 함께 군사력 증강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1917년 카를 카우츠키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참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 1919년 사회민주당에 복귀하였다.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1921년 괴를리츠 강령 기초를 도왔다.
사상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두 기둥인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비판하였다.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서 부의 집중과 사회적 궁핍화가 점점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점차 복잡해지고 적응력도 커지고 있다고 관찰하였다. 즉, 그는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본주의가 붕괴되어 사회주의가 출현할 것을 기다리기보다 현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을 쇠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중간계급과 농민들은 노동자들과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았다.
저서
저서로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가 있으며, 책세상 출판사를 통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