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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영천을 사수하라.』피의 대회전 열흘.
낙동강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 50년 8월 8일 당시 한국군은 최악의 열세에 몰려 있었다.
북괴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강 남북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국을 침공 장악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선에 최후 방어선을 쳤다. 미군이 왜관-창령-마산 선을 담당했고 한국군은 왜관-낙정리-개덕 선을 담당했다.
이러한 생사기로의 마지막 전투는 영천지역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북괴군은 영천 함락 부산 점령의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1950년 9월 4일부터 9월 13일까지 10여 일간 계속된 영천의 전투는 낙동강 공방전의 최후 결전장이었다.
영천을 두 번 빼앗기고 두 번 되찾는 대역전의 전사를 기록한 영천 전투는 한국전쟁 초반의 패배를 벗어나 반격과 북진의 승기를 잡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괴군 제 15사단의 완전 섬멸과 제8사단을 초토화 시킨 전투에서 적 사살 3천 7백 99명. 포로 309명. 적 탱크 5대. 장갑차 2대. 차량 85대. 격파 화포 14문. 각종 화기 2천 3백 27정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6 · 25』35주년을 맞는 오늘. 나에게는 당시 우리의 운명이 걸렸던 영천 전투의 피 어린 증인들이 생생히 들려온다.
정말로 그것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사투였다.
영천은 대구. 포항. 경주. 아동. 청송으로 큰길을 나누어 주고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다. 군사용어로 작전의 요충지였다.
(1).『적 15사단 나타났다.』
8월에 들어서면서 참모회의 때마다 영천방면 적의 동향이 초미 관심사였다.
나는『아직 없나요.』라곤 묻곤 했고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과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은『아직 낌새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던 중 9월 1일 참모회의 때 심상치 않은 보고가 있었다.
『드디어 나타난 것 같습니다.』장 대령의 보고였다.
영천 방어에서 북괴 군관(장교) 한 명을 생포했으며 그는 북괴군 제15사단 소속으로 밝혀졌다.
적 15사단(사단장 박성철 소장)은 6일 전까지 다부동 전선에 있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영천이 우리 8사단 정면에는 적 8사단이 있었다. 피차 8사단 끼리 맞붙어 왔었다.
그런데 적 8시단은 그대로 있고 다시 제15사단이 증원된 것이다. 회의를 마치자마자 유재흥 준장의 제2군단 사령부가 하양으로 달려갔다. 이 날짜로 제1군단장에 보임된 김백일 준장도 오게 됐다.
사실 이 날짜로 군 주요 지휘관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 중앙 훈련 본부장 이형근 준장. 육군 제병(諸兵)학교 차장 김홍일 소장. 육군 제병학교 차장 이준식 준장. 전시 특병 검열관 김석원 준장. 제3사단장 이종찬 대령. 수도 사단장 송요찬 대령. 육군 헌병 사령관 장창국 대령. 제주도 경비 사령관 이응준 소장.
생포된 적 제15사단 소속 군관은 다른 사실도 털어놨다.
김일성이가 직접 수원 보와 금천 두 곳에 나타나 북괴군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독전 협박했다는 것이다.
제2군단장 유 준장은 나의 도착과 함께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군단 참모장 이한림 대령. 군단 작전 참모 이주일 대령이 동석했다.
포로 심문결과 밝혀진 김일성의 독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초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 할 작정이었다. 그 계획이 차질을 빚음으로써 한 달을 더 연기 9월 15일까지는 부산 점령을 끝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실패하면 군 지휘관을 모조리 반동으로 몰아붙이겠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으로서는 영천 전투를 마지막 카드로 생각하고 적 제15사단을 영천으로 돌린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회의는 결론적으로 영천의 이성규 준장이 이끄는 제8사단을 최대한 지원키로 했다. 그러나 이때도 안타까운 것은 아군에게 탱크가 한 대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포는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단지 인근 사단에서 1개 연대씩의 병력을 차출 제8사단을 지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9월 4일 새벽 1시경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가 요란해 지기 시작했다.
적은 10여 대의 T34탱크를 앞세우고 영천 바로 북쪽 자양에서부터 공격을 가해 왔다.
육군 상황실에서는 급보가 계속 들어왔다.
적의 공세는 예상했던 것보다 강공이었다.
우리 6사단은 5일 하루를 간신히 견뎠을 뿐 6일 새벽 2시 반 영천에서 퇴각해야 했다. 즉시 낙동강 최후 보루의 승부를 건곤일향의 영천 전투에 제2사단 예하 부대가 투입됐다.
(2).『서울 재판(再版)은 안 되오.』
-제8사단(이성규 준장)의 제10연대(고근홍 중령). 제16연대(유의남 증령). 제21연대(김용배 대령). 공병 대대(김묵 소령).
-제7사단(신상철 대령)의 3연대 제1대대(정령 소령). 제5연대(최창현 대령). 8연대(박승일 중령).
-제1사단(백선엽 준장)의 11연대(김동무 대령).
-제6사단(김종호 준장)의 제10연대(김익렬 대령).
-수도 사단(송요찬 대령)의 제18연대(정승화 소령 후에 육군 참모총장 역임).
이밖에 오점석 대위의 정찰 비행대대가 투입됐다.
영천 전선의 급박한 전황은 곧 대구 시내에 퍼졌다. 민심이 뒤숭숭해 지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그럴 즈음 조병옥 내무 장관과 전 서울시 경찰국장 이익홍씨가 사무실로 찾아 왔다.
『정 총장 어떻게 돼 가는 거요?』
조 장관은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시민들이 온통 야단이오. 대구가 곧 떨어진다고들 난리요. 진정 제가 뭔지 알려 주구려.』
『예 지금 상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측했던 일이고 대책도 세워놓고 있습니다. 장교님께서 걱정 말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하양의 2군사령부에서 논의 한 방어 작전 내용을 간추려 설명했다.
『알았소이다. 시민들이 너무들 야단법석들이구먼. 그러나 정 총장 이건 알아 두어야 하외다. 서울의 재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 장관은 이어 울 피난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 총장은 그때 없었으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미아리 문턱까지 놈들의 탱크가 닥쳤는데도『걱정 말라. 걱정 말라.』했소이다. 그러다가 수많은 서울 시민들을 지금 생지옥에 갇혀 있게 해 버렸소이다.』
조 장관은 솔직한 성품이었다. 말도 직선적이었다.
『그러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에는 솔직히 털어놓아야 합니다. 시민들이 산속으로 들어가든지 할 피난 시간은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채병덕 장군이 정 총장을 아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니 잊지 마시오.』
조 장관은 돌아가면서 란 마디를 넘겼다.
『나 내무부를 이끌고 부산으로 이사 갈까 했는데 여기 눌러 있기로 결심했소이다. 정 총장 잘 부탁하오.』
한 낮이었는데도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내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대구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유재흥 준장과 고생을 같이 나눌 마음에서 하양의 제2군단사령부로 차를 몰았다.
유 군단장은 제8사단 지휘소가 있는 금호강변 부락에 나가고 없었다.
빗줄기 속에서 미 공군의 지원도 기대 할 수가 없게 됐다.
장병들은 실망하는 눈치들이었다.
장병들은 모두 우의(雨衣)도 없이 흠뻑 비를 맞고 있었다. 계속 호를 파고 있었다. 군단장도 사단장도 비에 젖었다.
(3).『공병대가 역습 중』
사단 지휘소에 도착했을 때 유 군단장이 김목 소령의 공병대가 영천 시내로 역습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해 왔다.
제8사단 정보참모 이세호(후에 육군참모총장 역임)이 또 다른 보고를 했다.
『포로 심문결과 적 제15사단 외에 적 8사단과 강태무가 지휘하는 유격대도 나오고 있습니다.』
『강태무?』
『6 · 25전에 월북한 놈입니다. 북괴군 상좌로 있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영천을 노리는 적의 기세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야 말로 총 공격이었다.
9월 7일 오후 1시경 김묵 소령의 공병 대대가 시가지 일부를 역습 확보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8일 오전 11시 30분 탱크 46대를 앞세우고 밀어 닥치는 북괴군에 다시 영천을 내주고 말았다.
이때 8사단 16영대는 치열한 싸움 끝에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다.
영천 북방 봉대산 부근에 포진했던 16연대 장병들의 장렬한 전사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다.
전투 경험 없는 신병들이 태반이었던 16연대는 화력이나 군수 보급 면에서도 역부족이었다.
밀려오는 적 탱크를 막아 육탄 특공대를 조직했다. 수류탄 10개를 한 다발로 묶었다. 적 탱크의 캐터필러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적 탱크에 채 접근하기도 전에 총탄에 맞는 바람에 들고 가던 수류탄 다발이 폭발 장렬한 최후를 마치기도 했다.
북괴 제15사단이 영천 공격을 다시 시작해 오던 9월 6일 김용배 대령(후에 육군참모총장 역임)이 이끄는 8사단 21연대는 영천 북방 20km 떨어진 자천에 있었다.
김용배 대령은 채 철수 명령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북괴군 45연대. 103연대. 73연대 등 3개 연대에 완전 포위도고 말았다.
김 대령은 부근 고지에서 최후의 진지를 구축했다. 이때부터 21연대는 4일간을 버티면서 적 3개 연대를 붙들어 맺다.
(4). 사흘간 굶으며 혈전.
밤에는 1개 분대 또는 2개분대로 특공대를 조직 포위중인 적을 기습했다.
목숨을 건 특공대 공격에 소위. 중위. 초급 장교들이 특공대를 자원하고 나섰다.
비가 내리는 호 속에서 먹던 주먹밥도 떨어졌다. 사단장으로부터의 식량 보급은 이미 끊겼다. 전 연대는 마지막 사흘을 굶어야 했다. 식수도 떨어졌다. 내리는 빗물을 철모와 수통에 받아 두었다가 마셨다.
영천지구의 전 전선 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다.
낮에는 화력전 밤에는 백병전이었다.
특히 야간의 백병전은 그야말로 피아를 가릴 수 없는 처절한 것이었다.
그때 우리 국군은 적과 백병전을 벌일 때마다 적의 전투모를 우선 확인했다. 박박 깍은 머리는 적이었다. 총을 쏠 겨를도 없는 백병전이어서 대검으로 찔렀다. 총의 개머리판 때로는 배낭에 짊어졌던 야전사 바지를 꺼내 들어야 했다.
고립됐던 김용배 대령의 21연대는 9일간 새벽 21연대 군수주임 허순오 소령이 적진을 뚫고 기적적으로 갖고 온 탄약 식수로 막자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9월 8일 밤과 새벽 우리 2군단은 최후의 혈전을 벌였다.
6사단 19연대(김익렬 대령) 제2군단의 김욱호 대위는 대단한 야간 기습을 결의했다. 공격 모표는 영천 동북쪽에서 위치한 북괴군 제15사단 사령부였다. 불시에 감행한 이 기습 공격은 성공을 거두었다. 적 사단장 박성철 소장은 9월 5일부로 경질 돼 딴 곳으로 쫓겨 가고 말았다.
이어 사단 16연대의 제2대대(이창범 대위)의 제3대대(신건선 대위)는 경주로 가는 길목의 하회 터널에서 적 포병연대를 발견하고 일제히 공격 섬멸했다. 적은 공습을 피해 각종 포를 열차 속에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영천은 6일 만에 빼앗겼다. 7일 만에 탈환 다시 8일 만에 빼앗겼다가 9일 만에 재탈환하는 사투의 현장이었다.
(5).『하늘도 우릴 도왔다.』
당시 우리에게는 하늘의 운도 따랐다. 우리 국군의 영천 저항이 완강 하자 적이 경주 쪽으로 주공격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따라서 북괴군의 보급선은 그만큼 길어졌다.
이 보급로를 우리 국군은 곳곳에서 공격 차단했다.
8일경부터는 북괴군도 탱크용 기름 탄약 식량 보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9월 9일 아침 제1사단 김동무 대령의 11연대와 6사단 김익렬 대령의 19연대가 영천 시내로 밀고 들어갔다.
지리멸렬한 적 15사단과 8사단 패잔병들에 대한 소탕작전은 9월 13일까지 계속 됐다.
바로 이 날 우리 제2군단의 8사단(이성규 준장)은 영천 시내 한 복판에 사단 지휘소를 설치했다.
영천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해서 미군의 전차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영천 전투를 승리 할 수 있게 한 것은 우리 국군 용사들의 굳센 결의였다.
10일 동안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었다. 영천 전투는 9월 13일로 역전의 막을 내렸다.
바로 그럴 즈음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는 미 기동함대는 서해의 파도를 헤치며 북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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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굿럭.
오랫만입니다. 반가원요.
여기는 시골입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즐감합니다
선중님 감사합니다,
날씨가 여름 날씨군요. 아침은 서리가 내리고....
이게 전형적인 열대 지방 날씨랍니다.
금년 여름은 얼마나 더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