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불국사가 대체 무엇이뇨?
불국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385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입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라 하지요.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사찰이 신라 때 생겨났다는 정도는 아는 듯합니다. 서기 1995년 12월에는 토함산 중턱의 암자 석굴암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요.
불국사는 불국정토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야심 찬 신라의 꿈을 드러내는 건축물입니다. 불국 정토(佛國淨土)는 부처나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말하지요. 사찰의 이름인 불국사는 불국정토에서 유래한 호국사찰입니다. 호국사찰(護國寺刹)은 부처의 공덕으로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고자 건립한 사찰이지요.
황룡사가 거대한 규모로 유명한 절이라면 불국사는 치밀한 구성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절입니다. 불국사는 전성기인 남국 신라~고려 시대에는 지금의 8배에 달하는 규모의 대사찰이었다고 하지요. 이런 대사찰이 세월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규모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불국사는 조선 영조 때 복원된 불국사에 근거하고 있지요.
불국사는 대표적인 한국 건축물들 중 하나로 경주시로 소풍 내지 수학여행을 간다면 꼭 들르는 곳입니다. 필자도 고교 시절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고요. 정작 경상북도 인근의 사람들은 수학여행으로 불국사를 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불국사는 유치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소풍 단골 장소라 하지요.
그래서 경북 인근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인생에 한 번은 불국사를 가 보게 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입장료는 서기 2023년 5월 4일부터 무료가 되었다고 하지요. 필자는 서기 2023년 이전에 답사를 다녀온지라 무료 방문을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여하튼 불국사의 정확한 건축 연대에 대한 논란이 있지요.
② 불국사의 역사 살펴보기(통일 이전)
일단 『불국사고금창기』 혹은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라는 기록에 의하면 『삼국유사』에 없는 이야기를 소개했다고 합니다. 제가 불교에 밝지 못해 『불국사고금역대기』 원전은 읽어보지 못했지요. 이 책은 조선 시대 승려 동은[혹은 귀은(歸隱)]이 여러 기록을 수집하여 서기 1740년에 집필하였습니다.
이 저작을 서기 1767년에 그의 제자 만연(萬淵)이 새로 베껴 썼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15년(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연제부인)이 새 사찰을 짓기를 소원하여 불국사를 처음 지었다고 하지요. 이후 서기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이 크게 개창했다고 합니다.
이때 아미타여래상과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봉안했다고 합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 정토에 있는 부처이고 비로자나불은 연화장세계에 사는 부처라고 하지요. 사실 불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서방 정토와 연화장세계의 구분조차 어렵습니다. 더구나 연화장세계의 경우 불교의 종파에 따라 그리고 있는 모습이 다르다고 하지요.
여하튼 문무왕 10년(서기 670년)에는 무설전을 건설해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합니다. 불국사의 무설전(無說殿)은 경전을 강의하고 공부하는 곳이지요. 말로 설법이 이루어지는 곳임에도 ‘설법이 없는 곳’ 즉 무설전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본질이 언어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있음을 의미하지요.
서기 670년에는 신라-당 전쟁이 벌어진 상태였습니다. 문무왕은 현실적인 대책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종교의 힘에 의지하려 했지요. 참고로 화엄경(華嚴經)은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설법한 불경의 문구입니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 제일의 제국이라 할만했지요. 서남아시아는 이슬람 제국의 성장세가 한풀 꺾인 우마이야 왕조 시대였습니다.
③ 불국사의 역사 살펴보기(남북국시대) Ⅰ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국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북국시대인 경덕왕 10년(서기 751년)에 그 유명한 김대성이 불국사를 크게 손질하며 고쳤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청운교,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 『불국사고금역대기』의 기록이지요. 이상은 「경주신문」, 2018.09.07. 기사를 근거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신문만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지요.
가령 지학사에서 만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연표에도 서기 751년이 불국사와 석굴암이 중창되기 시작한 해라고 서술했습니다. 여기서 중창(重創)은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불국사고금역대기』에서 언급한 부분이 빠지고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나옵니다. 제 입장에서는 앞부분은 전혀 몰랐었던 이야기지만요.
김대성의 불국사 일화가 유명해서 김대성이 처음으로 지은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부터가 그랬고요. 그렇지만 『불국사고금역대기』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 보는 시각이 일반적인 듯합니다. 일단 불국사 자체가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지요. 그런 만큼 김대성 혼자서 그런 엄청난 건설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그가 기록처럼 시중이라는 고위 관직일지라도요.
그러니 불국사는 김대성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법흥왕 때부터 신라라는 국가 차원에서 개증축을 해오던 사찰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훗날 불국사 모습의 바탕이 되는 결정적인 중수를 김대성이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요. 그 당시가 아닌 후대 기록이라지만 아무래도 『불국사고금역대기』의 기록이 더 세세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삼국유사』가 설화적인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합니다. 참고로 『삼국사기』를 보면 김대성이라는 이름은 없지요. 다만 경덕왕 시절 중시를 지낸 김대정(金大正)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고(故) 이기백 교수를 비롯한 여러 역사학자들은 정황상 동일인물로 추정했지요. 여하튼 중수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도 실린 김대성 설화가 유명합니다.
이 시대 당나라는 내우외환의 조짐이 있었지만 정작 한국사의 남북국은 매우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북국 발해의 문왕도 그렇지만 남국 신라의 경덕왕도 굳이 전쟁에 매달리는 인물들이 아니었고요. 이런 시대 배경 속에 불국사 중수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