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모든 고통과 상실을 끝낸다.
1.
용서가 보여주는 세상은 이러하니, 고통이 끝나고 상실이 불가능해지며 분노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공격이 사라지고 광기도 끝났다.
이제 도대체 어떤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상실이 지속될 수 있겠는가?
이제는 기쁨, 풍요, 자비, 그리고 가없는 베풂의 세상이 된다.
세상은 이제 너무도 하늘과 같아져서, 그 모습이 바뀌어 세상이 반영하는 참빛 안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간다.
따라서 신의 아들이 시작한 여정은 그가 출발했던 빛 안에서 종료된다.
2.
아버지, 저희 마음을 당신께 돌려드립니다.
저희는 저희 마음을 배반하였고, 사악한 쓰라림 속에 가두었으며, 폭력과 죽음의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당신 안에서, 당신께서 저희를 창조하신 대로 다시 쉬렵니다.
...
[예수의 추가 설명]
세상의 구원이 그대의 용서에 달려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미 일어난 것을 막기 위해, 그대가 무언가를 하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
많은 이가 재난이나 정치적인 소요 같은 것이 일어나면 행동을 취함을 본다.
행동을 취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이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증오와 판단으로 가득하다면, 그대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새로운 진동을 가져오려면, 용서의 실천이 그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곳에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
호전가들과 싸우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그들이 그대에게 사용하라고 가르친 것과 동일한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변화를 위한 매개체로서 다른 에너지를 사용하라고 가르친다.
바로 사랑이다.
그대는 용서의 실천을 통하여 모든 권능을 되찾으며, 그 힘을 무엇이든 이곳에서 모든 이의 경험을 향상시키기에 적합하다고 보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은 그대가 머물고자 하는 곳이 아닐 것이다.
상승 과정, 깨달음의 과정은 마침내 그대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갈 것이며, 그대는 다시는 이 세상에서 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우상을 좇느라 지쳤다.
그대는 그대가 사용했던 몸들과, 지금 가지고 있는 몸이 지겨워질 것이다.
몸이 싫증난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젠 충분해!”
그런 말은 환멸이 아니다.
우울이 아니다.
깨달음이다.
“나는 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이제는 특별한 종류의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
그대가 모두 마침내 도달하게 될 곳이지만, 용서가 그대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는 도구로서 사용하는 변형적인 실천이 되지 않는 한 이 지구에서의 전쟁은 지속될 것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집단적인 마음의 진동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가난한 자와 슬퍼하는 자와 고통 받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이 용서하는 장소가 되게 하라.
평화의 지복을 경험하고, 그대는 세상을 용서함으로써 세상에 기여함을 이해하라.
...
[알렌의 설명]
용서하지 않음은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이 묶이고, 굳어지고, 무장합니다.
마음은 어떤 사람을 내 마음 밖으로 몰아내느라 아파합니다.
용서는 그런 고통과 상실, 외로움을 끝냅니다.
용서가 모든 고통과 상실을 끝낸다고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 고통의 일정 부분은 용서하지 않음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고통이 용서하지 않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이 단지 용서하지 않음 때문인 것 같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형태의 바탕에 깔린 내용은 바로 용서하지 않음이다."
만약 내가 고통 받지 않고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면, 만약 내가 기적수업의 의미에 맞는 용서를 해서 죄는 없다는 것을,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면 분노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분노가 없다면 공격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용서를 주고받는다면 더 이상의 고통과 상실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기쁨, 풍요로움, 자비, 그리고 끊임없는 줌(giving)의 장소가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의 세상입니다.
예수는 심지어 십자가형을 받을 때조차 세상을 이런 식으로 봤으며, 자신을 비난하고 못 박은 이들에 대한 자비와 끊임없는 줌 외에는 마음에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실재 세상을 보는 것은, 갑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천사 같은 존재로 변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는 실재 세상을 보았으며,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통 받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더 이상 그의 몸과 동일시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몸은 살아있던 적이 없기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용서를 통해 실재 세상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온통 꽃이 뿌려진 영광스러운 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여전히 아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죽고, 자동차를 누가 훔쳐 가거나 집에 불이 나거나 실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된 마음은 상실을 보지 않을 것이며, 고통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위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점점 더 많은 마음들이 용서를 수용하고, 그 마음들의 물질적 반영들 또한 변형되어, 보다 평화롭고, 사랑 가득하며, 더 풍요로워지고, 친절함과 자비로 가득찰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반영이 변형되는 것은 일종의 부차적인 혜택이지 목표는 아닙니다.
신께 돌려드릴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드높아져 참된 지각에 도달할 때, 천국이 매우 가까워집니다.
세상은 세상이 반영하는 빛으로 빠르게 변형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내 마음을 신께 돌려드리려 합니다.
나 자신을 비통함에서 놓아주고, 내 마음을 폭력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풀어주려 합니다.
나는 오늘 신 안에서 휴식하려 합니다.
나는 오늘 나를 해치려는 것 같아 보이는 모든 것들을 용서하려 하며,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렵니다.
오늘 내가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평화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