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베스처럼 얌전하고 조용한 성품을 가진 아이들이 많다.
그런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필요해질 때까지 구석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면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언제나 기분 좋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 간다.
벽난로 근처 작은 귀뚜라미가 지저귐을 멈추고, 사랑스럽고 햇살처럼 화창한 존재는 사라져 정적과 그림자만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아이의 존재감을 깨닫는다.
=====
“옛날에 어린 여자애들 네 명이 살았어.
그 아이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이 충분했고, 마음을 달래주고 기쁘게 해주는 것도 많았어.
다정한 친구들도 있고, 사랑을 주는 부모님도 있었어.
하지만 아이들은 만족하지 않았지.
아이들은 심성이 착하고 훌륭한 결심도 여러 차례 했지만, 그 결심을 잘 지켜나가지는 못했어.
이미 많은 걸 가졌고 충분히 재미나게 살 수 있는데도 툭하면
‘우리한테 이게 있으면 좋을 텐데’ 라든지 ‘우리가 저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말을 했지.
아이들은 한 노파를 찾아가 행복해질 수 있는 주문을 가르쳐달라고 했어.
노파는 ‘인생이 불만족스러우면 너희가 받은 축복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라’ 하고 조언했지.
분별 있는 아이들이라 노파가 해준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단다.
아이들은 자기네가 지금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를 깨닫고 깜짝 놀랐어.
첫 번째 아이는 아무리 부자라도 수치와 슬픔을 모르고 살 수는 없다는 걸 깨우쳤어.
두 번째 아이는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자신은 젊음과 건강, 선한 영혼을 갖고 있으니, 안락한 생활을 즐기지도 못하고 툭하면 짜증을 부리는 병약한 노부인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임을 알게 됐어.
세 번째 아이는 식사 준비를 돕는 게 재미없기는 해도 먹을 걸 구걸하러 다니는 것보다는 덜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네 번째 아이는 홍옥수 반지가 훌륭한 처신만큼 가치 있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네 아이는 불평불만을 그만두고 이미 받은 축복을 즐기면서 그 축복을 계속 누릴 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기로 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축복이 늘어나기는 커녕 이미 받은 축복도 사라질 수 있으니까.
내가 보기엔 그 아이들은 노파가 해준 충고를 받아들여서 실망하거나 후회하진 않았을 것 같구나.”
=====
“네 아버지 덕분에 버텨냈어, 조.
네 아버지는 인내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
의심을 품지도 불평하지도 않아.
늘 희망을 갖고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유쾌하게 결과를 기다리지.
그래서 그렇지 않은 자들은 네 아버지 앞에 서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돼.
네 아버지는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 주면서, 어린 딸들이 가졌으면 하는 모든 미덕들을 내가 먼저 갖추고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깨우쳐줬어.
나보다 너희를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더 쉽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어.
날카롭게 말을 하면 너희가 놀라는 표정을 보면서, 내가 이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지.
너희 본보기가 되려는 노력에 대한 가장 달콤한 대가는 바로 내 아이들의 사랑과 존경, 믿음이야.”
=======
“나는 내 딸들이 아름답고, 재주 많고, 선량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
남들에게 존경과 사랑과 존중을 받으면서 행복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좋은 사람을 만나 현명하게 결혼을 하고, 유익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길 바라고 있어.
하느님이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을 조금만 겪게 하시면 좋겠어.
좋은 남자를 만나 짝이 되어 사랑을 받는 건 여자가 누릴 수 있는 큰 행복 가운데 하나거든.
내 딸들이 그런 아름다운 경험을 하길 바란단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메그.
네겐 그런 미래를 꿈꾸면서 기다릴 권리가 있어.
넌 그런 미래에 현명하게 대비를 해야 해.
행복한 순간이 왔을 때, 그 순간을 감당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사랑하는 딸들아, 너희가 잘살기를 바라지만, 속물적으로 사는 건 원치 않아.
단순히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해서 멋진 집에 산다고 행복하진 않거든.
사랑이 결여된 집은 진정한 집이라고 할 수 없어.
돈은 생활하는 데 필요하고 귀중한 것이지.
잘 사용된다면 고귀한 것이기도 해.
하지만 너희가 매사에 돈을 우선시하면서 돈에 얽매여 사는 걸 바라지 않아.
자존심과 마음의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왕좌에만 앉아 있는 여왕보다는 가난하더라도 행복하게, 사랑받고 만족스런 삶을 사는 편이 나아.”
“벨 얘기로는 가난한 집 여자애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기회를 잡지 못할 거래요.”메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혼자 살면 되지.” 조가 용감하게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조.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아내가 되거나 남편감을 찾으려고 경박스럽게 구는 여자로 살기보다는 행복한 독신으로 사는 게 낫지.”
마치 부인도 단호하게 말했다.
“괴로워할 거 없어, 메그.
가난은 진실한 연인을 가로막지 못해.
지금 최고로 명예로운 귀부인으로 살고 있는 분들중에는 가난한 집안 출신인 분들도 있어.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분들이라 좋은 사람들과 짝을 이룰 수도 있었고, 독신으로 늙을 필요가 없었던 거야.
시간이 알아서 하도록 맡겨두렴.
이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 보면 나중에 청혼을 받아 네 가정도 행복하게 꾸려갈 수 있을 거야.
청혼을 받지 못해도 이 집에서 만족하고 살면 돼.
엄마와 아빠는 너희가 언제든 속을 털어놓은 수 있는 좋은 친구라는 것만 명심하렴.
결혼을 하든 혼자 살든 너희는 우리 인생의 자부심이고 위안이야.”
======
“좋아! 그럼 실험은 이쯤 해두자.
이 실험을 다시 해야 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고 극단으로 노예처럼 일만 하고 살아서도 안 돼.
규칙적으로 일을 하고 쉴 땐 쉬어야지.
하루하루를 유익하고 즐겁게 보내면서, 시간의 가치를 잘 알고 활용할 줄 알면 되는 거야.
그래야 젊은 날이 기쁨으로 가득하고 노년이 돼서도 후회가 적어.
가난하더라도 아름답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면 돼.”
=======
돈은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지만 가난도 장점이 있다.
가난의 장점 중 하나는 머리나 손으로 열심히 일한 대가를 거머쥐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만족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현명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의 절반은 모두 가난 속에서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조는 그런 만족감을 즐길 줄 알게 되면서 부유한 여자들을 더는 부러워하지 않았다.원하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얻고, 남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면서 마음에도 큰 위안이 됐다.
========
“존은 좋은 남자지만 단점도 있어.
같이 살게 되면 네 눈에도 그의 단점이 보이겠지.
너에게도 단점이 있다는 걸 떠올리면서 그의 단점을 포용하면서 살아야 돼.
존은 단호하지만 네가 좋은 말로 대하고 섣부르게 반대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는 않을 거야.
매사에 정확하고 진실을 따지는 사람이잖니.
넌 그의 그런 점을 까탈스럽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상당한 장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속이지 마, 메그.
그리 하면 그는 너를 믿고 지지해줄 거야.
그는 우리처럼 쉽게 화를 냈다가 곧 가라앉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런 진득한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쉽게 가라앉히기 힘들어.
그러니 그가 너에게 화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남편이 아내를 존중해야 가정의 평안과 행복이 지켜지는 거야.
그러니 늘 삼가면서 둘 다 잘못을 했어도 네가 먼저 사과하도록 해.
사소한 다툼과 오해, 섣부른 말은 더 큰 슬픔과 후회로 이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
========
처음에 조는 왜 모든 사람들이 바에르 씨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는 부자도 아니고 대단한 유명 인사도 아니었다.
젊거나 잘생기지도 않았다.
사람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을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눈길을 끌거나 멋진 생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따뜻하고 불같은 매력이 있는 사람이라 사람들이 벽난로 앞에 모여들듯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늘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었고 외국에서 온 이방이지만 모든 사람의 친구였다.
젊지는 않지만 소년처럼 순수한 행복을 느낄 줄 알았다.
평범하고 약간 특이한 그의 얼굴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워 보였고 괴짜 같은
면도 두루 용서받았다.
바에르가 가진 매력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종종 지켜보던 조는 마침내 그런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 그의 자비로운 성품임을 알게 됐다.
그는 새가 날개 밑에 머리를 넣고 앉아 있듯이 슬픔을 가슴속에 묻고 가급적 밝은 면만 세상에 내보이려 했다.
이마에 주름이 있기는 했지만 세월의 풍파가 그의 착한 성품을 알고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듯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그의 입에서 나온 수많은 다정한 말들과 유쾌한 웃음의 흔적이었다.
눈빛에 싸늘함이 담겨 있지 않았고, 커다란 손은 따뜻하고 든든해서 말보다 더 깊은 안정감을 주었다.
======
바에르는 좀처럼 자기 의견을 내지 않는 신중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볍게 입을 놀리지 않는 진중하고 성실한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를 비롯한 몇몇 젊은이들이 철학의 화려한 불꽃에 매료된 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하고 나설 기회를 엿보았다.
쉽게 불타오르는 젊은 영혼들이 불꽃에 홀렸다가 불꽃놀이가 끝난 후 남은 것은 빈 막대기와 그을음 묻은 손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방황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줄곧 참고 있던 그는 의견을 말할 기회를 얻게 되자 진실한 웅변으로 종교를 옹호했다.
서툰 영어는 음악처럼 들렸고 평범한 얼굴은 아름답게 빛났다.
지성인들이 반론을 제기했지만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남자답게 꿋꿋이 싸웠다.
바에르의 주장을 들으며 조는 뒤집혔던 세상이 바로 서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옛 신념은 새로운 신념보다 훌륭했다.
하느님은 맹복적인 힘이 아니었고 영원불멸은 동화가 아닌 축복받은 사실이었다.
조는 발밑의 땅이 다시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바에르는 말을 하다 멈칫하기도 했고 입씨름에서 밀리기도 했지만 흔들림 없이 주장을 펼쳤다.
감동받은 조는 박수를 치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박수를 치지도 따로 감사 인사를 하지도 않았지만 조는 그날 일을 잊지 않고 바에르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그런 자리에서 자기 의견을 낸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는 양심상 침묵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는 훌륭한 인품이 돈이나 지위, 지성, 외모보다 더 큰 자산임을 깨달았다.
어떤 현자의 말처럼 위대함이 진실, 경의, 선의를 의미한다면 그녀의 친구 프리드리히 바에르는 선하면서도 위대한 인물이었다.
========
단순하고 진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는다.
신앙은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나며 훈계나 설교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다.
베스는 믿음에서 용기와 인내심을 얻어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렸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저 신앙심 깊은 아이답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와 대자연 어머니에게 맡겼다.
하느님과 자연만이 이 삶과 다음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마음과 영혼을 가르치고 북돋워준다고 믿고 있었다.
베스는 조를 고고한 말로 나무라지 않았다.
언니의 뜨거운 애정이 그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마르지 않은 사람을 주셨고, 그 사랑을 통해 우리를 그분에게 가까이 이끄신다.
베스는 하느님이 주신 삶을 소중이 여겼으므로 ‘기꺼이 떠난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조에게 매달려 울면서 “기분좋게 떠나려고 노력하고 있어”라고 털어놓았다.
거대한 슬픔의 쓰디쓴 첫 번째 파도가 자매를 덮쳤다.
======
“존은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거야.
저녁 시간을 혼자 보내려니 쓸쓸했겠지.
지금이 중요한 시기야, 메그.
젊은 부부는 서로에게 소홀해지는 때가 오기 마련이지만 그런 때일수록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돼.
서로 처음 느낀 애정은 지키려고 애쓰지 않으면 곧 사라지고 말아.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만큼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 없어.
존을 아이들한테 낯선 사람으로 만들지 마.
시련과 유혹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식들만큼 네 남편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존재는 없어.
너희 부부는 자식들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더 사랑하게 되는 거야.
난 이제 가봐야겠다.
내 충고를 잘 생각해보고 맞다고 생각되면 실행에 옮겨보렴.
하느님의 축복이 너희 가족과 함께하길!”
=====
이 집의 행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었다.
다소 삐걱거리긴 했지만 존과 메그는 행복으로 가는 열쇠를 발견했고 해를 거듭하면서 그 열쇠로 상자를 열어 진정한 가족애와 서로를 돕는 마음으라는 보물을 얻었다.
그 보물은 가난한 사람들은 가질 수 있지만 부자들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집이야말로 젊은 아내와 어머니들이 세상의 불안과 걱정을 피해 안전하게 머무르기 원하는 보금자리다.
부모는 어린 자식한테서 슬픔과 가난, 세월의 무정함에도 변치 않는 헌신적인 사랑을 발견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의지하는 곳, 가족애로 똘똘 뭉쳐 날씨가 좋을 때나 궂을 때나 서로를 챙기며 살아가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메그는 여자의 가장 큰 행복의 나라는 가정이며, 여왕이 아니라 현명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그 왕국을 다스리는 것이 여자가 누리는 가장 큰 영광임을 깨달았다.
======
베스를 돌보는 사람으로서 선택받은 것을 평생의 영광으로 여기며 그방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조의 가슴속에는 인내를 통해 얻은 교훈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모든 이들에게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영혼은 매정함을 용서하고 진심으로 잊을 수 있다는 교훈,
책임을 다할 때 가장 큰 고난도 쉽게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
깊은 신앙심이 있으면 두려움을 떨치고 담담히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조가 가끔 잠에서 깨서 보면 베스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낡은 작은 책을 보고 있거나 조그맣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투명할 정도로 창백한 손가락 사이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조는 조용히 누워 베스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베스는 자신만의 소박하고 이타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의 삶에서 물러나 신성한 위로의 말씀, 조용한 기도, 사랑하는 음악을 통해 다가올 다음 세상의 삶을 준비하는 듯했다.
베스의 이런 모습은 어떤 현명한 설교보다, 성스러운 찬송가보다, 열렬한 기도보다 조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조는 수많은 눈물로 맑아진 눈, 지극한 슬픔으로 온화해진 마음으로 동생의 아름다운 삶을 바라보았다.
베스의 삶은 평탄하고 야심도 없었지만 ‘달콤한 향기와 흙 속에 피어난 꽃 같은’ 진실한 미덕으로 가득했다.
사리사욕 없는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게 살았던 베스는 천국에서도 바로 알아볼 소중한 존재였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나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이 아닐까.
어느 날 밤, 베스는 고통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지독한 피로감을 잊기 위해 뭐든 읽어보려고 탁자 위에 놓인 책들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즐겨 읽었던 천로역경의 페이지를 넘기다 조의 필체가 적힌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그 쪽지에 적힌 이름이 베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군데군데 얼룩진 부분은 조의 눈물 자국일 터였다.
‘불쌍한 조 언니! 곤히 잠들었는데 굳이 깨워서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을 거야.
언니는 나한테 뭐든 보여주니까 봐도 괜찮겠지.’
베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조를 흘끗 쳐다보았다.
조는 장작이 다 타서 떨어지면 바로 일어나 불을 지피기 위해 옆에 부지깽이를 놓아둔 채 깔개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의 베스
축복의 빛이 다가올 때까지
어둠속에서 참고 기디라는 너.
고요하고 성스러운 네가 있어서
말썽 많은 우리 집은 축복받았다.
지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은
네 발이 닿아 있는
깊고 엄숙한 강가에
잔물결이 되어 부딪친다.
아, 인간의 근심과 다툼에서 벗어나
나에게서 떠나가는 동생아,
네 삶을 아름답게 빛나게 해준
숭고한 미덕들을 내게 선물로 남겨다오.
고통의 감옥 안에서도
불평 없이 버텨낸 유쾌한 네 영혼의
위대한 인내심을
내게 물려다오.
네 발이 닿는 곳마다
의무의 길이 푸릇푸릇하게 물들었듯이
네 용기와 지혜, 착한 마음을
내게 물려다오.
사랑으로 잘못을 용서하던
자비심 가득한 네 이타적인 마음을
내게 물려다오.
온순한 마음을 가진 동생아, 내 잘못을 용서해주겠니!
쓰디쓴 고통 속에서
우리는 매일 조금씩 멀어져간다.
널 잃는 내 마음은 엄연한 교훈으로
다시 채워진다.
슬픈 손길은
내 거친 본성을 잠재우고,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꽃피운다.
언젠가 그 강을 건너가면
이미 건너 강가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한느 동생의 영혼을 만나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겠지.
슬픔에서 비롯된 희망과 믿음은
수호천사가 되어
나보다 앞서 떠나간 동생에게로
나를 이끌어주리라.
======
“그래, 나도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아.
늘 언니의 동생 베스로 남아서 언니를 사랑하고 도울 거야.
내가 가고 나면 언니가 나 대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힘이 되어줘.
그때는 두 분이 언니한테 의지하려고 하실 거야.
곁에서 잘 지켜드려.
그 일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언니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걸 기억해.
그럼 멋진 책을 쓰거나 온 세상을 다 돌아볼 때보다도 더 행복할 거야.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야.
사랑이 있어야 마지막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어.”
“노력할게, 베스.” 조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야망을 접고 새로이 더 훌륭한 꿈을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더군에 하찮은 욕망들은 저만치 기우고, 영원한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봄은 떠나갔다.
하늘은 더욱 맑아지고 지상은 초록빛으로 물들었으며 꽃들은 일찌감치 만개했고 철새들은 제때 돌아와 베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베스는 많이 지쳤지만 믿음 깊은 소녀답게 자신을 이 세상으로 데려와준 부모님의 손을 꼭 잡았다.
부모님은 베스의 손을 이끌어 죽음의 골짜기 너머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다.
죽어가는 사람이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한다거나 특별한 환영을 본다거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죽음으로 숱한 이들을 떠나보낸 사람들은 삶이 마치 잠처럼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베스도 본인이 바랐던 대로 ‘썰물처럼 어렵지 않게’ 빠져나갔다.
새벽이 오기 전 아직 세상이 어둠에 잠겨 있을 때, 베스는 세상에 태어나 첫 숨을 토해냈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조용히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사랑스러운 표정과 작은 한숨 위에 별다른 작별 인사는 없었다.
어머니와 자매들은 고통 없는 긴 잠에 빠져들 베스를 위해 눈물과 기도, 다정한 손길로 곁을 지켰다.
고통을 참아내는 애처로운 인내심 대신 아름답고 평온한 기운이 베스에게 깃든느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그들의 가슴을 짓눌렀던 아픔에서 벗어났다.
무시무시한 유령이 아닌 자애로운 천사가 베스를 데리러 와주었음을 느끼고 경건하게 기뻐했다.
아침이 밝았다.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방 벽난로의 불이 꺼졌다.
조의 자리를 비어 있었고 방은 고요했다.
이제 막 싹이 올라오기 시작한 근처 나뭇가지에서 새 한 마리가 쾌활하게 지저귀고 창가에는 작고 하얀 스노드롭 꽃이 피어났다.
베개 위에 잠든 평온한 얼굴 위로 따뜻한 봄 햇살이 축복처럼 흘러들었다.
그 얼굴은 고통 없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흐르는 눈물 사이로 한껏 미소를 지으며 베스를 잘 거둬준 하느님께 감사했다.
=====
작은 상자 네 개가 나란히 놓였네
먼지로 뒤덮이고 세월에 닿은 상자들
오래전, 한창때인 아이들이
만들고 채운 상자라네.
색 바랜 리본으로 묶인 채
나란히 걸려 있는 네 개의 작은 열쇠들
오래전, 비 오는 날에 아이들이 용감하고 쾌활하게
자부심을 갖고 묶은 열쇠들이라네
사내아이처럼 거친 손이
뚜껑 안쪽에 하나씩 새긴 이름들.
다락방에서 놀다가 쉬면서,
지붕 위에 내리는
여름의 빗소리를 듣고 했네.
당시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이
오롯이 담긴 아이들의 역사라네
매끄럽고 하얀 첫번째 상자에 새겨진 이름은 ‘메그’라네.
사랑의 눈으로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차곡차곡 접어 넣고 잘 보살핀
물건들이 담겨 있네.
평화로운 삶의 기록들,
얌전한 소녀가 받은 선물들.
결혼식 드레스,
작은 신발과 어린 아기의 곱슬머리라네.
그 안에 담겨 있던 장난감들은
이제 모두 밖으로 나와
메그의 아이들과 또 다른 놀이를 시작했네.
아, 행복한 엄마 메그!
부드러운 노래는
여름의 빗소리에 섞인
부드럽고 나지막한 자장가.
긁히고 닳은 두 번째 상자에 새겨진 이름은 ‘조’라네.
그 상자 안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담겨 있네.
머리 없는 인형들, 찢어진 교과서들,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장난감 새와 동물들.
요정의 땅에서 집으로 가져온 전리품들이 가득하네.
어린 시절의 다양한 흔적들
미래의 꿈들은 온데간데없고,
과거의 추억은 여전히 달콤하네.
쓰다가 만 시들, 거친 이야기들,
온기와 냉기가 교차하는 4월의 편지들,
고집스런 아이가 쓴 일기들,
조숙한 소녀의 흔적들이라네.
어느덧 외로이 홀로 집을 지키게 된 여인은
여름의 빗소리에 섞인
슬픈 노래를 듣고 있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 사랑이 찾아온다’는
내용의 노래라네.
나의 ‘베스!’
네 이름이 새겨진 세 번째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니
사랑 가득한 눈이 흘린 눈물로 씻어내고
세심한 손으로 닦아낸 것처럼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구나.
넌 인간이라기보다는 성녀에 가까웠고
죽음은 우리 앞에서 너를 성녀로 공표했다.
우리는 여전히 아픈 가슴을 안고 통곡하며
가족의 성소에 네가 남긴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드물게 울리던 은색 종,
마지막까지 네가 섰던 작은 모자,
문 위에 매단 천사 인형들 사이에
놓여 있던 창백한 캐서린 인형.
네가 고통의 감옥 안에서
슬픈 기색 하나 없이
담담히 부르던 노래들이
이제 영원히 감미롭게
여름의 빗소리에 섞여든다.
윤기 나는 마지막 상자의 뚜껑 위에 놓인
아름답고 진실한 전설.
용감한 기사는 그의 방패에
금색과 파란색으로 ‘에이미’라는 이름을 새겼네.
머리카락을 감싼 머리 망,
기사와 마지막 춤을 출 때 신은 실내화,
세심하게 돌본 색 바랜 꽃들,
열심히 바람을 만든 부채들은 과거로 흘러갔네.
열정의 불꽃을 활활 태워 만든 유쾌한 발렌타인데이 카드들,
소녀의 희망과 두려움, 부끄러움이
소소한 물건들 속에 조금씩 담겨 있네.
아가씨가 행복에 겨운 노래 같은
더욱 아름답고 진실한 주문을 배우며
남겨놓은 기록들은
여름의 빗소리에 섞여드는
신부의 은빛 종소리가 되었네.
한 줄로 나란히 놓인 네 개의 작은 상자들.
먼지로 뒤덮이고 세월의 흐름에 낡았지만
네 여인이 행복과 비애로 영혼을 단련하며
사랑과 노력을 배워나간 흔적이라네.
네 자매 중 한 명이 먼저 떠나
잠시 헤어졌지만 영원한 이별은 아니네.
멸하지 않은 사람의 힘으로
네 자매는 서로에게 더욱 가까워지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네.
아, 우리가 숨겨놓은 물건들을
언젠가 찬란하고 풍성하게
아버지 하느님의 눈앞에 펼쳐놓을 수 있기를.
빛보다 더 환한 선행.
영혼을 울리는 선율처럼
용감하게 천상의 음악을 따라 나아간 삶.
비 내린 후의 긴 햇살 속에
영혼들은 기쁘게 날아올라 노래 부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