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9 (월) 오랜만에 10월의 고궁을 둘러보며 문화탐방 및 이조왕들이 기거한 가장 운치가 있는
고궁들을 둘러보며 잠시 왕이 된 기분으로 산책을 해 보았습니다.
(산책코스는 성균관->창경궁->창덕궁->북촌한옥거리->경복궁을 차례로 답사)
"사랑의 미로' 멜로디를 들어며 이조의 고궁을 거닐며~~~
조선 전기의 성균관
1398년(태조 7) 조선 태조는 숭교방(崇敎坊 : 명륜동)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다.
입학 자격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우선적으로 성균관 입학 기회가 주어졌고, 그 외에 선발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정원은 200명이었으나 유동적이었다
첫착으로 이조의 왕족과 선비들의 최고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둘러보고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둘러보고~~~
대성전(大成殿)은 문묘의 시설 중 공자와 관련 인물들의 위패를 안치한 건물. 문묘나 향교에서 가장 귀한 건물이라
맨 안쪽에 자리한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4성(四聖) 뒷줄로 동쪽에는 민손(閔損)·염 옹(冉雍)·단 목사(端木賜)·중유(仲由)·복상(卜商)·주돈이(周敦頤)·정이(程頤)·장재(張載)를 앞줄에, 설총(薛聰)·안유(安裕)·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은 뒷줄에 종향(從享)하였다.
서쪽으로는 염경(冉耕)·재여(宰予)·염구(冉求)·언언(言偃)·전손사(顓孫師)·정호(程顥)·소옹(邵雍)·주희(朱熹)는 앞줄에, 최치원(崔致遠)·정몽주(鄭夢周)·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김인후(金麟厚)·성혼(成渾)·조헌(趙憲)·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는 뒷줄에 종 향해, 공자를 비롯한 이른바 5성(五聖)·10 철(十哲)·송조 6현(宋朝六賢)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판을 봉안하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대성전 앞뜰엔 거대한 2그루의 500년 된 은행나무와 한그루의 느티나무 그리고 노송이 어우러진 문묘이지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는 <성균관 대성전 은행나무> 두 그루는 사적 제143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 내의 대성전(大成殿) 앞뜰이자 신삼문(神三門)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익혔으며, 또한 왕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시(講試)한 곳이다.
대성전 뜰애는 거대한 500년 된 은행나무가 위엄이 있게 자라고~~~
이곳에서 조선 말엽까지 많은 학자와 정치인들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국민의 도의정신과 사회정의를 부식하고 교화하는 근원(首善之地)이 되었다. 그리고 역대 왕이 때때로 행차하여 대성전에 참배하고 유생들을 격려하기도 하였으며 왕세자가 입학할 때에는 문묘에 석채례(釋菜禮: 석존례)를 올리기도 하였다.
성균관 가로수눈 벌써 붉은 단풍이 찾아오고 있네요.
성균관을 나와서 명윤동 거리는 젊은이들의 거리로 맛집들이 즐비해 있어 값도 착하고 다양한데
난 맛난 소고기만두로 간식을 맛보고~~~ 창경궁으로 이동해서~~~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춘당지에도 계절이 바끼고 있음을 느끼며 둘러보면서~~~
소춘당지도 평화로운 풍경을 느끼면서~~~
일제 때 잘 조성된 식물원의 정원도 보면서~~~
소나무 숲길을 따라서 올라오면 잠시 머물고 싶은 뷰가 나타나고 휴식도 하면서~~~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 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왕과 과 왕비의 침실이 나란히 조성된 통명전이~~~~
왕이 직접 과거시험을 보고 면접하는 곳이지요.
500년된 향나무와 죽은 주목이 버티고 있고~~~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군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으로 쓰인 곳으로, 인정전 바로 동쪽에서 인정전과 나란히 남향하고 있다.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다
선정전의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어좌 뒷편에 놓였던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병풍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 1층 건물이다.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인정전의 일월오봉도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40년(1607년)에 재건하여 광해군 원년에 완공한 것이다
북촌 한옥마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가회동과 삼청동 내에 위치한 한옥마을이다. 지리상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왕조의 두 궁궐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예로부터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의미로 ‘북촌’이라 불리었으며, 현재의 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계동 일대에 해당한다. 많은 사적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경복궁과 마주하고 있는 삼청동길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늘어서 있고, 화동길을 비롯한 곳에서는 각종 먹거리와 특색 있는 카페를 접할 수 있다. 또한 원서동에는 전통 기능의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북촌거리는 먹거리 맛집과 카페와 골동품과 선물울 판매하는 매장 등등으로 젊은이와 외국관광객들에
인기있는 거리이지요
특히 친구들과 만나서 카페에서 차도 마시며 만남의 장소로도 인기있지요.
경복궁에 들어서니 한복입은 관람객들이 눈에 많이 보여 더울 전통 고궁에 온 기분이 업되네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법궁)이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받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4]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5년간[5] 방치되다가 19세기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에는 7천여 칸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거듭났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고 매각되며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등 궐내가 크게 훼손되었다.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36동의 건물(고종 재위 당시의 7% 수준)만 남았고 지금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은 한민족과 세계 각국의 생활양식·풍속 및 관습과 이에 사용된 도구 및 자료의 수집·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 및 교류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의 소속기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 본관 건물은 건축가 강봉진이 설계한 것으로,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한국 전통 건축물들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졌다
1867년(고종 4)부터 1873년(고종 10)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경회루(慶會樓)의 서북쪽 넓은 터에 있는 향원지(香遠池) 안의 작은 동산 위에 있다. 원래 연못의 북쪽에 연못과 정자를 연결하는 취향교(醉香橋)가 있었으나 6·25 때 파괴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남쪽의 다리는 1953년에 가설된 것을 최근에 철제다리로 복원했습니다.
최근에 새로 복원된 궁으로 잘 조성이 완성단계이네요.
건청궁은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인 1873년 지어진 건물이다. 다른 전각과 달리 일반 사대부가 살던 집의 양식을 따른 점이 특징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공간이다.
1885년부터 1896년까지 고종(재위 1863∼1907)과 명성황후가 생활하는 공간으로서 조선의 여러 정책이 결정됐고, 1887년에는 국내 최초로 전기를 생산해 전등을 밝혔다. 명성황후가 1895년 10월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후 건청궁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1907~1909년에 철거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금의 모습은 2006년 복원한 것이다.
이 향원정 정자는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육각형 모양의 초석과 평면 그리고 육모지붕 등 육각형의 공간을 구성하여 비례감을 두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높다.
건청궁은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인 1873년 지어진 건물이다. 다른 전각과 달리 일반 사대부가 살던 집의 양식을 따른 점이 특징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공간이다.
1885년부터 1896년까지 고종(재위 1863∼1907)과 명성황후가 생활하는 공간으로서 조선의 여러 정책이 결정됐고, 1887년에는 국내 최초로 전기를 생산해 전등을 밝혔다. 명성황후가 1895년 10월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후 건청궁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1907~1909년에 철거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금의 모습은 2006년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요즘 고궁에 오니 한복입고 관광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보이는데 예전엔 주로 외국인들이었는데 요즘은 젊은
여인들이나 신혼 부부들도 제접 보이네요.
우리 전통한복을 입는 기회가 거의 없어서 특히 젊은이들이 한복을 선호하는듯 합니다.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1506) 3월 17일 정유 8번째기사
경회루와 연산군의 일화로 연산군이 경회루를 가장 많이 이용햇는데
경회루 못가에 만세산을 만들어 꾸미게 해 흥청 등을 모아 놀다
경회루 못(池)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해 그 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樓)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생황(笙簧)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
원래 연산군 조의 왕실 기생 흥청이란 이름은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흥청에서 유래한 흥청망청이란 단어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흥에 겨워 마음껏 즐기며 거드럭거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또는 돈이나 물건 따위를 아끼지 않고 마구 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연산군이 서울 근교로 놀러 갈 때 왕을 따르는 흥청의 수가 1000 명씩 되었고, 날마다 계속되는 잔치에도 흥청과 운평이 동원되었다. 연산군은 이 수많은 기생과 궁궐에서 함께 놀이를 즐기고 주연을 베풀면서 국고를 탕진하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흥청으로 인해 망국이 든다는 뜻에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돼 강화도 교동에 귀양 갔다가 그해 11월 병사했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으로 인왕산·북악산·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연못의 물과 섬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경복궁울 나와서 보성 멋진 망구친구들과 즐건시간도 갖고~~~
오늘은 이조 500년 왕들이 근무하고 산책하던 멋진 고궁들을 걸어며 우리 선조들의
문화를 접하고 가장 풍경이 있고 품위가 있는 고궁을 산책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