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하일기 2권. 3권>>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돌베개.
나에겐 ‘남들’이 드물지만, 혹시나 있다면 그 남들에게 말하고 싶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책상에 앉아 독후 감상문을 쓰는 일은 결코 즐거워서 하는 일이 아니다. 누가 나에게 이것을 하라고 등떠밀지는 않았지만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이 시간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런 것 뿐이다.
이 책 표지 위쪽에는 개정신판이라고 박혀있다. 마치 중국음식점에 신장개업 문구와 비슷하다. 2009년에 출판한 이후 8년만에 다시 신장개업을 한 셈이다. 그동안 9쇄를 찍었다고 하니 그런대로 장사를 하였는데, 갑자기 개정신판 하였다. 역자의 의하면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시에 독서계의 베스트셀러였고, 수많은 필사본이 난립하였다고 한다. 역자는 1932년 박영철이 출판한 연암집에 수록된 열하일기를 번역의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를 학계에서는 ‘박영철본’이라 하고 학계에서도 표준으로 널리 인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영철본’도 윤색을 거친 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가원선생이 소장하다가 단국대에 기증한 /열하일기/ 초고본, 혹은 초고본 계열의 책이 2012년 영인(파일)되어 학계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역자가 신장개업을 한 까닭이다. 레시피가 약간 변했다고 신장개업 호들갑을 떨 것까지 있을까 싶지만, 학계에서는 작은 사건이 아닌 모양이다. 내 혓바닥과 위장만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처지에서는 원본이든 필사본이든 달콤하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생산자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는 의지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차이가 창조자와 소비자의 거리가 아닐가도 싶다. 박지원의 손자가 구한말의 박규수(1807-1877)인데 조부의 문집을 간행하자는 아우의 건의를 받았는데, 거절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당시까지 ‘금서’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 책이 당시의 기득권층이나 지배층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책이었고 한다. /열하일기/의 무엇이 못마땅했을까?
내친김에 저자와 역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할까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약력을 옮겨 본다. 박지원(1737-1805)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문명을 떨쳐 장래 나라의 文運을 잡을 인물로 촉망받았다. 그러나 타락한 정치 현실과 속물적 사회 풍기를 혐오하여 과거 시험을 통한 출세를 진작 포기하고, 창조적 글쓰기와 학문에 몰두, 당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하였고, 특히 선비 곧 지식인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일생동안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였다. 50세에 음직(신분 배경)으로 벼슬아치가 되었고, /연암집/, /열하일기/ /과농소초/등의 저서가 있고, 주옥과 같은 시와 산문 등이 있다고 한다.’ 박지원의 호가 연암인데 그 연유는 세상을 등지고 황해도 산골의 연암협에 칩거하여 호를 연암으로 하였다고 한다. 역자 김혈조는 1954년 경북 선산 출생, 성균관대 한문학과에서 /연암 박지원의 사유양식과 산문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누구나 검색하면 쉽게 알 수 있는 이런 약력을 너절하게 써보는 까닭은 생산자에 대한 예의 차원이다. 지금은 소비자가 왕인 세상이라 댓글이나 상품평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소비자의 구미에 맞지 않아 소비되지 못하는 상품은 가치가 없다지만, 그 어떤 물건도 생산자가 없는 상품은 없다. 예전에 잠깐 아주 사소한 일상용품을 제조하는 공장에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사소한 제품 한 개를 만드는데도 수십 번의 단계를 거쳤다. 터치 한 번으로 내일 아침 식료품을 손쉽게 받을 수 있지만, 사실 그 식품이 집 앞 출구까지 오기까지는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비애와 울분이 들어있을 게 틀림없다.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다. 오늘만은 소비자로서 내 감상과 품평이나 댓글을 달기보다는 생산에 관심을 조금 더 갖고 싶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내가 먹는 두유 설명란에는 나트륨 5%라고 쓰여 있다. 이 나트륨이 어디서 생산되었고,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구의 손을 거쳐왔으며, 어떤 유통 경로를 거쳐 나에게까지 도달하였는지 등을 추적하고 싶다. 내게 추적할 힘과 지식이 없다면 제품 설명문이라도 베끼고 싶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아마 날씨 탓이려니.
1권은 기행문에 가까웠는데 2권과 3권은 ‘모든 것’들이 쓰여 있다. 처음 사행의 목적지는 청나라의 수도 북경이었다. 강희황제의 칠십 생일에 맞춰 당도하기 위해 천신만고를 거쳐 북경에 당도하였는데. 황제는 열하로 옮겨갔고, 조선 사신의 행차는 다시 열하까지 가야만 했다. 열하는 지금의 허베이서 청더(승덕)이다. 1권은 이 여정을 기록하였다. 계속 말 위에서 견뎌야 했고 험난한 산악과 지형을 뚫고 급히 여정을 서둘러야 했기에 기행이 우선이었다. 먹을 갈고 붓을 놀릴 여가가 없어 박지원은 말 위에서 무형의 문자를 수도 없이 지우고 썼고, 숙소에 도착하여 비로소 정리 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2권과 3권은 황제 접견 후 열하에서 머물수 있었고, 북경에서도 체류할 수 있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쓸 수 있었지 않나 싶다. 1권은 이동이라면 2권 3권은 정주의 글쓰기가 아닐가 싶다. 당시 조선에서 북경까지 갔었는데, 열하까지 다녀온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박지원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이었던 셈이다. 일반 독자들은 1권과 2.3권의 일부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고, 읽는 것 자체를 마다하지 않거나 시간이 넉넉한 독자는 다 읽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등산로를 통해 산행을 하는 것과 등산로를 벗어나 가시에 찔리고 길을 잃고 헤매면서 산을 즐기는 차이가 아닐가 싶다.
누구나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고 하고, 누구는 ‘기념비적인 저술‘, ’민족문학사의 최고의 경지‘라고도 하지만, 나는 평가하거나 비평할 깜냥이 없다. 배우고 익히다 보면 언젠가는 안목이 생기길 바라긴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가 그림이나 음악이 있더라도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지 않으면 그 진면목를 알 수가 없다.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아는 안목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이 아니라, 공부나 수련을 통해 배우고 익혀야 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2.3권은 ’모든 것‘ 혹은 온갖 잡동사니를 쓰고 기록했다. 박지원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단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대단한 기록자이자 집념이 느껴진다. 나는 어줍잖은 댓글을 하나 첨가하기보다는 대신 목차를 옮겨적어 보고 싶다. 변덕 많고 믿을 수 없는 내 혓바닥보다 제품설명서를 첨부하는 것이 나아보인다. 때로는 제품설명서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가치있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한 것에 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2권 /태학관에 머물며/,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 /열하에서 만난 친구들/, /라마교에 대한 문답/,/반선의 내력/ /반선을 만나다/, /사행과 관련된 문건들/, /천하의 대세를 살피다/, /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 이야기/, /곡정과 나눈 필담/ /피서산장에서의 기행문/ 3권 /요술놀이 이야기/, /피서산장에서 쓴 시화/, /장성 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옥갑에서의 밤 이야기/, /북경의 이곳저곳/,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 /적바림 모음/, /동란재에서 쓰다/, /의약 처방기록/, /양매죽사가에서 쓴 시화/, /중국인의 편지글들/.
나는 한 달 동안 잘 알지도 못하는 글을 읽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효율적으로 쓰지 않았고, 들인 노력에 비해 성적은 초라하다. 그러나 나에게 시간은 효율적이나 성과를 내는 수단이 아니다. 단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동안 /열하일기/를 읽었다. 그뿐이다. 내게는 성과나 효율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다. 익숙한 집 뒷산만 오르다가, 그동안 지리산 이곳저곳을 헤매다 온 기분이다. 동네 실내 수영장에서 뽐내다가 태평양에서 허우적대다 온 것도 같다. 혹시 모르지, 이제 동네 뒷산을 지리산처럼 느끼고 즐길 수 있을지도. 당시 청나라는 강희 황제 치하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다고 한다. 박지원은 청 문명의 위대함을 똥과 깨진 기와에 있다고 하였다. 위대한 통찰이다.. 박지원이 우리 시대에 여행을 한다면 그는 높은 빌딩과 화려한 랜드마크에 넋을 잃을까 아니면 우리 시대의 똥과 깨진 기와를 통찰해 낼까?
첫댓글 ㅡ그동안 /열하일기/를 읽었다. 동네 실내 수영장에서 뽐내다가 태평양에서 허우적대다ㅡ라는 표현을 보니 책을 읽는동안 박지원과 하나가 되다 돌아온 사람 같습니다!
먼 책여행을 다녀오셨군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세 어제 오늘 이틀의 시간을 보내봤습니다.
또 방문해야 될것같아요.
https://cafe.daum.net/goodinfo/LK4K/358?q=%EA%B5%AD%EB%A6%BD%EC%A4%91%EC%95%99%EB%B0%95%EB%AC%BC%EA%B4%80%203%EC%B8%B5%20%EB%B6%88%EA%B5%90%EC%A1%B0%EA%B0%81%2C%20%EA%B8%88%EC%86%8D%EA%B3%B5%EC%98%88%2C%20%EB%8F%84%EC%9E%90%EA%B3%B5%EC%98%88%20%EB%8B%B5%EC%82%AC&re=1
작가의 생활이 묻어 있는 글이라 읽기가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힙니다. 자연스럽게 쓴 글이라 무겁거나 걸림이 없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