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5)
퇴계 선생의 고매한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5일] 4월 8일(금) 한여울(양평군 양서면 국수역)→ 배개나루(이포보) (23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8일 퇴계 선생]
○ 퇴계 선생 33세(1533년) 가을에 고향으로 내려갈 때, 여주를 지나면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을 뵈었다. 이 행차는 권충정공[권벌(權橃)]을 따라 갔었다. 모재 선생은 당시 파직을 당하고 여주(麗州) 이호촌에 살았다. 선생은 만년에 말하기를, ‘모재를 뵙고서야 비로소 정인군자(正人君子)의 언론을 처음으로 들었다’고 한다. -《퇴계선생연보》
◎ 1569년 음력 3월 8일 이날, 퇴계 선생은 양평의 ‘한여울’을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배개나루[梨浦]에서 묵었다. — ‘한여울’은 남한강에서 가장 큰 여울[大灘]이었다. 이곳을 거슬러 올라갈 때에는 배 위의 사람들을 모두 내리게 한 뒤, 여러 배의 뱃사공들이 배에 밧줄을 매달고 자신들의 어깨에 그 밧줄을 메고서 온몸의 힘을 다하여 배를 끌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곳을 다니던 늙은 뱃사공의 어깨는 굳은살이 백여 낙타봉처럼 솟아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지리학자 이기봉 박사가, 30년 전 한여울에서 예전에 사공 일을 하였던 노인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배개나루[梨浦]는, 양근의 ‘칡미나루’를 거쳐 여주 경계에 들어서면서 바로 당도하는 큰 나루이다. 나루의 남단인 여주 금사면에는 김안국(金安國)과 홍인우(洪仁祐) 등 여주(麗州)와 연고가 있는 유현과 명사 8분을 배향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이 있다. 김안국은 퇴계가 존경하는 선학이요, 홍인우는 선생이 아꼈던 후배이다. 그는 선생보다 앞서 1554년에 세상을 떠났다. 기천서원이 세워진 것은 퇴계 선생 별세 뒤인 1580년이었고, 홍인우가 배향된 것은 1611년이었다.
◎ 여주(麗州)의 읍지 《황려지》는 홍인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생원 홍인우의 자가 응길(應吉)인데, 효제와 충신이 천성에서 나왔다. 소시부터 성현의 학문에 독실하게 뜻을 두어 굳건하고 강인하였고 진실하게 실천하였다. 몸가짐이 반듯하여 예를 좋아하였으며, 행동은 고인을 본받았다. 교제한 이들이 모두 일시의 어진 선비들이었으니, 퇴계선생과 가장 친하였다.’ … ‘나이 40에 부친의 상례를 치루면서 지나치게 건강을 해쳐 세상을 떠났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 [2022년 4월 8일 금요일 귀향길 재현단]
▶ 오전 8시, 퇴계 선생의 귀향길 재현단은 국수역 앞 광장(주차장)에 모였다. 오늘도 ‘도포와 갓’[衣冠]을 갖추어 입은 이한방 교수를 비롯한 이동수 원장·박경환(참공부모임), 홍덕화, 이원필·이재찬 님,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안창섭 과장, 이강호 지도위원, 송상철·오상봉(의관 정장), 오상수, 조민정, 이상천(후미의 기수), 배낭을 메고 있는 진연천 님이 연일 계속 동행하고 있다. 오늘은 특별히 전 경상대 김덕현 박사,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동식 전 KBS부산총국장, 이선기, 이문원, 이원태, 이원주, 이동진 님 등 10여 명의 후손방손들이 함께 했다.
이동수 전 안동문화원 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퇴계 선생의 〈도산십이곡〉 중 제4곡을 다함께 노래했다.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듣기 좋아,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욱 잊지 못하네
— 퇴계 선생의 도산(陶山)은 그냥 묻혀 사는 은둔지가 아니다. 자연과 하나 되어 청정한 도락을 즐기는 공간이며 나라 걱정과 함께 어린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정의 공간이다. 종장의 ‘피미일인(彼美一人)’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저 아름다운 한 분’이다. 선정(善政) 하기를 기원하는 바로 임금이다. 깊은 산, 숲속의 난초는 자기를 보아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그윽한 향기를 발한다. 남들이 주변에서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를 발하지 않은 법은 없다. 산마루를 넘나드는 흰 구름 역시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윽한 향기를 발하는 난초와 산정의 구름처럼 의연한 자세를 지니고 살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 국수역→ 복포리→ 기곡터널→ 아신갤러리→ 물소리길
▶ 오전 8시 30분, 이동신 별유사의 주도로 준비운동을 하고 중앙선 ‘국수역’을 출발하였다. 필자가 선두에서 향도를 하고 의관을 정제한 선비단에 이어, 평상복을 입은 재현단 일행이 뒤를 따랐다. 오늘은 ‘국수역’에서 ‘배개나루’, 즉 ‘이포보(梨浦洑)’까지 23km를 걷는다. 길은 중앙선 폐선로를 단장한 자전거길-인도를 따라 걷다가 양평읍 오빈리를 지나면서 다시 한강의 강변 길을 따라 걷는다.
▶ 국수역을 출발하여 중앙선 옆길을 따라 걷다가 얼마가지 않아서 복포천 다리를 건넜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은 남한강종주 자전거길이다. 원복터널을 지나고 나면 양평군 양서면 복포리이다. 복포리에서 길이가 긴 기곡터널을 지나고 나면 예술기행 명소로 자리 잡은 옛 아신역사의 ‘아신갤러리’가 있다. 열차의 두 칸을 개조하여 예술문화공간으로 꾸몄다. 옛날의 역 광장이 너른 휴게소로 되어 있다. 남한강 종주 바이크로드는 결국 남한강 강변의 양평 ‘물소리길’로 통한다.
▶ 우리 귀향길 재현단은 6번국도(경강로)의 아래를 지나고 나서 비로소 강변의 ‘물소리길’로 들어섰다. 남한강변 아신대학교 양평캠퍼스 입구를 지나 강변 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경강로 아신교차로(중앙선 아신역 입구)에서 복잡한 국도의 보도를 따라 걸었다. 옥천면의 사탄천 고읍교를 건넜다. 이곳은 ‘옥천냉면’으로 유명한 곳이다. 옥천교차로에서 경강로의 구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완강한 다리가 머리 위를 지난다. 그리고 직선의 길을 한참 동안 걸은 후 경강로 덕구실 육교를 건너 본격적인 강변길로 들어섰다.
감호암과 감호정
▶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덕구실 육교’(6번국도, 경강로)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강안으로 들어가면 감호암(鑑湖巖)이 있다.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순우 박사가 감호암에 대해 자상한 해설을 베풀었다. …
‘감호암’은 양평읍 오빈리, 남한강 강변에 있는 ‘鑑湖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이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강 위에서는 볼 수 없다. 팔당댐으로 인한 수위가 높아져서 배를 타야만 글씨를 볼 수 있다. 감호(鑑湖)는 ‘거울같이 맑은 호수’라는 뜻이다. 원래 감호는 중국 저장성[浙江省]에 있는 호수로 은둔하는 선비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으며 이로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선비들이 이 명칭을 사용하곤 한다. 양평 지역에 위치한 감호와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권8, 경기 양근군 조(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당기록에는 ‘감호정은 (양근군 관아) 서쪽 8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덕구실 강변 언덕에 감호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덕구실 마을’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 권철신(權哲身)과 권일신(權日身) 형제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산 정약용이 매우 존경하며 흠모했던 대학자 권철신의 흔적과 체취가 남아 있는 유적지이다. 다산의 기록에 의하면, “(권철신은) 스스로 지은 호는 녹암(鹿庵)이요 그가 거처하던 곳은 감호(鑑湖)라고 불렀다.” 감호암은 경기도 양평군(그때는 양근군) 양평읍 오빈리에 있다. 다산의 마을에서 남한강을 따라 한참 멀리 올라가면 강가에 절벽이 있는데 그 절벽 바위에 ‘鑑湖岩’(감호암)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바위 윗쪽에는 ‘감호정(鑑湖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의 뒤쪽으로는 덕구실 마을로 권철신이 살았던 마을이고 앞쪽은 넘실대는 남한강 물이 흐르고 있으며, 강 건너 큰 산이 앵자봉이고, 앵자봉의 서쪽은 서학[천주교]을 처음 받아들여 공부하던 천진암, 동쪽은 주어사여서, 권철신과 그 제자들이 경학을 토론했던 강학회가 열렸던 곳이다.
권일신(權日身)은 성호 좌파로서 초기 천주교의 주춧돌 역할을 한 인물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교분을 나누던 감호정(鑑湖亭)은 그 흔적만 남긴 채 소실되어 없어지고 남한강은 무심히 흘러간다. 여기에서 퇴계에서 다산으로 이어지는 인맥을 정리해 보면, 퇴계 이황(1501~1570년)→ 한강 정구(1543~1620년)→ 미수 허목(1596~1682년)→ 성호 이익(1681~1763년)→ * 녹암 권철신(1736~1801)→ * 다산 정약용(1762~1836년)으로 요약된다.
*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권철신(權哲身, 1736~1801.4.4, (음력 2월 22일))은 본관이 안동으로 양촌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그는 처음 부친에게서 학문을 익혔고 그가 24세 때 이익(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는 기호 남인계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성호학파의 거유가 되었다. 이승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세례명 암브로시오)가 되었다. 1777년 경기도 양주에서 정약용, 이벽 등 남인(南人)의 실학자들과 함께 서양의 학문 및 천주학에 대한 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이승훈, 강완숙,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 등과 같이 투옥되었는데 66세라는 노령에 고문을 당한 끝에 옥사, 순교한 천주교인이다. 천주교 전교 활동을 활발하게 하다가 신해박해(1791년) 때 사망한 권일신(權日身)의 형이다. 지금 마을에는 권철신의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감호암’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곳이 권철신이 살던 곳임을 알 길조차 없었을 것이다.
권철신(權哲身)의 안동 권씨는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우찬성 지재(止齋) 권제(權踶 1387~1445), 좌의정 소한당(所閑堂) 권람(權擥 1416~1465) 등 3대가 대제학(大提學)으로 조선 초기 찬란한 명성을 얻은 가문이다. 그의 후손에 길천군 권반은 병조판서, 그의 후손에 권흠은 이조참판을 지냈으니 권철신의 증조부였다. 권철신은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은 제자였으며, 수많은 제자들이 그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대학자였지만, 천주학쟁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비록 ‘감호암’이라는 세 글자의 자취뿐인 유적지였지만, 당대 유명한 학자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마을 안쪽에 유명한 ‘권근 삼대묘’가 있다. 권근을 비롯한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3대 묘가 한 곳에 모여 있기에 붙은 이름이다. 묘역이 많이 알려진 까닭은 조선 초기 나라를 좌지우지했던 고관대작 3대의 묘가 모여 있고, 풍수상 매우 뛰어난 명당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 천주교와 다산 정약용
1801년 신유옥사(辛酉獄事)는 천주교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건이다. 죽음을 당한 대표적인 사람이 권철신(權哲身, 1736~1801)과 이가환(1742~1801)이었다. 다산이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평생의 작업으로 자신의 일대기인 〈자찬묘지명〉 두 편을 쓰고 자신의 일생 못지않게 반드시 세상에 전해지게 해야 할 대표적인 인물로 생각한 녹암 권철신과 정헌 이가환의 〈묘지명〉을 썼다.
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마재’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다산 정약용 등 4형제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마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한강변에 안겨있는 마을로 정약종이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또한 이벽, 이승훈, 황사영 등 신앙의 선조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정약현·약전·약종·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정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고,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이며, 정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약용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약현·약용 형제는 유배를 가고 나머지 모든 가족은 천주교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했다.
《목민심서》, 《경세 유표》, 《흠흠 신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긴 정약용은 본래 ‘세례자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쓴 것이다. 이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하고,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 유고(蔓川遺稿)’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한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양평 들꽃수목원 ― 양평 물소리길
▶ 감호암 유적지를 나온 우리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물소리길’로 명명된 양평 남한강 강변을 걸었다. 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는 강변길이다. 직선의 물소리길을 한참 걸어내려 가면 양평 ‘들꽃수목원’이 있다. 강변의 둔치에 조성된 들꽃수목원은 남한강이 감아 도는 강변의 정취와 꽃들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자연이 함께하는 휴식의 공간이 잘 갖추어져 있다. 야생화 단지, 허브정원, 자연생태박물관, 식물원, 연꽃연못이 있는 명소이다. 들꽃수목원은 산업화, 도시화로 자연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도심 속에서 가족들이 함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생태 공원이다.
천주교 양근성지(楊根聖地)
▶ 들꽃수목원을 지나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덕평천’을 건넜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정갈하게 쌓은 담장을 두른 붉은 벽돌건물이 시선을 끈다. 바로 ‘천주교 양근성지’이다.
‘양근(楊根)’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이곳 양평의 옛 이름이다. 상고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돼 홍수 피해를 대비하기 위해 둑을 만들고 버드나무를 심어 경관을 살리며 토사 유실을 막았다고 한다. 여기서 ‘튼튼한 근원’, ‘기초’라는 ‘양제근기(楊提根基)’가 유래했다. 현재 ‘양평(楊平)’이란 지명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8년 양근군(楊根郡)으로 전입한 지평군(砥平郡)과 합치면서, 양근군의 ‘양’자와 지평의 ‘평’자를 따서 오늘날의 ‘양평군’이 되었다
이곳 양근지역은 신유박해(1801년, 순조 1년) 이전 천주교 도입기에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하여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권철신(암브로시오)과 이암(移庵)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중국 ‘베이징’의 북당(北堂)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고,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과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승훈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자다. 권일신은 서학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주도하였던 순암 안정복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곳 ‘양근’은 조숙(베드로)과 권천례(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조숙은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가르친 조동섬(유스티노)의 종손자이고, 권천례는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다. 그리고 주문모(1752~1801)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북경에 다녀온 조선의 밀사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와 윤점혜 그리고 권상문이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한 곳이다. 그 외에도 조용삼, 홍익만이 순교하였다.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역,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는 순교자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졌다. 가까운 용문산 용문사는 권일신이 을사 추조적발사건 이후 양근 출신 조동섬(유스티노)과 함께 8일간 침묵 피정을 한 곳이며, 순교자 현양비 축복식이 거행된 도곡리 능말은 조숙과 조동섬, 병인박해 때 순교한 조중구(타대오), 조인달 등 순교자들의 고향이다.
이렇게 양근성지는 최초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다.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됐다. 이런 의미에서, 양근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 어떤 상황에서도 잘 자라는 모습에 빗대어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상징했던 버드나무, 그리고 그 뿌리라는 의미의 ‘양근’. 한국천주교회 신앙의 근원이라는 양근성지의 교회사적 의미와도 아주 상통한다. 한국천주교 수원교구에서는 이곳 양근의 한강변 너른 부지에 순교자를 기념하는 건물(성당과 피정의 집)과 동상 그리고 신앙고백을 담은 조형물을 만들어 성지로 조성했다. 현재의 성당은 2011년 5월 7일 축성했다. 2013년 5월 23일에는 양근 출신으로 1868년 5월 28일 서소문 밖 사형 터에서 순교한 권일신의 증손자 권복(프란치스코)의 유해를 성지 내에 안치했다.
― 너른 마당과 정갈하고 엄숙한 건물, 깔끔하게 가꾸어진 백주의 성지는 적요했다. 200여 년전의 처절한 순교의 시간을 조용히 되살리게 하는 엄숙하고도 거룩한 곳이다. 성지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산을 비롯한 초기 천주교인들이 숭상한 상제[하느님]와 유학의 하늘[천명]은 어떻게 관계 지어야 할까?’
양근천을 지나 직선의 물소리길
▶ 고요한 순교성지의 정문을 지나면 좌측에 ‘물안개공원’이 있고 오른쪽 남한강에는 족구장, 배구장, 야외무대 등을 갖춘 ‘수중도(水中島)’가 있다. 강변과 수중도는 테크다리가 건설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양근대교의 거대한 다리 아래를 지났다. 양근대교는 강 건너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양평I.C와 연결되는 남한강 다리다. 일행은 남한강에 유입되는 양근천을 만나 그 하구의 테크 다리를 건넜다. 이곳 양근천 부근의 한강 백사장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지금은 하구의 둔치에 ‘6·25 양민학살 현장비’가 서 있다. 양근천에서 갈산까지의 강변길[물소리길]은 아득한 직선의 주로인데 양평군청이 인접해 있는 양평읍의 중심지역을 지나는 강변길이다. 중앙선 양평역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양근나루 갈산공원
▶ 콘크리트 양평대교 다리 아래를 지났다. 양평대교는 양평읍 도심에서 남한강을 건너 강상면 교평리를 잇는 남한강의 대교이다. 이곳은 옛날 ‘칡미나루’였다. 칡미나루는 양평군 양근면사무소가 있는 갈산 아래의 남한강나루이다. ‘갈산나루’, 혹은 ‘양근나루’라고도 부른다. 이제는 대교(大橋)가 생겨 사라졌지만, 이곳 ‘양근나루’는 양평의 중요한 명소였다. 하류의 한여울나루와 상류의 여주 배개나루를 연결하는 남한강 조운의 중간 거점이었다. ‘갈산공원’ 입구에 나루터가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양근에서 가장 큰 나루였으므로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에서도 배를 잠시 정박하고 쉬었을 것이다.
‘갈산(葛山)’은 칡이 많이 난다고 하여 붙은 양평읍의 옛 이름이다. 이곳 남한강변에 위치한 양평 생활체육공원을 ‘갈산공원’이라 부른다. 양평역에서 1km 떨어진 공원으로, 벚꽃 명소로 유명하다. 양평역에서 원덕역까지 10.8km의 트레킹 코스인 물소리길이다. 남한강변을 따라 조성한 산책로는 자전거 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대중교통으로도, 자전거로도 접근하기 좋은 공원이다. 체육공원 내에는 축구장, 게이트볼장, 배드민턴장, 탁구장 등의 시설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 2km 근방에서 양평 오일장이 열린다. 3일과 8일에 장이 열린다. — 재현단 일행은 갈산공원 안쪽에 있는 식당에서 ‘막국수’로 점심식사를 했다.
잘 가꾸어진 갈산공원에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자연석에 새긴 시비(詩碑)가 있다. *—〈過葛山風日甚美〉(갈산을 지나는데 풍경이 몹시 아름다웠다)
水滑琉璃漾玉沙 수활유리양옥사 유리처럼 맑은 강물이 하얀 모래에 넘실대고
鳧鷖晞日踏輕霞 부예희일답경하 오리와 갈매기는 햇빛을 쬐다가 얕은 노을로 날아가네
中流間歇篙師手 중류간헐고사수 강 가운데에서 뱃사공은 잠시 손을 멈추고
笑指龍門塔影斜 소지용문탑영사 웃으면서 용문산을 가리키는데 탑 그림자 비끼어 있네
벚꽃이 만발한 양평 ‘물소리길’
▶ 갈산공원부터 이어지는 강변의 제방 길(바이크로드-인도)는 매우 쾌적하고, 오늘따라 아름다운 벚꽃이 장관을 이루었다. 한강 종주 자전거길은 남한강의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도로이다. 폭 4.5m로 양방향 자전거가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특히 남한강 자전거길을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고 기존의 철로와 역사, 터널, 양수리 북한강 철교를 그대로 살린 점이 특징이다. 오늘 따라 갈산공원에서부터 이어지는 남한강 강변길은 온통 벚꽃이 피어 화사한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물소리길’로 명명된 강변의 길은 직선으로 뻗어 있다. 강안의 버드나무에도 물이 올라 노릇노릇 생명의 기운이 넘친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길은 멀고 아득하다. 귀향길 재현단의 발걸음은 여전히 진중하다!
▶ 강변 길의 좌측에 있는 강변녹지공원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를 지나 도곡촌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직선의 길이다.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4월의 봄 햇살이 화사하다. 바람결이 청신하다. 남한강에 유입되는 ‘흑천’의 다리를 건넜다. 흑천은 한강기맥 금불산에 발원하여 광탄—용문을 경유하여 이곳 양평읍 회현리에서 남한강에 유입되는 지천이다.
양평 개군면 강변 물소리길
▶ 흑천 하구의 다리[현덕교]를 건너면 양평군 ‘개군면 강변길’이다. 다시 이어지는 직선의 길이다. 참으로 길고 긴 제방 길이다. 남한강 강안에 즐비한 수양버드나무는 노릇노릇 은은하게 물이 오르고 있었다. 강 쪽으로 휘어진 벚나무 가지에 하얀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어 그 정취를 더해 주었다. 귀향길 재현단이 자연스럽게 대열을 이루어 걷는 동안, 전 안동문화원 이동수 원장이 휴대용 마이크를 잡고 ‘도산구곡’에 대하여 해설하고, 영양 주실마을 출신 조성진이 퇴계 선생을 흠모하여 지은 *〈도산별곡〉를 특유의 가락으로로 창수했다. —*〈도산별곡〉은 이 글의 뒷부분에 부기(附記)한다.
양평 개군면 앙덕리 ‘고인돌소공원’
▶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에는 고인돌소공원이 있다. 양덕리 남한강 강안사구의 사질충적대지 내에서 발견된 지석묘(支石墓)는 총 5기로, 1974년 팔당댐수몰지구에 대한 문화재 조사를 할 때 1기가 발굴되어 연세대박물관에 옮겨졌고 이후 서울지방국토관리청에서 앙덕—창대제의 제방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단국대학교박물관 팀이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4를 발굴·조사하였다. 이들 지석묘들은 대체로 상면이 평평한 개석이고 그 아래 자갈돌로 부분적인 받침을 한 형태로, 분포상 유물의 산포범위가 넓고 퇴적상황을 고려할 때 지하에 유구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선이 매운 높은 지역이다.
유적 및 유물의 시기 또한 신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등 매우 넓은 시간 폭을 가졌으나 그간 앙덕리 일대 남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층위의 교란이 심하여 유구와 유물이 많이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1998년 마지막 발굴 후 앙덕리마을회관 앞에 방치되어 있던 고인돌을 주민의 편의를 도모하고 후손들에게 전통문화의 명맥과 문화재의 중요성을 교육하기 위해 2003년 현 위치로 복원한 것이다.
양평 개군면 하자포리의 긴 강변길
▶ 귀향길 재현단은 앙덕리에서부터 강안을 떠나 ‘구미리고개’를 넘어간다. 길은 공사 중이어서 무척 어수선하고 팍팍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의 걷기로 인해 무거운 발걸음이 경사진 고개를 넘어가는 일은 실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고개를 넘어오면서 대열이 흩어지고 사람들의 간격이 많이 벌어졌다. 구미리 앞을 지나고 나서 강안의 길로 들어섰다. 멀리 아, 이포보의 구조물이 아련하게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군면소재지에는 추읍산(582m)에서 발원한 향리천이 남한강에 유입된다. 하구 둔치에는 체육공원이 있고 주변의 습지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향리천 다리[하자포교]를 건너 다시 남한강 강변길로 들어섰다.
▶ 다시 아득하게 이어지는 직선의 길이다. 길의 바로 옆에 연해 있는 강물은 팔당댐으로 인해 호수처럼 머물러 있다. 4월의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재현단 선비들의 긴 그림자를 만들고 강안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하얀 도포자락을 물결치게 했다. 2차로의 바이크로 주변에는 띄엄띄엄 노란 산수유가 곱게 피었고, 또 순백의 꽃을 눈부시게 피운 거대한 목련나무가 길손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준다. 저만큼 남한강 수면 위에 이포보의 구조물이 보이는데, 거리는 쉬 좁혀지지 않았다. 오후의 강변 길은 멀고도 멀었다.
배개나루[梨浦] — 이포보(梨浦洑) 전망대
▶ ‘배개나루’는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를 잇는 나루였다. 이포(梨浦)라고도 한다. 이 나루는 이포대교가 만들어지면서 사라졌고, 지금은 그 가까운 곳에 이포보(梨浦洑)가 설치되어 있다. 밝은 햇살이 내리는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이포보 전망대(사각정)에 도착했다. 일행은 귀향길 지원단 버스를 이용하여 강 건너 기천서원을 탐방, 참배했다.
기천서원(沂川書院)
▶ ‘기천서원(沂川書院)’은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 있는 서원이다. 남한강 물이 가슴에 안겨드는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 기천(沂川)은 공자의 제자 증점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여강’ 선비들의 근원처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 기천서원은 1580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뒤에 회재 이언적, 수몽 정엽, 치재 홍인우, 오리 이원익, 택당 이식, 나재 홍명구, 기천 홍명하 등 모두 8분의 유현(儒賢)을 봉헌하였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은 김안국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한 인물로, 양재역벽서사건으로 강계에 안치되었다가 타계한 후 1611년에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수몽 정업은 정인홍이 득세한 기간 중에 기자헌과 불화로 동래에 유배되었으며, 오리 이원익(1547~1633)은 광해군 당시 극언을 해 홍주로 귀향갔다가 풀려난 뒤 여강에 우거하였다. 나대 홍명구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 2,000명을 거느리고 김화에서 항전하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택당 이식은 1642년 김상헌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여 중국의 심양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이와 같이 기천서원은 절의(節義)가 높은 인물들을 모셨다. 이호지방의 정신적 구심역할을 하였다. 홍명하는 명문 남양 홍씨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현종 때 영의정에 오는 인물이다. — 기천서원은 1871년 훼철되었다가 1937년에 복설되었다.
▶ 2022년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퇴계 선생과 인연이 깊었던 김안국과 홍인우의 위패가 봉안된 기천서원을 찾아 예를 갖추어 참배했다. … 오늘 기천서원에는 이광호 박사를 비롯하여 나대용 박사·장학섭 박사·강희복 박사 그리고 윤재철 님 등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동수 원장이 대표로 방명록에 서명하고, 이어서 의관을 정재한 선비들이 내삼문 안의 사당으로 들어가 분향하고 예(禮)를 올렸다. 나머지 일행은 사당의 아래, 마당에서 예를 갖추었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 조선 인종(仁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은 의성 김씨의 대표적인 학자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조광조, 기준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고, 1507년(중종 2년) 문과 중시에 급제했다.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로 전라도관찰사로 있다가 기묘사화 때 대사헌 조광조의 일파라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관직은 대사헌, 대사간, 예조·병조의 판서, 양관대제학, 좌찬성, 판중추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했다.
김안국은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병법·국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 《모재집(慕齋集)》, 《모재가훈(慕齋家訓)》 등의 저서와 〈이륜행실(二倫行實)〉, 〈창진방(瘡疹方)〉 등의 편·저서를 남겼다. 조광조와 같이 지치주의(至治主義, 인간 세상을 하늘의 뜻이 펼쳐진 이상 세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교 교리)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의 문하에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미암(眉菴) 유희춘(柳希春) 등이 배출되었다.
모재 김안국의 ‘부조묘(不祧廟)’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 있다. 부조묘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어야 하지만 공훈이 있는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퇴계와 모재의 특별한 인연
◎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일파의 명신들이 죽임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이곳 경기도 ‘이호촌(梨湖村)’에 내려와 거주하며 후진을 가르쳤다. 그리고 잠시 서울생활을 도모하다가 1527년 이후 이호나루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는 이호(梨湖) 부근에 범사정(泛槎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당대의 명사인 이장곤, 신광한 등과 교유했다. 윤근수가 쓴 《월정만록》에 따르면, 퇴계가 33세 때 도산 귀향길에 들른 곳이 바로 이 범사정이었다. 당시 두 분의 만남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당시 모재 김안국은 사림파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사림은 연산군 때 혹독하게 사화를 당하고 나서, 중종 때에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이 조정에 등장하여 군민(君民)을 교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때 향촌 교화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모재 김안국이었다. 김안국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이륜행실도〉〈여씨향약〉 〈정속〉〈삼강행실도〉 등을 출판하고《소학》등을 강론하여 백성교화에 전범이 되었다.
사실, 오래 전에 김안국은 퇴계 형제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온계 22살, 퇴계 17세 때인 1517년 당시 이름을 날리던 김안국은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안동에 부임했는데, 이때 퇴계의 숙부인 송재(松齋)를 방문했다. 모재는 본래 퇴계의 부친인 찬성공 이식(李埴)과 숙부인 송재와 교분이 두터웠기에, 송재에게 인사차 왔다가 온계와 퇴계 두 형제를 보고 “기지(器之, 이식의 자)는 죽지 않았네! 기지는 죽지 않았어!”라고 칭찬을 하면서 온계와 퇴계에게 책과 양식을 주어 청량산에 가서 공부하도록 했었다.
그로부터 16년 뒤 1534년 가을, 33세의 퇴계(1501~1570)는 성균관에 수학하다가 향시에 응시하기 위해 고향 가는 길에 여기 이호촌에서 김안국(1478~1543)을 만났다. 그때 퇴계와 동행한 사람이 충재 권벌(1478~1548)이었다. 당시 충재는 기묘사화의 화를 입어 14년간 야인 생활을 하다가 재기용되어 외직인 밀양부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부임하러 가는 길에 이호에 우거하고 있는 모재를 만난 것이다. 향산 이만도에 의하면, 이때 월연 이태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월연은 김안국과 아주 절친한 사이다. 이호에서 모재를 만난 이후 퇴계는 훗날 “비로소 ‘정인군자’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극찬하였다. 이때 함께 자리한 모재는 물론이고, 권벌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던 인물이고 이태 역시 기묘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이었다. 모두 뜻이 상통하는 사이로 당시 퇴계의 입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퇴계는 학문적으로 정지운(鄭之雲)을 통해 모재(慕齋)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퇴계철학의 바탕이 된 〈천명도설(天命圖說)〉이 모재의 제자인 정지운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재가 무인년(1518) 사은사 부사가 되어 북경에 가서 가져온 《주자대전》, 《주자어류》, 《논어혹문》, 《맹자혹문》, 《연평답문》, 《이정전도수언》 구준의 《가례의결》 및 《고금표선》 등은 퇴계를 비롯한 후학들의 학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정순우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p.100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
◎ 기천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에 퇴계 선생과 아주 각별한 우정을 나눈 인물이 치재 홍인우(1515~1549)이다. 홍인우는 중종 10년(1515) 홍덕연(洪德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홍덕연은 유숭조(柳崇祖)와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수학하고, 젊은 날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공부했던 인물이다. 그는 1530년 대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 홍인우는 자가 응길(應吉)이고, 처음 호(號)는 경재(敬齋)였으며 뒤에 치재(耻齋)로 바꾸었다. 1537년(중종 31)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대과(大科)를 단념하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한 처사형(處士型) 학자이다. 그는 25세 때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고, 주로 서경덕의 제자인 허엽(許曄)·박순(朴淳)·박민헌(朴民獻) 등과 교유하였기 때문에, 학술사에서 서경덕의 제자로 분류된다. 택당 이식도 그가 서화담의 제자임을 증언했다.
그러나 그는 기묘사화 이후 충주에서 강학하였던 김안국·이연경(李延慶)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연경은 홍인우와 먼 친척관계에 있었고, 절친했던 친구인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과 동생 홍인지(洪仁祉)는 모두 이연경의 제자들이다. 또한 홍인우는 38세에 처음 이황을 만난 이후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서간을 주고받으며 누차 학문을 토론하였기에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이황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퇴계는 제자로 자처하는 그를 좋은 친구로 여겨 교유했지만 기를 이로 아는 결점이 있다고 지적하여 학문적으로 거리가 있음을 밝혔다. 퇴계는 사상적으로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이라도 학문적인 깨우침이 있다면 종유를 마다하지 않았다. 홍인우는 1553년 10월 부친상을 당하였고 상을 치르다 병을 얻어 1554년(명종 9) 11월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퇴계는 그것을 매우 애석해 했다. 저서에 《치재유고(恥齋遺稿)》, 《관동록(關東錄)》이 있다.
퇴촌(退村) 홍진(洪進)
홍진(洪進, 1541~1616)은 치재 홍인우(洪仁祐)의 아들이다. 광해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 자는 희고(希古), 호는 인재(認齋), 또는 퇴촌(退村)이다. 젊은 시절 아버지 홍인우가 사사했던 퇴계선생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로 등용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좌승지에 올라 선조의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이듬해 환도하고 염철사(鹽鐵使)가 되어 경기·황해·충청·전라도 해변의 소금을 전국 각지에 보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것을 진언하였다. 1595년(선조 28) 대사헌이 되어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겸하였으며, 이후 동지중추부사·이조판서·우참찬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604년(선조 37) 판의금부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609년(광해군 1) 관상감제조를 제수 받았으나 북인(北人)이 집권하자 곧 사퇴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단민(端敏)이다. 저서로 《퇴촌유고(退村遺稿)》가 전한다.
하루가 저무는 여강(麗江)
453년 전 오늘, 이곳 이호에서 머무신 퇴계 선생을 생각하며
▶ 오늘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국수역에서 출발하여, 양평군의 남한강 강변길[물소리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은 남한강 종주의 바이크로드로 조성된 길이어서 아주 산뜻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4월의 하늘은 청정하고 햇살은 맑았으며 강역의 공기는 신선했다. 국수역을 출발한 퇴계선생의 귀향길 재현단은 복포리를 지나 ‘기곡터널’—중앙선 옛 아신역(‘아신갤러리’)—오빈리의 ‘감호암’—천주교 ‘양근성지’—‘갈산공원’—‘양덕리 지석묘’—‘구미리고개’—개군면 ‘강변길’을 경유하여 이포보 전망대 이르렀다.
그리고 재현단 일행은 모재 김안국을 위시하여 이호8현(梨湖八賢)을 모신 기천서원을 탐방하여 향을 피우고 참배했다. 기천서원의 송림에서 바라보는 여강[여주의 남한강]은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다웠다. 이포보로 인해 여강은 장대한 호수를 이루고 있다. 오후의 봄 햇살이 은연히 여강을 빛나게 했다.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며, 453년 전 오늘, 이곳 이호에서 머무신 퇴계선생을 생각하며 오늘의 일정을 마쳤다. 비록 다리가 아프고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한결 상쾌했다. 참으로 은혜로운 하루였다. 긴 여정을 함께 한 귀향길 재현단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 [계속]
* 도산별곡(陶山別曲)1) *
― 전 안동문화원장 이동수 박사가 귀향길 여정에서 전문을 암송하여 창수하신 노래
주1) 조선조 중·후기에 영양 주실의 조성신(趙星臣)이 중년에 눈이 어두워지자 젊어서 도산서원의 별과(別科)에 참여했던 사실을 회상하면서 도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퇴계선생에 대한 경모와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술회한 가사이다. ―불원 이동수 해설
태백산(太白山)2) 나린 용(龍)3)이 영지산(靈芝山)4)이 높아서라.
황지(黃池)5)로 솟은 물이 낙천(洛川)6)이 맑아서라.
퇴계수(退溪水)7) 돌아들어 온계촌(溫溪村)8) 올라오니,
노송정(老松亭)9) 높은 집에 대현(大賢)10)이 나시셨다.
공맹(孔孟)11)의 도덕(道德)이요. 정주(程朱)12)의 연원(淵源)13)이라.
문정공로 날로 달라 서당(書堂)을 정(定)하시니,
일구(一區) 도산(陶山)이요 그 곁에 명승지(名勝地)라.
오호(於乎)라 우리선생 이곳에 장수(藏修)14)하사,
당년(當年)의 장구지(杖屨地)15)요 후세(後世)에 조두소(俎豆所)16)라.
연말(年末) 후학(後學)이 인읍(隣邑)17)이 생장(生長)하야,
문정(門庭)은 못 미처도 강산(江山)은 지척(咫尺)이라.
유서(遺書)를 통독(通讀)하고 고풍(高風)을 상상(想像)하야,
백리(百里) 연하(煙霞)를 지점(指點)함이 오래더니,
임자년(壬子年) 춘삼월(春三月)에 성상(聖上)의 은전(恩典)으로,
예관(禮官)이 명(命)을 받아 묘하(廟下)에 치제(致祭)하고18),
다사(多士)를 함께 모아 별과(別科)를 보이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지록 망극(罔極)하다.
교남칠십주(嶠南七十州)19)에 뉘 아니 흥기(興起)하랴.
서동(書童)을 앞세우고 장보(章甫)20)의 뒤를 따라,
향례(享禮)를 참례(參禮)하고 대향(大享)을 마친 후에,
시장(試場)에 들어가서 무사(無事)히 성편(成篇)21)하고,
월야(月夜)에 퇴좌(退坐)하야 신세(身世)를 생각(生覺)하니,
공명(功名)엔 염(念)에 없어 물색(物色)이나 구경(求景)하자.
농운정사(隴雲精舍)22) 돌아들어 암서헌(巖栖軒)23)에 들어가니,
문전(門前)의 살평상(平床)은 장석(丈席)이 의의(依依)24)하고,
궤중(櫃中)25)의 청려장(靑藜杖)26)은 수택(手澤)27)이 반반(班班)하다.
풍채(風采)를 뵈옵는 듯 경해(謦咳)28)를 듣잡는 듯,
심신(心神)이 숙연(肅然)하야 비린(鄙吝)29)이 절로 없다.
완락재(玩樂齋)30) 시습재(時習齋)31)와 관란헌(觀瀾軒)32) 지숙료(止宿寮)33)와,
절우사(節友社)34) 정우당(淨友塘)35)을 차차(次次)로 둘러본 후(後),
몽천수(蒙泉水)36) 떠마시고 유정문(幽貞門)37) 돌아나와,
곡구암(谷口巖)38) 가던 길로 운영대(雲影臺)39) 올라 앉아,
원근(遠近) 산천(山川)을 일안(一眼)에 굽어보니,
동취병(東翠屛) 서취병(西翠屛)40)은 봉만(峰巒)도 기이(奇異)하고,
탁영담(濯纓潭)41) 반타석(盤陀石)42)은 수석(水石)도 명려(明麗)하다.
금사옥력(金砂玉礫)43)은 처처(處處)에 버려 있고,
벽도홍행(碧桃紅杏)44)은 면면(面面)이 자잣으니,
용문팔절(龍門八節)45)은 보든 못 하였으나,
무이구곡(武夷九曲)46)인들 예서야 더할 손가.
서대(西臺)를 다 본 후(後)에 동대(東臺)에 올라앉아,
상하(上下)를 살펴보니 이름 좋다 천연대(天然臺)47)야.
운간(雲間)의 저 솔개야 너는 어찌 날았으며,
강중(江中)에 저 고기야 너는 어찌 뛰노나요.
우리 성왕(聖王) 수고하샤 작인(作仁)하신 여화(餘化)로다.
형용찬란(形容燦爛)48) 활발발지(活潑潑地)49) 비은장(費隱場)50)이 여기런가.
창강(蒼江)에 달이 뜨니 야색(夜色)이 더욱 좋다.
상류(上流)에 매인 배를 하류에 띄워 놓고,
사공(沙工)은 노(櫓)를 젓고 동자(童子)는 술을 부어,
초경(初更)에 마신 술이 삼경(三更)에 대취(大醉)하니,
주흥(酒興)은 도도(陶陶)하고 풍류(風流)는 소소(蕭蕭)로다.
그 제사 고쳐 앉아 요금(瑤琴)을 비겨 안고,
냉냉(冷冷)한 옛 곡조(曲調)를 줄줄이 골라내어,
청량산(淸凉山) 육육가(六六歌)51)를 어부사(漁父詞)52)로 화답(和答)하니,
이리 좋은 무한경(無限景)을 도화(桃花) 백학(白鶴) 네 알 소냐.
춘풍무우(春風舞雩)53) 언제인고 추월한수(秋月寒水) 비치었다.
십팔절(十八節) 칠언시(七言詩)와 이십육절(二十六節) 오언시(五言詩)를,
장장(章章)이 뽑아내어 자자(字字)이 외운 후(後)에
강산(江山)을 하직(下直)하고 편주(扁舟)를 도로 대어,
백학(白鶴)을 다시 불러 정녕(丁寧)이 언약(言約)하되,
구추(九秋) 단풍절(丹楓節)에 또 한번 놀자 더니,
연광(年光)은 덧이 없고 조물(造物)이 샘이 별나.
우연(偶然)히 얻은 병(病)이 거연(居然)이 십년(十年)이라.
공산(空山)에 홀로 누워 왕사(往事)를 생각하니,
청춘(靑春)에 못다 놀아 백수(白首)에 여한(餘恨)일세.
이 뜻으로 노래지어 시시(時時)로 풍영(諷詠)하니,
백년(百年) 광감(曠感)54)을 일편중(一篇中)에 붙이노라.
아마도 쉬이 죽어 구천(九泉)에 내려가서
선생을 뵈온 후(後)에 이 말씀을 사뢰리라.
주 2) 태백산 : 봉화 소천면과 삼척 상장면 사이의 산으로 태백산맥의 주봉으로 해발 1,561m
3) 용 : 산맥이 뻗어나간 줄기
4) 영지산 : 온혜에서 마주 보이는 높은 산으로 퇴계선생께서 초년에 호를 영지산인으로 하였음.
5) 황지 :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에 있는 연못으로 낙동강 발원지.
6) 낙천 : 도산서원 앞에 흐르는 강, 즉 낙동강을 말함
7) 퇴계수 : 상계 앞을 흐르는 개천,
8) 온계촌 :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퇴계선생 태생지
9) 노송정 : 퇴계선생께서 태어나신 고택, 퇴계선생의 할아버지(諱 繼陽)의 당호
10) 대현 : 크게 어지신 어른, 퇴계선생을 지칭함
11) 공맹 : 유학의 종장인 공자(孔子) 와 맹자(孟子)를 말함
12) 정주 :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儒學者) 정호(程顥/명도), 정이(程頤/이천) 형제와 주희(朱喜/회암)를 말함
13) 연원 : 학문의 근원, 사물의 근본
14) 장수 : 착한 본성을 간직하며 덕행을 닦음, 책을 읽고 학문에 힘씀
15) 장구지 : 지팡이와 집신을 신고 다니면서 선생이 머무른 자취
16) 조두소 : 제사음식을 담는 그릇이 있는 장소, 즉 제사를 모시는 장소
17) 인읍 : 이웃고을 영양 주실을 말함
18) 치제 : 도산별과시 정조 임금이 신하를 보내어 퇴계선생께 제사 올리는 의식
19) 교남칠십주 : 영남지방(경상좌우도)의 칠십고을 말함
20) 장보 : 유생(儒生) 선비
21) 성편 : 답안지 글 한편을 완성하는 것
22) 농운정사 : 도산서원 정문에 들어 왼쪽 건물로 제자들이 공부하던 곳,
23) 암서헌 : 도산서당 마루이름, 암서(巖栖)는 세속을 떠나서 산다는 뜻,
24) 의의 : 선생께서 자리하시던 모습이 어렴풋하다.
25) 궤중 : 지팡이를 보관하던 나무상자 속
26) 청려장 : 일년생 관옆식물로 맹아주 또는 도토라지라고 하고 퇴계선생께서 생시에 사용하시던 지팡이
27) 수택 : 손때가 묻어 생긴 윤기
28) 경해 : 윗 사람을 공경하여 그의 기침소리나 말씀을 이르는 말
29) 비린 : 어리석고 인색함
30) 완락재 : 선생께서 기거하시던 도산서당의 작은 방,
31) 시습재 : 농운정사 동쪽의 마루,
32) 관란헌 : 농운정사의 서쪽마루 이름, 관란(觀瀾)은 큰 물결을 관찰한다는 뜻,
33) 지숙료 : 농운정사의 방
34) 절우사 : 도산서당 동쪽 산기슭의 화단, 절우(節友)는 절개있는 친구로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일 컬음.
35) 정우당 : 도산서당의 뜰에 있는 작은 연못, 정우(淨友)는 연꽃을 일컫는 말,
36) 몽천수 : 도산서당 뜰 밖의 샘, 몽천(蒙泉)은 산밑에 나는 샘이라는 뜻이며 “바르게 가르치다”란 뜻이 있다.
37) 유정문 : 도산서당에 출입하는 사립문,
38) 곡구암 : 낙동강변에서 계곡을 따라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의 바위
39) 운영대 : 선생께서 즐겨 산책하시던 곳,으로 서원정문 서쪽의 조망대 천광운영대
40) 동·서취병 : 운영대에서 바라보면 동쪽과 서쪽으로 병풍같이 둘러쳐진 산봉우리.
41) 탁영담 : 천연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넓게 못을 이룬곳 ,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뜻,
42) 반타석 : 천연대 건너편 강 가운데 있는 넓은 바위, 반타(盤陀)는 넓적한 바위라는 뜻,
43) 금사옥력 : 금빛 모래와 옥같은 자갈
44) 벽도홍행 : 복숭아와 살구꽃
45) 용문팔절 : '용문팔절'이란 중국 하남성 낙양 '용문담'에 있는 '용문팔절탄'을 말하는데, 백거이의 '용문팔절'시를 회상하면서 도산서원앞 분강촌으로 구비쳐 내려가는 여울을 비겨서 말함
46) 무이구곡 : 주자가 만년에 거처하였던 중국 복건성에 있는 무이산의 아홉굽이의 이름다운 계곡
47) 천연대 : 서원 정문에서 동쪽 산기슭을 오르면 탁영담, 반타석, 동.서취병산을 바라볼 수 있는 조망대
48) 형용찬란 : 사물의 모양이 빛나도록 아름답다.
49) 활발발지 : 사물의 활기가 넘친 모양
50) 비은장 : 성인(聖人)의 도(道)가 두루 미친 곳
51) 청량산가 :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훤사하랴 못 잊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52) 어부사 : 강호의 즐거움을 노래한 농암(聾巖) 이현보 선생이 지은 연시조
53) 춘풍무우 : 봄바람과 여름에 기우제 지냄, 퇴계선생의 사시를 노래한 도산잡영의 시를 말함
54) 광감 :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데 대한 감회를 말한다.
* 조성신(趙星臣, 1765~1835)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요. 호는 염와(恬窩)이다. 1765년(영조 41)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英陽/ 당시 영양은 폐현 상태로 영해도호부에 속해서 주민들 불편이 심했다)에서 태어나 1792년(정조 16)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치른 별시(別試)에 참가하고 돌아온 뒤, 32세 때인 1796년 양쪽 눈이 멀었다. 이후 1835년(헌종 1) 죽을 때까지 향리인 영양 지역에서 은거하였는데, 작품으로는 《陶山歌》가 있는데, 조성신이 눈이 멀기 전 도산서원의 별시에 참가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눈이 먼 자신의 안타까운 현실을 빼어난 산수에 비유해 읊은 가사(歌辭) 작품이다. 《염와유고》와 《노계선생문집》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