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머, 우리더러 아주머니래...”>
1976년 12월,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을 당했다.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입대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그전에는 2대 독자라는 이유로 '의가사 (依家事)'의 사유에 해당하여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나가있던 1971년 이후에 병역법이 바뀌어 방위병이라는 제도가 생긴 것이었다. 12월 중순 어느 날, 서울지방병무청 소집과장이라는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12월 30일이면 완전히 병역면제가 되기 때문에, 소집과장이 그것을 알려주려고 전화를 한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방위병으로 소집되었으니, 훈련소 입소준비를 하라"고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며칠 전에
그리하여 12월 17일에 늦깎이 방위병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무원인 나는 기꺼이 소집에 응했다. 13일만 지나면 완전히 병역면제를 받는데, 어떻게 보면 나는 공무원 신분이라 기꺼이 입소는 하면서도 이 지시 한마디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내가 훈련소에 입소할 당시 71년생인 큰아이 오인이는 만 5살이었고, 73년생인 둘째 오중이는 만 3살이었다. 이와 같이 운명의 장난처럼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둘이나 있는 서른 살이 넘는 나이에 태릉에 위치한 OO동원사단의 훈련소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소에 입소한 첫날, 연병장에 집합한 훈련병들은 행동이 굼뜨고 대오(隊伍)도 엉망이었다. 게다가 사회에서의 긴 머리를 그대로 기르고 있어서 마치 민방위 훈련을 받으러 온 사람들 같았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에서 대오를 지휘하던 조교들의 갑자기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조교들은 앞쪽에서부터 건들건들하던 훈련병들을 군화발로 걷어차면서 뒤쪽으로 달려왔다. 그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 훈련병들이 얻어맞지 않으려고 재빠르게 정렬을 하였다.
조교가 으르렁거리며 내 근처까지 왔을 때였다. 검은 가죽점퍼를 입은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나는 조교에게 얻어맞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훈병
"훈병
우리는 현역 소령과 방위 훈련병이라는 것도 잊고 그 동안 지내온 얘기를 나누었다. K는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입대하여 막말로 "군대에 말뚝을 박았다"고 했다. 지금은 이 부대의 보안대장으로 파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K는 며칠 전에 친구로부터 "외무부 권 과장이 방위병으로 입대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훈련병명단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일부러 불렀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대학 때부터 친구인 그를 만나서 반가웠고, 또 조교들에게 얻어맞지 않도록 배려해줘서 무척 고마웠다. 우리는 한 시간 가량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는 훈련병 내무반으로 돌아가야 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건물 밖까지 배웅해주었다.
내무반으로 돌아오니 70여명의 훈련병들이 조교들의 인솔로 머리를 빡빡 깎고 피복을 지급받고 있었다. 나도 훈련병들 틈에 끼여 머리를 깎고 피복과 군화 등을 지급받았다. 조교들은 우리를 연병장에서처럼 거칠게 다루지 않고 신사적으로 대했다. 그날 소집된 훈련병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많았고 오랜 외국생활로 한국말도 서툴렀다. 곧이어 우리는 잠자리와 관물대 등을 배정받았다.
내 옆자리는 서울 근교에 있는 OO사 주지 스님이 배정되었다. 그 스님은 인도에서 유학하고 일본에서 장기간 체류하다가 돌아온 불교계에서는 인텔리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이윽고 휴식시간이 되자 주지스님이 물었다. "노형은 어디로 도망을 다니다가 이제야 붙들려 왔소?" "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초면인 그에게 내 신상에 관해서는 대충 둘러댔다.
그런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쨌든 주지스님과 나는 우리 중대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스님은 나와 동갑이었지만 깍듯이 형님 대접을 해주었다. 내가 생일이 3개월 2일 빨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 생일이 하루라도 늦었다면 유난히 개성이 강한 이 심술쟁이 주지 스님에게 많이 시달렸을 것이다.
입소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나와 주지스님은 교관인 박 중위나 다른 교관들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동료 훈련병들과 똑같이 모든 훈련을 받았다. 그 며칠 뒤, 우리 중대는 야외훈련장으로 각개전투 훈련을 나가게 되었다. 주지스님과 나는 언제나처럼 맨 앞줄에 서서 구보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M1 소총을 '앞에 총' 자세로 들고 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입증하듯 줄곧 사무실에서만 근무했고 30대로 접어든 나의 체력은 금방 바닥났다. 20대 초 중반인 동료 훈련병들은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잘 달렸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뒤로 처졌다. 이윽고 1킬로미터 가량 달렸을 때 이 주지 스님과 나는 대열의 맨 뒤에서 뛰고 있었다. 주지스님은 체력관리를 잘했는지 지친 기색이 없었지만, 나를 부축하기 위해 일부러 뒤처진 것이었다. 내가 M1 소총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 해하자 주지스님은 내 소총을 빼앗아 자신의 어깨에 메었다. 그는 소총 두 자루를 들고 뛰면서도 끄떡없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술에 대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렸다.
그렇게 몇 백 미터쯤 더 달렸을 때 갑자기 또 나는 쥐가 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교관 박 중위가 대열에서 나를 끌어내더니 면도칼로 손톱 밑을 따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쥐가 조금 풀리자 박 중위는 나와 주지스님을 지프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앞으로 절대 야외훈련은 참가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 두 사람은 야외훈련이 있는 날은 열 외로 훈련소 내에서 총기수입이나 식판 닦는 일을 하였다. 처음에는 힘든 야외훈련을 빠지게 돼서 우리들은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말이 총기수입이지 두 사람이 수십 정의 소총을 닦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식판을 닦는 일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곤욕이었다. 엄동설한에 꽁치기름이 덕지덕지 묻어서 잘 닦이지 않는 식판을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로 세척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주지스님은 식판을 닦을 때마다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진 손을 연신 입김으로 녹이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에이 참, 노형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입니까!" "...!" 나는 너무 미안해서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한편으로 주지스님은 심술궂은 데가 많아서 정훈교육 시간만 되면, 그 나쁜 버릇이 나왔다. 그는 정훈교육 시간이면 항상 맨 뒷자리에 앉아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앞에 앉은 훈련병들을 놀려댔다. 조그마한 소리로 "죄다 머리를 빡빡 깎아서 어떤 놈이 중놈인지 모르겠다."는 등의 농담을 해댔다. 그래서 주위에 앉은 훈련병들을 웃겼다. 훈련병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정훈교육 시간마다 항상 그런 식의 농담과 푸념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그의 옆자리에 앉은 나는 교육시간 내내 교관들이 눈치 챌까 봐 가슴을 졸여야 했었다. 이처럼 주지스님은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준 사람이지만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외무부에 복귀하고 한 달 쯤 뒤에 그를 만난 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1977년 7월 18일, 나는 방위병에서 소집 해제되어 외무부 통상2과로 복귀했다. 그 후,
생각난 김에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맺은 인연 하나를 더 소개하겠다. 77년 7월 주지스님이 뜬금없이 사무실로 찾아온 지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허방빈 (주 월남 대사 역임) 선배가 누군가 나를 찾는다며 전화를 바꿔주었다. 수화기를 들자 상대편에서 군대식 반말로 자기를 소개했다.
그렇게 통화를 한 후로 K중사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도 업무에 쫓기다 보니 그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K중사가 다시 전화 연락을 해왔다. 중앙청 근처에 와있으니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다니 피할 수도 없어서 약속장소로 나갔다. "자네 충고 덕분에 동생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이번 달부터 시골 군청에 다니고 있다네. 고맙네." "동생께서 잘됐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축하합니다." 혹시 또다시 취직자리라도 부탁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K중사의 동생이 스스로의 힘으로 공무원이 되었다니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나는 방위병 훈련소에서 4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집 근처에 있는 강남구 청담동 동사무소에 배속되었다. 중앙부서의 4급 서기관이 지방관서 9급 서기보(병사계)의 보조가 된 것이었다. 그 당시 방위 병들은 대부분 동사무소나 국가 기관 등에 배속되어 행정 업무를 보조했기 때문에, 이런 아이러닉 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나는 청담동 동사무소의 병사 계 일을 도우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군부대에 들어가서 점호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군부대에 가서 점호를 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왜냐하면 군부대의 현역병들이 점호를 받으러 온 방위병 들을 갖은 방법으로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막내 동생보다 어린 현역병들에게 괴롭힘을 당해보니 분통이 터져서 군부대 점호에는 각종 핑계를 대며 빠졌다.
사실 나는 엄밀히 따지면 동장이나 사무장보다 높은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동사무소에서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러한 나를 묵인해주었다. 그래서 내가 점호를 받아야 하는 날에는 선임 방위 병들이 대신 군부대로 가서 수고를 해주었다. 그들은 방위병으로는 나보다 선배였지만 나이는 열 살 가량 아래였기 때문에, 군소리 없이 현역병들의 괴롭힘도 인내해 주었다. 결국 이곳 저곳에 신세만 지고 다닌 꼴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사무소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서른 안팎의 젊은 여자 두 사람이 나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어머, 저 사람 혹시
한편으로 내가 동사무소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친구들의 가십거리이기도 하지만, 대학 동창이나 선후배들이 찾아올 것을 생각하니 신분을 감추는 것이 가장 편리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그녀들에게 물었다. "저어, 아주머니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머, 우리 더러 아주머니래.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나? 조금 살이 쪘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끝까지 모른 척했다. 그러자 그녀들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주민등록등본을 발급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친절하게 그녀들이 원하는 서류를 발급해주었다. 이윽고 필요한 서류를 모두 발급받은 그녀들은 "사람을 잘못 봐서 미안하다"며 점심이나 사먹으라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내밀었다. 나는 당연히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수고 비를 사양했다. 만약 그 후배들이 이 기사를 읽게 된다면 40년 가까이 숨겨온 비밀이 들통 나게 되는 것이다.
1977년 6월,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동 사무소 근무를 마치고 짧은 머리를 가발로 가린 채 삼청동 총리 공관을 찾아갔다. 한 달 후면 방위 병에서 소집 해제된다는 것을 신고 겸 알려드리기 위해서였다. 공관으로 들어서니 사모님이 화단의 잡초를 뽑고 있었다. 나는 사모님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화단의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안채에서 "총리님이 퇴근하셨으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인사를 드리자 총리님이 휘둥그런 눈으로 물었다.
"자네, 머리가 왜 그런가? "예? 그게?"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가발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뿔싸! 조금 전에 사모님 대신 화단의 잡초를 뽑느라고 가발이 비뚤어진 모양이었다. 가발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총리가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었다. 나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서서 가발을 반듯이 고쳐 쓰고 응접실로 나오니 총리께서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자네, 이제야 대한민국의 사나이가 되었군. 그런 일로 창피해할 것 없네. 군대에 갔기 때문에 빡빡머리이고, 그래서 가발을 쓰고 온 것을.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미안하네." "...?" "정부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공장에서 품질 좋은 가발을 만들도록 정부 차원에서 지원도 하고 지도도 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자네는 이제 대한민국의 떳떳하고 모범적인 국민이 된 거야!"
최규하 총리는 이처럼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당신이 주인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일 처리를 하려고 애썼다. 그 후로 나는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면 이날의 일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곤 하였다. 예비군복과 방위 복이 똑같아서 방위병 시절의 에피소드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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