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운요호 사건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강화성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강화성당(江華聖堂)이란?
강화성당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성공회 성당입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강화읍성당이라고도 하지요. 혹은 성 베드로와 바우로(바울) 성당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렇게 '두 성인이 함께 하는 성당' 아이디어는 오늘날 체코 공화국에 있는 브르노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성당이 대표적이지요. 이 강화성당은 서기 1900년에 지어진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실리카와 한옥이 결합되었던 것입니다. 강화성당의 외관은 조선시대 한옥의 양식이지만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매우 독특한 혼합 건물이지요. 바실리카는 그리스어로 '왕족의'라는 뜻인데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 건축양식을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 신전을 로마식으로 발전시킨 형식이지요. 그리스 신전보다 내부 공간이 넓으며 ㄷ모양의 평면을 가진 건축물의 중앙에 높은 천장을 만들어 개량시킨 형태입니다.
여하튼 이 강화성당은 사적 제42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② 강화성당 축성의 역사와 코프 주교
서기 1890년 찰스 존 코프 주교가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코프 주교를 비롯한 성공회 신부들이 서기 1893년 강화도 갑곶 나루터에서 선교를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서기 1897년 조선왕실 해군사관학교(통제영학당)의 영국인 교관 윌리엄 헨리 콜웰(William Henry Callwell) 대위로부터 땅 3천 평가량을 매입하여 선교본부를 강화성내로 이전하였습니다.
서기 1900년 11월 15일에 강화성당은 찰스 존 코프(1843~1921) 주교에 의해 ‘성 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축성되었습니다. 체코에서도 그렇지만 같은 아시아인 싱가포르에도 성 베드로와 바오로 (천주교) 성당이 있지만요. 여하튼 이때 코프 주교는 만 57세였습니다. 그는 10년 세월을 조선에서 보내며 초대 조선교구장을 역임했지요. 토착화를 위해 고요한(高要翰)이라는 성명도 만들었습니다. 그는 1904년 7월 25일까지 조선교구장을 맡게 되었지요.
③ 강화성당의 구조와 내부
이미 언급했지만 강화성당은 겉이 한옥처럼 보이지만 구조와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입니다. 강화성당은 그저 성공회만의 건물이라기보다 한국 크리스트교 토착화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지요. 바실리카 성당을 한옥 재료로 만든 건물의 표본이라 할 것입니다. 강화성당의 토착화 노력은 조선교구장들의 창씨개명(?)에서도 잘 드러나지요. 특히 단아덕 교구장의 경우는 한국에 여러 서양 스포츠를 도입하여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여하튼 이들의 노력은 ‘현지화’라는 말이 맞겠습니다. 가령 조선교구장들은 하나같이 한국식 이름이 있었지요. 언급한대로 초대 교구장인 코프 주교는 고요한, 2대 교구장 터너(1862~1910)는 단아덕(端雅德), 3대 교구장 트롤로프(1862~1930)는 조마가(趙瑪可)라는 성명이 있었습니다. 강화성당 측에서 현지화를 위해 애쓴 흔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강화성당 건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지요.
가령 석재와 기와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강화도 내에서 구했습니다. 다만 강화도에만 재료 수급을 한정하지는 않았지요. 후대의 경우처럼 유난하게 ‘대형교회’를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건물의 웅장함과 견고함 정도는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목재는 수령 백년 이상의 백두산 정송을 조마가 신부가 직접 신의주에서 구하여 뗏목으로 운반하여 왔지요.
사실 조마가 교구장은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은 고요한, 단아덕에 비하면 별반 없었다고 합니다. 단지 파견되었으니까 따랐을 뿐이라고 하지요. 여하튼 강화성당이 공을 들인 건축물임은 분명합니다. 도목수는 경복궁 중수에 참여했던 도편수였고, 중국인 석공과 강화 지역의 교우들이 참여하여 1년여 만에 완공되었지요.
그 당시로는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입니다. 언급한대로 기와 지붕에 십자가를 올린 모양새가 현지화에 신경쓴 대목이지요. 한자 현판 등이 이국적이면서도 어색하지는 않은 묘한 분위기라 관광지로 많이 찾는 듯합니다. 강화성당은 전통 건물의 개념에서 본다면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고 하지요. 반면 면적에 비하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강화성당 중앙에 있는 석재 구조물은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는 세례대입니다. 전근대시대에 전통적으로 글자를 표기하는 방식에 따라 오른쪽부터 보면 修己(수기), 洗心(세심), 去惡(거악), 作善(작선)이라고 한자로 새겼지요. 이러한 방식은 교인들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효과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구약성경』에 나오는 십계명도 돌에 새겨졌다고 하니까요.
잠시 이야기한 바가 있지만 이와 유사한 바실리카-한옥 건축물로는 같은 지역(강화도)의 온수리 성당,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수동성당(천주교) 등이 있습니다. 이중 온수리 성당은 같은 강화도(강화군)에 있는 같은 성공회의 건축물이지요. 다만 강화성당은 강화읍, 온수리 성당은 길상면에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④ 그 밖의 이야기
강화도에는 같은 이름의 천주교 성당도 있습니다. 온수리성당이 아니라요. 그것도 하필이면 직선거리로 200m 안팎인 근접거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에 그냥 강화성당이라고 검색하면 천주교 강화성당이 주로 잡히지요. 확실하게 찾으려면 ‘성공회 강화성당’이나 ‘강화읍성당’이라고 검색해야 이 성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토착화를 지향한 성당답게 사용하는 종도 전통적인 범종입니다. 다만 범종의 표면에는 연꽃 문양이나 비천상, 보살상 등 불교적인 이미지 대신 십자가를 넣었지요. 종이나 징을 치는 나무 막대인 당목(撞木)으로 범종을 칠 때 망치가 늘 닿는 자리인 당좌(撞座) 부위에도 전통적인 연꽃 장식 대신 십자가 문양을 넣었습니다.
원래 강화성당은 서기 1914년 영국에서 가져온 서양식 종을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태평양 전쟁 물자로 쓰겠다는 이유로 강제 반출당하고 말았지요. 이후 서기 1989년에 성당 신자들이 모금하여 현재의 십자가 장식 범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범종 밑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제작방식인 명동(鳴洞)이 없다고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범종을 치는 소리가 더 은은하게 멀리 퍼지도록 범종 밑으로 움푹 패인 공간을 만들거나 항아리를 묻는다고 합니다. 이를 명동(鳴洞)이라 부르지요. 이러한 양식은 일본이나 중국에 없는 우리나라식 방법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훈맹정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