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4일 오늘의 역사
2021년 미국 플로리다주 12층 아파트 붕괴 96명 사망
2018년 여성운전 금지한 유일한 나라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운전금지령 전면 해제.
2015년 자수성가 택시회사 대표 김광자씨, 50억원 평생 모아 ‘언지장학회’ 설립
6월 초,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의 60대 여성이 서울시교육청을 찾았다. 지난달부터 “장학회를 설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수차례 전화로 묻던 여성이다. 교육청에 온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재산을 물려줄 가족도 자식도 없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며 장학회 설립 신청서를 냈다. “택시 기사로 일하며 평생 모은 돈”이라며 내놓은 재산은 50억원에 달했다.
서울시 면목동에 있는 택시 회사 ‘평화교통’ 김광자(68) 대표가 개인 재산을 털어 일용직 근로자 등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 ‘언지장학회'9를 설립했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그는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20대부터 택시 기사로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러면서 주경야독으로 고졸 검정고시까지 마쳤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1981년 한 택시 회사를 인수, 여성 CEO가 됐다. 몇 년 뒤 ‘평화교통’의 전신인 ‘평화택시’를 설립, 현재 기사 100여명, 택시 65대에 이르는 중견 회사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그는 이번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만 교육청을 통해 “열악하게 살아가는 일용직 근로자들과 단기 계약 종사자 자녀들이 희망을 갖고 성실하게 사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2015년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의 맏딸 안수산 여사 별세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맏딸인 안수산(100·미국명 수전 안 커디) 여사가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5남매(3남2녀) 중 맏딸인 안씨는 1915년 미국 LA에서 태어나 샌디에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1942~1946년 미 해군에서 사격 교관과 정보장교로 근무했다. 미 역사상 최초 동양인 여성 해군 장교였다.
종전 이후 예비역 대위로 전역한 뒤에도 1951년 미 합참정보국에서 암호 시스템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전문가 300여 명을 교육했다.
1973년 도산공원 건립 소식에 처음 방한(訪韓)했으며, 1983년 도산의 유품과 자료 등을 정리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안 여사는 신한민보와 흥사단, 3·1 여성동지회 등에서 활동했다. 1994년 타계한 아일랜드계 남편 프랜시스 커디와의 사이에 아들 필립과 크리스틴 등 1남1녀를 뒀다.
2013년 국정원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문과 전문 공개
2012년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60년만의 민선대통령에 당선
2009년 원로 성악가 오현명씨 별세
1948년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같은 해 한국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통해 데뷔한 뒤, 50여 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한양대 음대 학장을 역임했고, 국립오페라단 단장(1964~82년)으로 18년간 재직하면서 40여 편의 오페라를 연출하며 한국 오페라의 기틀을 잡았다.
'노래 나그네'로 불렸으며, 변훈의 〈명태〉와 〈임진강〉 같은 애창 가곡들이 그의 굵직한 베이스 저음을 통해서 초연됐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 첫 존엄사가 실시되다
2009년 나경우씨, 한국인 첫 'PGA 마스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나경우(41)씨가 2009년 6월 24일 미PGA로부터 마스터 프로페셔널 자격증을 획득했다.
미국 프로골프협회(PGA of America)는 수많은 골프 교습가들에게 경륜과 전문지식에 따라 다양한 자격증을 수여한다. 'PGA 마스터 프로페셔널' 타이틀은 이 가운데 최고봉으로 행크 헤이니나 짐 맥클린 같은 세계적인 코치들이 지니고 있는 타이틀이다.
나경우씨는 최근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PGA 에듀케이션 센터에서 최종 논문 프리젠테이션을 한 뒤, 이날 현지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골프 교육의 대가(大家)로 인정받는 PGA 마스터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PGA 클래스 A와 그 다음 단계인 PGA 공인 티칭 프로(CPP)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고, 8년간 실무 경험을 쌓아야 한다. 또 구체적인 전문 지식을 담은 책 한 권 분량의 논문을 제출해, 기존 마스터 프로페셔널들 앞에서 발표한 뒤, 심사를 거치는 오랜 '수행기간'을 거쳐야 한다. 1969년 미 PGA 마스터 프로그램이 창설된 뒤, 인스트럭터 분야에는 고작 172명에게만 마스터 자격증이 수여됐다. 일년에 4명에게만 문을 열어 준 셈이다. 현재 PGA클래스 A멤버는 2만8000명가량이고, PGA 공인 티칭 프로는 900명 정도이다.
나경우씨는 1992년 경희대 체육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샌디에이고 골프아카데미를 시작으로 17년간 공부와 레슨 프로를 병행하며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섰다.
2003년 배리 본즈 500홈런-500도루 달성
미국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39)가 사상 최초로 ‘500―500클럽’에 가입했다. 본즈는 24일(이하 한국시각)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벨 파크에서 벌어진 LA 다저스와의 홈 경기에서 연장 11회말 2루를 훔쳐 통산 500 도루를 기록했다. 이미 633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본즈는 이로써 메이저리그 사상 통산 500홈런과 500도루를 함께 기록한 첫 번째 선수가 됐다. 500도루를 넘긴 선수로는 통산 36번째.
본즈는 2―2로 맞선 연장 11회말 선두 타자로 나와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 에릭 가니예로부터 볼 넷을 얻어 출루한 뒤 다음 타자 안드레스 갤러라가 타석 제 2구째에 2루를 훔쳤다. 본즈의 예상치 못한 도루에 다저스 포수 폴 로두카는 2루에 볼을 송구하지도 못했다.
500도루를 성공시킨 본즈는 2루 베이스를 뽑아낸 뒤 환호하는 홈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본즈는 이어 1사 후 베니토 산티아고의 좌전 안타 때 홈을 밟아 팀의 3대2 승리를 이끌었다. 본즈는 이날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결정적인 도루로 팀의 4연승을 도왔다.
지난 1986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본즈는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73개)을 보유한 대표적인 슬러거지만, 2001년까지 16년 연속 두자리 수 도루를 기록할 만큼 발도 빠른 선수. 1996년엔 42홈런, 40 도루로 메이저리그에서 역대 두번째 ‘40-40클럽’에 가입했다. 그의 아버지 바비 본즈도 통산 5차례나 ‘30-30클럽’을 기록했다. 바비 본즈는 이날 경기 전 아들을 방문, 격려했다
2002년 북경 한국총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26명 서울 도착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한국대사관 등에 진입, 한국 망명을 요청했던 탈북자 26명이 6월24일 오전 방콕과 싱가포르 등 제3국을 거쳐 한꺼번에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우리 나라에 왔다.
지난달 23일 이후 11차례에 걸쳐 주중 한국대사관 본관과 영사부에 진입한 23명과 중국에 강제 연행된 뒤 풀려난 원모(56세) 씨 등 24명은 이 날 오전 8시 45분 방콕에서 대한항공654편을 이용, 입국했다. 어린이 3명을 포함해 남자 13명과 여자 11명으로 구성된 탈북자들은 비행기에서 내린 뒤 긴장된 표정이었으나 곧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한국땅을 밟은 데 대해 기뻐했다. 일행 중 두번째 연장자라고 밝힌 조모(55세·여) 씨는 감격한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 가족이 모두 한국으로 오게 돼 기쁘다. 감사한다.”고 말했다.
1997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에 머물렀다는 고모(15세) 군은 “대사관에서 한국이 스페인을 꺾고 월드 컵 4강전에 진출하는 것을 보았다. 앞으로 4강전 이후 경기를 한국에서 계속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캐나다 대사관에 진입했던 10대 탈북자 2명은 24일 오전 6시 10분 싱가포르에서 대한항공편을 이용해 서울에 왔다.
2001년 해군,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어선에 경고사격
우리 해군이 2001년 6월 24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어선을 경고사격으로 물러나게했다. 백령도 레이더 기지에 북한 선박 1척의 NLL 침범이 처음 포착된 것은 이날 오전 2시50분경. 4시5분쯤 대청도에 있는 150t급 ‘참수리’ 고속정 편대(3척)가 시계 200야드의 안개를 뚫고 현장에 접근해 뱃고동 소리와 발광으로 정선을 명령한 뒤 국적을 물었다. 갑판 승조원은 “접근하지 말라우”라고 대답, 북한 선박임이 확인됐다. 9t급 소형 목선으로 배에는 ‘ㄴ-함-7501’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속정은 어선으로부터 80~90m쯤까지 접근, 정선을 명령했으나 북한 어선은 각목을 휘두르고, 횃불을 고속정 10m 앞에까지 던지는 등 위협 행동을 계속했다. 고속정은 사격 경고방송을 3차례 한 뒤 2함대사령관의 지시로 4시52분 K-2 소총으로 공포탄 9발을 발사했다. 5시쯤 북한 어선은 북상 의사를 밝힌 뒤 30여분 뒤 NLL을 넘어 북측 지역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2시간37분간의 상황은 종료됐다.
1998년 클린턴 미 대통령,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북경에서 정상회담
클린턴 대통령은 첫 방문지인 중국 시안에 도착, 진시황릉 등을 관광한 뒤 26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을 방문, 톈안먼(천안문)광장에서 열리는 공식 환영식에 참석하고 장쩌민(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클린턴 대통령과 장쩌민(강택민) 국가주석은 27일 밤 국빈 만찬에서 해방군 밴드를 차례로 지휘했으며, 장주석은 특히 중국 전통악기인 얼후인(이후인·2줄짜리 바이올린)을 연주, 인권 문제 등 양국간의 골칫거리를 잠시 접어둔 채 개인적인 우정을 나눴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 동편의 충원먼(숭문문) 교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본 뒤, 고궁(자금성)과 만리장성을 돌아보며 전날 정상회담의 피로를 풀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9일 베이징(북경)대학 연설했다
2시간 이상에 걸친 연설과 질의 응답이 끝난 뒤, 베이징대학 총장은 동판에 베이징대학 건물을 배경으로 클린턴 대통령의 얼굴을 새긴 기념품을 증정했다.
1992년 서울 강남 수서지구 철거민 임시이주단지 불 280여 가구 불탐 이재민1000여명
1989년 장쩌민, 중국 당총서기에 선출
1989년 6월 24일 중국공산당 제13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그 후임으로 덩샤오핑(등소평)에 의해 장쩌민(강택민)이 당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장쩌민은 장쑤성 양저우시 출신으로 상하이교통대학에 다니던 1946년 공산당에 가입, 1955년 모스크바 유학 후 기술경제 관료로 성장하였다. 문화혁명으로 한동안 밀려났다가 복귀한 뒤, 1985년 7월 상하이시장이 되어 상하이를 중국의 금융·산업중심지로 발전시켰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로 실각한 조자양에 이어 당중앙위원회총서기가 되고 11월 덩샤오핑에게서 당군사위원회주석을, 1990년 4월 국가군사위원회주석을 물려받은 데 이어 1993년 3월 국가주석까지 겸함으로써 당과 행정, 군을 총괄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기술관료로서의 장쩌민은 마오쩌둥(모택동)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카리스마는 갖지 못했으나, 대신 남다른 성실성과 정치력으로 인구 13억의 대국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장쩌민이야말로 사회주의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지도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1989년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 사망
생선장수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그녀는 9살 때 첫 무대에서 천재소녀란 명성을 얻었다. 뛰어난 미모, 가창력에 매끄러운 스테이지 매너를 지닌 미소라는 1950년 ‘슬픈 휘파람’의 대히트로 예능계 여왕의 자리에 군림하며 일본 국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패전후 황폐해진 국토, 그 잿더미 속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했던 일본인들의 마음을 그녀의 노래가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항구의 13번지’ ‘슬픈 술’ 등이 그 대표곡으로 그녀가 남긴 노래는 1천4백여곡에 이르며 음반판매량만도 4천만장에 달했다.
이렇듯 일본 가요계에서 신격화됐던 그녀이지만, 현실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1962년 배우인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 1년반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후 혼자 살아오던 그녀는 1988년 4월 동경 돔에서의 컴백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일본의 정통 엔카 세대는 막을 내렸다. 그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신문들은 1면 또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취급,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일본대중문화에 기여한 그녀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1984년 프랑스 파리서 사학자유 요구 데모
1983년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국내 발효
1983년 서방19개국 정치지도자, 런던서 사회주의인터내셔날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민주연합(IDU) 발족
1981년 세계은행(IBRD), 중국에 첫 차관 제공 결정
1980년 김종필, 이후락씨 모든 공직 사퇴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 방일
1978년 북한, 유아의 가정양육 금지
1978년 아메드 알 카사미 북예멘 대통령 피살
1976년 구마고속도로 기공
1976년 미국의 식물 사진 작가 커닝엄 사망
1976년 로물로 필리핀 외무장관, 아세안독트린 제창
1976년 베트남 첫 남북통일국회 개막
1973년 미국-소련 가상병기 사용금지 합의
1971년 한-일 무역회담 열림
1965년 월남, 프랑스와 단교
1960년 미국,일본 안보조약 발효
1960년 국회, 군정법령 55호, 88호 폐기. 신문, 정당등록법안 통과
1958년 일본 아소산 화산폭발
1950년 제4회 월드컵 브라질에서 개막
1948년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소련이 1948년 6월 24일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공동 관리하는 서베를린이 고립됐다. 2차대전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특히 소련점령지역인 베를린은 공동관리하에 있었다. 이러한 동서 양진영의 공동보조도 소련과 다른 3국과의 입장차이로 균열이 시작돼 1947년 런던에서 개최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기도 했다.
봉쇄 전날 소련군의 소콜로프스키 원수는 독일의 소련점령지역에서의 통화개혁을 발표했고 다른 3국도 같은 날 새로운 통화인 독일 마르크를 발행했다. 소련은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항공로를 제외한 모든 교통로를 봉쇄했다. 더욱이 25일에는 베를린의 3국 점령지역에 대한 식량수송을 금지했다. 6월 30일 미 국무장관 마샬은 ‘식료품과 물자 보급을 위한 공수를 단행한다’고 발표, 공수작전을 시작했다. 232만 5천톤에 달하는 공수는 1949년 10월 31일에 중단됐다.
1947년 미국 아이다호주, 케네스 아놀드가 비행중 UFO를 목격했다고 보고, UFO 최초 발견
1947년 반탁투쟁위 결성
1946년 북한 8시간 노동 규정한 노동법 발표
1940년 프랑스-이탈리아 휴전협정 조인
1933년 아우토반 건설 공사(公社) 설립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는 즉시 아우토반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명칭은 ‘라이히스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도로)’. 아우토반 건설을 담당할 공사(公社)를 설립(1933년 6월 24일)하고 3개월 뒤에는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 간의 제1기 공사를 시작했다.
17년 동안 1만7000km의 도로를 까는 것이 목표였지만 2차대전 발발로 히틀러는 생전에 4000km 만 볼 수 있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1926년부터 ‘하프라바(HAFRABA)’라는 민간단체가 아우토반 건설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하프라바’는 고속도로 연결 예정지 함부르크·프랑크푸르트·바젤(스위스)의 머리글자에서 딴 명칭이다.
히틀러가 아우토반에 매달린 이유는 1차대전 때 마른 전투의 패인이 수송력 부족에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650만의 실업자를 구제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를테면 공황 타개를 위한 독일판 뉴딜정책이었던 셈이다.
아우토반은 경부고속도로와도 인연이 깊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방문길에 올라 본·쾰른 간 20km 구간을 160km로 달려본 뒤 경부고속도로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1928년 프랑스 프랑크화 5분의1로 평가절하
1915년 미국, 연합국측에 대차관 제공
1915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관(장서 350만권) 하버드대 와이드너 도서관 개관
타이타닉호에서 죽은(1912.4.14) 헤리 엘킨스 와이드너의 어머니가 기증(350만$)
1910년 일제, 한국 경찰권 완전박탈
1905년 국고증권조례 공포
1903년 국문학자 양주동 출생
1901년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 출생
1901년 6월 24일에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朴敬元)이 조종사로서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7년 1월, 3등 조종사 시험에 합격하면서였다. 이 당시의 도쿄 아사히 신문은 ‘조선출신 여성비행사 1호 탄생’이란 기사를 실어 그의 존재를 알렸다.
고국의 하늘을 날고 싶었던 박경원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33년. 서울을 경유해 중국 창춘(長春)까지 ‘일·만(日·滿)친선, 황군 위안’을 위한 장거리 비행이 허락된 것이다. 몰고갈 비행기가 없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고이즈미 현 총리의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체신대신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신사참배도 함께 하는 등 만남이 잦아져 둘 사이의 염문이 일본 신문 가십란에 실리기도 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박경원이 장장 2000km의 비행을 위해 청연호(靑燕號)를 몰고 고국을 향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그러나 50분 만에 그의 애기(愛機)는 하코네 중턱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청연호의 동체는 두동강났고 박경원은 핸들을 잡은 채 숨져 있었다.
1901년 피카소 19세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피카소가 1901년 6월 24일 1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전해 1900년에 이어 재차 파리에 온 피카소는 화상(畵商) C. 보라르와의 친분 덕에 그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피카소의 개인전을 관람한 한 미술평론가는 이 무명의 청년화가를 두고 ‘피카소는 화가이다. 근성부터 화가이다. 그는 색채를 색채로서 찬미하고 있다’고 격찬했다. 파리에서의 데뷔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향과 달리, 작은 체구에 까만 피부의 스페인 출신 청년화가 피카소의 그림은 단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청년시절을 모국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피카소는 그 즈음 캬바레나 선술집을 강렬한 색채와 역동감 넘치는 터치로 그려냈다. 그러던 어느날 풍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동행했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으로 권총 자살을 한다. 이 소식은 피카소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이 때부터 온통 푸른색으로만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계속된 ‘청색시대’의 시작이었다.
1899(조선 고종 36) 관립상공학교 설립
1894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제4대 대통령 카르노 사망
1894년 `킨제이 보고서`를 낸 알프레드 킨제이 출생
1892년 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김은호 출생
1886년 개신교,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
1883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헤스 출생 - 우주선(宇宙線)의 발견으로 193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881년 멕시코서 열차 추락. 200명 사망
1852년 디프테리아균을 발견한 독일 세균학자 뢰플러 출생
1842년 미국 소설가 비어스 태어남
1838년 독일 경제학자 구스타프 폰 슈몰러 출생
1783년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제 물의 분해 성공
1780(조선 정조 4)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지음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문물제도와 생활풍습 소개하고, 조선의 문물과 제도 개혁 주장
박지원은 형식적인 예절과 도덕만을 중시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학문은 실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며 실학 깊이 연구, 벼슬아치와 양반들의 생활 폭로하고 풍자한 한문소설 지어 세태비판
1434년 장영실(蔣英實)·김빈 등, 자격루(自擊漏) 제작
79년 제9대 로마제국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