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갈맷길 중 가장 이용도가 높고 많이 알려진 코스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부산사람 누구나 주저 없이 이기대(二妓臺) 코스를 꼽는다. 최근 갈맷길 최종 용역보고를 통해 이 길은 민락교~오륙도 구간 2코스로 조정되었다. 전체 길이는 12km인데 이 글에서는 광안리에서 시작해 이기대와 승두말, 신선대를 거쳐 유엔공원까지 17km를 걷는다. 한편 이 길은 동해 해파랑길 1구간에 속하기도 한다. 멀리 장산봉 자락 이기대 끝 동생말을 이정표로 한다.
광안리는 수영팔경 중 남장낙안(南場落雁)이라 하여 기러기가 쉬던 땅으로 칠산포라 부르기도 했다. 해수욕장 삼거리 옆 호르메스호텔 뒤편 광안바다가 보이는 카페 ‘커피이야기’를 기점으로 삼는다. 커피이야기는 탐방객의 이용을 돕는 해파랑가게이기도 하다. 일정을 체크하며 이 동네에 30년 거주한 전승혜 주인장과 그의 유년시절 광안리를 뒤돌아본다.
그녀가 성장하면서 보았던 광안리는 각종 개발이 도처에서 일어나던 시기로서 조금은 어수선한 때였다고 회상한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경과하며 광안리는 일신했다. 현재 광안리해변은 다양한 계층이 이합집산을 하는 곳이다. 이 도시에서 해안의 존재는 축복이지만 그 선물의 가치를 모르고 함부로 대한 세월 동안, 해안의 원경은 많이 사라졌다. 한마디로 도심의 전형적 해변이다. 시나브로 멀어진 바다를 그리워하며 부산사람들은 광안리의 밤바다에 취한다. 다양한 형태의 술집과 카페, 횟집들로 언제나 불야성이다.
광안대교가 들어선 뒤 시인 이규열은 광안대교 때문에 수평선을 잃었다고 슬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광안대교는 부산의 상징이 되었다. 10월이면 여기서 쏘아 올리는 불꽃의 허무한 장관을 보기 위해 100만 인파가 운집한다. 부산시민의 4분의 1이 여름에는 해운대로, 늦가을에는 광안리로 몰리는 것이다. 더러는 황령산이나 장산에서 이 빛의 축제를 즐기기도 한다.
광안리의 아침은 백사장을 조깅하거나 산보하는 사람들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남천 삼익비치아파트 광안해변로 벽화거리를 돌아 남천어촌계 입구까지 일주한다. 1km 남짓한 거리이지만 우레탄 바닥에 1m에 불과한 호안은 개방감으로 시원스레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봄이면 삼익비치아파트 단지를 관통하는 벚꽃길을 추천한다. 201동과 301동 사이 10분에 불과한 거리지만 봄날 이 길은 몰려든 상춘객으로 더디 가는 꽃길이 된다.
파도가 자글자글 소리 내며 놀다 가는 곳 길은 남천항을 지나 광안대교 입구 횡단보도를 건너 섶자리까지 1.5m를 차로와 마리나항 데크를 따라 간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지만 예전에 이 바닷가는 수심이 얕고 뻘과 모래가 섞인 혼합갯벌이었다. 해서 백합이나 고둥이 지천이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해수욕을 즐겼다. 그러던 세월이 미군의 쓰레기 야적장을 거치며 흉물스럽게 방치되다 1960년대 지금의 메트로시티 자리가 매립되면서 동국제강이 들어왔다. 삼익비치는 1970년대에 들어섰다. 그보다 앞서는 염전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일대를 분포라 부르는데 동이(가마)를 이용해 소금을 부었다고 해서 ‘분이 있는 포구’로 분개(盆浦)라 했다. 지금의 용호 1~3동 지역으로 ‘경상도지리서’와 ‘동래부읍지’에 의하면 31좌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전한다. 1886년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작성한 부산항 해도를 통해 그 흔적들을 추적할 수 있다.
동산교에서 동생말까지는 약 500m. 용호부두를 지나 언덕에 오르자 시원하게 펼쳐지는 수영만이 보인다. 더하여 파도가 달려든다. 장산봉 자락이 바다로 내려서면서 작은 골마다 몽돌을 깔았고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자글자글 소리 내며 놀다 간다. 그 소리를 귀에 담고 본격적인 이기대 해안길을 걷는다. 사실 허다한 해안길이 있지만 이기대만큼 뛰어난 곳이 없다. 원래 자기 것은 잘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부산에 살면서 늘 보는 해안으로만 인식하다 다른 지역에 갔다가 ‘아, 부산해안이 더 좋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는 대체적인 평이다.
실제 이기대 해안길은 다양한 길걷기의 맛을 제공한다. 동생말을 내려서 5개의 구름다리를 건너 모퉁이를 돌 때마다 늘 새로운 풍광이 펼쳐진다. 파도는 언제나 발아래 출렁이거나 달려들고 때로 포말 세례를 입힌다. 눈과 귀가 즐겁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걷는다면 그 맛은 배가 된다. 다소 오르막이 있어 숨이 가쁘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이기대가 제공하는 풍광에 비하면 가뿐하게 넘길 수 있는 하찮은 불평일 뿐이다.
이런 이기대의 유래와 관련 몇 가지 설이 있다. 동래영지(東來營誌)가 공식적인 기록인 바,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는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서 그리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두 기생이다. ‘수영의 의로운 기녀가 수영성을 함락시킨 왜군들이 잔치를 벌일 때 자청해 함께 술 마시며 놀다가 왜장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떨어져 죽었다 하니 의기대(義妓臺)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인 바, 어쨌거나 남아 있는 기록이라곤 ‘左營南十五里 上有 二妓臺云(좌영남십오리 상유 이기대운)’이라 전할 뿐이다. 다만 의기대란 주장에 대해 살펴본 바, 왜장을 끌어안고 떨어져 죽을 만큼 높지 않아서 선뜻 믿기지 않는다.
이기대는 바다에 접한 암반이 비스듬히 바다로 몰입하는 형태의 해안으로 지질사적으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어울마당 주변 울트라사우루스의 발자국 화석에 더하여 가족 나들이 길로도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다리쉼을 한 다음 장바위와 낭끝을 돌아서면 기암절벽이 펼쳐진다. 가는 길머리에 ‘공갈바위’라고 작명한 바위 하나가 있다. 이기대가 초행인 분들과 올 때면 “밀면 흔들린다”고 거짓말을 능청스레 하면, 호기심에 진짜 밀어 보는 사람이 꼭 한둘은 있다. 안 흔들린다고 하면 “바위 자존심이 있지, 여러 명이 한꺼번에 하면 흔들린다”고 다시 밀어 볼 것을 주문하면 한꺼번에 달려들어 힘을 쓰는데, 바위 생긴 것이 그럴듯하여 열이면 열, 다 속아 넘어가 한바탕 웃음을 연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폭 1m 남짓한 흙길을 따라 평평한 암반지대를 걷다 보면 철따라 야생화들이 반긴다. 군부대를 돌아서면 처마바위의 호탕함과 박골새 사이로 몰려오는 파도떼, 그리고 농바위에서 오륙도 쪽 정경은 이기대의 진수다.
지금은 사라진 용호동 해녀들의 사연 산태골 잘룩개 언덕에서 바라보는 농바위는 여러 형상으로 해석된다. 가장 공감되는 이름이 망부석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어른들은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어 망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농바위의 ‘籠’은 버들채나 싸리 따위로 함처럼 만들어 종이를 바른 퀘로 고리짝을 포개어 놓은 듯한 형상을 말하는데, 오륙도처럼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한다.
승두말까지 이동하면서 해식대지와 해식동, 해식절벽에 가지를 뻗친 소나무가 풍경에 더한다. 고갯길을 넘어서면 오륙도 SK뷰 아파트 단지가 있다. 승두말까지는 약 1km, 오륙도가 수평선을 배경으로 성큼 다가선다. 일대는 예전에 일본군 포진지 터가 있던 자리다. 제2차 세계대전 또는 태평양 전쟁으로 일컫는 그 시절 1930년대 일제는 연합국의 본토 공격에 위협을 느끼고 공해상의 길목인 이곳에다 16년의 시간을 들여 포진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포진지 터는 아파트 단지를 만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문득 용호농장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 1904년 외국인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감만동 한센병원에서 시작된 구제사업은 1940년 12월 일제에 의해 소록도로 강제 이송되면서 사회와의 격리를 강요당했다. 그리고 1945년 10월 태종대(박애원교회)에서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27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생활을 꾸리다 1946년 3월 여수 애양병원 원장이던 윌슨 박사와 미군의 도움으로 용호농장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본동주민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밤을 이용하여 배편으로 이주했다. 이들 중 양성환자는 소록도로 가고 음성환자만 남아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아 왔지만 SK뷰가 들어오면서 그들은 사라졌다. 아파트 단지 입구 어디든 이 땅의 이력을 알 수 있는 안내판 하나라도 섰으면, 해본다.
해맞이언덕에서 바라보는 오륙도는 아침과 저녁이 다 좋다. 특히 겨울 저녁 굴섬에 날아드는 민물가마우지의 비행이 일대 장관이다. 아침이면 영도를 경유해 다대포 몰운대나 다대5지구의 아파트 능선을 넘어 낙동강 하구로 먹이 활동을 하러 갔다 오후 4시 반~5시 사이 출근길을 따라 퇴근해 굴섬에서 집단휴식을 취한다. 굴섬이 다른 섬과는 달리 유난히 희게 보이는 것은 가마우지들의 배설물 때문이다. 여기에 아침저녁으로 대마도가 선명히 보여 또 다른 눈요기를 곁들인다. 오륙도는 뭍으로부터 방패섬-솔섬-수리섬-송곳섬-굴섬-등대섬(밭섬)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방패섬과 솔섬이 물때에 따라 썰물이면 하나로 되고 밀물이면 두 개로 분리되는 현상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오륙도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승두말에서는 정작 오륙도를 볼 수 없다. 따라서 등대섬(밭섬)-굴섬-송곳섬-수리섬-우삭도(솔섬과 방패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하거나 신선대나 태종대로 가야 한다. 1927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인도였던 오륙도는 제일 끝 밭섬에 등대가 들어서 유인섬이 된 것이다.
선착장으로 내려서면 오륙도행 유람선이 대기 중이다. 1만 원을 내면 오륙도를 일주하는 뱃길에 오를 수 있다. 등대에 올라 뭍을 조망할 수도 있다. 출출한 배를 다스리고 싶거든 이제 막 물질을 끝내고 돌아온 해녀들이 장만한 해산물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기울여 볼 일이다.
이른 아침 승두말 오륙도 선착장으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낚시꾼들이다. 그리고 오전 9시반경에 이곳을 일터로 하는 해녀들이 나타난다. 용호동에 해녀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57년부터다. 그들 역시 제주 출신이다. 당시 일본으로 수출하던 천초와 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기 위해 해녀 17명이 현지인 해남들과 작업을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웃한 용당에도 해녀가 30여 명 있었다. 역사를 따져보면 용당 해녀가 먼저고 기술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한때 이곳에서 잡혔던 상어는 영남의 제사상을 장식하던 주요 어종으로서, 특히 헛제사밥으로 유명한 안동의 상어고기 공급처였다. 허나 이제는 상어잡이는 흘러간 기록일 뿐이다. 길은 열렸지만, 사연은 묻혔다.
오륙도 및 주변 해역·육역(378,189㎡)은 해양 생태계가 우수하고 해양생물의 다양성이 높아 2003년부터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부산시는 2009년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해당지역의 생태계 보전을 위한 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조사를 통해 밝혀진 동식물은 야광충 등 식물플랑크톤 87종, 동물플랑크론 70종, 조간대 생물 240종, 해조류 27종, 유영생물 63종이 출현했고, 섬향나무 등 식물 70종, 조류 15종이 오륙도에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서식이 확인된 우말, 뿔산호류, 섬향나무 및 매 등은 보호대상 해양생물, 멸종위기 야생동물, 천연기념물 등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생물로서 각별한 관심과 주의가 요구된다.
앤드루왕자길은 화사한 벚나무길 방향을 틀어 백운포 고개로 향한다. 원래 백운포로 가는 길은 갯바위인 거무섬이 지척인 몽돌 해안을 따라 깜장돌, 백석바위, 깨진돌새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길은 현재 씨사이드개발과 관련해 막혀 있다. 할 수 없이 차도 고개길을 이용한다. 고갯마루에 서면 매립지 위에 들어선 해군작전사령부와 서너 척의 함정이 보인다.
길은 천주교 묘지를 가로 질러 삘기고개를 경계로 신선대로 향한다. ‘뻘기’(伐基)란 ‘묵은 땅을 일구어 들을 넓힌다’는 뜻으로 고개 아래쪽을 개간하면서 붙여진 지명이다. 신선대로 오르는 길은 약간 오르막이 있어 숨이 가빠진다. 거기다 180봉을 거쳐야 닿을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언제나 적당한 발품 끝에는 그 수고만큼의 보상에 부합하는 멋진 풍광이 제공된다. 오륙도도 제대로 볼 수 있다. 거기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도 태종산과 봉래산이 삿갓구름을 쓰고 태평양을 마주한 그림은 이곳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장면이다. 땀을 식혔다면 신선대로 이동할 일이다.
우암반도의 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신선대는 그 이름처럼 신선이 놀다 가는 장소에 걸맞게 절경을 간직한 곳이다. 주변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용당(龍塘)이라 불렀고, 신라 말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유람했다고 한다. 꼭대기 정상부에 ‘무제등’이란 큰 바위가 있는데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현재는 위에서 굽어보는 부산항 일원의 파노라마로 만족해야 하지만 반세기 전에는 해송 숲과 백사장 그리고 몽돌밭에 늘어 선 기암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한다.
한때 이곳을 찾았던 청마 유치환은 대의 아래쪽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가관’이라 표현했다. 그 가관은 6·25 이후 피란민이 몰려들고 중위에 판잣집이 들어서면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하여 1960~1980년 동명목재 시절을 지나며 절반쯤 까여 나간 뒤 1987년 컨테이너 전용부두 3단계 공사가 이루어지면서부터 완전히 지워졌다. 길이 200여m의 ‘모래불’이며 일곱 여덟물 때 모습을 드러냈던 ‘다다목’은 그때의 신선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만 남았을 뿐이다.
무제등 바로 밑에는 1796년 9월 6일(정조 20) 이곳을 방문했던 영국 함정 프로비던스호의 사연이 비석으로 서 있다. 보우턴 함장은 그의 항해일지에 “…신선대에 올라 바위각을 재는데, 이 산의 강력한 자력으로 인하여 나침반이 소용없었다. 가파르고 높은 이산은 지도상에 ‘자석의 머리’라고 표기했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 2001년 200주년을 맞이해 영국 왕실의 앤드루 왕자가 제막식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그 기념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앤드루왕자길이란 이름도 부여했다.
앤드루왕자길은 벚나무길이다. 봄이면 연분홍 꽃대궐 터널길이다. 끝물이면 벚꽃 분분히 눈처럼 휘날리지만 여름 폭염 아래서는 그늘길이라 벗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다.
삘기고개가 있는 신선대 입구에서 다음 코스는 유엔기념공원이다. 봉우리산(이전 지명이 보오지산인데 이름이 거시기하다 하여 봉우리산으로 불린다)을 마주하며 걷는 내리막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그 길에 한때 부산 최대의 기업이었던 동명목재 터와 부두를 본다. 동명부두 역시 이름만 남았을 뿐이다. 원목더미 가득했던 바다 저류장은 오래 전에 매립되었다. 흉흉한 소문이 끊이질 않던 1980년대 동명목재는 망했다.
동명대학교 앞에서 도로 대신 학교 안길을 이용한다. 차도가 주는 위험과 차량의 소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다. 제3정문에서 제3주차장을 지나 12지신 거리와 분수대를 따라 이동한다. 그리고 제1정문에서 우회전하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연수목원이 있다. 가족나들이라면 다양한 식생들을 만나보는 것도 재미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묘지 수목원의 북쪽 입구에는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고 담장 옆에는 유엔공원이 있다. 정문은 김중업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한국적 건축미의 적용이 고스란히 드러난 수작이다. 조성 당시 엄동설한에 황량하기 짝이 없었는데, 방법을 두고 고민하던 중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보리를 이식해서 푸른 묘역으로 단장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다운 발상이다.
현재 이곳에는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21개국(전투지원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2,300명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한국전쟁 당시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의 가매장지에 있던 유해를 1951년 1월 18일 이곳으로 이장하기 시작해 1951년 4월 5일에 봉납되었다. 애초 유엔군 전사자 약 1만1,000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미국과 벨기에 등 전사자의 유해는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었다. 묘역 전체를 통틀어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 영국군 전사자가 가장 많이 봉안되어 있다. 해외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람은 그곳에 매장한다는 그 나라의 관습 때문이다. 그래서 별도의 위령탑이 조성되어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묘지는 1955년 국회결의를 통해 UN에 영구 기증되었다. 그리고 2007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359호로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비자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외국 영토로 대한민국 국군이 입구를 지키고 섰다. 입구에 묘지 조성과정을 기록한 전시관과 추모관이 있다. 묘역으로 가는 길 곳곳에 정숙을 요구하는 팻말이 붙어 있다.
안장된 전사자 중 17세 최연소자인 호주병사 JP DOUNT의 성을 따서 만든 ‘도운트수로’며 한국전쟁 당시 부산미군수사령관 워트컴의 묘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자 워트컴은 군법을 어기고 이재민들에게 군수물자를 나누어준 인물로 한국인과 결혼하고 병원을 짓는 등 전쟁이 할퀴고 간 황량한 터에 박애 정신을 실천한 사람이다.
이념을 떠나 유엔의 기치 아래 최초로 결의된 구제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이 공간이 존재하지만 가족과 살던 사회를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는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국에서 산화한 젊은 넋들을 추모한다. 역사의 교훈은 늘 이렇듯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라고 일러주지만 이 땅은 여전히 막막하다. 어둠이 밀려온다. 지척에 선사시대부터 부산 근현대사를 일람할 수 있는 부산박물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