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도 없는 원혼들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 ||||||||||||||||||||||||
김해지역 민간인 학살 실태 발표회 및 위령제 거행 3·1동지회 김해지부 · 김해지역사연구소 · 부경유족회 공동주최 | ||||||||||||||||||||||||
| ||||||||||||||||||||||||
천병덕 기자 ghn@ighn.co.kr | ||||||||||||||||||||||||
| ||||||||||||||||||||||||
23일 오전 10시 인제대학교 A동 101호 강당에서 (사)3·1동지회 김해지부·김해지역사연구소·부경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공동주최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보도연맹) 실태 발표회’가 열렸다. 이날 이광희 (사)3·1동지회 김해지부장(교육위원)을 비롯해 김상원 부지부장, 김광호 전국희생자 유족회집행위원장,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시민사회부장, 김근태 민노당 김해시위원장, 민노총관계자, (사)평화의 친구들 관계자, 관내 사회단체 대표 및 회원,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진행됐다. 이광희 지부장은 개회사에서 “김해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은지 10년만인 1960년에 처음 위령제를 개최한후 45년이 지난 지금, 그 동안의 공백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면서 “우리 김해지역에서의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난 억울하고 부당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할 역사적인 과제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제1부 학살실태 발표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운동방향이라는 주제로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시민사회부장의 ‘김해지역 민간인 학살실태’ 발표가 있었다. 우리민족사에 있어 또하나의 비극으로 점철돼 있는 보도연맹 사건은 전국에 걸쳐 무고한 양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된 가운데 우리지역에서도 1950년 7월말부터 8월초 진영을 비롯한 창원동면, 대산면 일대의 양민 2천여명을 생림 나밭고개(생림면 나전리), 대동면 주동골짜기, 한림면 독점골짜기, 진례면 냉정고개, 동면 덕산고개 등지에서 무참히 학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양민은 김해와 창원군 일부지역 750명, 진영 335명(251명?), 대동면 400명 등이 보도연맹원 학살피해자로 집계됐으나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내에서는 거제 878명, 진주시 명석면 718명, 진양군 금산면 100명, 사천 100명,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 200명, 울산 869명, 창녕 200명, 삼랑진 200명, 통영 915명, 양산 350명, 밀양 300명, 남해 162명, 하동 150명(매티재), 함안 200명, 고성 100명 등 우리 김해지역을 포함해 약 8천93명이 학살피해자로 집계됐으나, 체계적인 조사와 신고가 이뤄지게 되면 이보다 훨씬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잠정, 추정했다.
이날 헌작례는 이복희 김해문협 사무국장의 헌시낭독속에 초헌관에 이 지부장이, 아헌관은 부경유족대표, 종헌관은 김해지역유족대표가 각각 맡아 진행했다. 유족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들의 혼을 달래는 길은 정확한 사실규명을 통한 명예를 회복해 주는 길이다”고 말했다. 원불교, 천주교, 불교, 개신교 등 각 종교단체에서 참석한 대표들은 5분간에 걸쳐 종교별 위령의식을 가지며 원혼들의 혼을 달랬다. 보도연맹원 조직 및 학살 과정에서 지휘라인에 있던 경남도와 김해단위의 군·경인사들 △경남경찰국장 최철용(崔喆龍. 경무관):1949년 6월 13일~1950년 4월 26일, 이동철(李東哲. 경무관):1950년 4월 27일~1950년 7월 26일, 최 천(崔 天. 경무관):1950년 7월 27일~1950년 11월 2일 또 이들의 지휘에 따라 당시 김해에서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고 학살에 관여한 경찰과 우익단체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김해경찰서장 조삼제(趙三濟. 경감):1949년 2월 22일~1949년 8월 24일, 박영근(朴英根. 경감):1949년 8월 25일~1950년 12월 17일
한얼중 설립자 강성갑 목사와 진영여중 김영명 교사의 학살
당시 민간인학살 사건 가운데 드물게도 학살책임자 중 한 명이 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받은 일이 있다. 바로 진영 강성갑 목사의 책임을 물어 김병희 진영지서장이 총살됐던 것이다. 하지만 진영학살사건의 진짜 책임자는 해군과 육군의 특무대(CIC)였다. 전국의 예비검속이나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직접 지휘한 것도 CIC였음이 드러나고 있지만, 하수인이나마 학살책임을 지고 사형집행이 이뤄진 점은 특이한 일이다. 그 이유는 ‘목사’라는 성직자가 희생됐기 때문이다. 한얼중학교 설립자(관련내용 본지 2004년 3월 12일(17호))이기도 한 강성갑 목사가 학살되자 미국 선교단체와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KRA)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언론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고 나서자 이승만 정권은 그제서야 학살관련자들을 구속시키기도 한다. 김병희 지서장과 하계백 부읍장, 의용경찰(청년방위대) 강백수, 강치순 등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김병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풀려나고 말았다. 국회 조사기록에서 당시 여동생을 잃었던 김영봉(당시 진영유족회 고문)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김영봉씨는 여동생 영명(당시 23세. 진영여중 교사)씨를 잃었지만 스스로도 학살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생존자이다. 또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이곳에서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장소는 창원군 동면 덕산고개였다고 한다. 그의 여동생이 학살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진영유족회장이었던 김영욱 선생은 이에 대해 “영명씨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됨됨이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던 교사였다”면서 “지서장 김병희가 그녀의 미모를 탐내 오다가 오빠를 빌미로 잡아가 능욕하려다 학살해버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설창리 국도변 학살자 합동묘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다
김영욱 선생 또한 당시 독립운동가로서 추앙받던 부친을 잃었다. 그의 부친 김정태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던 민족자본가였다고 한다. 당시 청년방위대 간부가 이사하는데 필요하다면서 자동차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이를 거절한데 대한 앙갚음으로 학살을 당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영에서만 251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김영욱 김영봉씨를 주축으로 한 유족회는 이들의 유골을 모두 발굴, 진영읍 설창리 국도변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5.16쿠데타와 함께 이 합동묘는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헌병들이 들이닥쳐 묘를 마구 파헤쳐 버린 것이다. 두 김씨를 비롯한 유족의 간부들은 구속됐다. /다음(77)호에 계속.
국민보도연맹이란
해방후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미국의 기본 목표는 한반도 반쪽만이라도 손에 넣어 충실한 대소전진기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남한을 철저한 반공기지로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이승만으로 하여금 폭압이 아니고서는 권력을 만들 수도 유지할 수도 없게 했고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 2.7 구국투쟁, 4.3 제주항쟁 등 민중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다. 국가보안법은 제정 당시부터 귀걸이, 코걸이라는 비판을 받았었고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시행 1년만에 3만명의 구속자를 양산했다. 이는 전체 수감자의 80%에 달하는 것으로 전국의 형무소가 터져나갈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과 이승만은 국민을 다스릴 새로운 형식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국민보도연맹이다.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 약칭으로 보도연맹 또는 보련이라고도 한다. 보도라고 쓰기도 하지만, 뜻은 서로 비슷하다. 보도연맹은 한마디로 좌익 핵심세력은 제거하고 추종자는 포섭한다는 전향 공작의 조직적 결과물이며 국가보안법과 함께 대국민 사상통제를 위한 도구였다. 다시 말하면 보도연맹은 기본적으로 과거 좌익활동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 전향한 사람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 통제, 관리하기 위한 조직이었으며 이를 통해 대국민, 대좌익 사상 공세를 위한 조직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은 법적근거를 갖고 있는 조직은 아니다. 당시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리던 오제도가 제안하고 내무장관, 법무장관, 국방장관 등 사회지도자들이 인정한 것 뿐이다. 국가보안법이 일제의 치안유지법에서 나왔다면 보도연맹도 역시 일제의 사상보국연맹의 재탕인 셈이다. 식민지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또다시 우리민족을 절망의 길로 몰고 간 것이다.
보도연맹 사업과 조직도
보도연맹은 기본적으로는 전향자들을 관리하는 조직이었지만 거기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반공교육, 선전, 시위 등의 활동과 좌익 색출에도 동원됐다. 보도연맹의 기본조직에 문화실이라는 것이 있는데 보도연맹의 기본적인 사업(시위, 강연, 연극, 출판 등)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보도연맹의 주요한 활동 중 하나가 좌익색출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전향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달라는 요구를 계속 받게 되는데 이른바 자백서(양심서)를 통해 당시 같이 활동했던 동료의 이름을 밝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고문과 협박이 계속된다. 이렇게 해서 체포된 남로당원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다음은 이광희 지부장과의 인터뷰 내용.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지역부터 과거사를 올바로 규명해야” ■ 이번 행사를 개최하게된 동기는 ■ 작년의 위령제때에 비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 어려웠던 점이나 보람있는 점은 ■ 앞으로의 계획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