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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22강 -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보만론寶鬘論)(00:07-47:47)
00:07 <보행왕정론>
오늘은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게 왕정(王正)이라는 건요 왕한테 설하는 내용이에요. 이 내용이 “올바르게 정치를 잘하십시오.” 하면서 여러 가지 도가 나오는데 보만론(寶鬘論)이라고 주로 알려져 있는데요. 티벳에서 보행왕정론 해가지고 많은 티벳의 승려들도 봅니다. 그런데 티벳이 특히 용수보살 가르침을 중시하잖아요. 그런데 티벳에서 또 용수보살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용수보살 저작으로 돼 있습니다. 다 용수보살의 가르침으로 봐요. 왕한테 설한 용수보살의 가르침으로 봐요. 그런데 이제 보면, 용수의 직접 저작은 아닌 것 같다는 거죠. 위작 같은데, 그렇게 알려져 있으니까. 의미가 있는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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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도 다 용수의 말로 인용하기 때문에 이 자체를 그냥 용수보살의 가르침이라고 여러분 보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용수보살의 제자들도 용수보살의 말로 여긴단 말이에요. 그렇게 여겨 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위작 같긴 하지만 용수의 제자가 분명히 만든 것 같고, 용수의 가르침으로 인정받아 온 거니까 용수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한역은 보배의 화환, 이런 뜻입니다. 보만론이라는 게 보배로운 화환. 보배로운 행위. 왕이 이제 올바른 정치를 할 때 해야 될 보배로운 행위들, 이런 걸 논해 놓은 건데요. 거기에 재미있는 게 께왓다경이 나와요. 그래서 제가 이 증거로도 아주 귀한 작품입니다. 께왓다경을요 기억하시죠. 우리 께왓다경으로 시작한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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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 자체를. 그런데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헤매게 된 근본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께왓다경의 오역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을 의식이라고 안 하려고 하다 보니까. 왜? 의식이 영원하다는 내용이 나와버리니까. 그 순수의식, 영원한 순수의식 초의식을 부정하고 얘기하려니까 잘못된 거예요, 번역이. 그런데 그분들 탓에 불교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건 최근 일이니까. 애초에 한역될 때 잘못됐어요. 그래서 꼭 한번 적어 드릴게요. 께왓다경 지금 내용은 대충 아시죠. 그래서 이거 한번 적어 드릴게요. 이게 한역인데요. 길지 않아요. 께왓다경에 께왓다경, 즉 니까야에 상응하는 게 아함경이죠. 여기 남전 북전 해서 북전은 아함경인데 아함경은 우리가 이제 한역돼서 일찌기 아함경을 봤어요. 그래서 일찍이 초기 불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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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이라고 해서 공부했어요, 이쪽 동아시아는. 그게 최근에 니까야라고 해서, 남전 남쪽으로 전해졌던 팔리어 이렇게 전해졌던 경전들이 번역돼서 지금 들어온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애초에 한역될 때 어떻게 됐었냐? 아함경, 께왓다경이 디가 니까야에 있는데, 장아함경에 해당돼요. 거기 견고경이라는 게 있어요. 견고한. 견고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식무형(識無形) 무량자유광(無量自有光) 차멸사대멸(此滅四大滅) 추세호추멸(麤細好醜滅) 어차명색멸(於此名色滅) 식멸여역멸(識滅餘亦滅)]. 은근히 기네요. 교재로 드릴 걸. 아, 견고경이 께왓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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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부분 딱 제가 한역 어떻게 되는지 보여드리는 거예요. 왜 제가 이러고 있을까요? 그래도 보람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다 적고 나면. 이제 한 자 한 자 읽어보세요. 식무형, 무량자유광, 차멸사대멸, 추세. 미세할 세(細.) 거칠 추(麤). 추세호 추할 추(醜). 술 마시면 귀신 된다. 추할 추 호추멸. 어차에 어차(於此)에 명, 명색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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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식멸(識滅) 이게 안타까워요. 이때 아함경에서 번역이 잘못됐어요. 식멸여역멸. 아함경 견고경이거든요. 그러면 한번 보실래요. 원래 께왓다경 제가 읽어볼까요? 각주에 있어요. [6) “‘의식’(열반의식)은 볼 수 없고(의지하지 않음, 낙樂ㆍ정淨), 무한하고(변화하지 않음, 상常).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일체의 주인이 됨, 아我). 여기서 ‘지수화풍’(사대)은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아름답고 더러운 것(선善과 불선不善), 즉 ‘정신과 물질’(5온 명名과 색)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5온의 식별)가 소멸하면 모두 남김없이 소멸한다.” (께왓다경, 디가 니까야)] 께왓다경 디가니까야. 의식은, 이때 의식은 열반의식이거든요. 전혀 달라요. 이 의식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이건 제가 번역한 겁니다. 제 번역인데 여러 번역들, 서양과 달라이 라마 번역을 참고해서 번역한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여기 의식부터 잘못 번역하고 있어요. 그래서 의식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난다(識無形無量自有光). 한역 잘 됐나 보죠. 의식은 무형이고 무량이고 스스로 빛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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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다. 됐죠. 의식은, 여기에서 의식은 열반의식입니다. 열반의식인데 식(識)은 무형 무량 자유광. 자는 스스로 자(自)자죠. 스스로 빛나는 현존입니다. 멋있죠. 이렇게 멋있는데, 이놈이 멸하면 사대도 멸한다(此滅四大滅). 죽었네요. 망했네요, 여기서. 번역을 잘못했습니다. 원문은요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 여기서 사대는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 이거(此) 지금 바로 잡아야 돼요. 이거 어차(於此)로 바꿔야 됩니다. 어차 이래야 돼요. 번역을 잘못했어요. 어차가 여기에 있어야 돼요. 여기에서 사대가 멸한다(於此滅四大滅). 이렇게 해야 돼요. 이 열반 의식에서는 사대가 못 버티고 멸한다. 됐죠. 견고경부터 말아먹었습니다. 그래서 신기하게 안 되게 됐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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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번역할 때부터 이제 망했어요. 이게 “멸해버리니”라고 원문에도 없는 말이 나온 거예요. 이해되시죠. 이해를 잘못한 거예요. 번역하신 분이 아예 의도를 잘못 이해한 거예요. 여기에서 사대가 멸한다. 거칠고 미세하고. 원문에는요 지수화풍 사대는 견고하게 설 수 없다. 길고 짧고, 길고 짧고는 뺐더라고요, 미세하고 거친 것, 즉 거칠고 미세한 것(추세麤細) 호추(好醜) 아름답고 추한 것 더러운 것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됐죠. 추세호추멸(麤細好醜滅). 미추라고 해도 될 텐데 호추라고 했어요. 멸. 그런즉 정신과 물질. 명(名)이 정신입니다. 개념으로만 붙일 수 있는 형체가 없는 것들을 명, 형체에 있는 건 색(色)이에요. 명색이 다 멸한다. 정신적인 작용과 물질 작용이 다 여기서는 어차라고 했잖아요. 여기에서 멸한다(於此名色滅). 정확히 번역했죠. 여기에서 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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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이가 소멸하면. 이때 알음알이, 의식은요 열반의식이 아닙니다. 오온 중의 식이죠. 이 알음알이 식이 멸하면 나머지 것들도 다 멸한다. 이 식이 멸하면 모든 것이 남김없이 소멸한다(識滅餘亦滅). 번역 되게 잘했는데. 그렇죠. 여기(此滅四大滅)서 망했어요. 버렸어요. 갑자기 쌩뚱맞게 차멸이 들어왔어요. 이 식이 멸한다는 걸 가지고 오역을 해버린 겁니다. 결국 이분도 이렇게 읽었겠죠. 식이 무형이고 무량이고 빛나고. 좋네. 읽다가 보니까 아 이놈이 멸해야 다 멸하네. 앞에도 멸한다고 해버리자고 한 거예요. 그렇죠. 의역해버린 거죠. 이게 멸하면 모든 게 멸한다. 사대가 멸한다. 여기에서 사대가 멸한다랑 이 의식이 멸할 때 사대가 멸한다랑 그러면 이 전체 다 읽으면 이 식은 열반의식이 아니게 돼 버렸죠. 웃겨요. 식은 무형이고 무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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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빛나고 완전 죽이는데 이놈이 죽어야 사대가 죽어요. 거칠고 미세하고 좋고 아름답고 추한 것 다 멸하고 여기에서 명색이 멸한다. 여기는 어디예요? 아무튼 식은 죽어야 한다. 끝. 망했죠. 아함경부터 망했습니다. 이러니까 지금 저희가 이 강의를 시작을 이것부터 바로 잡고 시작한 거예요. 견고경 잘못됐다. 이 얘기 제가 라이브 때도 한번 읽어드렸어요. 견고경. 글로만. 한번 직접 보시는 게 좋죠. 강의 때는 좀 직접 확인해 봐야 좋죠. 이 원문을 그대로 읽으려면 열반의식은 볼 수 없다(識無形)는 건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다는 겁니다. 형체가 없다. 그러면 상락아정 중에 뭐예요? 락이나 정. 형체가 없어요. 청정하다는 얘기죠. 청정하고 어떤 번뇌도 없겠죠. 그리고 무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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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상락아정을 붙여 보자면 이 의식은요 무형이니까 락(樂), 어떤 번뇌도 없고 청정하고(淨), 굳이 붙여 보는 겁니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영원하다는 얘기고(常). 상락하죠. 스스로 빛난다는 것은 의식이 있다는 얘기죠(我). 여기서 아(我)라는 건 의식입니다, 의식. 알아차리는 주체. 이게 에고가 아니에요. 에고의 나가 아니에요. 이게 상락아정입니다. 이게 힌두교적으로요. 힌두교적으로 볼까요. 힌두교적으로, 우리 힌두교도 했죠, 힌두교에서 아트만 순수 의식은요, 형체가 없고(無形) 헤아릴 수 없고(無量) 스스로 빛나는(自有光) 순수의식이었죠. 똑같은 얘기예요. 상락아정은 억지로 붙여본 거예요. 요 식에 이렇게 배당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곳에서 빛이 나는, 일체의 주인 자리죠. 보세요. 여기서는 그냥 여기서 '모든 것'을 빼고 스스로 빛난다고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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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라고 했고, 저게 원문에는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 모든 곳의 주인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을 이것이 알아차려줘야 되는 거예요. 존재하는 만법은 이 의식이 알아차려줘야 존재하는 겁니다. 이 의식이 알아차려야 되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라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 건데. 그리고 여기서는 스스로 자(自)자를 써서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여기서 지수화풍은 사대는 견딜 수가 없고요. 지수화풍 물질 다 무너지고요. 원문에는 길고 짧은 것, 그럼 원문대로 하면 장단(長短)까지 넣어주면 좋겠죠. 장단추세호추가 다 멸하고(長短麤細好醜滅). 어떤 여기는 이거는 뭐예요? 이원성이에요. 이원성이 다 멸하고 여기서는 선과 악도 해당되겠죠. 아름답다 추하다 여기에 또 선과 악으로도 볼 수 있겠죠. 어떤 선과 악도 여기에서는 다 멸하고, 명과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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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물질, 총체죠, 이 명색을 부풀리면 오온이에요. 색은 그대로 먹고요. 명이 뭐냐 하면 수상행식(受想行識)이 명(名)이에요. 이겁니다. 견고경을 제 식으로 이렇게 푸는 게 옳다면 근거가 있냐 이거죠. 지금 아함경도 부정했고 제가. 최근 팔리어 전공자들인 전재성 박사님이나 각묵스님 번역도 무시했다면, 너는 뭐 믿고 그러느냐? 달라이 라마도 저처럼 번역한 거 예전에 읽어드렸죠. “의식이 무한하게 빛난다” 이렇게 푸시는 거. 그런데 간단하게 용수보살이 입증해 주고 있어요. 지금 그게 지금 보행왕정론에서 이 구절을 퍼 온 이유예요. 용수보살이 이 구절을 푼 거예요. 실제로 어떻게 풀었나 보실래요. 흙과 물과 불과 바람, 지수화풍 나왔죠. 흙과 물과 불과 바람, 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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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것, 장단 나왔고요. 미세하고 거친 것과 선 그 자체 등, 즉 선과 악 등을 의식 속에서 남김없이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식 속에서 남김없이 한다고 그랬죠. 의식 속에서, 여기에서 소멸된다고 그랬잖아요. 의식 속에서 사라진다고요. 이 모든 것들이 의식 속에서 사라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짜 의식이 그 의식 맞아? 보세요. 94절 [94. ‘의식’(識)은 의지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無轉) 일체의 주인 된 자이니 바로 그것에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은 (그) 머물 곳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의식은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다. 이렇게 풀었습니다. ‘무형’을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형체가 없다는 걸 ‘의지하지 않았다’고 풀었고요. ‘무량’을요 ‘변화하지 않았다’고 풀었고요. 그러고 ‘모든 곳에서 알아차린다’는 걸 ‘일체의 주인된 자이니’ 이렇게 풀었어요. 자 이거 제가 번역한 거 아닙니다. 신상환 박사가 번역한 거예요. 용수보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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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왕정론은. 도서출판b인가요? 의식은 제가 그대로 옮겨놓기만 한, 인용만 한 거예요, 이분 번역을. 의식은 의지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일체의 주인된 자이니 바로 그것에. 그리고 참고로 이분은 용수보살 번역하시는 신상환 박사님은 중관학당을 운영하는 중관파예요. 철저히 참나 없다 입장입니다, 이분은. 이분이 번역하신 게 “의식은 의지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일체의 주인 된 자이니 바로 그것에, 거기서 지수화풍은 머물 곳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때요? 우리 해석이 맞죠. 용수보살도 딱 저처럼 읽었죠. 그것도 중관학파가 지금 번역해 놓은 거예요. 입장이 저랑 정반대인. 이분도 지금 이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이거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
15:01 <용수보살의 방편>
[95. 바로 이것에서 길고 짧음과 미세하고 거친 것, 선善과 불선(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로 이것에서 이름(名)과 형색(色)들이 역시 남김없이(無餘) 사라지게 됩니다.(용수 저, 신상환 역, 보행왕정론, 도서출판b)] 바로 이것에서 바로 여기에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거칠고 선하고 불선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로 이것에서 이름과 형색, 명색들이 남김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어때요? 아예 지금 용수보살은 의식이 '소멸되면'이라는 말 자체도 날려버렸죠. 그냥 의식 안에서 모든 게 사라진다는 얘기만 강조했죠. 어때요? 여러 입장을 봐야 돼요. 그래야. 아무튼 저는 용수보살과 의견이 같습니다. 어때요? 저건 용수보살과 저는 용수보살 편이에요. 그러면 지금 정반대 입장에서 참나를 제일 욕하는 용수보살 중관학파 입장에서 용수보살의 가르침으로 전하는 이 문장이 께왓다경을 정확히 풀이했다는 거 아시겠죠. 이 경전에는 께왓다경의 풀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요. 제가 보고 놀래서 가져온 거죠. 간절하면요 이런 게 보여요. 그냥 폈는데 이런 게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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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게 돼가지고 이 구절을 딱 보고 놀래서 책도 사서, 제가 책 제가 또 사드렸어요. 그래서 사드리고 얘기합니다. 재미있죠. 그러면 이 의식은 뭘까요? 이 '의식' 풀이가 없어요, 지금 중관학파에서도. 그러면 지금 이 의식은 뭐겠어요? 청정광명심이요. 정광명이에요. 정광명 안에서 지수화풍 사대가 모두 멸한다. 그러면 이때가 언제겠어요? 무분별지요. 무분별지는 중관학파도 강조한단 말이죠. 무분별지 상태에 들었을 때 공성을 직관한다고 용수보살은 봤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분별지에 들어가라고, 모든 분별이 의미 없다는 걸 얘기하려고 모든 언어나 이걸 다 날려버린 거잖아요, 중관파 이론이. 중관파 이론도 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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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정광명심, 무분별지를 강조한 겁니다. 언어화할 수 있는 모든 걸 날려버린 거예요. 거기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이 용수보살이 결국 저는 좋아하지 않는 방편입니다만 모든 언어를 해체하면서 결국 주장한 것은 희론(戱論)이라고 합니다. 그래야죠 희론, 희론, 언어유희, 언어놀음을 벗어나라 예요. 희론을 벗어나서 어디로 들어가라고요? 무분별지. 무분별지가 지금 정광명 마음입니다. 이 정광명에, 청정광명심에서 정광명 이럴 수도 있고 청정심 이럴 수도 있죠. 합치면 뭐예요? 청정광명심. 청정심, 정광명. 안 하면요 한역할 때 마음대로 해요. 정광만 얘기할 때도 있어요. 정광이라고도 해요. 정광, 정광명, 청정광명심 풀네임 하면요. 청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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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양하게 부르니까 이 의식이 무분별지예요. 이 의식이. 이 의식이 그런데 보세요. 이 의식을 확대해 보면 이렇게 되겠죠. 나눠 볼까요. 보세요. 청정심은 뭘 알아차릴까요? 여기에 동그라미도 하나 그려 볼게요. 공성. 원래 텅 비어 있어요. 원래 텅 비어 있는데, 공성, 영지죠 여기는 영지예요, 영지. 텅 비어 있는 영지가 뭘 알아차리냐면 지가 지를 알아차려요. 결국 뭘 알아차리느냐? 공성의 진리를 알아차려요. 원래 텅 비어 있는 이 자리가 알아차려요. 자기를 알아차려요. 공성이, 공성이 자기를 알아차릴 때 이 대상화되는 것을 공성의 진리, 객(客)이라고 하면, 주체가 청정심이죠. 이게 원래 하나인데. 이 텅 비어 있는 의식이 이 자리도 이미 공적영지지만 공성이 더 강조된다면, 이쪽은 영지가 더 강조되는 겁니다. 알아차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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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뭘 알아차려요? 자기를 알아차려요. 이 자기를 알아차리는 게, 보세요, 공성이니까 텅 비어 있으니까 무분별이죠, 애초에. 애초에 무분별이죠. 청정심은 알아차리니까 영지자리니까 지(知)죠. 그래서 무분별지입니다. 무분별지는 뭘 알아차려요? 공성의 진리요. 이게 다른 말로 진여입니다. 진여를 알아차려 지가 지를 알아차리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자도 진여고 알아차려지는 것도 진여예요. 굳이 이렇게 구분해서 말하자면, 알아차려지는 것을 진여니 진리니 이렇게 얘기합니다. 알아차리는 쪽은 마음이니 지혜니 붙여주고요. 본래는 한 덩어리인데 쪼개져서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려요. 이게 실상이에요. 여러분 참나 상태, 궁극의 참나 상태 실상 이겁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도요 공적영지 상태. 이 청정심 상태에서 알아차려 보니까, 공성의 진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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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겠죠. 거기 오온이 있겠어요? 사대가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 자리에는.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리고 있겠죠. 그래서 의식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가 되고요 모든 걸 초월해서 존재하고, 스스로 존재해요.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인연법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다 날아갔잖아요. 연기법으로 존재한 건 다 날아갔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오직 그 식(識)만 있는 거죠. 식만 있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텅 빈 식이에요. 그래서 공적영지입니다. 공성에서 오는 지혜. 텅 비어 있는 알아차림. 본바탕은 공성인데 공성에서 뭐가 작용해요. 그래서 텅 비어 있다는 건 진공(眞空)인데 알아차린다는 건 묘유(妙有)입니다.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텅 빈 각성, 티벳에서도 강조했었죠, 파드마 삼바바가. 텅 빈 각성. 텅 비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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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도 않아요. 그런데 알아차리니까 없지도 않아요. 이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신기한 겁니다. 텅 비어 있다 없다를 초월해 있는 거예요, 이 자리는. 여러분의 참나 자리는 있다 없다를 초월해 있어요. 이원성을. 텅 비었기 때문에 있지도 않아요. 그런데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없지도 않아요. 있지도 없지도 않은 자리예요. 이원성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굳이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공성이 알아차려요. 누구를? 자기를. 텅 비었구나 하는 걸 알아요. 지금 텅 비었구나 하는 걸 아는 소식이잖아요. 알아차려 보니까, 의식 상태에 있어 보니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더라는 걸 알아차린 거죠. 텅 비었더라. 그런데 여기 보시면, 이 공성에는요 아공의 진리가 있고 구공 진리가 있고 법공이 있고 구공이 있죠. 삼공이 있죠. 나도 없다. 남도 나도 없더라 저기에는. 에고가 없더라. 저기에는 만법이 다 없더라. 그런데 구공, 꽉 차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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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이 꽉 차 있더라. 여기까지 같죠. 지난번 우리 마하반야바라밀경 할 때도 여기까지 왔죠. 공성의 진리는 그러니까 이런 걸요 크게 두 개로 나누면요 공성을 직관한다.
22:17 <공성에 대한 닝마파와 겔룩파의 입장 차이>
이 무분별지는 결국 뭘 알아차리느냐? 공성을 직관하고요 자성을 직관합니다. 이때 자성은요 결국 또 만법을 다 갖추고 있어요. 공성은요 무자성이죠. 텅 비어 있어요. 텅 비어 있으면서 텅 비어 있지 않아요. 이거는 우리 반야경에서 이미 공부한 거예요. 텅 비어 있는 공성을 직관한 것 같지만 거기서요 육바라밀이 꽉 차 있는 거 봤죠. 텅 비어 있지 않아요. 아무튼 어떠세요? 여기까지 지금. 이 정도가 그냥 좀 상식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가 상식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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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공성에 대한 닝마파와 겔룩파의 입장 차이 한번 보실래요. 이게 석설오 스님이 번역하신 “달라이 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 밀교 강의거든요. 달라이 라마의 효림 출판사에서 나온 것. 보실래요. [1. 닝마파에서는 ‘능관能觀’인 ‘혜식慧識’(무분별지)과 ‘소관所觀’인 ‘공성空性’에 대해 분명한 구분을 짓지 않고 있다. 비교적 높은 단계의 수행 차원에서는 능소가 서로 융합되어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언어나 문자상의 운용에 불과할 뿐이다. 삼매 속에서 공을 관할 때에는 능소가 하나가 되어 차별이 없는데, 이것은 평소의 언어 개념으로 형용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상을 여의고 언어가 끊어진 경계라고 한다.] 닝마파에서는 능관인 혜식. 번역을 어렵게 했는데요. 능관이라는 건 보세요. 이거예요. 주체예요. 능소(能所)로 구분합니다. 주객(主客)을 한문에, 불교 한문 번역어에서 능소라고 그래요. 소를 객체. 능을, 보세요, 능은 인식을 능히 내가 인식하는 능력을 말하고요. 인식되는 태상 이게 장소 소(所)자잖아요. 장소 소(所)자 그러니까 대상으로서 보는 겁니다. 능이 주체고 소가 객체예요. 그럼 능관인 혜식. 능이 알아차리는 지혜로운 의식, 이게 뭐겠어요? 무분별지, 청정광명심. 무분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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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관인 혜식과 소관, 관찰되는 바인 능히 관찰하는 바인 주체인 혜식, 무분별지와 관찰되는 바인 공성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구분을 닝마파에서는 짓고 있지 않다 뭔 소리예요? 닝마파에서는요 이게 뭐라고요? 이 청정광명심과 공성의 진리가 닝마파에선 한 덩어리라고요. 한 덩어리로 승의제(勝義諦) 승의라는 승의라는 건 진실의, 궁극의 진리라는 겁니다. 절대적 진리라는 거예요. 즉 공성의 진리도 절대적이지만 그걸 알아차리는 의식도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시공을 초월한, 인과를 초월한 절대적인 거라는 거. 중관파는 이런 말 안 좋아한다고 그랬죠. 그런데 제가 얘기하는 건 원래 중관파는 언어적으로 해체하려다 보니까 공격해서 그렇지 원래 용수보살은 이 무분별지에 들어가라고 하는 거죠, 사실은. 원래 용수보살은 무분별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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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라고 하는 겁니다. 궁극의 이 무분별지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달라이 라마가 속한 귀류논증 중관파는 그 언어로 파괴하는 데 지금 너무 집착해서 어떤 궁극적인 것도 다 부숴버리겠다 예요. 용수보살의 원래 입장은요 청정광명심이라는 것도 언어화된 것은 부술 수 있다는 얘기를 한 거예요. 청정광명심이라면 그러면 자성이 항상 청정해야 되는데 지금 이 더러운 우리 마음은 뭐냐? 이런 식으로 해서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공격을 한 건데 귀류논증파 달라이 라마 쪽까지 오면 오다가 계속 무수한 세월 속에서 중관파가 소화됐을 거 아니에요. 소화되는 과정에서 아예 이 자성청정심이 영원불멸한 자성청정심이 있으면 안 된다까지 간 거라고요. 언어에 완전히 더 빠져가지고. 이해되시죠. 언어는 공격해도 용수보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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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분별지를 체험하라고 원래 한 얘기였는데 무분별지, 모든 언어를 파괴하는 데 열을 올리다 보니까, 언어 파괴에 영원 청정불멸 불변하는 이 자성청정심이 그대로 시공을 초월한, 모든 언어를 초월한 진리라는 거를 이 중관파는 받아들이지 않고, 닝마파는 지금 이걸 받아들이고 있는 거예요. 닝마파도 엄밀히 따지면 중관파입니다. 그런데 중관파 안에서 자립논증 중관파라는,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유식학을 받아들여서 일체가 내 의식의 작용이라는 걸 알아요. 그런데 달라이 라마가 속한 겔룩파는 바깥세계는 그냥 바깥세계라고 봅니다. 내 의식의 작용으로 안 봐요. 그럼 내 의식의 작용으로 안 봐 버리면 그건 완전히 다른 철학이 됩니다. 완전히 다른 철학이 돼요.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닝마파는 지금 우리랑 똑같은 입장입니다. 청정광명심이 그대로 공성의 진리, 이건 같은 거라는 겁니다, 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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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는 의식과 알아차려진 진리는 하나다'가 닝마파 입장이고, 겔룩파는 '둘이다'는 거, 어떻게든 찢어서. 공성의 진리만 승의제지 알아차리는 놈은 이건 무상한 의식이라는 거예요, 지금 달라이 라마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해되세요. 영원한 의식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집착이 있다니까요. 용수는 영원한 의식이 있다는 말을 공격함으로써 언어에서 떠나서 진짜 영원한 의식을 만나라고 한 얘기인데 이제 내려오다 보니 영원한 의식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고요. 이렇게 돼 버렸다고요. 그래서 지금 공격하는 거예요, 달라이 라마는. 닝마파는 이 둘을 같이 보는데 우리는 다르다, 입장이. 이 공성의 진리만 절대적인 진리지 이걸 알아차리는 혜식, 이 의식이라는 건 이미 뭐라고요? 달라이 라마는 항상 이 의식을 뭐로 보세요? 연기하는, 연기하는 의식연속체로 봐요. 즉 이거는 다른 말로 무상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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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한다는 건 계속 변화한다는 거죠. 계속 변하고 있는 걸로 자꾸 보려고 해요. 그래서 이 말들이 나온 겁니다. 닝마파에서는 알아차리는 무분별지나 알아차려지는 공성의 진리나 구분을 안 하고 있다. 그런데 닝마파를 이제 달라이 라마도 모든 사대 문파의 또 어른이다 보니까 이해는 하려고 해요. 통합을 시도합니다. 비교적 높은 단계의 수행 차원에서는 능소가 서로 융합되어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달라이 라마도 무분별지는 인정하거든요. 무분별지 상태에서는, 의식은 영원한 의식이 불변한 의식이 있다는 걸 부정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다만 무분별지는 경전에 있는 거라 의심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무분별지 상태에서 주객이 그때 주객이 딱 하나 된 거는 맞다. 주객이 딱 하나 돼야, 왜? 주객이 하나 돼야 직관이 일어나잖아요. 직관이 일어나야 되니까. 무분별이라는 거 보세요. 무분별은 이미 분별이 없다는데 주객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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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이 없는 그 직관 상태에서는 그때는 능소가 없는 거 맞다. 달라이 라마 얘기 이해되세요? 비교적 높은 단계의 수행 차원에서 능소가 서로 융합되어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언어나 문자상의 운용에 불과할 뿐이다. 언어로만 구분이 가능하지 무분별지에서는 구별이 안 된다, 능소가. 맞다. 그런데 삼매 속에서 공을 관할 때는 능소가 하나 되어 차별이 없는데 이것은 평소에 언어 개념으로 허용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그리고 상을 여의고 언어가 끊어진 경계라고 한다. 이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하신 건요 닝마파 말을 어떻게든 소화해 보려니까 뭐라고 한 거예요? 무분별지, 딱 그 삼매에 들어서 무분별지 상태에서는 주객이 합일된 거 맞다. 그때는 이 청정광명심과, 즉 가장 미세한 의식과 즉 공성의 절대적 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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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하나로 회통해 있는 건 맞다. 닝마파는 이걸 강조한 거다. 그런데 본인 얘기는 뭘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다르다는 거죠. 그때 잠깐 남녀가 만나서 잠깐 무아지경에 들어가서 주객이 잠깐 초월될 수는 있어도 원래는 둘이다.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닝마파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있는데, 평소에 언어 개념을 형용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는 거. 닝마파가 이상한 얘기를 해도 그거는 말이 이상할 수 있다. 겔룩파 입장에서 얘기한 거예요. 걔네들 말이 너무 과할 수 있다. 설명 안 되는 걸 설명하려고 하니까 그런 말들이 나오는 거다. [2. 닝마파에서는 ‘소관所觀’인 ‘정광淨光’과 ‘능관能觀’인 ‘정광淨光’이 전혀 차별이 없는 경지에서 그 성품의 본질을 말한 것이다.(무분별지의 ‘정광명淨光明’이 그대로 ‘공성空性’의 진리임.)] 닝마파에서는 소관인 정광과. 즉 보세요. 이 보이는 것도 정광이라고 하는 게 지금 정광명이에요. 보이는 것도 정광명이라고 하고, 공성의 진리도 정광명이라고 하고, 능히 보는 자도 정광명이라고 해서 전혀 차별이 없는 경지에서 성품의 본질을 말한 거다. 닝마파가 자꾸 둘을 구분 안 하는 거는, 이걸 그냥 보세요, 닝마파는 이걸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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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명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 자체를 정광명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겔룩파한테는 충격인 게요 공성의 진리만 절대적이고 정광명은 연기하는 의식인데 닝마파는 자꾸 정광명으로 공성의 진리까지 먹어버리는 거예요. 정광명을 더 주로 해가지고. 이게 뭡니까? 정광명이지. 공성의 진리는요? 정광명 속에서의 알아차려지는 진리지.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리니까 다 정광명이지. 그냥 청정광명심만 있는 거지. 청정광명심 속에서 청정광명심이 청정광명심을 알아차려,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려 보니까 공하다 하는 진리를 아는 거지. 공성의 진리마저도 청정광명심을 더 강조해서 설명해 버리는 닝마파 방식에 반대하는 거예요, 지금 겔룩파는. 어디 무상한 게, 영원한 건 공성의 진리뿐인데, 무상한 정광명으로 지금 진리를 카버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지금 불만이 있죠. 구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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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야 되겠으니까. [3.일반적으로 ‘정광’은 ‘공성空性을 소연경所然境을 삼은 식(心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광명은 공성을 소연경으로 삼은. 공성을 소연경이라는 건? 번역이 지금 너무 어렵죠. 한문 그대로 해 가지고. 소연경은 대상으로 삼는다는 거예요. 공성을 대상으로 삼은 식을 가리키는 거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가 정광명 하면 원래는 그냥 식(識)이지. 그리고 이 정광명은 무상하게 변하는 식이지. 공성의 진리를 딱 깨달을 때 무분별지 그 상태에서만 영원하다고 말하지 일반적으로는 그냥 무상한 식이지.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달라이라마는 계속해서 끌어내리려고 하니까 이런 말이 나오는 거예요. [4. 이상과 같이 신역 여러 종파의 논술에서는 ‘승의제勝義諦’라는 명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 뜻이 공성‘空性’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공성을 인식하는 심식을 가리킴)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이치로 볼 때 밀교(닝마파의 밀교적 가르침)와 현교(귀류논증 중관파의 현교) 사이에 지견상 차별이 있다.]
32:40 <현교와 밀교의 차이>
이상과 같이 여러 논술에서는 승의제라는 궁극의 진리라는 명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여러 종파에서 그 뜻이 공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뭐냐면 닝마파나 까규파나 다른 파들도 샤카파 이런 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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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의제라는 말을 정광명에다 자꾸 갖다 붙이더라는 거예요. 이거 불편한 겁니다. 지금 겔룩파는. 궁극의 진리를 자꾸 알아차리는 의식에다 갖다 쓰더라는 거예요. 이 무상한 의식에다가. 그래서 밀교들이, 자꾸 밀교들이 정광명을 강조하거든요. 왜 그러냐면 밀교는 여래장 사상이에요, 베이스가. 티벳 불교가 지금 모순이 일어나는 게 교학은 중관파잖아요. 그런데 밀교는 근거가요 밀교는 원래 애초에 비로자나불 사상이거든요. 밀교는 참나 사상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참나 사상을 강조하는, 정광명을 강조하는 밀교와 그 뭐죠? 절대적인 걸 해체하려고 하는 중관파가 만났다고요, 지금. 그러니까 현교는 교학입니다. 교학은 중관파를 배우는데 수행은 밀교를 하는데 밀교는 참나를 인정하고 이 교학은 참나를 부정하는 모순이 생긴 거예요, 지금 특히 달라이 라마 쪽이. 왜? 다른 데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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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통돼 있는데, 달라이 라마만 자꾸 참나를 부정하려니까 이게 충돌이 나죠. 그러니까 달라이 라마의 고민인 거예요. 닝마파는 고민을 안 해요. 왜? 지금 회통돼 버렸잖아요. 이 정광명을요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게 밀교예요. 수행, 호흡법 수행과 이런 족첸 명상 수행을 통해서. 간단하죠. 그런데 이상한 교학이, 그 쫑카파라는 분이 만든, 정도전 때 분인데요 우리나라 교학이 현실화된 게 지금 겔룩파인데 겔룩파의 쫑카파의 제자가 계속 환생하는 게 달라이 라마거든요. 쫑카파 제자 중의 하나가 계속 환생하면서 자기 스승 이론으로 지금 티벳을 지배해 온 겁니다.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권력적으로 다 지배해 온 게 달라이 라마라 자기 사상에 안 맞는 사람들 다 숙청하고 닝마파나 이런 까큐파 사원들 다 없애버리고 겔룩파 사원으로 먹어버리고 고문도 하고 해서 책 못 내게 다 막아버리고. 사상 독재를 엄청나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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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우리 조선이랑 비슷하다니까요. 정도전 때쯤 분인데 쫑카파가 그 이후 거의 우리 조선이 사상 독재하듯이 달라이 라마가 완전히 통제해 온 겁니다, 겔룩파 중심으로. 겔룩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문제가 뭐냐면 현교랑 밀교가 원래 밀교랑 지금 충돌이 나요. 그래서 쫑카파가 밀교 책까지 써요. 밀교까지 회통을 시켜놔야 되니까. 쫑카파라는 분이 귀류논증 중관파를 가지고 중관파 내에서도 되게 협소한 주장을 가지고 전체를 먹어버리면서 밀교까지도 여기에 맞춰서 해석을 해가지고 겔룩파에도 다 밀교가 있습니다. 겔룩파식 밀교는 좀 이론적으로 회통이 돼 있겠죠. 달라이 라마 입장에. 그러면 다른 파 밀교들은 지금 너무 여래장 사상, 참나 사상 그대로인 거예요. 그래서 닝마파를 가지고 이제 시비하면서 이렇게 다른 파들을 보면 자꾸 절대적인 진리를 얘기하면서 공성을 말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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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을 알아차리는 자를 말하니까 이런 이치로 볼 때 밀교와 현교, 즉 귀류논증 겔룩파 밀교랑, 다른 현교 중관파와 다른 파 밀교들이 충돌 나는 것 같다. 차이가 있어 보인다. 뭔 차이예요? 공성의 진리만 절대시하느냐? 알아차리는 자를 절대시하느냐? 이 둘을 같이 보느냐? 이 차이예요. 다른 파들은, 다른 파 밀교들은 다 이걸 같이 보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뭔가 현교랑 중관파랑 지금 밀교가 차이가 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쫑카파가 등장합니다 이때. 그걸 회통시킨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쫑카파는 밀교 책까지 막 썼거든요. [5.그러나 쫑카파 대사가 설한 지견은 ‘소관所觀의 정광淨光’이 ‘공성空性’을 가리킨 것이요. 이 공은 이미 이변二邊의 희론을 다 여읜 경지이므로 밀교(겔룩파의 밀교적 가르침)와 현교(귀류논증 중관파)에 차이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석설오, 달라이 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 효림)] 쫑카파가 말할 때 그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정광명은 공성의 진리만을 가르친다라고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리고 이 공성은 양극단의 희론을 다 여읜 경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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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으니 밀교와 현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들에서 이미 회통된 밀교를 가지고 와서 그래도 우리 겔룩파 밀교에서는 이 공성의 진리와 이 청정심, 광명심을 명확히 구분해서 본다는 걸 강조하면서 “밀교랑 현교 차이 없어”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지금 여기서 여러분이 뭐만 아시면 되냐면요? 밑에 그림 보시면, 그림으로 그려 볼게요. 그림 어때요? 닝마파 다음 장을 보시면, 이쪽이 겔룩파입니다. 어떻게 다른지 한번 볼까요? 이쪽이 닝마파예요. 겔룩파는요 겔룩파에서 말하고 싶은 건 정광명은 지혜로운 의식일 뿐이라는 거예요. 알아차리는 의식, 이 의식은 뭐라고요? 무상한 무상하고 연기하는 의식의 연속체일 뿐입니다. 즉 연속체라는 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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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멸한다는 얘기에요.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오래 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의식이 영원히 가요. 부처가 된 뒤에도 이 의식은 있어야 되거든요. 부처도 의식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겔룩파 입장에서는 이 의식은 영원은 해요. 그런데 불변은 아니에요. 그냥 불멸이에요. 불멸할 뿐이지 끝없이 변화하고 무상하게 변화하는 중에 영원한 거예요. 이런 정광명으로 공성의 진리, 이것만이 승의제고요. 진짜 절대적 진리는 일체는 무자성, 자성이 없다, 텅 비었다 이것만이 진리지 그걸 알아차리는 일체가 텅 비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의식 자체는 생멸한다고 보고 싶은 거예요. 그건 생멸심이다. 그런데 그럼 석가모니 얘기랑 다르죠. 석가모니 얘기는 뭐라고 했어요? 용수보살도 인정한 석가모니 얘기는 뭐였어요? 의식은 모든 것의 주인이고 변하지 않는다. 이 의식에서 오히려 지수화풍 사대가 다 소멸한다. 여기에 머물지 못한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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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있다고 했는데, 자꾸 겔룩파는 이상한 말을 붙이는 거예요. 자 그럼 이게 뭐냐? 이 겔룩파가 용수보살의 순수 중관파도 아니라는 겁니다. 용수보살의 순수 중관 사상이라면 무분별지를 부정하면 안 되고 아까 말한 용수보살도 인정한, 분명히 최소 용수보살에 엄밀히 말해서 제자가 썼다 하더라도 용수보살의 제자도 인정한 그 청정광명심, 모든 것에 초월한 이걸 자꾸 해체하려고만 하고 있는 거예요. 안 맞죠. 닝마파는요? 정광명이요 정광명이 그대로 공성의 진리고 이게 전체가 승의제예요. 이게 초의식이에요. 달라이 라마는 초의식을 자꾸 생멸하는 걸로 보려고 그래요. 초의식. 가장 미세한 의식도 생멸한다고 보고 싶어 해요. 가장 미세한 의식 그 자체가 공성의 진리고 절대적 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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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합니다. 우리 닝마파는 모든 것은 이것의 발현으로 보고 싶어 해요. 모든 것은 이것의 현현일 뿐이다. 만물은 세속제, 세속의 모든 존재들은 이 정광명의 다툼일 뿐이라고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닝마파도 세속의 모든 것을 공성의 작용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 의미는요 세속의 모든 것들도 무자성, 자성이 없어서 그러는 거지 특별한 의미가 아니에요.
40:32 <일체유심 사상의 중요성>
이쪽은요 진짜 의식에서 만들었다는 거예요. 일체유심 사상입니다. 여기서 전혀 다르죠. “이것도 무상해. 내 의식도 무상해. 우주 전체가 무상해. 그래서 우주 전체는 무상한 공성의 나툼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거랑 이거는 겔룩파고. “내 의식이 텅 빈 의식이 있어. 이 텅 빈 청정광명의 의식의 작용이야, 이 펜이. 그래서 이놈도 텅 비어 있어.”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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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죠. '일체유심이 있냐 없냐?'가요 이게 모든 걸 가릅니다. 일체유심 사상이 없으면요 진짜 대승이 아니에요. 진대승은 일체유심이 있어야 진대승입니다. 반야경도 다 일체유심 사상에서 나온 건데 유식학 이전에 이미 반야경도 일체유심이고 화엄경도 일체유심이었어요. 그런데 자꾸 다른 사상이 끼어가지고 이 공성의 진리와 알아차리는 의식을 구분해서 차별 지으려는 사상이 등장해 버린 거예요. 이게 이제 겔룩파식 중관파, 왜곡된 중관파들의 주장입니다. 왜 이걸 알아야 되느냐? 지금 불교계에 이게 만연하게 껴가지고 얘네들이 주장하는 건 항상 연기공(緣起空)만 주장해요. 연기는 공하다. 그러니까 정광명도 연기한다. 연기하는 건 무자성, 공하다. 그래서 무자성하다는 진리만 영원하지 모든 만물은 다 영원하지 않고 자성이 없다. 연기공 할 때 공은요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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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하다는 뜻이에요. 없다도 아니에요. 보세요. 이 펜은 연기하니까 공합니다. 그거 공합니다가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단순히. 뭐예요? 연기하니까 연기하니까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즉 뭔 소리냐? 무상하단 소리예요. 이 펜은 무상합니다라는 말밖에 안 돼요. 즉 중관파는요 소승철학이에요. 계속 소승 사상을 끌고 가고 있는 거예요. 부처님 때 사상, "제법무아, 무상 고 무아 사상의 연장일 뿐이지, 일체유심하니까 만법이 본래 내 의식의 작용인데, 내 의식이 본래 진여고 공이니까 만법도 공이고 진여다." 이 사상을 이해 못 한다고요. 이게 법공의 핵인데. 정확히 알아야 돼요. 중관파가 주장하는 공은 영원한 게 없다는 뜻입니다. 있긴 있다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닝마파 입장에서는요, 겔룩파를 공격해 볼까요. “연기하니까 공허하다고? 무자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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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펜이 연기하니까 무자성이라고? 그러면 펜은 있다는 얘기잖아.” 닝마파가 볼 때는 “우리가 더 용수의 중관파에 충실하다”고 주장해요. 용수는 중도적입니다. 이쪽(겔룩파)에서 우리가 제일 잘 안다고 주장했죠. 귀류논증, 귀류논증이라고 말꼬리 잡아서 논증하는 거예요. 남의 말꼬리만 잡아서 오류를 드러내요. 지 얘기는 안 해요. 제일 재수 없죠. 남의 말의 허점만 잡아요. “잠깐 네 말 좀 이상한데. 이렇게 하면 안 맞지 않아. 그러면 애매한데.” 그래서 이쪽은 자립논증이에요. 주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립논증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립 논증은 유식학까지 수용한 자립논증파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식학까지 수용한 게 닝마파예요, 굳이 닝마파의 근원을 따지자면. 그래서 닝마파는 우리가 더 용수보살에 충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얘기는 결국 뭐냐면 우리가 더 반야경에 충실하다는 건데요.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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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룩파. "이 펜은 있습니다. 펜은 있어요. 실제로 있어요, 우리 마음밖에. 겔룩파는 마음 밖에 펜이 있어요. 이 펜은 그런데 무상해요. 연기하고 있잖아요. 시시각각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영원한 펜은 없잖아요. 그래서 펜은 공한 겁니다. 오온도 영원한 오온은 없잖아요. 그래서 오온은 공한 겁니다." 무상하다는 소리예요. 닝마파 입장에서는요. 즉 닝마파 입장이 학당 입장입니다. 학당 입장에서 이 펜은 놀고 있네요. 연기하니까 영원하지 않다는 말은 의미가 지금 중요한 얘기가 아니에요. 더 본질이 뭐예요? 이 사람도 이게 법공이라고 그래요. 닝마파에서 말한 법공은 뭔지 아세요? 펜 자체가 없죠. 이건, 아니 눈에 보이는 이 펜 자체가 공의 작용이라니까요. 참나 작용이잖아요. 펜 자체가 참나예요 지금. 본래 펜이 텅 비어 있다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이게 법공이에요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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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의 본질은요 펜 자체가 공하다는 거예요. 이쪽은 이 펜이라는 말로 또 공격해 올 수 있으니까. 펜이라는 이름 붙여지기 전에 이 오온의 현상 있죠. 이놈 자체가 본래 공하다는 거예요, 참나 작용이기 때문에. 일체가 의식 작용인데 의식이 본래 공하단 말이에요. 그럼 전체가 공하다는 거예요. 애초에 공하다는 거예요. 이 전체가 우주가 꽉 차 있으면서 동시에 그대로 공이라는 거예요. 왜? 일체는 참나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게 유식학, 일체유심 사상이나 유식학 사상 없이 설명이 되겠어요? 원래 중관파는 이런 입장이고, 원래 용수도 이런 입장이었고, 더 나아가 반야경, 화엄경은 다 이 사상이라는 겁니다. 닝마파 입장은 맞죠. 그러니까 닝마파가 맞아요. 펜은 있는데 우리 밖에 펜이 있는데 연기하니까 무상하다는 정도의 얘기는 닝마파에서 볼 때는 뭐로 보여요? 이거 자체가 법집(法執)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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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밖에 펜이 있다고 한 게 법집이에요, 이미. “우리 마음밖에 펜이 있다고요? 독자적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건.” “아니요. 영원한 펜은 없다니까요.” “놀고 있네. 뭐가 있다는 거잖아 아무튼.” 이거죠. 펜이라 이름 붙이기 전에 오온의 작용은 있는 거잖아요. 겔룩파는 대상을 인정해요. 다만 영원한 펜이 없다고 얘기한 거예요. 영원한 펜이 없다는 걸 법공, 이 연기공을 법공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닝마파를 포함한 일체 화엄경 사상, 대승기신론 사상, 선불교 사상은요 애초에 공하다는 거예요, 이게. 이거 구분되세요? 홍익학당 입장과? 홍익학당에서 법공 인가 받으시려면 뭐라고 해야 되죠? “만법은 본래 열반이고 공하다” 해야죠. “만법은 본래 공한가?” 하면 안 돼요. 그런데 지금 만약에 겔룩파의 우수한 겔룩파 박사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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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당에서 이제 심사를 봐요. “이 펜은 공합니까?” “아! 이 펜은 공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펜이라는 이름에 의존하고 있고, 오온에 의존하고 있고, 지수화풍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게 없고 계속 무상하게 변할 뿐이기 때문에 영원한 펜은 없습니다.” 그러면 학당에서 뭐라고 할까요? “뭐라는 거야 이게?” 보통 학당 정사들은 “아! 이상한데. 이 사람 이상한데” 할 거예요. “법공을 얘기하는데 왜 이런 얘기를 할까? 나한테?” 이럴 수도 있어요. 그렇죠. 뭔 말인지 아시겠죠. “아 예 그런데 그런 언어를 그런 언어 펜이니 뭐니.." 많이 따지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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