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0일 오늘의 역사
2023년 기아 최형우 선수 1500타점 신기록 작성
2023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강미선, 무용수 최고 영예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
유니버설발레단 간판스타 강미선 수석무용수가 당대 최고 무용수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u de la Danse)’의 올해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강미선에게 브누아 라 당스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을 가져다 준 작품은 지난 3월 국립극장에서 선보인 ‘미리내길’이다. 올해 나이 마흔인 강미선은 무용 명문인 선화예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워싱턴 키로프 아카데미를 거쳐 2002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다. 2014년 동료인 러시아 출신 수석무용수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결혼한 발레 커플이다
2019년 시진핑 주석 중국 최고지도자로는 14년 만에 북한 방문
2018년 이란 여성들 1981.10.5일 이후 37년 만에 축구장(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 입장해서 러시아 월드컵 경기(이란 대 스페인) 관전
2018년 설조 전 불국사 주지 조계종 개혁 요구하며 단식 시작, 41일 만인 7.31 병원 이송
2011년 러시아 카렐리아 공화국에서 레스에어 Tu-134 항공기 추락 사망 44명
2008년 필리핀 해역서 태풍으로 페리호 침몰 800명 이상 사망
승객과 승무원 등 845명을 태운 여객선 프린세스 오브더 스타호가 마닐라를 출발, 중부 세부로 가기 위해 시부얀 섬 인근을 지나던 중 엔진 고장을 일으킨 뒤 최대 풍속 160km에 이르는 태풍의 파고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했다.
이중 4명의 생존자 외에 841명이 사망하었다
2007년 중동 북동부 30년 만에 최악의 가뭄 140ha 농지 피해
2005년 정부 중앙청사 게시판에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자 신상명단 공개
2005년 고이즈미 총리 방한, 노무현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2005년6월20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열어 최근 활동이 종료된 1기 공동역사연구위원회에 이어 2기 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그 산하에 교과서연구위원회를 신설하기로 했다. 양국 정상은 교과서연구위의 연구결과를 양국의 교과서 편수 과정에 참고하기로 했다. 또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이를 위한 한·미·일 3국의 외교적 공조원칙도 재확인했다.
한·일 정상회담은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공식회담 결과 발표, 만찬 순으로 진행됐다. 정상회담에서는 길게 논의를 했지만, 양국 간 중요 현안인 독도,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문제 등에 있어 한발짝도 진전이 없었다. 서로 할말을 했다고 청와대의 한 당국자는 설명했다. “때로 불편했다”고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상회담 직후 결과 발표에서 “솔직하게 대화하고 일부 공감대가 있었으나 합의에 이른 것은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2기 공동역사연구위 출범 등 일부 합의에 대해 “낮은 수준의 합의”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와 관련, 고이즈미 총리가 “앞으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데 대해 “총리께서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나와 우리 국민에게는 역시 과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일본 지도급 인사들의 과거사 관련 망언도 각별히 유의할 것을 요구했다.
2005년 이화여대에서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개막
20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개막한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는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 여성의 힘을 전 세계에 알리는 자리였다.
‘경계를 넘어서:동-서, 남-북’이란 주제 아래 2시간 동안 진행된 개막식에 모인 3000여명의 여성리더들은 호주제 폐지, 성매매특별법 제정 등 최근 한국 여성들이 일궈낸 성과들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대회 조직위원장인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 여성들은 급속한 경제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가족과 국가를 위해 희생해왔지만 동시에 양성평등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면서 “여성이 앞장서 동참해야 할 한국의 평화와 안보 문제의 해결 또한 전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예위원장인 권양숙 대통령 부인은 축사를 통해 “2008년까지 한국 여성들의 권한척도를 세계 30위권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다.
이날 저녁 7시 장하진 여성부 장관이 주재한 만찬에는 각국의 여성리더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개나리색 한복을 입고 나온 장 장관은, “장관이 되기 전 학자였던 저는 이런 학술대회의 무게와 진지함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래도 모처럼의 여행이니 남은 시간 동안 좋은 추억을 만드시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24일까지 열린 세계여성학대회에서는 ‘생명공학과 여성’ ‘환경과 여성’ 500개 세션에서 2100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 13개 언론사에 242억원 과징금 부과
공정거래위원회가 13개 중앙 언론사에 대해 모두 24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 같은 과징금 규모는 공정위가 2000년 7개 재벌그룹에 부과한 전체 과징금 규모(173억원)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은 2001년 6월 21일 10개 중앙 일간지와 3개 방송사를 상대로 부당내부거래를 조사한 결과 총 510억원의 부당지원 사실이 밝혀져 242억원(신문사 203억원, 방송사 39억원)의 과징금을 물렸다고 발표했다.
언론사별로는 조선일보 33억9000만원, 동아일보 62억원, 문화일보 29억원 등 그동안 비판적 논조를 유지해온 신문들이 과징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부과받았다. 그러나 한겨레신문(1500만원), 대한매일신보(1억4000만원), 세계일보(3600만원)는 상대적으로 과징금 액수가 미미했다. 방송국도 신문사에 비해 과징금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방송사 가운데는 SBS가 1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고, MBC와 KBS에는 각각 13억원과 11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그러나 공정위가 지금까지 30대그룹과 거대 공기업을 빼고 부당내부거래를 직권 조사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조사방식도 유례없이 강도가 높았으며, 과징규모도 상식을 뛰어넘는 편파적인 금액이 부과됐다는 점에서 공정위 조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았다. 더구나 신문산업의 특수성과 각 언론사의 소명자료를 전혀 반영하지 않아 언론사로부터 편파적인 조사라는 반발을 샀다.
2000년 전국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1차 총폐업
정부의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폐업 첫 날인 2000년 6월 20일 전국 대부분의 병-의원들이 문을 닫는 사상 초유의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병원 3곳을 전전하던 70대 노인이 숨지는 등 의료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전국 대부분의 동네의원이 문을 닫은 가운데 문을 연 종합병원에는 환자들이 평일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어 한산한 모습을 보였으며, 대신 보건소에 환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의과대학 교수들도 23일 사표를 제출하고 응급실에서 철수하자 일부 병원에서는 분노가 한계에 달한 환자 가족들이 의사를 폭행하는 등 공황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협회가 24일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7월 약사법을 재개정하기로 했다는 합의사항을 수용하고, 25일 폐업철회 여부를 묻는 찬반투표를 벌인 결과 철회 의견이 51.9%를 넘자 의사들은 26일부터 진료에 복귀했다.
1999년 조진호, 한국인으로 두번째 메이저리그에서 승리
조진호(보스턴 레드삭스)가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메이저리그 승리투수가 됐다.
조진호는 1999년 6월 20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 6이닝동안 홈런2개 포함, 5피안타 4실점했으나 타선의 도움으로 첫 승리를 땄다. 삼진6개에 볼넷은 1개. 1998년 7월5일 빅리그에 첫 등판했던 조진호는 메이저리그 6번째 등판에서 첫승을 신고했다. 방어율은 4.50이 됐다.
조진호는 최고구속이 146Km에 불과했지만 절묘한 제구력으로 서부지구 1위팀 레인저스 강타선을 요리했다. 레드삭스는 7대4로 이겼다.
1998년 12월 귀국 후 부친의 사망소식을 뒤늦게 알고 통곡했던 조진호는 “18일이 아버님 제사였는데 호텔에서 절을 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아버님께 첫 승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혔다.
1999년 금강산관광객 민영미씨 북에 억류
1999년 6월 20일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인 민영미씨에 대해 북한 환경감시원을 상대로 남한 `귀순 공작`을 했다며 그녀를 북한에 억류, 장전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감금, 조사했다. 북한에 억류된 민영미씨는 북측 여자 환경감시원과 10여분간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다 북한 귀순자에 관한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측 환경감시원은 대화가 끝난 직후 민영미씨에게 관광증 제시와 벌금을 요구했으며, 민영미씨는 관광증을 건네주고 2회에 걸쳐 총 100달러의 벌금을 지불했다. 북측은 "더 조사할 것이 있다"며 민영미씨를 연행, 장전항 출입국관리소 옆 북측 금강산관광총회사 사무실로 데려가 강제 구금했다.
그후 5일 만에 북한이 현대측에 민영미씨를 인도했고, 다음날 새벽 속초항에 도착,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렸다. 그일이 있은후 한동안 금강산관광이 중단되었다가 8월 5일 다시 재개됐다.
1995년 중요무형문화재 발탈 예능보유자 이동안씨 별세
이씨는 발탈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나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제자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스스로 춤을 추어온 타고난 춤꾼이었다.
화성재인청 도대방의 아들로 태어나 광대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열두살 때 남사당에 입단했으나 곧 광무대로 옮겨가 당대의 명인 김인호 선생으로부터 ‘신칼대신무’ ‘진쇠춤’ ‘태평무’ 등을 전수 받았다. 발에 탈을 쓰고 하는 놀이인 ‘발탈’은 박춘재, 줄타기는 김관보 선생으로부터 각각 배웠다. 18세 때 송만갑, 정정렬 등 명창들을 모시고 다니며 그들의 무대에서 줄타기로 인기를 모은 그는 21세 때 부민관에서 열린 ‘한성준 무용발표회’ 때 처음으로 ‘태평무’를 선보였다.
당대 최고의 고수 한성준씨와의 인연으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 무용선생으로 들어간 그는 신무용의 개척자인 최승희에게도 ‘장고춤’ ‘태평무’ ‘진쇠무’ ‘입춤’ 등을 잠시 전수했으며, 최씨의 제자인 김백봉, 정승의, 문일지 등에게도 춤을 가르쳤다. 발탈은 현재 박정임, 조영숙 등 두명의 이수자가 뒤를 잇고 있으나. 제자층이 두껍지 못해 전수가 어려운 실정이다.
1994년 KT(구 한국통신), 아시아 최초의 상용 인터넷 서비스 ‘코넷’ 시작
1994년 금융기관 개인연금 상품 시판
1991년 한국-루마니아, 상사중재협정 체결
1991년 광역의회의원선거 실시
1990년 이란 북서부 규모7.7 지진 사망·실종 4만5천여 명
1990년 로드리게스 파라과이 대통령 내한
1990년 그리스 크레타섬 근해서 유조선 시킹호 탱크 폭발 한국선원 5명 사망
1986년 구병삼 고려대 교수팀 국내 첫 체외수정 시험관아기 출산 성공
1986년 스페인 총선 곤잘레스 총리와 노동자사회당 승리
1985년 제3차 남북경제회담 판문점서 열림
1983년 문교부 학생체벌금지지침 발표
1981년 이란 혁명검찰, 바니 사드르 대통령 체포령
1980년 남북총리회담 대비한 판문점 자유의 집 별관 준공
1980년 서산 근해 간첩선 사건
해안 초병이 괴선박을 발견 사격하자 응사하며 도주,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격침후 간첩 김광현 생포 피해(부상 2명)
1979년 정신이상 사설도서실 주인, 공부하러온 대학생 살해
1974년 태백선 전철 개통(제천-고한)
1973년 아르헨티나 독재자 후안 페론 18년 망명생활 청산하고 귀국
1973년 중앙선 전철 개통
전체 철도 수송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산업선인 중앙․태백․영동선의 전철화를 추진하고 있는 철도청은 1차로
1968.5.29 중앙선에 착수.
1973.6.20 청량리 - 제천간 155.2km를 완공.
2차로 태백선(제천 - 고한간 80km)이 개통(1974.6.20).
우리 나라 철도 사상 동력 혁명을 이룩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 16번째의 전철 보유국이 되었다.
1970년 국회의원 겸직 파동 발생
1969년 김영삼 의원 초산병 피습사건
1969년 간첩 김창원, 오형식 사건
1969년 문경선(진남-문경) 개통
1968년 100m `魔의 10초벽` 돌파
100m 달리기에서 인간의 한계로 여겨 온 `마의 10초 벽`이 마침내 무너졌다. 전미 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 1968년 6월 20일이 세계 육상사를 다시 쓰게 한 그날이다.
1912년에 세계기록 공인이 시작되고 1960년에 독일의 아민 해리가 10초F를 끊은 이래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10초 벽이 같은 날 그것도 세 사람에 의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무너진 것이다. 수동시계로 9초9. 준결승전 1·2조에 출전한 하인즈·스미스·찰리가 주인공이었다. 기록이 믿기지 않아 트랙 길이를 재조사했으나 오히려 10㎝가 더 길었다. 지미 하인즈는 4개월 뒤 열린 멕시코올림픽에서 9초95를 또 기록해 명실공히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됐다.
20여년 동안 깨지지 않던 9초9 벽이 88서울올림픽에서 9초79를 기록한 벤 존슨에 의해 깨지는 듯했으나 곧 약물중독임이 밝혀져 기록이 취소됐다. 이후 9초9 벽은 1991년 칼 루이스(9초86)가, 9초8 벽은 1999년 모리스 그린(9초79)이 깨뜨렸다. 현재 세계최고기록은 2008년 9초7의 벽을 깬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가 2009년 8월 16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 9초6의 벽을 깨며 세운 9초58이다.
1968년 정부, 폭력배들을 국토건설에 투입
1964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소련 방문
1963년 미국-소련 직통통신선 개설 협정에 조인
워싱턴 D.C에 위치한 백악관의 북쪽 포티코 1963년 6월 20일 미국과 소련 사이에 '직통통신 연락선 설치에 관한 미소각서'가 조인되어 워싱턴 D.C의 백악관과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 사이에 직통전화가 설치되었다.
이 핫 라인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핵전쟁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나자 긴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 정상간의 직접대화를 통해 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9월 30일에 체결된 협정에 의해 인공 통신위성의 지원을 받았으며, 1984년 7월 17일 협정에 의해서는 팩시밀리 장치도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어 프랑스-소련, 영국-소련 간의 핫 라인도 설치되었다.
남북한의 경우에는 7․4남북공동성명에서 서울과 평양 사이의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이 합의된 바 있다.
1963년 제4호 태풍 '셰리' 남부지역 강타
제4호 태풍 '셰리'호가 남부지역을 강타했다.
중심기압 965헥토파스칼에 초속 17m가 넘는 폭풍우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덮쳤다.
셰리가 우리 나라에 상륙한 6월 20일을 전후해 닷새 동안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다. 낙동강,금강,영산강,섬진강 등 대부분의 강들이 홍수위험 수위를 오르내리고 하천 범람과 산사태가 잇따랐다. 여기저기서 도로와 가옥, 농경지가 침수됐다 인명피해도 컸다. 무려 86명이 숨지고 백20여명이 다쳤다. 주민 5만여 명이 이재민 신세가 됐다.
1963년 주민등록법 시행
1963년 6월20일 주민등록법이 새행되었다
주민등록법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주민이 자신이 살고 있는 자치단체에 그 내용을 등록하는 제도이다
주민의 거주관계와 인구의 동태를 명확히 해서 행정사무를 원활하게 처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1962년 제2한강교 기공
1961년 케네디-이케다 회담 미국서 개최
1960년 말리,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년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가원수 취임
1955년 IMF와 IBRD 가입에 대한 국회 비준
1952년 부산에서 국제구락부사건 발생
1949년 수도경비사령부 창설
1947년 서재필, 한미특별의정관에 취임
1947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KOC가입 공식승인
KOREA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향한 한민족의 염원을 담았던 단어. 그러나 광복과 함께 시작된 냉전 시대엔 남북 체제경쟁의 그림자가 Korea에도 짙게 드리워졌다.
1947년 6월 2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40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당시엔 조선올림픽위원회)의 IOC 가입을 정식 승인했다.
이때 IOC가 인준한 KOC의 정관은 KOC가 올림픽 운동을 펼치는 영역은 한반도 전역이며 그 사무실 소재는 서울이라고 명시했다.
다분히 북한을 겨냥한 포석.
6․25전쟁 중이던 1952년 7월 19일 개막된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국민성금으로 참가 경비를 마련한 43명의 한국 선수단은 태극 마크와 Korea 표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다.
북한도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경기장 밖에서 시위만 벌여야 했다. 북한 선수는 한반도의 유일한 올림픽위원회인 KOC의 선수단 명단에 등재돼 있지 않아 뛸 수 없다는 IOC의 결정 때문.
IOC가 남북한의 첨예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꾸준히 내놓은 카드가 단일팀 구성. IOC의 권유로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해 1963년 스위스 로잔에서 남과 북이 마주 앉았다.
단일팀 국기는 태극기여야 합니다.(남)
앞면은 태극기, 뒷면은 인공기로 합시다.(북)
오륜 표지 밑에 Korea라고 쓰고 양쪽 귀퉁이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그리는 것은 어떤가요.(IOC 중재안)
이런 실랑이는 26년 뒤인 1989년 아시아경기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회담에서도 재연됐다.
단일팀 명칭을 영문은 Korea, 한글은 남북단일팀으로 합시다.(남)
그러지 말고 영문은 Koryo, 국문은 고려로 합시다.(북)
이 지루한 논쟁이 마침표를 찍은 것은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의 남북단일팀이 구성된 1991년.
영문은 Korea, 국문은 코리아,
단기는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기,
단가는 아리랑.
남북한 선수들이 Korea 국호와 한반도기 아래 함께 서는 데 걸린 세월은 반세기.
1946년 국제부흥개발은행 (IBRD) 발족
1935년 남경에서 민족주의단체 대표회의
1933년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 제정 주도한 독일혁명가 클라라 체트킨(76세) 세상 떠남
1931년 후버 美대통령 `모라토리움` 선언
미국의 제31대 대통령(1929∼1933)후버가 1931년 6월 20일 오후 6시 성명을 발표, 세계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미국에 진 채무와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할 전시배상 지불을 7월 1일부터 1년간 동결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후버 모라토리움’이다.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전쟁ㆍ천재(天災)ㆍ공황 등에 의해 경제가 혼란하여 채무상환 기간이 도래했음에도 외채가 많아 상환이 불가능한 경우, 채무상환 기간의 일시적인 연기를 채무국이 요청하는 것, 즉 지급유예를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된 독일은 당시 배상금 1320억 마르크라는 엄청난 금액의 채무를 연차적으로 분할지급을 하거나 외국으로부터의 단기차입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정치의 불안이 가중되고 외국단기자본의 인상ㆍ유출이 격화되어 독일은행이 차례로 도산하게 되자 경제가 마비됐다.
이에 후버가 전시채무 동결을 제안하는 ‘후버 모라토리움’을 제안하자 배상지불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과 불황에 빠진 연합국 각국이 ‘현명하고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후버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전쟁부채 배상안의 제안자인 오웬 영은 채권국의 현명한 처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논평했고 당초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며 선뜻 응하지 않던 프랑스도 결국 이에 동조했다.
1929년 소학교. 보통학교 규정개정공포
1927년 미국-영국-일본 3국 해군군축회의
1926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개관
1925년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조셉 브로이어 사망
1924년 언론집회압박탄핵민중대회 개최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평양) 창립. 회장에 조만식 선출
1916년 독립운동가 임병찬 순국
1911년 숙박 및 주거규칙 공포
1911년 삼림법 공포
1911년 맹아와 고아를 위한 제중원 설치
1904년 일본, 만주군 총사령부 설치
1896(조선 고종 33) 이범진을 주미공사에 임명
1879년 프랑스, 국민대표의회 조직
1873(조선 고종 10) 독립운동가·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 태어남
1870년 프랑스 작가 쥘 콩쿠르(콩쿠르형제중 동생) 사망
1861년 영국의 생화학자 홉킨스 출생 - 필수영양소 비타민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
1837년 빅토리아 영국 여왕 즉위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한 하노버 왕가 켄트 공작의 외동딸 빅토리아 여왕이 1837년 6월 20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빅토리아 시대’는 확장과 정복, 승리와 번영의 동의어였고 원동력은 18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1858년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 빅토리아 사망 당시 대영제국은 전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있었으며 넓이로 따져 1,100만 평방 마일(지표면적의 약 20%), 인구로 따져 4억인(전세계 인구의 약 25%)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시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자 ‘은행’이었다. 1850년 전세계 공업생산의 28%를 영국이 차지했고 강철의 70%, 면직물의 50%가 영국제품이었다. 또 전세계 상선의 3분의 1이 영국 소유였으며 금융자본의 90%가 파운드화로 결제됐다. 또 유사 이래 신이 창조한 것으로 믿고 있던 인류사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종의 기원’이 나온 것도 빅토리아시대였다.
기나긴 64년간의 치세를 마치고 1901년 1월 22일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던 빅토리아 여왕이 사랑했던 남편 알버트 공작의 뒤를 따라 눈을 감았다.
1819년 미국 증기선 사바사르호, 첫 대서양 횡단
1819년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 출생
1789년 프랑스 삼부회 평민 의원과 자유주의적 귀족의원들이 모인 테니스코트의 서약
1646년 조선 명장 임경업 사망
1419년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오랫동안 지리·정서적으로 일본보다 한국에 가까웠던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돼 우리 연안을 본격적으로 유린한 것은 고려 말, 조선 초 때의 격변기였다.
두 번이나 대마도를 정벌하고 유화책을 써 봤지만 약탈행위가 근절되지 않자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은 1419년(세종1년)에 이종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한 대마도 정벌군을 편성한다.
1419년 6월,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이 거제도 견내량에 집결했다.
병선 227척에 병력이 1만7300명이나 된 대규모 해외원정군이었다.
6월 20일 대마도 아소만에 상륙한 정벌군이 대마도주의 항복을 권했으나 반응이 없자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129척의 선박을 소각·포획하고 가옥도 1940여채나 불태웠다.
왜구도 104명이나 죽이고 21명을 포로로 삼았다.
이 정벌로 왜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수십년간 지속돼온 국가의 근심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었다
645년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안시성전 개시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를 출발한 50만 대군은 고구려의 관문인 요동의 안시성을 에워싸고 싸움을 시작.
적은 군대로 안시성을 지키던 성주 양만춘은 60일에 걸친 포위 속에서 67회나 되는 치열한 싸움 끝에 당나라군을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