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참꽃 유감 / 신노우
비슬산 정상은 해발 1,083m이다. 정상 근처에 대견사가 있고, 그 뒤 바위를 타고 오르면 하늘과 벗하는 참꽃군락지가 나타났다. 배고픈 시절에 입가가 시퍼렇도록 따먹던 참꽃. 꽃피기 전 봉오리는 보라색이지만, 피면 분홍꽃잎이 수줍은 듯 소곳이 오므린 모습이 우리네 정서에 얼추 맞다. 비슬산 참꽃은 매년 4월 중하순이면 분홍 카펫을 깔아 놓은 양 능선을 희롱하며 아득히 장관을 이룬다. 그 시기에 맞춰 개최하는 참꽃 축제는 상춘객들의 목마른 기다림이기도 하다.
월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한 회원이 무려 1,200여 명이다. 등단자 중에 수필과비평작가회의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회원이 450여 명으로 전국에 14개 지부가 있는 가장 큰 수필 문학 단체다. 2023년 2월 하순에 이틀간 전주에서 수필과비평 동계 행사가 있었다. 작가회의 총회에서 부족한 내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 회장이 사는 지역에서 상·하반기 임원 회의와 1박 2일 하계 행사를 치르는 게 관례다. 걱정이 저만큼 앞섰다.
상반기 임원 회의는 4월 둘째 주 주말에 개최한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임원들이 온다. 회의는 어디서, 무얼 먹고, 어떤 곳을 보여줄까 마음이 바빠졌다.
임원 회의와 300여 명이 참석하는 하계 행사를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고민하고 있는데, 행사 시기가 여름방학 기간이라 K 대학교 생활관 이용 추천이 들어왔다. 나는 비슬산 아젤리아 호텔이 어떨까 싶었다. 두 곳을 임원 몇 분과 함께 이틀 동안 발품을 팔아 따져 보았다. 대구 시내에 위치한 K 대학교 생활관은 접근성이 좋지만, 사용료가 만만찮다. 반면 비슬산 자연휴양림 입구에 있는 아젤리아 호텔은 해발 500m에 있어서 숲속 상큼한 공기와 시원한 조망이 회원들의 지친 심신을 후련하게 씻어줄 것 같았다. 사용료도 달성군민이 사용하면 큰 할인 혜택이 있는데, 내가 마침 달성군에 살고 있어서 올해 상반기 임원회의 장소는 아젤리아 호텔로 결정했다.
임원회의 개최 사전 점검을 위해 호텔에 들렀다. 회의실을 비롯하여 제반 시설을 점검하고 숨을 고르느라 로비에 앉았다. 대형 동영상 화면에 참꽃이 바람에 방글거리며 눈길을 유혹했다. 참꽃 축제 기간은 아직 8일이나 남았다. 호텔 직원에게 저 동영상이 오늘 영상이냐고 했더니 참꽃군락지에 연결된 실시간 동영상이라 했다. 직원이 싱글거리며 '어제까지 꽃봉오리 상태였는데 회장님이 평소 복을 많이 지으셨는가 봅니다.' 하며 눈 맞춤 했다. 성급한 봄 날씨로 꽃이 서둘러 피어 현재 참꽃군락지가 30% 이상 개화로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지 않아도 임원회의 일정은 지정되어 참꽃 개화기보다 빨라서 아쉬웠었다. 분홍 참꽃이 얼른 보고 싶어 셔틀버스를 타고 한달음에 참꽃군락지로 향했다. 높은 곳이라 차창 밖 계곡에는 아직 군데군데 얼음 눈이 미련으로 남아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주변에 참꽃이 모닥모닥 피기 시작해 가까이 다가갔다. 얼른 스마트 폰을 들이대자, 등산객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등 넘어 군락지에 어서 가 보라고 했다. 불에 덴 양 후다닥 달려갔다. 호텔 로비에서 보았던 참꽃이 눈앞에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한마디로 환상적인 분홍꽃물결이었다. 이틀 뒤에 볼 우리 임원들에게 맛 배기로 얼른 보여 주고 싶어 스마트 폰으로 이곳저곳을 마구 담아 임원 그룹 채팅방에 올렸다. 와- 소리가 들리는 듯 감탄 하는 글이 쏟아졌다.
드디어 임원회의 날이었다. 전국에서 꿀을 찾아 날아드는 벌처럼 열차, 비행기를 타거나 자가용을 이용해서 속속 도착했다. 열차를 이용한 뒤 지하철을 타고 오는 임원들을 위해 하차 역에 호텔 버스를 대기시켜 편하게 회의 장소로 모셨다.
고향에서 임원 회의를 한다고 달성군에 거주하는 회원이 지역 군수 환영 기념품을 주선해 주었다. 창원에 사는 작가회의 감사는 첫 회의라고 맛있는 망개떡을 선물로 가져왔고, 대전지부장은 행사 비용이 모자람을 예상하고 거금을 내놓기도 해서 고맙고 힘이 났다. 나는 고향에서 한창 출하하는 파파야 멜론을 준비하여 쫀득한 망개떡과 함께 달달한 정 나눔을 도왔다.
첫날 임원 회의는 아젤리아 호텔 특별회의실에서 개최하였다. 작가회의 하계 행사 일정을 수립하고, 제29집 동인지 발간, 회원 수첩 제작, 작가회의 활성화 방안 토의로 마무리하였다. 회의를 마치고 호텔 야외 벤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만찬은 현풍 읍내에서 이름난 오리능이버섯용압탕으로 보신했다.
둘째 날, 참꽃을 빨리 보여주고 싶어 셔틀버스를 정상 운행 시간보다 30분 앞당겨 운행하기로 시설공단에 사전 조율도 해놓았다. 아침 일찍 무료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작가회의 임원들만 타고 올라갔다. 비슬산 대견사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풍선같이 기대에 부풀어 츠렁바위를 지나 해발 1,000m에 있는 참꽃군락지로 진동 걸음으로 갔다. 아, 그런데 이럴 수가, 참혹 그 자체였다. 그 넓은 참꽃군락지가 참꽃 송이 하나 남김없이 감벼락을 맞아 폭삭 얼어버렸다. ‘버엉’하여 털썩 주저앉았다. 모두 울음빛이다. 이틀 전 현장 답사 때는 분홍 꽃봉오리들이 다투어 피며 방실방실 눈웃음으로 맞았었다. 그 곱게 피기 시작했던 참꽃 분홍 물결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지난날 믿고 보증서 준 친구가 야반도주했을 때 절망했던 꼭 그 심정이었다.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래서 참꽃 축제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하는구나. 이틀 전 임원 그룹 채팅방에 참꽃 바람 풍선을 매단 내가 너무 미안해서 임원들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애줄 없어 참꽃의 허망함을 떨쳐 버리고자 다음 기행지인 다람재로 서둘러 이동했다. 권 부회장은 허우룩했던 심사를 채워 주려 듯 다람재 내력을 상기된 얼굴로 열심히 이야기했다. 다음은 도동서원으로 향했다. 유서 깊은 곳이라 문화해설사의 해박한 설명에 모두 숨죽이며 듣느라 눈빛이 초롱했다. 마지막 기행지는 옥연지 송해 공원이었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며 청량감으로 넙죽 반겼다. 풋풋한 숲속 데크길을 삼삼오오 무리지어 쌓인 이야기를 풀어내며 걷다보니 허기가 졌다. 칼칼한 옛날 갈치 정식으로 점심을 나누고 모든 일정을 마물렀다.
8월 하계 행사 때 또 만나자며 손을 잡았다. 1박 2일 동안 참, 좋은 곳에서 회의 잘 하고, 토속 음식에 많은 곳을 보여 주느라 애 썼다고 했다. 참꽃이 얼어버려 마음 겹고 유감이었지만, 밝은 웃음에 그 한마디가 준비로 쌓였던 피곤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