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55) 바꾸지 말아야할 것들 역대하 11:13-17
르호보암이 악수를 둘 뻔 했습니다.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군사적인 행동을 일으키려 했던, 그래서 실제로 군대 18만을 모았던 르호보암인데, 다행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스마야를 통해 허락하신 말씀, “이 모든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다.” 인간의 결정, 내 이익을 위해 백성으로서의 도리는 물론, 언약마저 버리는 여로보암과, 인간의 결정, 내 욕망을 위해 왕으로서의 도리는 물론, 충언마저 버렸던 르호보암이 만들어낸 일이었는데, 오늘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시지요. 물론,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경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마저 싸워 망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개입해주셨고, 이 싸움을 멈춰주셨습니다. 욕심껏 나아가는 길, 고집스럽게 나아가는 길, 그때에라도 지금껏 외치고 계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고, 그 음성이 들리면, 곧 멈출 수 있는 속히 듣고 분노를 그칠 수 있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최우선을 넘어 유일한 기준이 되고 법도와 율례가 되는 우리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자, 이런 순종이었습니다. 가까스로 감당한 순종이었습니다. 어쩌면 겁도나고 무서웠을텐데, 하나님께서 멈춰주셔서 감사할 따름인 순종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해주셨다고요? 오늘본문 17절이 기록하지요? 3년동안 르호보암의 유다나라가 강성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나누신 저 열 지파의 지도자, 여로보암이 했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했는지,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는지,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이 일이 결국,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했던 것이지요? 15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대하11:15)
잘 아시는 대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왕권 확립을 위한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정치군사적인 일로서, 세겜을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지정했습니다. 또한 부느엘(브니엘)에 요새를 건축합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정책적 일로서, 숫염소 우상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갓 왕이 된 여로보암의 마음에는 치명적인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지지했던 열 지파 사람도 매년 3대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곤 하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정통 왕조인 유다 왕 르호보함에게 돌아가고 자신을 제거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열 지파를 예루살렘에 못 올라가게 하려고, 자기에게 묶어두려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의 모든 원리를 자기 임의대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여로보암이 바꾸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가 절대로 바꾸지 말아야할 것들입니다. 오늘 그것을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배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우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 20:3-7). 그러나 여로보암은 1,2,3계명 모두를 범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2장 28절을 보니, 두 금송아지를 ‘이스라엘아,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아론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라고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아론이 오랜 애굽 생활에서 금송아지 우상 숭배에 익숙해 진 것처럼, 여로보암도 애굽 망명 생활 동안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배운 것 같습니다(11:40). 금송아지를 다름 아닌 ‘출애굽의 구원을 주신 여호와’라고 소개함으로써 정통 여호와 신앙을 계승하는 척 했지만,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였습니다. 아론과 우상숭배자들에게 쏟으신 심판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출 32:27,28).
둘째, 예배 장소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때부터 예루살렘 중앙성소에서만 예배드리라고 미리 명령하셨고(신 12:4-14), 성전 봉헌식 때 구름 속에 여호와의 영광을 보이사 예루살렘 성전을 유일 성소로 인준하셨음을 보이셨습니다(7:10,11). 그러나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너희가 다시는 힘들게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종교적 편의를 봐주는 척하면서, 금 송아지 두 개를 각각 ‘벧엘’과 ‘단’에 두었습니다. 두 장소를 예배 중심지로 선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두 장소의 역사적 의미와 지리적 요건 때문입니다.
‘벧엘’은 족장시대에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여호와께 단을 쌓은 곳이며(창 12:8; 28:11-19), 사사 시대에는 언약궤를 둔 곳이고(삿 20:26), 사무엘이 해마다 순회했던 영적 중심지입니다(삼상 7:16). 지리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인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이고(삿 4:5; 대상 7:28). 북이스라엘의 거의 남단에 위치하여 예루살렘에게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밖에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절기를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가는 북쪽 순례객들이 꼭 경유해야 할 곳이므로, 여로보암은 그곳에 금송아지를 길을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훗날 선지자들은 벧엘(하나님의 집)을 벧아웬(우상의 집, 허무의 집)이라고 개칭하여 정죄합니다(호 4:15,5:8,10:5).
‘단’은 본래는 ‘레센, 라이스’였지만, 사사 시대 때 단 지파들이 라이스 사람들을 진멸하고 차지하고는 ‘단’이라고 명했습니다(삿 18:27-29). 그들은 불법적으로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제사장 삼고, 미가에게 훔친 은으로 만든 신상을 그곳에서 오래도록 섬겨왔습니다(삿 18:30,31). 단은 북이스라엘 최북단에 있어서, 북쪽 지역의 지파들에게는 비교적 접근이 쉬웠던 것입니다. 어디 거기까지, 저 멀리까지 가냐, 여기서 드려, 편의를 봐주는 것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북이스라엘이 죽는, 여로보암이 저지른 거대한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셋째, 예배 수종자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 자손들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만을 제사장으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28:1-4;신 18:1-8). 그러나 여로보암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폐하고 일반 백성 중 자원하는 모든 자들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너희가 아론 자손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들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대하13:9)
왕이 하나님께서 세운 아론계열, 사독계열 제사장을 해고하고 아무나 세운 것입니다. 만인 제사장이라고는 하지만, 이 일은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행했던 일인 것이지요. 제사장직을 소한마리 양일곱마리를 받고 팔았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보아도 고개가 저엊는 예배요, 인상이 찌뿌려지는 예배, 진정으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예배, 자기 만족과 욕심을 위한 예배, 결국 하나님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드려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오늘날 비인가 신학교에서 마구 마구 속성완성 목사님들을 배출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만 거룩하냐고 제사장직을 요구했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적했다가 향로불에 죽은 250명의 이스라엘 지도자들도 생각납니다.
여러분, 아무리 여로보암이 제사장을 일반인 중에서 자원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뽑는다고 말한들, 저들은 어쩜 그래 겁도없이 제사장이 되겠다고 하고 또 되었던 것일까요? 왜 그렇게 자원해서 제사장을 하고 싶어했을까요? 그들이 가졌던 그 무엇이 부러웠던 것일까요? 저 대대로 구별되어 섬겨온 레위인들보다 자신들이 더 성경대로 제사장직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성경에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 그런데도 저 겁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 걱정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식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서 해야 되는데, 왜 저들은 저리 편법을 써가며,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공의와 심판의 주님이심을 믿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외치는 이들인 것입니다.
나는 바른 목회자인가?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인가? 내가 전하는 설교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인가 내 삶은 존귀한 성도님들에게 그래도 하나라도 더 본이 되는 모습이 있는가? 목사는 늘 이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질문을 던질수록 부끄럽고 제 자신을 마주할 수록 죄스럽기만 하니 질문을 멈추고 살았던 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늘 하나님께 성도님들께 죄송스러운 종인 것입니다.
늘 떨고 있는 지도자, 나침반처럼 정북을 맞추기 위해 늘 떨고 있는 지도자, 바람에 밀려도 결국 자리를 찾고, 저 나비처럼 정확하게 꽃가루만 물어 옮겨, 열매맺게 하는 목회자, 여러분, 그런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먼저는 저를 위해서 그리고 한국교회 모든 목회자들을 위해서 늘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넷째, 예배 시간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초막절을 7월 15일에 지키라고 하셨습니다(레 23:33-44, 민 29:12).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 절기를 8월 15일로 임의 변경했고, 불법적 산당 제사장들은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로보암은 벧엘 제단에서 직접 분향하기도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은 철저히 불신앙의 산물입니다. 여로보암이 ‘다윗처럼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면 다윗에게처럼 견고한 왕조를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신뢰했다면(11:38), 정치적 불안감도 없었고 거짓 예배들을 고안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열 지파 백성들의 공범죄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여로보암이 악한 길로 인도할지라도, 여호와 신앙을 굳게 견지했다면 다른 방식으로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지도자만 탓할 수 없습니다. 각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신실하게 순종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일이 일어나게 되었고, 기록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몇몇 사람들의 행보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마치 압살롬을 따르지 않고 다윗을 향해 나아왔던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 소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4-16절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대하11:14-16)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북이스라엘 경내에 파송되어 있던, 제사장들, 레위인들이 다 해임을 당했던 것인데, 그때 뭐라고요? 마음을 굳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 분노하고 힘들고 마음이 맞지 않아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는 돌아와야 해요? 저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바른 하나님이 아닐 때, 저들이 드리는 예배의 장소가 하나님 정해주신 것이 아닐 때, 제사를 섬기는 사람이 정식 제사장이 아닐 때, 저들이 지키려는 절기가 엉터리 절기일 때, 우리는 과감히 저들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금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들의 걸음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험악한 시대, 함께 공멸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복된 이들인 까닭입니다. 이들이 있는 자리가 강성해지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들이 도대체 어떤 이들이었길래요? 다음 수요일에 ‘버림’과 ‘행함’이라는 키워드로 한번 말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분명히 반드시 꼭 언제 어디서고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믿음은 순종을 낳지만, 불신앙은 불순종을 낳습니다. 순종은 평안을 주지만, 불순종은 파멸을 줍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만 신뢰하며 순종하면, 박해와 환난은 있을지라도 궁극적인 영육의 평안을 결코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지켜야 할 것들을 잘 기억하시고, 편리함을 이유로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존귀한 생명의 길에서 떨어지지 마시고, 늘 모든 순간 참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더욱 존귀하게 쓰임받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