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 윤오영 | 부끄러움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가 몸매며 옷매무새는 열 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넌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넌방은 조용하고 깨끗하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지금 막 건넌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박이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고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 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 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 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홀낏 홈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빰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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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소’- 윤오영(尹五榮) | 염 소
어린 염소 세 마리가 달달거리며 보도 위로 주인을 따라간다.
염소는 다리가 짧다. 주인이 느릿느릿 놀 양으로 쇠걸음을 걸으면 염소는 종종걸음으로 빨리 따라가야 한다. 두 마리는 긴 줄로 목을 매어 주인의 뒷짐진 손에 쥐여 가고 한 마리는 목도 안매고 따로 떨어져 있건만 서로 떨어질세라 열심히 따라간다. 마치 어린애들이 엄마를 놓칠까봐, 혹은 길을 잃을까봐 부지런히 따라가듯.
석양은 보도 위에 반쯤 음영을 던져 있고, 달달거리고 따라가는 염소의 어린 모습은 슬펐다.
주인은 기저귀처럼 차복차복 갠 염소 껍질 네 개를 묶어서 메고 간다. 아침에 일곱 마리가 따라왔을 것이다. 그 중 네 마리는 팔리고, 지금 세 마리가 남아서, 팔릴 곳을 찾아 다니고 있는 것이다. 팔리게 되면, 소금 한 줌을 물고 캑캑 소리 한 마디에, 가죽을 벗기고 솥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저 주인의 어깨 위에는 가죽 기저귀가 또 한 장 늘 것이다. 그러나 염소는 눈앞의 운명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방 소파의 어린이 예찬에는 ‘어린이는 천사외다. 시퍼런 칼날을 들고 찌르려 해도 찔리는 그 순간까지는 벙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성스럽습니까, 그는 천사외다.’했다. 그렇다면 나도 ‘염소는 천사외다.’ 할 것이다.
주인의 뒤를 따라 석양에 보도 위를 걸어 가는 어린 염소의 검은 모습은 슬프다. 짧은 다리에 뒤뚝거리는, 굽이 높아 전족(纏足)한 청녀(淸女)의 쫓기는 종종걸음 이다. 조그만 몸집이 달달거려 추위 타는 어린애모습이다. 이상스럽게도 위로 들린 짧은 꼬리 밑에 감추지 못한 연하고 검푸른 항문이 가엾다. 수염이라기에는 너무나 앙징한 턱밑의 귀여운 수염, 그리고 게다가 이따금씩 어린애 목소리로 우는 그 울음, 조물주는 동물을 점지할 때, 이런 슬픈 유형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페이터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무한한 물상 가운데 네가 향수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여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의 직녀, 클로우도우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이 너를 실 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 했다. 이 염소는 충실한 페이터의 사도다. 그리고 그는 또 “네 생명이 속절없고, 너의 직무, 너의 경영이 허무하다 할지라도, 적어도 치열한 불길이 열과 빛으로 변화시키듯 하잘 것 없는 속사나마 그것을 네 본성에 맞도록 동화시키기까지는 머물러 있으라.” 했다. 염소가 그 주인의 뒤를 총총히 따르듯, 그리고 주인이 저를 흥정하고 있는 동안은 주인 옆에 온순하게 충실이 기다리고 서 있듯. 그리고 길 가에 버려 있는 무청 시래기 옆에 세워두면 다투어 푸른 잎을 뜯어 먹듯. 그리고 다시 끌고 가면 먹던 것을 놓고 층 총히 따라가듯.
이 세 마리의 어린 염 소는 오늘 저녁에 다같이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나오게 될 것인가, 흑은 그 중의 한 마리는 가다가 팔려서 껍질을 벗겨 솥 속으로 들어가고, 두 마리만이 가게 될 것인가, 또는 어느 것이 팔리고, 어느 것이 남아서 외롭게 황혼의 거리를 타달거리고 갈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염소 자신도, 끌고 가는 주인도, 아무도 모른다. 염소를 끌고 팔러 다니는 저 주인은 또 지금 자기가 걸어가는 그 길을 알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염소가 지나간 그 보도 위로 걸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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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윤오영(尹五榮) | 달 밤
내가 잠시 낙향(落鄕)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윗마을 김 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어느 날 밤, 김 군을 못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 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 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 됐소, 농주(農酒)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죽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 본 적은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
하고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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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고 자’- 윤오영(尹五榮) | 마고자
나는 마고자를 입을 때마다 한국 여성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한다. 남자의 의복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가 마고자다.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같은 다른 옷보다 더 값진 천을 사용한다. 또, 남자옷에 패물이라면 마고자의 단추다.
마고자는 방한용이 아니요 모양새다. 방한용이라면 덧저고리가 있고 잘덧저고리도 있다. 화려하고 찬란한 무늬가 있는 비단 마고자나 솜둔 것은 촌스럽고 청초한 겹마고자가 원격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노인네가 겨울에 소탈하게 방한삼아 입으려면 그 대신에 약식인 반배를 입었던 것이다.
마고자는 섶이 알맞게 여며져야 하고, 섶귀가 날렵하고 예뻐야 한다. 섶이 조금만 벌어지거나 조금만 더 여며져도 표가 나고, 섶귀가 조금만 무디어도 청초한 맛이 사라진다. 깃은 직선에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둥글어도안 되며, 조금 더 파도 못쓰고, 조금 덜 파도 못쓴다. 안이 속으로 짝 붙으며 앞뒤가 상그럽게 돌아가야 하니, 깃 하나만 보아도 마고자는 솜씨를 몹시 타는 까다로운 옷이다.
마고자는 원래 중국의 마괘자에서 왔다 한다. 귀한 사람은 호사스러운 비단 마괘자를 입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청마괘자를 걸치고 다녔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마고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고자는 마괘자와 비슷도 아니 한 딴 물건이다. 한복에는 안성맞춤으로 어울리는 옷이지만, 중국 옷에는 입을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한 옷이다.
그리고 그 마름새나 모양새가 한국 여인의 독특한 안목과 솜씨를 제일 잘 나타내는 옷이다. 그 모양새는 단아하고 아취가 있으며, 그 솜씨는 섬세하고 교묘하다. 우리 여성들은 실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받아 온 안목과 솜씨를 지니고 있던 까닭에, 어느 나라 옷을 들여오든지 그 안목과 그 솜씨로 제게 맞는 제옷을 지어 냈던 것이다. 만일, 우리 여인들에게 이런 전통이 없었던들, 나는 오늘 이 좋은 마고자를 입지 못할 것이다.
문화의 모든 면이 다 이렇다. 전통적인 안목과 전통적인 솜씨가 있으면 남의 문화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든다 할지라도 이를 고쳐서 새로운 제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송자에서 고려의 비취색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남의 문물이 해동에 들어오면 해동 문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탱자가 아니라 진주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의 것이 들어오면 탱자가 될 뿐 아니라, 내 귤까지 탱자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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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망이 깍던 노인’- 윤오영(尹五榮) | 방망이 깍던 노인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가는 길에, 청량리 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 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 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 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 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 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 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배가 너무 부르면 옷감을 다듬다가 치기(한쪽으로 쏠리거나 뭉침)를 잘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 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꼭 맞지 않고 헐거움)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竹器(죽기)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 그러나 요새 竹器는 대쪽이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竹器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 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藥材(약재)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熟地黃(숙지황)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길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九蒸九日暴(구증구포)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 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 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 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 깎다가 우연히 추녀 끝의 구 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採菊東籬不 (채국동리불)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도연명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 자반을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 · 북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 구경한 지도 참 오 래다. 요새는 다듬이질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萬戶衣聲(만호도의성) 」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 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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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잠설(養蠶說)’- 윤오영(尹五榮) | 양잠설(養蠶說)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훤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 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뽗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안,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 이령(一齡二齡) 혹은 한잠 두잠 잤다고 한다. 오령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 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共販場)에 가서 특등, 일등, 이등, 삼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대개 한 때는 문학소년 시절을 거친다. 이때가 가장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淸新)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이때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 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 대로 빛난다. 이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서적에서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떠서 제 각각 제 길을 찾아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沈鬱)한 사색에 잠긴다. 최안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잠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舊殼)을 벗는다. 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 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피에 몸부림친다. 이때를 넘기지 못하고 그 벽을 뚫지 못하고 대결하다 부서진 사람들이 있다. 혹은 그를 요사(夭死)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전에 읽었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제 이령(二齡)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하는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며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타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 자기대로의 세계에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成家)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일등품, 이등품으로 후세에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람의 일생을 육십을 일기(日期)로 한다면 이십대가 일령기요, 삼십대가 이령기요, 사십대가 삼령기요, 오십대가 사령기요, 육십대가 되면 이미 오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짓고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은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만치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면 지어 논 고치[경지]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의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십대∼육십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인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연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는 남의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 있다.
"그 사람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 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학식과 재질이 다 충분한데 그릇이 작아."
사령(四齡)까지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오령기(五齡期)는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 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아."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구렁 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大家)지, 훌륭한 문장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一家)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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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윤오영(尹五榮) | 까 치
까치 소리는 반갑다. 아름답게 굴린다거나 구슬프게 노래한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기교 없이 가볍고 솔직하게 짖는 단 두 음절 '깍 깍'. 첫 '깍'은 높고 둘째 '깍'은 얕게 계속되는 단순하고 간단한 그 음정(音程)이 그저 반갑다. 나는 어려서부터 까치 소리를 좋아했다. 지금도 아침에 문을 나설 때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 날은 기분 좋다.
반포지은(反哺之恩)을 안다고 해서 효조(孝鳥)라 일러 왔지만 나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좋다. 사랑 앞마당 밤나무 위에 까치가 와서 집을 짓더니 그것이 길조(吉兆)라서 그 해에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영전(榮轉)이 되었다던가, 서재(書齋)남창 앞 높은 나뭇가지에 까치가 와서 집을 짓더니 글 재주가 크게 늘어서 문명(文名)을 날렸다던가 하는 옛 이야기도 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까치 소리는 반갑고 기쁘다.
아침 까치가 짖으면 반가운 편지가 온다고 한다. 이 말이 가장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 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반가운 소식의 예고같이 희망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까치뿐이 아니라 까치집을 또 좋아한다. 높은 나무 위에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엉성하게 얽어 논 것이, 나무에 그대로 어울려서 덧붙여 논 것 같지가 않고 나무 삭정이가 그대로 떨어져서 쌓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소쇄(瀟灑)한 맛이 난다. 엉성하게 얽어 논 그 어리가 용하게도 비가 아니 샌다. 오직 달빛과 바람을 받을 뿐이다.
나는 항상 이담에 내 사랑채를 짓는다면 꼭 저 까치집같이 소쇄한 맛이 나도록 짓고 싶었다. 내가 오나자창이나 아자창을 취하지 않고 간소한 용자창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정서에서이다. 제비집같이 아늑한 집이 아니면 까치집같이 소쇄한 집이라야 한다. 제비집은 얌전하고 단아한 가정 부인이 매만져 나가는 살림집이요, 까치집은 쇄락하고 풍류스러운 시인이 거처하는 집이다.
비둘기장은 아무리 색스럽게 꾸며도 장이지 집이 아니다. 다른 새집은 새 보금자리, 새 둥지, 이런 말을 쓰면서 오직 제비집 까치집만이 집이라 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의 집에 대한 관념이나 정서를 알 수가 있다. 한국 건축의 정서를 알려는 건축가들은 한번 생각해 봄 직한 문제인 듯하다. 요새 고층 건물, 특히 아파트 같은 건물들을 보면 아무리 고급으로 지었다 해도 그것은 '사람장'이지 '집'은 아니다.
지금은 아침 여덟 시, 나는 정릉 안 숲 속에 자리잡고 앉아 있다. 오래간만에 까치 소리를 들었다. 나뭇잎들은 아침 햇빛을 받아 유난히 곱게 푸르다. 나뭇잎사이로 파란 하늘이 차갑게 맑다. 그간 비가 많이 왔던 관계로 물소리도 제법 크게 들려 온다. 나는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여길 와 본 적이 있었다. 보건 운동을 하러 온 사람, 약물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붐비어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윽한 숲 속이 한없이 고요하다. 지금이 제일 고요한 시간이다. 까치들이 내 앞에 와서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이른바 까치걸음이다. 귀엽다. 손으로 만져도 가만히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는 데는 아무 관심이나 의구심도 없이 내옆에서 깡충깡충 뛰놀고 있다.
나는 일찍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민화(民畵) 하나를 생각한다. 한 노옹(老翁)이 나무 밑에서 허연 배를 내놓고 낮잠을 자는데, 그 배 위에 까치 한 마리가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신기한 그 상상화에 기쁨을 느꼈다. 민화란 어린아이와 자유화(自由畵)같이 천진하고 기발한 데가 있어서 저런 재미있는 그림도 그려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저 까치들을 보고 그것은 기발(奇拔)한 상상이 아니요,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이지봉(李芝峯)이 정호음(鄭湖陰)의 "산과 물이 바람에 소릴 치며, 강물은 거세게 울먹이는데, 달은 외로이 비쳐 있다." 는 시를 보고 '강물이 거세게 이는데 달이 외롭게' 란 실경(實景)에 맞지 않는다고 폄(貶)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달이 고요히 밝은 밤중에는 물결이 잔잔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김백곡(金栢谷)이 황강역(黃江驛)에서 자다가 여울 소리가 하도 거세기에 문을 열고 보니 달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그 구가 실경을 그린 명구(名句)인 것을 알았다는 시화(詩畵)가 있다. 나도 그 민화가 실경인 것은 모르고 기상(寄想)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 태고연(太古然)한 풍경의 민화 한 폭이 다시금 눈앞에 뚜렷이 떠오른다. 나무 밑에서 허연 배를 내놓고 누워서 잠자는 노옹(老翁), 그 배 위에 서 있는 까치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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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성이 변하네’- 윤오영(尹五榮) | 식성이 변하네
오늘이 절후로는 가장 춥다는 소한인데 봄날처럼 푸근하다. 대숲머리로 떠오른 산빛이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르듯 아련하다. 수첩을 펼쳐보니 지난해 소한은 서울이 영하 16도 6부이고 우리 불일은 영하 13도 였다. 물론 늦추위가 없지 않겠지만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지금으로는 덜 춥다.
남쪽에는 눈다운 눈도 아직 내리지 않았다. 겨울비만 몇차례 내려 메마르기 쉬운 땅을 촉촉히 적시었다. 첫눈이 내리면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막연히 헤어진 사람들에게는 그 만날 날은 아직도 기약이 없다.
자취생활을 시작한지 열두 번째 겨울을 맞고 있는 처지로는 춥지 않은 겨울이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다. 얼어붙은 추위 속에서는 끓여 먹는 일이 너무 머리 무겁다. 미적미적 미루면서 게을러빠지기 쉽다. 이런 미지근한 겨울 날씨가, 지난 여름 세일 때 밍크코트며 부츠를 사놓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만일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자취생한테는 참으로 다행이다.
세월이 지나가면 개인의 취미와 취향이 달라지듯이 식성도 바뀌는 것 같다. 한동안 맛있게 먹던 음식이 이제는 별로 구미에 당기지 않고, 전에는 별로 가까이하지 않던 것들에서 새로운 미각을 찾는 수가 있다.
산에 들어와 살면서 나는 국수와 빵을 참으로 많이 먹었다. 남들이 몇생을 두고 먹을 그런 양을 요 10년 사이에 먹은 것이다. 봄부터 초강을까지 저녁은 으레 국수를 삶아 먹었다. 처음에는 표고버섯과 양배추로 조채를 만들어 비볐지만, 뒤에는 그것도 번거로워 맨간장을 쳐서 김치에다 먹었다. 조채가 적을수록 국수의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가장 맛없는 국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국수. 음식 만드는 정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며칠동안 표류해 다니면서 불대로 불어터진 그런 국수를 선 채로 긁어 넣을 때, 나는 새삼스레 인간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해 전 영동고속도로 소사 휴게소에서 먹은 보리국수만은 예외로 치고. 어느 절에서나 구수는 별미로 즐긴다. 그래서 국수가 스님들 사이에는 '승소(僧笑)'로 통한다. 국수 공양이 있다고 하면 좋아서 빙그레 웃는다는 뜻에서다.
이런 승소가 웬일인지 내게는 지난해부터 전혀 먹히지 않는다. 작년에 가져다 놓은 국수가 고방에 그대로 남아 해를 넘겼다.
빵도 산에 들어와 자취를 하면서 어지간히 먹었었다. 아침은 으레 빵이었다. 서울, 부산,광주, 순천 등지의 제과점이나 호텔 식빵은 거의 안 먹어 본 것이 없을 정도니까. 처음 빵을 먹게 된 연유는 이렇다. 산에 들어온 첫해 가을 아는 수녀님이 오시면서 빵을 가져왔는데, 마가린을 발라 프라이팬에 구워준 구수한 그 맛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수녀님이 산을 내려간 다음, 남은 빵을 몽땅 구워 여섯 쪽을 먹고 두 쪽은 더 먹을 수 없어 남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부터 빵을 열심히 먹기 시작, 처음에는 네 쪽씩 먹다가 세 쪽으로, 다시 두 쪽으로 줄었다. 이렇게 왕성하게 먹던 빵이 지난해부터는 시들해졌다. 어디서 빵이 들어오면 큰절로 내려보내는 요즘이다.
물미역도 무척 많이 먹었다. 한 겨울 시큼한 김치만 먹다가 물미역을 대하면 비릿한 갯내가 구미를 돋구었다. 끼니때가 되어 부엌으로 끓여 먹으러 들어가 밥을 안쳐놓고 나서 먼저 물미역을 씻어 초고추장에 찍어 맨입으로 한 접시씩 먹었다. 물미역을 먹으면서 나는 가끔 바위 기슭에 부딪치는 파도소리와 갈매기의 날개 짓이며 아득한 수평선에 대한 환상에 젖어 문득문득 바다로 내닫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요즘은 거의 양식 미역이지만 그전에는 바위에 붙어 자생하는 미역이라, 음력 정초면 그 부드럽고 단맛을 볼 수 있었다. 물미역은 거세지기 전이 제 맛이다. 잎보다도 오돌오돌 먹는 줄기가 훨씬 맛있다. 끓는 물에 데치면 제맛이 안 나고, 생미역 그대로 소금을 조금 뿌려 찬물에 씻어내면 느른한 곱이 빠지고 꼬들꼬들한 생미역 맛을 낼 수 있다. 정월 보름 겨울 안거가 끝나는 대로 바닷가에 가까운 절을 찾아가 물미역을 실컷 먹던 기억이, 지금은 저 세상일처럼 아득해졌다. 이번 겨울부터는 이 물미역도 먹히지 않는다. 너무 많이 먹어 물린 모양인가.
과일 중에는 배가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도 한겨울에 먹는 나주산 이마무라. 겉은 툭툭 불거져 못생겼지만, 속은 연하고 달고 물이 많아 시원한 그 맛이 일품이다. 추운 겨울에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 배를 깎아 먹는 맛은 아는 사람이나 알 것이다.
처음 배 맛을 들이게 된 것은 20년 전 봉은사 다래헌에서 법안스님과 함께 지낼 때였다. 절 곁에 배 밭이 있었는데(지금은 거기 아파트가 들어섰다) 스님이 배를 좋아해서 한 접씩 사놓고 먹으면서부터 배 맛을 알게 되었다. 뱃속같이 시원하다는 말이 있지만 법안 스님은 그런 분이다. 지금은 뉴욕에 원각사라는 절을 만들어 그 곳 교민들을 교화하고 있는 그리운 도반이다.
내가 배를 좋아하는 줄 알고 해마다 초겨울이 되면 약수암의 현문스님은 배를 한 상자씩 사서 자기 시봉들 편에 지워서 우리 불일암까지 보내준다. 배가 아이들 머리통만큼 크기 때문에 혼자서는 먹을 엄두를 못 내다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야 함께 먹었다. 배를 먹으면서 나는 이런 농담을 곧잘 했다. 어디 배씨가 양반인 줄 아느냐고 물으면 다들 어리둥절해 한다. 그러면 나는 시치미를 떼고 나주 배씨인데 그 중에서도 '이마무라파'라고 하면서, 우리는 바로 지금 그 양반 배씨를 먹는 중이라고 한다. 물론 좌 중에 배씨 성을 가진 분이 없을 때 한해서다.
이렇듯 맛있게 먹던 배가 웬일인지 지난 겨울부터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지난번에 가져온 배도 아랫 절로 내려보내고 말았다. 그 대신 요즘에는 사과가 먹힌다. 그전에는 사과만 먹으면 목구멍이 간지럽고 메스꺼워 별로 손을 대지 않았었다. 백건우 씨가 지난 가을 내 산거에 왔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사과 알레르기가 있어 그런다는 말을 듣고 동병상련의 위로를 받았는데, 올 겨울부터는 배 대신 사과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 글을 써놓고 나서 사과를 하나 깎아먹어야겠다.
이제는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해야겠다. 산에서 담담히 살다보면 먹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 먹고 싶은 게 뭐냐고 굳이 누가 묻는다면 향기로운 차라고나 할까. 이따금 시중에 나가면 아이스크림을 거르지 않고 사먹었다. 무슨 약을 섞는지 먹을수록 더 갈증나게 하는 것이 아이스크림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가 얼얼하도록 사먹었다. 막대에 꽂힌 '바밤바'를 다섯 개씩 먹은 기록이 있다.
몇 해 전 성철 종정스님의 법어집을 출간하는 일로 서울에 가서 머물 때, 한방에서 일을 하던 원택, 원융 스님과 함께 우리는 밤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무슨 행사처럼 반드시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먹었다. 탕에서 먼저 나온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오는 일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이제는 이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얼마 전 광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대했는데 기침이 나와 한 개를 겨우 먹었었다. 내 식성은 촌놈에다 토종이라 마요네즈나 토마토 케첩 같은 것은 비위가 상해 전혀 먹을 수가 없다. 먹는 음식으로써 그 사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요즘에는 호박죽을 한 통씩 쑤어 두었다가 아침 저녁으로 그걸 데워서 먹는다. 먹고 치우는데 단 10분밖에 안 거린다. 먹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는다는 것이 자취생에겐 너무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시간 귀한 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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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윤오영(尹五榮) |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옛 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형태 없기로 난(蘭)을 그렸던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의 빙옥(氷玉)같은 심정을 그리려 하되, 형태 없으므로 매화를 그렸던 것이다. 붓에 먹을 듬뿍 찍어 한 폭 대(竹)를 그리면, 늠름한 장부, 불굴의 기개가 서릿발같고, 다시 붓을 바꾸어 한 폭을 그리면 소슬한 바람이 상강(湘江-순임금의 왕비인 아황, 여영)의 넋(애절한 마음)을 실어오는 듯했다. 갈대를 그리면 가을이 오고, 돌을 그리면 고박한(古樸-예스런 맛이 있고 순수한) 음향이 그윽하니, 신기(神技)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기에 예술인 것이다.
종이 위에 그린 풀잎에서 어떻게 향기를 맡으며, 먹으로 그린 들에서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이것이 심안(心眼)이다. 문심(文心)과 문정(文情)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백아가 있고, 또 종자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뜻을 알면 글을 쓰고 글을 읽을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작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의 공민(共悶-함께 번민하고 괴로워함)이요, 사회의 공분(公憤-공적인 일로 느끼는 분노)이요, 인생의 공명(共鳴-함께 공감함)인 것이다.
문인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사를 즐겨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片貌-어느 한 쪽면)와 생활의 정회를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속악한(저속하고 악한) 시정잡사도 때로는 꺼리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생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여기서 뼈 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신은 주관적인 자신이 아니요, 응시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모두 다 글이 되는 것이다.
의지가 강렬한 남아는 과묵한 속에 정열이 넘치고,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하던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 진실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장황하고 산만할 수가 없다. 사진의부진(辭盡意不盡-말을 다 하였으나 뜻은 그대로 남아 있다)의 여운이 여기 있는 것이다.
깊은 못 위에 연꽃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도, 바닥에 찬 물과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 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멀수록 맑은 향기가 은은히 퍼지며, 한 송이 뚜렷한 연꽃이 다시 우아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글이 쓰고 싶고, 이런 글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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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오영 (尹五榮, 1907-1976, 치옹 痴翁, 동매실주인 桐梅室 主人) | 수필가. 교육자. 서울 출생. 호는 치옹(痴翁). 윤오영선생의 약력을 잠시 살펴보면, 190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서울 보성고등학교에서 20년간 국어와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주로 토속적인 제재를 사용하여 동양적인 인생관의 가치를, 고전의 세계와 조응되는 한국적 정신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썼다. 문단에는 l959년에 일찍이 등단하셨지만, 황혼에 가까운 나이라고 할 수 있는 65세가 되던 1972년부터 3년간 화염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시다가 이듬해인 1976년에 69세로 작고했습니다.
문학적인 활동으로 이분이 남기신 것은 1973년에 나온 제1수필집 〈고독의 반추(反芻)〉라는 단 한 권의 수필집과 『수필문학 입문』이라는 이론서가 있습니다. 고독의 반추(反芻)는 그가 조심스럽게 써낸 첫 10 년간의 글에서 추려 낸 것들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 수필 문학의 획기적인 이정표(里程標)의 구실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평자들은 이분을 평할 때 한국적인 전통을 재활한 작가요 이론가이며, 멀리는 중국의 명청시대(明淸時代)의 이론과 가까이는 조선시대 연암선생의 한문수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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