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적합지 않다. 막8:27-38, 눅9:57-6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신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주님의 약속대로 오순절날 성령을 받아 이 땅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자연스럽게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른다. 교회는 교인들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하는 곳이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 하셨던 사역들을 세상 끝날까지 하도록 명하셨다. 교회는 주님의 제자들이 했던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한 달 전쯤 주님은 제자들과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있는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이스라엘은 남북이 긴 나라로 우리나라를 백두에서 한라로 말한다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도 하는데 단 가까이 있는 고원이 바산지역으로 지금의 골란고원이며 그 북쪽에 헬몬산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헬몬산은 높이가 2815m인데 산에 오르면 이스라엘을 한눈에 볼 수 있으므로 헬몬산을 일컬어 이스라엘의 지붕이라고도 하는데 시편에도 그 지명이 나온다.
(시133:3) 헬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주께서 복을 명령하셨으니 곧 영생이로다.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비와 이슬은 풍요의 상징으로 농작물 재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헬몬의 이슬이 남쪽에 위치한 시온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풍요해진다는 뜻으로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슬과도 같은 영생의 복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이다. 지금의 헬몬산은 레바논과 시리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가장 높은 산꼭대기는 이스라엘 쪽에 있다. 이스라엘은 하루에도 사계절을 경험 할 수 있는 나라인데 헬몬산에서 스키를 탈 수 있고 사해바다에서는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 할 수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헬몬산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성경에서는 이 산을 높은 산 또는 변화산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막9: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었다.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오르기 엿새 전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곳인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남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올라가신 높은 산은 헬몬산임에 틀림없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가이사랴 빌립보는BC 20년경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시절 이 지역을 통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헤롯은 이곳에 궁궐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보답으로 신전을 짓고 도시이름을 황제란 이름의 가이사랴로 불렀는데 그의 아들 빌립이 이 지역을 물려받자 더욱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시키고자 황제 가이사랴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의미로 이 도시를 황제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였다고 한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 약 227km 에 위치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이다. 이 성의 현재 이름은 바니아스(Banias)인데, 이것은 헬레니즘 시대에 판 신전 (Pan theo)을 섬겼기 때문에 ‘파니야스’라고 불리다가, ‘파’의 p 발음을 잘 못하는 아랍인들에 의해 ‘b’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바니아스’로 굳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헬몬산에서 내려온 물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거쳐 갈릴리호수로 흘러가 요단강을 만들고 마지막은 사해로 들어간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델단에서 흐르는 물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서 바니아스 폭포를 보게 된다. 한편 헬몬산 아래쪽에는 이스라엘의 북쪽 끝 텔 단이라는 성읍이 있는데 지금도 단으로 가는 길가에서 살찐 암소들을 볼 수 있는데 이 헬몬산 암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바산의 암소들이다.
(암4:1) 사마리아의 바산에 있는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오늘날 골란지역을 성경에서 바산지역이라 하는데 바로 바산지역이 비옥하기 때문에 암소들이 살이 쪘다는 것인데 실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사치하는 사마리아 상류층 여인들을 향해서 아모스 선지자는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외쳤는데 지금도 비옥한 바산지역에서 암소들을 보니 성경말씀이 생각난다. 이곳 단 지역은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듯 우거진 숲과 풍부한 물 그리고 물이 만들어내는 폭포소리가 장관을 이루는 이곳은 헬몬산에서 눈 녹은 엄청난 물로 인해서 숲이 우거진 정말 살기 좋은 풍요로움과 함께 이스라엘의 어두웠던 단면도 볼 수 있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을 때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막고자 벧엘과 이 곳 단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산당을 지어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인도해 낸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것을 섬겼던 그 장소가 단이다(호4:13).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단 지역은 그때나 지금이나 헬몬산의 눈녹은 물이 땅에 스며들어 단에서 발원되고 그 물줄기는 단에서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빌립보 가이사랴까지 와서 그 풍요로움을 더하고 있다. 이스라엘 북단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를 기준으로 북쪽 40k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헬몬산 남쪽에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한 도시로 이스라엘 전체를 놓고 보면 남쪽지방은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 많은 반면에 북쪽 땅은 델단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나는 물이 요단강을 흘러 이스라엘 땅 전체를 기름지게 만드는 근원지이기에 왜 가나안땅을 젖과 꿀이 흐른다고 표현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1. 십자가의 여정은 가이사랴 빌립보로 부터
예수님은 벳세다에서 한 눈먼 사람을 치유하신 후(막8:22-26)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마을로 들어가실(막8:27) 때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말하기를 어떤 이들은 주님을 가리켜 침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대언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했을 때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시니 이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막8:29)라고 신앙고백을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는 신전 앞에서 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고백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로마의 권력이 쩡쩡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런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신에 대한 투쟁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셨던 주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으니 비로소 자신의 죽으심을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막8:31) 또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며 사흘 뒤에 다시 일어나야 할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시되.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비로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처음으로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이미 삼년이 지나 마지막을 향해 가는데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정점으로 예수님의 발걸음은 십자가를 향해 성큼 성큼 한발자국씩 예루살렘을 향해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예수님을 붙잡고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겠다는 주님을 말린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책망까지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감동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막8:34) 하시면서 제자들의 신앙을 새롭게 전환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8:35-36) 35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으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바로 그것을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우리는 예수님의 비장한 말씀속에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막8:34 )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예수님 안에서 가졌던 자기의 야망, 꿈을 포기하라는 것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건설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저마다 한 자리를 차지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할 때는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직까지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이 땅에서 건설될 메시아 왕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큰 자인가 논쟁도 하였고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 받는 것으로 알았기에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런 제자들을 어떻게든 바꾸어 주지 않는다면 다가올 오순절에 신약교회 모습이 드러나게 될 때 제자들은 교회의 기둥으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아셨고 로마로부터 해방된다는 유대교의 메시야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고 부활함을 확실한 방법으로 가르쳐 주어야 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사 자신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영광스런 체험을 통해 유대교의 메시야관에서 벗어난 올바른 메시야관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1) 제자들 앞에서 변형된 예수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지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신지 확실한 체험을 주고자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먹9:2-3) 2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취해 따로 그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사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3 그분의 옷이 빛나며 땅위의 어떤 세탁공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처럼 희게 되었더라.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부출신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그 높은 산의 확실한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을 바로 보는 사람들은 높은 산이 영적으로 높은 산이 아닌 실제 높은 산이며 그 산이 바로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헬몬산임을 알수 있다. 이 헬몬산은 베드로가 신앙고백하였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서쪽으로 약 4km정도에 떨어져 있는 산이다. 이 높은 산에 올라온 제자들은 피곤하였는지 곧 잠들었다가 예수님의 대화소리에 깨보니 예수님이 변형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제가지 본 모습과는 전혀 새로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는 육신을 입은 예수님이 천국에서 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 대화하려면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얼마나 놀랐을까? 조금 전 산에 같이 올라오셨을 때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빛속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가 만났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3일 전에 만났던 예수님을 몰라보고 부활한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착각을 하였던 것처럼 졸다가 깨어난 제자들도 변형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라워하였는가 생각을 합니다. 이 변형모습은 예수님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로부터 해같이 광채가 나왔으며 또 이 광채는 옷에 반사되어서 그분의 옷이 땅위의 어떤 세탁공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처럼 희게 되었더라는 말씀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옷에 반사된 광채가 그 정도였으면 실제 예수님 몸으로부터 나오는 광채는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능합니까?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아들이 죽은자들로부터 일어날 때까지는 그들이 본 것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시니(막9:9) 이 일이 있으신 후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한발짝 한발짝씩 죽음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예고를 3차례에 걸쳐 말씀하셨는데 두번째는 갈릴리(막9:30-31)에서 세 번째는 예루살렘 올라가기 여리고에 이르기 전(막10:32-33)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는데 사실상 가이사랴 빌립보는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우리 주님의 마지막 여행의 시발점이라고 봅니다.
(2) 제자들의 잘못된 메시야관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무거운 여정과는 아랑곳없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무언가 한자리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누가 크냐고 서열다툼하는 논쟁에서 드러나듯이(막9:34),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까지도 메시아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르기를 선생님의 영광가운데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옵소서(막10:37) 주님께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베드로 역시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말린 결과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자였고, 이를 위하여 혼연히 홀로 십자가 길을 가셨고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들에게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막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지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짊어지실 십자가는 엄연히 앞에 놓여 있었는데 제자들을 포함한 당시 사람들의 무지함과 대적들의 음모가 치밀하게 이루어졌지만 십자가를 목전에 두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던 까닭에 궁극적인 최후의 승리를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이러한 확신에 찬 예고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지 30년 후 기독교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는 물론 지중해를 건너 로마와 그리스 전역까지 전파되었습니다.
(3)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신 대속의 죽음이다
태초에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땐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만이 영혼을 갖게 되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았는데 하늘에서 쫓겨난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도록 미혹했을 때 여자가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여 여자가 먹은 후 남자에게 주어 하나님과의 교제는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자신이 지은 피조물과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지만 죄에 빠진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공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할 첫 단계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약속 즉 그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려고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았던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산으로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칼로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을 보셨을 때 아브라함은 나무에 뿔이 걸린 숫양을 잡아 이삭대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마지막 희생제물을 준비하시기 까지 양이나 다른 동물이 우리 죄를 위해 죽어야만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지만 희생제사는 그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을 대신해 한 사람이 마지막 희생제사가 되실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3:10) 완전한 것이 오면 그 때에는 부분적인 것이 없어지리라고 하였듯이 예수님 오시기까지는 양이나 짐승으로 제사지내던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제물이 되어 대속의 제사를 드렸던 이후부터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린 숫양이 아브라함의 아들을 대신 했듯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누군가가 인류를 위해 죽어야만 인간은 용서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구약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이 분을 메시야로 불렀는데 메시야는 단번에 이세상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은 이미 수백년 전에 오실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BC 800년 전 이사야는
(사7:14)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이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로 메시야탄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B.C 700년경 미가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미5:2)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비슷한 시기에 선지자 스가랴는 메시야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을 예언하였다.
(슥9:9)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오 예루살렘의 딸아 크게 외칠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의로우시고 구원을 소유하시며 겸손하사 나귀를 타시되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를 타시느니라.
그리고 제자중 하나인 가롯유다에 의해 배반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시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러한 성경증언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인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앞에 놓인 이 고난의 쓴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셨지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자기부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 즉 자신의 생각, 의지, 감정, 이런 혼의 생명을 성령님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혼이 영의 지배를 받아 육을 복종시켜 온전히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8:34-36) 34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36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 이 말씀을 해석한다면 예수님만 십자가 지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 사랑, 자기 연민, 자기 감정, 의지같은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고 오직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셨던 주님처럼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3.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요일3:2,갈4:6).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우리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야만 우리의 죄의 몸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 혼은 아직 살아서 주님의 뜻에 저항하므로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제자인가? 다음 말씀에 비추어 보면 여러분들이 주님의 제자에 합당한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마10:37-38)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1) 자기를 부인 하여야 한다(눅9:57-62)
요즘 교회마다 제자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많은 교인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수료한 후에는 마치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음 말씀을 보면 수긍이 간다.
57 그들이 길을 갈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주를 따르리이다 하니 58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는 말씀은 자원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에게 머리 둘 곳이 없는 험한 길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59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거늘 그 사람이 말하기를 주님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허락하옵소서 6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 말씀 역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가장 소중한 가족이라는 차원을 벗어나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61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62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제자가 되는 길은 혈육을 나눈 가족이라도 초월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밭을 갈기 위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본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때로는 자기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요구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심지어 자기 가족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 세상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보다도 더 우선이라는 것이다.
(마16: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다시말하면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라는 말씀은 이순신 장군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다. 정말 내가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인데 실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내가 죽는 건지.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십자가를 진다는 일은 고난을 의미 하는 것인데 실은 너무나 편안한 신앙생활속에서 죽을 만한 일들이 무엇이 있겠는가? 교회는 일주일에 한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도 때때로 오는 연단이나 고난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십자가를 지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의 그 말씀은 철회하셔야만 한다고 항변하는 상황에서, 주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사,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시며 무리와 제자들에게,
(막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말씀인데, 베드로와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경험 등 나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따라가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 지시는 것처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2)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주님을 믿고 따라 간다는 것은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고 나가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 생명을 얻데 더 풍성한 삶을 얻게 된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난으로부터 부요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약함으로부터 건강하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막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우리는 주님 안에서 마귀를 멸하는 권세와 우리의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것을 다 고칠 수 있는 권능까지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죽은 자까지라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마귀들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이름으로 구하면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14:12-1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처럼 하나님을 잘 섬긴 성도들에게 임하는 복이 세상의 물질과 성공과 명예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맞는 말입니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신앙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바임을 아셔야 합니다.
2) 재물과 명예와 생명이니라.
(시112:1-3) 1 할렐루야 주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가 가난하고 실패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말씀에 불순종할 때에는 실패를 맛보고 불명예를 당하게 된다는 경우들이 종종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호4:6) 1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6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5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신15:4-5)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 보이고 각박해 보이고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물질과 성공과 치유와 명예는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필수적인 복임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갈렙이 헤브론 산지를 취하여 다윗왕조를 출범시키는 복된 땅으로 만들어 놓았듯이, 우리도 바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믿음으로 접수하고 전진해 나감으로 성취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속에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육을 따라 살려는 나와 다른 하나는 성령(양심)을 따라 살려는 내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 둘이 서로 싸우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한 사람은 이 육의 사람을 욕심과 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는 죄를 지으려고 하는 내가 십자가 못박혀서 죽었다는 것이므로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을 짊어지고 가는 삶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 가치와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제 우리의 가치관을 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생명 단절입니다. 이 관계를 회복케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 삶이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4.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
(1)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던 손양원 목사
1938년 이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및 제도권 교회를 대상으로 강하게 비판하며 신자들에겐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펼쳤던 인물로는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한상룡, 이인재, 주남선, 전라남도의 손양원, 함경남도의 이계실, 만주 지역의 박의흠, 김형락, 김윤섭 등이 활약합니다. 특히1940년 3월경 안동화합에서는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 것, 신사참배를 하는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신사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등을 결정하고 각 지역에서 이러한 운동을 확산시킵니다. 신사불참배로 투옥된 이는 대략 2,000여명에 이르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침례교단은 그때 폐쇄되었다가 해방후에 다시 일어선 유일한 교단인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일제의 억압과 교회의 변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것인데 손양원목사는 당시는 목사는 아니었지만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교회 장로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연행(1939년) 되어 6년간 옥살이를 하다 광복을 맞아 애양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손양원목사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1946년)를 받고, 그 후 여순 반란 사건(1948년)때 순천 사범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던 두 아들을 잃게 됩니다. 자신은 한국전쟁 중 여수까지 내려온 공산군에 의해 여수 근교 미평 과수원에서 순교(1950년 9월28일 48세) 하였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에겐 손동인과 손동신 두 아들과 동희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 두 아들은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으로 안재선에 의해 총살당한 후 안재선은 체포되었고 이 사실을 안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의 탄원을 위해 노력한 결과 양아들로 입적을 합니다. 손양원목사의 실화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영화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가 쓴 수기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中에서 이후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는다. 그러나 비극의 역사는 참으로 무자비하며 잔혹했는데 왜냐하면 손양원 목사는 해방되기 전에는 신사불참배로 옥고를 치렀는데 이후에는 두 아들을 잃고 서울이 3개월만에 수복되는 1950년 9월 28일 북한군에 의해 총살 당하는 순교를 당하는 손양원목사야 말로 진정한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을 부인하였던 제자가 아니었던가?
(2) 피살당한 김진욱 선교사
2016년 11월 16일 터키에서 피살당한 김진욱 선교사는 비교적 자유롭다고 하는 터키에서 한국인 선교사가 순교되는 사건이 일어나 충격을 주고 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11월 25일 ‘고 김진욱 선교사의 순교를 애도하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우리 민족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터키에서도 故 김진욱 선교사가 흘린 순교의 피로 놀라운 영적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김 선교사는 시리아 전쟁 소식과 난민들의 고통을 전해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위험지역이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을 위한 사명감으로 2016년 봄에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로 터키에 도착하자마자 시리아 난민들을 섬기기 위해 터키 동부 국경지역이며 아브라함의 유적지이기도한 우르파로 가서 그 곳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나누며 전쟁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난민들을 도왔다. 터키에 있는 난민들의 상황과 그들을 돕는 외국인 사역자들의 입지도 좁아지게 되면서 김 선교사는 우르파를 떠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는 디야르바크르로 옮겨 소규모의 기독교 공동체의 목양을 담당하며 난민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해왔는데 이날 시리아 난민과 쿠르드족을 위해 사역하던 김진욱 선교사(41)가 11월 19일 터키 디야르바키르시 거리에서 16세 청소년으로부터 칼과 가슴에 등을 세 차례 찔려 구급팀 응급조치 후 병원으로 이송해 수술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터키는 터키인 99.8%가 무슬림인 이슬람교 국가로 지난 3년 동안 터키 내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한 박해와 위협 등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 다른 곳에 가면 더 큰 십자가가 너를 기다린다. 그러나 십자가를 달게 지면 그 십자가가 너의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리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십자가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십자가만 자랑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리들도 바울을 본받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예수님만을 따르고 이제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람들을 향하여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외치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분의 제자가 될 것 같은가? 당신이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이 예수님 제자가 되는 요건은 절대적인 순종이라는 값을 치러야 한다. 주님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란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서는 안된다. 당신은 주님만을 뚫어지게 바라다보고 있어야 하고 주님께서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습이다. “제자”란 말을 영어로는discipline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훈련하다, 길들이다 등의 뜻을 갖는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당신은 훈련을 받고 단련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길들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요,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요건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누가복음 9장 57절부터 62절에 묘사되는 제자의 길을 다시한번 살펴보자.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시는데 한 사람이 주님께 이렇게 구한다. “주님, 주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말하자면, 제자가 되겠다는 각오를 밝힌다. 이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신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내게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단다. 그래도 좋으냐?” 이 사람이 묵묵부답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 “네,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먼저 장례를 치르고 오겠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 그래야지. 아버지가 죽었는데 네가 장례 치르고 어서 다녀오렴.” 하고 말씀하셨을 법한가? 천만에!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일 따위는 죽은 자들에게나 맡겨라. 너는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었다. 냉혹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의 자격이라는 말씀이시다.
당신은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서 그 말씀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분의 제자가 아직 아니다. 당신이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요건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당신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영혼구원을 통하여 마땅히 복음을 전해야한다는데 왜 대답이 없는가? 아직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지 조차 못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죽은 아버지나 죽은 어머니를 먼저 장사지내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먼저 장례를 치르고 나서 영혼구원에 나선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나는 여태까지 이런 정도로 훈련을 받은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세상일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명심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