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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을 찾아온 시인
김 희 준
2017년 2월 18일, 매화가 피어날 무렵의 주말 아침이다. 나는 내연산 열두 폭포를 화폭에 담아낸 문인화가 심관(心觀) 이형수 선생을 안내하여 내 고향 영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항을 벗어나지도 못하여 이종암 시인이 전화하였다. 부산에서 강은교 시인이 내연산에 오시는데 안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소로우(H.D. Thoreau)의 말대로 시인의 행동 동기는 진실로 순수한 사랑에서 나왔다.
내연산 주차장에서 우리는 후학인 배재경, 송진, 이효림 시인들과 함께 오신 강은교 선생을 맞이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내 제자가 경영하는 진주식당으로 모셨다. 산채비빔밥과 함께 나오는 삼 년 묵은 김치는 맛이 천하의 일품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존함을 대학생 시절부터 익히 들었고, 촛불혁명을 노래한 시인들의 시를 모은 <<천만 촛불바다>>와 ‘블랙리스트’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강은교’라는 이름이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우리 시대의 ‘봉황음(鳳凰吟)’인 선생의 시를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언어의 종장(宗匠)과 마주 앉아 시를 문답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인데 나는 그만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나에게 현대 시는 무척 어렵다. 비유와 상징으로 엮어지는 시는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직관의 언어이거니와 언어가 시인의 손에 의해 느낌과 의미의 맥락이 창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시는 말을 초월하는 느낌의 불꽃이다.
삼국유사가 간직하고 있는 세계를 시로 형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리니 선생은 바리데기 신화의 세계를 오늘의 언어로 창작하고 싶다는 말씀을 주셨다.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원하는 바라문의 딸이 중생 구원의 근본 서원을 품고 지장보살로 태어났다는 지장경과 어린 자식을 구원하려는 어머니의 비원(悲願)이 서린 에밀레종의 슬픈 전설이 떠올랐다. 향가 ‘천수대비가’에 공명하는 선생의 시, <희명>은 내 마음에 심원한 울림을 준다.
“언젠가 화엄사에 갔을 때 나는 새벽 일찍 절로 올라가 종 앞에서 몇 시간을 서성대었다. 뭐랄까 어떤 답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세상의 온갖 소리를 끌어넣어 결국은 저 하나만의 종소리를 내는 그것, 내 시의 답이 있다면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라는 그리움에 젖어.”(강은교, <<벽 속의 편지>>)
주종대박사 박종일은 12만 근의 구리를 녹여 마귀도 항복하고 어룡(魚龍)도 구원하는 언어를 토해내는 성덕대왕신종을 이루어내었다. 신종 앞에 서면 시가 무엇인지, 시인의 고투가 어떠한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다. ‘시적 열망으로 벽 속에 갇힌 노래를 불러 세상의 하늘에 걸린 종을 울리려는’ 선생의 시를 읽으면 내 마음에는 한림랑 김필흥(金弼興)이 지은 종명(鐘銘)의 첫머리가 떠오른다.
“무릇 지도(至道)는 모양 밖을 포함하기에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고, 대음(大音)은 천지간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방편의 말을 열어서 삼진(三眞)의 오묘한 뜻을 통찰하게 하고, 신종(神鍾)을 걸어서 일승(一乘)의 원융무애한 부처님 음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배재경 시인이 <<사이펀>>(2016, 겨울)을 건네주었다. 시문학의 문외한인 나에게 ‘사이펀’이라는 제목이 무척 낯설었다. ‘내 마음의 풍파! 시인들의 威儀를 위하여!’라는 제목 아래의 모토가 시 전문지로서의 위엄과 고뇌를 보여주었다. 시경에 등장하는 유비군자(有斐君子)의 위의가 생각났다.
강단에서 은퇴하여 범어사(梵魚寺)를 품은 금정산(金井山) 기슭 ‘범어(梵語) 동산’에서 부치는 문학 편지가 사이펀의 첫머리에 실려 있었다. 시인의 이력에 1945년 ‘해방둥이’로 함남 홍원(洪原)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함경도와 강원도의 선상(船商)들이 1881년 음력 8월에 세운 선정비가 내가 아내와 함께 산책하는 철길 숲 공원에 있다. ‘심정필정(心正筆正)’이라는 말로 황제에게 필간(筆諫)을 한 당나라 유공권(柳公權)의 서체로 중용, 대학, 맹자, 시경, 문옹(文翁, 한서), 한유(韓愈, 고문진보) 등의 고전을 인용하는 비문에는 홍원 사람 서정근(徐禎根)이 등장한다. 시인은 비석을 세운 지 136년 만에 홍원에서 포항에 오신 귀한 손님인 것이다.
경상도와 함경도에 흉년이 들면 창고의 비축미를 배로 실어 날라 서로 구제하였다. 포항에는 포항창이 있었고, 홍원에는 교제창이 있었다. 서재에서 <<동여비고(東輿備考)>>를 뽑아 지금은 갈 수 없는, 아니 내 마음 속에서 잊혀진 함경도와 강원도의 지도를 펼쳐 홍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았다. 옛 지도에는 ‘38선’도 남한도 북한도 없었다. 고래와 청어 떼가 영일만을 찾아왔다가 새끼를 낳아 기르고서 홍원의 신포만으로 회유하였듯이 함경도의 단천, 이원, 북청, 홍원, 함흥과 강원도의 통천, 간성, 강릉의 상인들이 바닷길 수천 리를 배 타고 남하하여 포항의 형산강 포구에서 열리는 부조장으로 내왕했다. 윈난(雲南)의 리장(麗江)에서 티벹의 라사까지 차마고도(車馬古道)가 있었다면 동해에는 선상고도(船商古道)가 있었다. 고조선, 옥저, 고구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발해, 달단동(韃靼洞)의 태조대왕전승비, 홍원역, 조선어학회 사건, 향파산(香坡山), 문암(門巖), 읍성의 문루, 마양도(馬養島), 은적사(隱寂寺), 학봉 김성일 형제, 윤선도와 관기(官妓) 조생(趙生) … 홍원의 시공이 파노라마처럼 내 마음에 펼쳐졌다.
“기다려야 하네
네가 몰래 새벽 마을을 밀고 나와
새벽하늘에 박힌 별을 밀고 나와
달랑 차표 한 장을 사 들고
낯선 여관방
혹은
임진강 찬물을 기다렸듯이
기다려 기어코
금곡 동두천 건너왔듯이 맨발 맨손 구슬피 부르텄듯이
(강은교, <기다려야 하네>)
태어난 지 백일만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홍원을 떠나 임진강을 건너서 서울로 오고, 다섯 살에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부산으로 가는 피난민 열차를 탔으며, 큰 수술을 받고 임신한 아이를 잃어야 하였던 시인의 연보를 읽고서야 상실감과 허무, 비애와 매혹, 사랑과 연민, 모성과 구원의 세계를 빚어낸 선생의 시 세계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사이펀의 책장을 넘겼다. 백신애와 하근찬의 작품을 수집하여 전집을 엮고 영천의 민중사를 발굴하여 시로 기록하는 내 고향 영천 사람인 이중기 시인의 제1회 사이펀 우수작품 수상작 <억수 무덤>이 <<사이펀>> 제1호에 실렸던 <영천능금농사 70년사>와 함께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내가 심관 화백과 가려고 하였던 곳이 시총(詩塚)이었지만 시인은 시총 아래의 충노(忠奴) 억수의 초라한 무덤을 보며 양반가의 허위의식을 풍자하고 있었다. 또 다른 시는 대구 사과의 주산지인 영천에서 평생 농사를 짓다 빚에 시달리고 골병만 든 아버지의 삶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수출주도형 산업화, 신자유주의 시대의 농촌 포기 농정으로 영천의 사과나무는 모두 늙어지고 캐내어졌다. 어린 날 고향마을의 그 컸던 두 곳의 사과밭을 이젠 볼 수가 없다. 사과꽃 향기 능금 냄새가 묻어 있는 유년의 바람이 시에서 아버지의 기침 소리와 함께 불어왔다. 일제에게 징용된 나의 아버지는 탄광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현해탄을 다시 건너왔고, 부산역에서 기차를 몰래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육이오 전쟁이 나자 청천역에 징집되어 다시 강원도 홍천으로 가서 고지로 미군의 탄약을 지게로 져 날랐다. 하근찬의 소설 <수난이대>가 아버지 일대의 삶 속에 녹아 있다.
점심을 먹고 내연산으로 들어갔다. 불교와 도교의 도장이었던 내연산을 사대부 사회에 알린 사람은 우리나라의 은자로 자처하며 무릉도원을 찾아왔던 청하현감 백운거사(白雲居士) 옹몽진(邕夢辰, 1518-1584)이었다. 그는 사대부 사회에 명망이 높던 경주부윤 귀암(龜巖) 이정 선생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귀암이 찾아와 주자의 형산 축융봉 산놀이를 재현하며 시를 남긴 뒤로 사대부들은 내연산의 진달래와 단풍 숲을 앞다투어 찾아왔다.
보경사 범종루를 돌아서 등산로 입구에서 나는 시인께 길가에 버려진 나무 지팡이를 주워서 드렸다. 무풍계(舞風溪) 가로 난 산길을 따라 내연산의 첫 경관인 낙호암(落虎巖) 밑을 지났다. 문수대에서 쉬다가 승선교(昇仙橋)를 건너 사자폭포로 갔다.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지만 밤낮으로 사자후를 토해내는 폭포는 나에게 소동파의 오도송을 떠오르게 한다. “계곡물 소리가 곧 부처의 설법이고/ 산빛이 어찌 부처의 몸이 아니리오.”
바위에 숨어 있는 보현폭포를 지나서 보현암, 적멸암터를 돌아 비하대와 학소대가 치솟아 있는 삼용추(三龍湫)로 갔다. 최남선, 이병기, 이광수, 홍명희, 정인보와 교유하고 김달진, 오장환, 조지훈, 김동리, 신석정, 서정주 등 한국 문단의 거장들을 제자로 양성했던 석전(石顚) 박한영 스님은 삼용추가 금강산의 구룡연, 철원의 삼부연과 백중을 다툰다며 한번 오고 싶어 하였다. 백악사단(白岳詞壇)의 일원으로 인왕산 아래에 살았던 겸재(謙齋) 정선은 청하현감으로 와서 삼용추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에 담았다. 연산폭포 암벽에 새겨진 숱한 인명 중에서 ‘甲寅 秋 鄭敾’이라는 각자를 찾아볼 수 있다.
1754년 3월,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산(大山) 이상정 선생이 영일 현감으로 와서 흥해의 천재시인 농수(農叟) 최천익과 보경사의 시승(詩僧) 오암(鰲巖) 스님과 어울려 삼용추를 찾아와 시모임을 열었다. 옛사람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랐던 바위 벼랑을 올라 구름다리를 건너 얼어붙은 폭포 앞에서 시인을 모시고 기념 촬영을 하였다.
비하대 옆의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다시 내연산 제일의 전망대인 선열대(禪悅臺)로 올랐다. 시인은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가파른 계단을 후학들과 함께 활기찬 발걸음으로 올라가셨지만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계단에서 넘어져 메고 있던 카메라의 렌즈가 깨질 뻔하였다. 1587년 황여일은 숙부와 함께 선열대에 올라 시를 읊으며 광활한 우주를 살피고 근원으로 돌아갔다. 시인과 함께 아득히 먼 바다와 까마득한 아래의 삼용추를 보았다.
선열대, 삼용추를 보고 내려오며 보현암 곁의 적멸암(寂滅庵)터 정자에서 쉬었다. 골바람이 솔가지를 스치고 ‘쏴- 쏴- ’ 하는 소리를 내며 불어왔다. 1587년 음력 8월 6일에 적멸암에 묵었던 황여일의 여행기가 생각났다. “불당에 들어가 베개를 높이하고 누우니 바람과 냇물이 세차서 골을 울리는데, 바람 소리의 울림이 영롱한 음성이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뼈를 차게 하고, 혼을 깨어나게 하였다. 밤은 일경인데 달이 산봉우리에 걸렸고, 달그림자가 계곡물 가운데에 떨어졌다. 성글게 돋아난 별이 빛나고, 은하수가 비껴 돌았다. 적막하여 한 마리 새도 울지 않으니, 참으로 산중의 절경이었다. 아침에 잠든 객들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숲 끝에 벌써 붉은 해가 걸렸다.” 옛사람들은 솔바람 소리를 무현금(無絃琴)의 연주로 들었다고 말씀드리자 강은교 선생님은 산의 온갖 나무 소리, 계곡의 바람 소리, 세상의 모든 사소한 소리가 모두 거문고 소리가 아니겠느냐며 반문하였다. 시인은 장자의 천뢰(天籟)를 말씀하신 것이다. 나중에 이종암 시인은 이 장면을 시, <그냥은 없다>로 형상화하였다.
사자폭포를 지나며 송진 시인에게 금강경의 눈으로 보는 시론을 들었다. 보경사 경내의 숲에 있는 한흑구문학비를 일행에게 안내했다. 수필, <보리>로 유명한 흑구 선생은 해방되던 해에 평양에서 38선을 넘어와 1948년에 포항에 정착하였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미국 유학을 가기 전부터 수필, 시, 소설을 발표하였다.
산문을 나서서 우리는 찻집에서 매화꽃 차를 나누며 산행의 여운을 음미하였다. 이종암 시인은 매화꽃을 보며 시, <몸꽃>의 창작 노트를 말하고, 강은교 시인은 이젠 나비처럼 가벼운 시를 쓰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시인이 해탈의 시경(詩境)에 접어들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연산에서 나와 청하면사무소로 안내하였다. 회재(晦齋) 이언적 선생이 빼어난 문장으로 쓴 기문과 돈재(遯齋) 성세창이 묘필로 쓴 편액이 걸렸던 해월루(海月樓)가 현감으로 왔던 겸재의 <청하성읍도> 속에 등장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느티나무 노거수 앞에서 그날을 기념하는 사진을 촬영하고 시인 일행과 작별했다. 목월은 젊은 날 버스를 타고 먼지 날리는 길을 달려 청하로 와서 조경대(釣鯨臺)가 있는 월포(月浦) 바닷가의 아가씨와 선을 본 추억을 시, <청하>로 남겼다.
내연산에 다녀와서 나는 배재경 시인의 청탁으로 <내연산의 시화(詩話)>를 사이펀(2017년 봄 제4호)에 기고하였다. 글의 첫머리에 강은교 시인의 절창, <기차>를 싣고 단풍이 황홀할 무렵 원효와 일연 스님이 머물렀던 오어사(吾魚寺)에 찾아와 ‘범어(梵語)’를 토할 날을 기다린다며 글을 맺었다. 다음 해 가을에 시인 일행이 오어사와 기림사를 찾아왔지만 나는 동행하지 못하였다.
2019년 10월 5일 강은교 선생이 배재경, 김곶, 강미정, 전구, 백미늠, 조기현, 김려, 조준, 오정미 등의 후배 문인들과 함께 내연산을 다시 찾아오셨다. 이종암 시인이 참석하지 못하여 나는 심관 화백, 성정애 수필가, 손창기 시인과 함께 시인 일행을 맞이하였다. 성보박물관에서 숙종이 호쾌하고 웅대한 행초서로 쓴 맹호연의 시, <봄날의 새벽(春曉)>과 섬세하고도 웅장하여 신심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18세기 민중들이 조성한 괘불을 보았다. 선생은 승장(僧匠) 사인(思印)이 주조한 범종의 어깨에 돌아가며 연꽃 속에 작게 새겨진 40개의 얼굴들에 주목하셨다. 사소하고 외면받는 것들에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선생의 시심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시인께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빗발이 듣는 가운데 일행은 문수대에서 돌아 내려왔다. 무풍계 너럭바위에 둘러앉아 싸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보경사 산문을 나서서 배재경 시인과 함께 걸으며, 2018년 4월 27일의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9월 19일에 평양의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15만 평양시민들과 8천만 동포 앞에서 5천 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사는 겨레가 통일과 평화의 미래를 열어나가자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약속했다고 말하는 감격적인 연설을 하고, 다음날 남북 두 정상이 백두산 천지를 찾아 천지의 물을 먹물 삼아 민족의 새역사를 쓰자고 다짐한 감동적인 일을 화제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
진주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나는 수필집, <<눈 내리던 밤>>을, 손창기 시인은 시집, <<파랑 뒤에 오는 빨강>>을 강은교 선생님께 드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선생의 시집, <<네가 떠난 후에 너를 얻었다>>에 사인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배재경 시인이 나비시회 현판 제작을 나에게 부탁했다. 11월에 강은교 선생의 시집, <<벽 속의 편지>>와 함께 선생의 친필 글씨 ‘나비시회’를 보내왔다. 나의 서예 스승인 우연(又然) 김경희 선생님께 시인의 필의(筆意)를 살린 큰 글씨를 받아 매산(梅山) 김성일 명장에게 현판의 서각을 맡겼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의 구도행을 부조(浮彫)로 새기고 지상에 만다라를 구현한 보로부두르와 적도의 낙원인 발리섬을 여행하고 돌아온 나는 2020년 1월 20일에 완성된 현판을 강은교 선생 댁으로 보냈다. 심관 화백은 시인의 시를 화제(畫題)로 쓴 초상을 그려서 나에게 부쳐주도록 부탁했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시인이 사는 금정산까지 이어지고, 홍원의 선상들이 배를 타고 영일만으로 왔던 것처럼, 나비시회가 시베리아로 가는 동해선 기차를 타고 홍원으로 소풍 가는 날이 어서 오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날마다 호접몽(蝴蝶夢)을 꾸는 시인에게 남북의 경계는 본래 없지 않은가!
* 출처 : 보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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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보경사까지 가는 데만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가끔 한번씩 가면 입구 보경사에 가서 절도 하고 차도 마시기도 한다.
물론 그 근처에서 사우나도 한번씩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개의 폭포가 있어서 한 두번은 가볼 만 하다.
주위에 홍류폭포 홍룡?폭포 무슨 폭포 무슨 폭포 등...많다
물론 설악산의 폭포도 멋지고
주왕산에도 폭포가 있다.
제주도에도 등..
하지만 여러개의 폭포들이 있어서 가면서 계속 볼 수 있고 그 다리를 건너면 세차게 물이 흘러내려오는 폭포가 있었는데 멋지고 장관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시간이 되면 가보기를 권한다.
물론 돌이 좀 많아 걷기에 다소 힘이 들수도 있을 것이다.
글에 여러 이야기들이 있네
“계곡물 소리가 곧 부처의 설법이고/ 산빛이 어찌 부처의 몸이 아니리오.”
문 전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백두산에 까지 갔었지 .. 잊고 있었네
제행무상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동해안따라 울산 경주 포항에서 강원도 거쳐 저 함경도 해안을 따라 쭉 여행도 하며 걷고도 싶네
물론 금강산에도 가보고 싶다
유럽가서 제일 부러운 것 중의 하나는 국경을 넘어 어느 나라든 쉽게 갈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 되겠지
때가 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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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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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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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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