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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봉스님 (1874~1956)
“천지의 화융함 비로소 깨닫네”
▶사진설명: 평생 선교일치의 수행정진을 보여준 혜봉스님 모습.
지난 2월 28일 입적에 든 관응(觀應, 1910~2004)스님은 우리시대의 대강백이다. 선교(禪敎)를 겸하고 많은
후학을 양성한 관응스님은 교단의 튼튼한 기초를 놓았다. 교육이 백년대계임을 상기할 때 스님은 한국불교 발전을 이룬 초석(礎石)이 되고도
남는다.
이 관응스님 행장에 맨 먼저 등장하는 큰스님 한분이 있다. 1929년 상주 남장사에서 관응스님에게 계를 설한 혜봉(慧峯,
1874~1956)스님이다. 혜봉은 법호이고, 법명은 보명(普明) 또는 용하(龍下)라고 했다.
혜봉스님은 유학(儒學)을 비롯한
외전(外典)은 물론 불교 경전 등 내전(內典)에도 눈 밝은 스님이었다. 또 평생 화두참구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몸소 익히고 배우는 등 정진을
소홀히 않는 등 수행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분이다.
스님은 1874년(고종 11년) 3월 23일 충북 충주에서 부친 이규직(李奎職)
선생과 모친 광산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세상과 인연을 맺었다. 세속에서의 이름은 종국(鍾國). 한학에 남다른 조예를 지니고 있던 부친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해 선비적 몸가짐을 배웠다.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성장한 혜봉스님이 출가 이후에도 엄격한 생활과 학문에 전념하는 모습을 잃지 않은
것도 이 같은 환경적 요인이 있었다.
‘선비’의 자세를 유지했던 스님은 평범한 ‘조선의 젊은이’들처럼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며
과거에 응시했다. 평소 갈고 닦은 학문으로 어렵지 않게 합격해 관직에 나섰다. 이때가 1891년 〈고종 28년〉선비적 몸가짐을 배웠다. 17세의
청년이었다.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관직에 나섰으나, 당시 조선은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횡포 앞에 놓여 있었다.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상황은 ‘청년 종국’을 고민에 빠지게 했다.
한학능통…17세 과거
합격 30세 출가…관응스님 계사
밤을 낮 삼아 고민의 시간을 보내던 스님은 결국 출가 사문의 길에 들어선다.
이때가 1904년이니, 지금부터 100년 전 일이다. 스님의 세속나이는 30세. 1904년 상주 남장사에서 영봉(靈峯)스님을 은사로 부처님
제자가 된다. 영봉스님은 후학들의 존경을 받던 당대 선지식이었다. 영봉스님을 시봉하면서 불철주야 정진한 혜봉스님은 그 뒤로 제방의 강당과 선원을
돌며 선교(禪敎)의 종지를 배우고 익혔다.
세속에서부터 시작된 학문의 깊이는 출가이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한시(漢詩)에 담는데 능통했다. 봄 문턱에 있는 요즘 어울리는 시 한수를 살펴본다. “雪消爲雨氷爲水/ 始覺乾坤氣和融/
自此群生皆有活/ 岩前細柳動微風”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눈 녹아 비가 되고 얼음이 물이 되니 / 천지의 기운이 화융함을 비로소 깨닫겠네 /
이제부터 모든 생명 모두 활기를 되찾으리니 / 바위 앞 가는 버들 미풍에 하늘대네.”(연관스님의 풀이).
“아니오,
틀렸소. 그것도 아니오”
▶사진설명: 혜봉스님의 일지. 평생 흐트러짐 없이 정진한 스님의 향기가
묻어있다. 용하(用下)는 스님의 법명이다.
1930년대 어느 날.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있던 시절이다. “뿌우~~
칙칙 폭폭” 증기기관차가 힘차게 바퀴를 굴리면서 서울역을 빠져 나갔다. 기차에는 혜봉(慧峯, 1874~1956)스님이 타고 있었다. 옆에는
동경제대 교수인 일본인이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의 풍광이 아름다웠지만, 나라 잃은 심정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본인 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무엇하는 분이시오” 일본인과 대화조차 하기 싫었던 것이 스님의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재차 묻는 질문에 답을 주었다. “나는 스님이오.” “어떤 일을 하십니까” “참선도 하고 포교도 하오” “참선은 잘 모르겠고,
포교하는 목적은 무엇이요”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병이 든 사람에게는 약을 주는 것이 포교요”
이 정도면 말을 멈추기도
하련만, 교수의 질문은 계속된다. 불교공부를 했는지 질문의 강도를 높인다. “그러면 배고프지도 병들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나요” “약을
쓰는 것은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부처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군자(君子)를 위해서가 아니요.(用藥不爲健人,
演法不爲君子)”
이어 스님은 교수에게 일갈(一喝)을 한다. “그대 같은 자를 위해서는 이렇게 말하노라. 석양이 서산에 걸리니
양떼들이 들로 내려간다.(夕陽在山, 群羊下野)” 흠칫 놀란 일본인은 애써 웃음을 보였다. “무엇을 알았기에 웃는가. 내 말한 뜻을 알겠거든
한마디(一句)를 말해보라”고 스님이 되물었다. 상대는 “맑은 바람 부는 강 위에, 흰 갈매기가 한가롭게 납니다.(淸風江上, 白鷗閒飛)”라
답했다.
일제시대 동경제대 日人 교수 법거량 후 감화…가르침 청해
스님은 곧바로
단호하게 답한다. “아니오, 틀렸소” 대화 도중 창밖으로 보이는 전선 위에 앉아있던 제비가 기적소리에 놀라 날아가는 것을 보고 교수가 한마디
더한다. “기적소리에 전선 위에 앉았던 제비가 홀연히 날아갑니다.(汽笛一聲, 線燕忽飛)” 스님의 답은 분명했다. “그것도 아니오” 일본인 표정이
심각해졌다. 명색이 동경제대 교수의 대답을 아니라고 하니 부끄러웠던 것이다.
말문을 열지 못하고 계속 생각에 몰두해있던 일본인에게
스님이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대가 내가 물은 것처럼 다시 한번 나에게 물어 보시오” 뜻을 몰라 고민하던 교수가 입을 열었다. “석양이
서산에 걸리니 양떼들이 들로 내려간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스님이 답한다. “맑은 바람 부는 강 위에 흰 갈매기가
한가롭게 납니다.” 또 다시 침묵.
어느덧 대구역에 도착할 때가 되었다. 스님과 교수는 함께 내렸다. 스님이 말 없이 손으로 교수의
등을 쳤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스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흙덩이를 던지면 사자는 사람을 물지만, 개는 흙덩이를
쫓느니라”
혜봉스님의 법력(法力)에 감화 받은 일본인 교수는 그 뒤에 혜봉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선산 도리사를 찾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상좌에 “참 좋은 스승 만났소”
혜봉(慧峯,
1874~1956)스님은 한학(漢學)에 밝았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영향으로 한학의 기초를 닦았고,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학문을 연마했기 때문이다.
또 조선말기 관직에 나선 뒤에도 한학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출가 후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친필 일기에도 밝은 한학 세계를
보여주는 명문장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혜봉스님 일기는 56세 때인 1930년 정월 초하루부터 쓰여지고 있어 한층 깊어진 스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상주 남장사에 머물던 1930년(경오년) 입춘을 맞은 스님의 일기 내용이다. 이날 스님은 “오전
5시에 불전에 예불을 드리고, 6시에 마지를 올리고, 7시에 차를 울겨 마신다”면서 “한가로이 앉아 있는데, 문득 누가 와서 입춘임을 알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날 지은 스님의 한시이다. “休說空門始到春, 誤却年來多少人, 吾家自有無根樹, 葉葉枝枝日日新” 연관스님(전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이 옮긴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공문(空門)에 마침내 봄이 왔다 말하지 말라, 해마다 수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하였네, 우리 집엔 본디
뿌리 없는 나무가 있어, 잎새마다 가지마다 날로 푸르르네.”
교학과 함께 참선정진도 치열했던 스님의 수행세계가
엿보인다.
높은 학식과 덕행 우러나 깔보던 유생들도 “선생님”
이에 앞서 스님은
1911년 선산 도리사 주지로 취임했다. 한학에 능통했던 스님은 지역 유생(儒生)들과 교류가 잦았다. 처음에는 유생들로부터 “머리 깎은이가 뭘
안다고 그래”라면서 홀대 받았지만 스님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스님의 학식이 높은 것을 알고는 도리사에 찾아와 시문답을 나누곤 했다. 초면에는
하대하던 유생들도 나중에는 “혜봉 선생 시 한수 하시죠”라며 존대어를 사용했다. 당시 가장 높은 호칭은 ‘선생(先生)’이었다. 1900년대만
하더라도 사회적 위상이 높지 않았던 시절임을 고려할 때 파격적인 호칭이다. 더구나 자존심 높은 유생들의 입에서 스님에게 선생이란 호칭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혜봉스님의 학식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어느날, 혜봉스님의 상좌가 선산 도리사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혜봉스님이 소임을 놓은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혜봉스님의 제자가 왔다는 소식에
유생들이 절까지 찾아와 “그대가 혜봉 선생의 제자요. 참 좋은 스승을 만났소”라면서 혜봉스님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스님은 상주
북장사와 남장사 사적기를 비롯해 용흥사 시왕전 중수기와 청룡사 극락전 창건기, 문수사 사자암 상량문 등 11편의 ‘기(記)’를 남겼다. ‘기’는
한문 문체(文體)의 한 가지로 사적(事蹟)이나 풍경(風景) 따위를 적은 서사적(敍事的)인 문체를 말한다.
“수좌의
중생제도는 본원의무”
▶사진설명: 혜봉스님이 오랫동안 머물며 정진했던 선산 도리사.
교학에 밝았던 혜봉(慧峯, 1874~1956)스님은 화두참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여 수행의
깊이를 심화하고,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던 혜봉스님은 간화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스님이 직접 작성한 ‘김용사 본말사 선원에 관한
의안(議案)’을 살펴보면 간화선에 대한 명쾌한 신념이 담겨있다.
혜봉스님은 이 글에서 “선과 교는 언제나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금과
금색과 같은 것”이라면서 “더욱 심전(心田)을 개발하고 정진을 부흥해야 한다는 경종이 산과 들에 울려 퍼진다”며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무를 짊어진 우리 법려(法侶)로서 교화선두에 어찌 주저하겠습니까. 한 걸음을 내디디어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자 한다면 선과 교가 병행되어야만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선방 입방 자격에 대해서도 ‘교학(敎學)을 이수한 경우’로 제한한
것도 선교를 겸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총림의 본규(本規)에 따라 교과를 필수한 자로 할 것이나, 다만 무상이 신속함을 절실히 깨달은
용맹정진자나 구참납자는 이에 구애되지 않는다.” 나아가 “선방이 수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혁신적인 주장’도 폈다. “선원은 본래
본분납자만을 위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신훈학자를 위해서”라면서 매달 두 차례 정식법회를 열어 학자들도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30년대 본말사 선원의안 작성 선교병행.선원운영 등 밝혀
‘선원의
제도’라는 항목에서 스님은 “선원은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전심으로 도를 닦는 곳이므로 독립제(獨立制)와 같이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자비와 신심, 절약과 근검 등 모든 것이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결과 자연히 몸과 마음이 안락하고 도량이 청숙하고 뜻이
화합하며…불미스런 점이 없는 한 무슨 이든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수행자는 타인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품위’에 대해서도
각별한 당부를 했다. “수행자는 몸가짐이 수정과 같아서, 털끝만치의 허물이 있어도 그 잘못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면서 “여래를 위하고 중생을
위하여, 안으로는 부지런히 삼학(三學)을 닦고, 밖으로는 이리(二利)를 겸행하여 단엄하고 자순(慈順)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이로 하여금
교만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고 공경하는 뜻을 표하도록 모범적인 위엄과 신망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온전히 익힌 수행자는
당연히 포교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스님 생각이다. “정안(正眼)과 정력(定力)을 증득한 스님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므로 본원(本願)의
의무로써 당연히 중생을 제도하는 길에 나아가야 합니다. 본말사의 공비로 교육을 받고 삼하의 선정을 전수한 자는 반드시 포교의 의무를 실행하되,
만약 대중이 뽑았거나 초청이 아닌 경우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으며, 자발적인 신심과 원력으로 행할 때에도 종무소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1930년대 중반 스님이 손수 작성한 ‘김용사 본말사 선원에 관한 의안’은 이밖에도 △안거의 제한 △수용방법 △전수의 방편 △말사의
선원 등 선원운영과 관련된 입장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7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유효한
제안이다.
‘선교일치’수행 영원한 귀감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초석 열반 드는 순간까지
가르침
▶사진설명: 혜봉스님의 문집 가운데 일부. 유려한 한문 필체 사이로
한글이 돋보인다.
혜봉(慧峯, 1874~1956)스님은 새벽같이 일어나 불전에 예를 올린 후 화두를 들었다. 교학에
밝았던 스님은 참선 수행도 중요하게 여겼다. 한 치의 빈틈없는 수행정진은 후학들의 귀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스님의 명성이 제방선원에 널리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 ‘왜색불교의 먹구름’이 끼었을 때 혜봉스님의 정진은 한국불교의 튼튼한 초석(礎石)이 되었다.
스님은
1910년 양산 통도사 보광선원에서 도반들과 함께 용맹정진한 것을 비롯해 주요 선원에서 정진했다. 한번 앉으면 좀처럼 일어설 줄 몰랐다.
화두삼매에 빠지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추대된 것도 스님의 수행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37년에는 남장사
관음선원 조실로 추대돼 열반에 들 때까지 20여 년간 납자들을 지도했다.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수행자상을 몸소 보여준 스님은
포교일선에도 나섰다. “출가수행자면 당연히 포교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었다. 선산 도리사 주지소임을 보고 있을 무렵 대구 동화사 포교당
포교사를 맡아 중생제도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의성 고운사 포교당 포교사와 서울 각황사 중앙포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불법(佛法)의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전념했다.
혜봉스님은 1956년 5월 26일 남장사 관음선원에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 81세. 법납
50세. 원적에 드는 날 상좌인 고봉(古峯)스님이 인사를 왔다. “스님, 경욱(慶昱)이 왔습니다.” 경욱은 고봉스님의 법명이다. 혜봉스님은
상좌의 법호를 주로 불렀다. 눈을 감고 있던 혜봉스님이 눈을 뜨고 상좌를 바라보았다. 법체는 쇠약해졌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그래, 너 왔구나”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앉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은사 얼굴에 맺힌 땀을 씻어주기 위해
고봉스님은 수건을 들었다. 혜봉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짝였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혜봉스님과 고봉스님은 굳이 말로써
문답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은사와 상좌 사이의 따뜻한 마음과 치열한 구도행은 통했다.
고봉스님을 비롯해 일봉(一峯), 고암(古庵),
의암(義庵)스님이 은제자이며 뇌허 김동화 박사와 범우(梵宇)스님이 법제자이다. 해외포교의 초석을 놓은 숭산(崇山)스님은 혜봉스님의
손상좌이다.
구한말 유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조선 선비’의 삶을 살았던 혜봉스님. 망국의 설움을 안고 홀연 출가하여 구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늘 마음 한쪽에 ‘잃어버린 조선’의 광복을 발원하면서 평생 선교일치의 수행자로 빈틈없던 어른이다. 혜봉스님이 사바세계 인연을 놓은 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스님의 가르침은 후학들의 영원한 사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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