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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ㅣ가재가 노래하는 곳 Where the Crawdads Sing, 2020 제작
개요 ㅣ미국 / 드라마, 미스터리, 법정 / 15세 관람 / 125분 / 2022.11..02 개봉(한국)
감독 ㅣ올리비아 뉴먼
출연 ㅣ데이지 에드가 존스(카야), 테일러 존 스미스, 해리스 디킨슨, 데이비드 스트라탄
나의 별점 ㅣ★★★☆
원작 ㅣ'델리아 오언스'의 2018년 동명 소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영화 시작 부분 _ 카야의 독백narration)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제목에 마음을 빼앗겼다. 은유적隱喩的 개념 강한 제목을 통해 영화에서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제목으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1969년의 한 시골마을 습지를 배경으로 한 장엄한 대자연의 풍광에서,
주인공 '카야'의 자연 그대로를 닮은 청아하고 순박한 마음에서,
가려린 삶에서도 편견에 저항하는 힘찬 모습에서.
습지..
어둡고 습한 미로의 공포가 숨어 있는 '늪'이 아니라
한없이 맑고 깨끗한, 그러면서도 힘찬 빛이 존재하는 그곳에
연약한 가재, '카야'가 산다.
그러나 억센 집게발을 치켜 들고 당당하게..
보이지 않는 작은 '카야'가 그렇게 촉촉히 삶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습지가 되어 감미롭게.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영상을 언어로, 공간을 실제로 옮겨 놓은 환상적인 풍경으로" 그렇게 경이로운 자연 배경으로 감탄할만한 영상미를 담고 있다는 찬사다.(인터넷 인용) 또한 한 폭의 그림같은 장면속에 이기적인 인간 군상과 법정 미스터리, 마지막 반전까지 이루어낸 흡입력과 볼거리,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까지 고려한 '볼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면서(closing credits) 흐르는 OST <Carolina>에서 영화의 모든 것이 함축 내포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 그대로 동화된, 영화와 동일함의 깊은 여운이었다.
개인적으로.. 인물, 배경, 대사 등 영화적 구성 요소가 뛰어난 꽤 좋은 영화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말하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나에게서 만큼은 별점 반점(☆)을 빼야하나 하고 갈등을 하게 하는, 차라리 그 '반전'이란 것이 완성이 아닌 여백이었다면, 그냥 관객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두었더라면 훨씬 더 카야를 카야다운 습지의 '가재'로서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는 때묻지 않음이었을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다.(이 또한 개인의 관점이리라~^0^)
그러나 <테일러 스위프트>의 안개 짙은 습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쓸쓸하면서도 몽환적인 OST가 영화와 잔잔하게 어우러지면서 더욱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매력 만점이다. 노래 '캐롤라이나'가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아련함이다.
내가 높게 바라보는 이 영화의 품격은 제목에서 풍기는 은유隱喩와 카야의 독백(narration) 안에 스며든 시적詩的 감미로움이다.
또한 <올리비아 뉴먼> 감독과 스스로 음악에 참여한 <테일러 스위프트>, 매력적인 '카야' 역의 주인공 <데이지 에드가 존스>, 원작 소설의 작가 <델리아 오언스>, 이 넷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대한..
아직도 사회에서 숨죽이고 움크릴 수밖에 없는, 세상 속 미소한 이들로 대변되는 카야, 곧 '가재'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은유적 위대성의 영화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진취적이고 차분하면서도 도전적인 영혼의 소유자들인 여성들이 만든 영화.
그래서 특히 여성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어 흥행에 성공했던 것일까.
습지 소녀로 불리는 한 여자,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어렸을 때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연만이 유일한 친구였던 카야.
그녀가 세상과 단절된 채 성장하는 가운데, 테이트가 그녀의 마음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밀려오는 외로움 속, 체이스가 그녀에게 적극적인 고백을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랑이란 이름을 시작하고 있을 어느 날, 체이스는 습지에서 추락사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고, 시체에서 발견된 카야의 빨간 털실로 인해, 그렇게 카야는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 사람들의 마녀사냥식 법정에 서게 되는데…(출처: 인터넷 정보 인용)
"자연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늘 변화變化한다는 것이다."(카야의 독백narration 중)
영화 속 사람들은 습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용의자로 아무런 설명도 합리적 이유도 없이 당연히 "습지 여자"가 범인이라 단정을 짓지요.
우린 나와 생활 방식이 다른, 주류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범주에서의 벗어남이면 너무도 쉽게 잘못된 사람, 틀린 사람, 무언가 숨기고 속이는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 죄인, 악마 취급을 하는 자기 가치적 개인주의적 우상의 경향을 봅니다.
내가 그와 같지 않기에 그도 나와 같지 않을 당연함을, 너와 나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참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쪼잔한 마음의 나를 들여다 봅니다.
이미 나만을 위한 '내'가 형성되에 타인에 대한 분별조차, 배려마저 필요없는 내 사유의 편리를 살지요.
밀턴(데이빗 스타라탄)은 마지막 변호 때 배심원들에게 카야를 편견과 오해로 바라보지 말고 혼자 습지에서 살아왔던 '자기 삶'의 소녀로 바라봐 달라고 호소하네요. 사실이 아닌 거짓된,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로 판단하지 말고 법적인 판단을 해달라고 말이죠.
어쩌면 문화적, 지식적, 권력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그들의 고상한 품위에 걸맞게 공정한 이성적 판결이 당연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구하고 사정을 해야 하는 이 시대의 힘에 의한 풍요로운 절대성을 마주하게 되지요.
자연의 모든 것은 변하는데 기필코 변하려 하지 않는, 변화 되지 못하는 미성숙한 이기적 편견적 우리들의 모습만이 덩그러이 보여지는 씁쓸함입니다.
사람들은
조가비에 깃들여 사는 생명을 잊곤 한다.(카야의 독백)
중3 때, 어떤 형이 전학을 왔네요. 같은 학년의 우리 또래보다 세 살이나 위였지만 체구도 더 작았고 무엇보다도 옷차림새며 얼굴에 덕지덕지 상처가 지저분한 거칠고 비루한 모습이었지요.
우리는 졸업 때까지 누구도 그를 형이라 부르지도 않았지만 같이 어울리려 하지도 않았고, 그러면서도 뒤에서 수근거렸네요. 소년원을 갔다왔느니, 소매치기범이라느니, 매일 밤마다 복면을 쓰고 도둑질을 한다는 등등.
옛날 어릴적부터, 우리 동네에서는 한참 떨어진 어느 작은 산山 언저리에라도 가게 될 때면 어른들은 '아이들 심장과 간을 빼서 약으로 먹는 문둥이들이 산다.'고 했던, 그 형 부모님이 나병, 곧 한센인들이었기에 일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지정된 산속 그곳에서 마을지어 살으셨고, 그 형도 거기서 태어나 자라고 학교를 다녔던 것이지요.
고2 때 우연히 들른 이발소, 그 형은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는.. 도심 근교에 이발사가 되었네요. 어려서부터 이발 기술을 배웠었다고. 그렇게 산속 마을 그 형이 살고 있는 집으로 두세 번 초대받아 가서 한센병을 앓았던 얼굴이 조금 뭉개지고 손마디가 뭉그러진 부모님과 학생인 여동생 둘, 그렇게 형의 가족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었지요.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여름 밤이면 반딧불이를 찾아서, 집게 달린 시커먼 장수풍뎅이를 잡으러, 밤 따러, 도토리를 주우러 수없이 그 산의 탐스런 밤나무와 울창한 참나무 숲을 헤집던 그 아름답던 산 속이었네요.
그래, 그곳에 꽁댕이로 형광색 불빛을 반짝이며 우리를 유혹하던 반딧불이의 하늘을 수놓던 반짝임이 장관이었지. 참나무 밑둥에서 불빛을 비추어 누가 더 집게가 큰 장수풍뎅이를 잡아 으뜸 싸움꾼을 수집하느냐 열정이었지. 여름 밤이면 더 뜨거웠던 어릴적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우리의 산 속, 그곳.
그곳에 우리와 같은,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몰이해의 시선속에서도 심성 맑고 순박한 마음으로 우리네와 똑같이 밥을 먹고 교육하고 웃고 울며 노래하고 살았을 그들, 그곳에 그들 '가재'가 살고 있었네요. 존귀하고 존엄한 생명으로 빛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이 살았네요. 우리의 편견 속 깊은 상처에서도 꿋꿋이.
그 형은 이른 나이에 가정을 꾸려서 아이 넷을 낳아 아주 평범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화목하게 잘살고 있고, 여동생 중 하나는 나와 형이 다니던 우리의 그 중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네요.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
우린 너무도 뻔뻔히 내 기준, 내 가치, 내 잣대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옳다고 큰소리로 살고 있나 봅니다. 우주 그 어떤 곳에도 아니 계시지 않는, 피조물 그 어느 것에도 생략없이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신데, 우린 언제나 내가 생각하고 인식하고 바라보고 듣고 교육된, 내 관념의 것만을 정답이라 고집하며 대립하나 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중심을 고집하기 위해 야비하게도 사회적 기득권에 편승하는, 집단적 이기성에 더 기대는, 떼거리 힘의 문화에 굴복하는 역설적 비굴한 삶의 흔적들로 이어가고 있지요.
막상 홀로 서서 자기를 기준으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주장하고 투쟁할 용기도 용감도 없는 비겁쟁이이기에 유난히 더 집단적 주류의 세력이나 흐름에 덧붙어서 따라가는 우리들의 생존적 나약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발을 벗어라' 하시네요.
단단히 나를 조여매고 있는 그럴듯한 내 허세의 신을 벗으랍니다.
편견에 잔득 덧씌워져 묶여 있는 비대한 내 육신을 벗어내라 하시네요.
세상의 이기와 허영을 갈구하는 나의 굳은 발바닥을 하느님 한없이 부드러운 의로움의 영에 결합시키라 하시네요.
나의 육신적 군더더기들로는, 온통 먼지투성이의 탐욕적 영혼으로는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하시며 당신 창조의 "거룩한 땅"으로의 발디딤에 단호히 거부권을 행사하심이네요.
가재는 수질오염이 되지 않은 맑고 깨끗한 물에서만 서식하지요.
카야는 그들의 집단적 우위에서의 마녀사냥식 재판에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추호도 그럴 생각없다. 안한다. 나를 저들처럼 세상의 제물로 바칠수는 없다. 판결받는 건 저들이다. 자기들을 심판하는 거다.'라며 기득권의 편견에 타협이 아닌 순결한 영혼으로써의 순수한 저항을 선택하네요.
내 신을 벗는다는 건 정말 놀랍도록 지금의 덧입혀진 거짓의 내가 아닌 본래의 겸손된 나로서, 온전히 하느님과 하나되는 밀착이고 접촉이고 성령에 일치되는 합일의 내가 되는 것. 그분과 같은 하느님이 되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부활의 내가 되는 새생명이네요.
주님의 땅에 맨발로 서 있는 것, Touch By Touch네요.
주님께서 온갖 세상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발가벗겨 당신 품으로 가까이 오게 하는 심장의 고동침이네요.
이제는 내가 아니라 당신을 살게 하는, 당신 안에 머무르고 당신 내게 머무시는 "하나"가 되는 "됨", 성화聖化네요.
편견과 이기의 신을 벗어내야 하는 이 땅..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생명의 곳이었네요.
이미 주님이 현존하고 계셨고, 내가 나를 만나는, 내 하느님 담은 숨결이 하느님 영으로 숨쉬게 하는 창조의 조화로운 땅이네요.
하느님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세상, 그리고 하느님의 신비체인 우리들,
나도 너도 우리 모두는 그렇게 서로 높이가 다른 음音으로 함께 공명共鳴하여 진심으로 어울려서 나는 소리, 화음和音이어야 하는 것을.
주님의 지휘에 따라 경쾌히 공감하며 각자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야 하는 오케스트라, 합창이어야 하는 것을.
내 오염된 삶의 신을 벗으면 가재가 노래하는 하느님 '그곳'이 되는 것을.
내 늪의 자아를 버리고 비우는 고통의 시간만큼 삶의 향기가 짙어지나 봅니다.
하느님과 숨결이 맞닿는 맨발로써의 합일의 꽃이 더 향기로운가 봅니다.
세상 가재와 호흡하는 동감의 넉넉한 습지의 나일때, "나는 있는 나다"의 현존 앞에서 비로소 노래하는 참생명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풀은 물속에서 자라고,
물은 하늘로 흐른다.(카야 독백)
▼ ost 가사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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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새삼 달리 보이네요. 그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