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 오늘의 역사
2020년 방송작가 양근승 세상 떠남(85세)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2018년 소설가 황석영 장편소설 '해질 무렵’으로 프랑스 '2018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수상.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이주노동자노조 합법 인정판결
2015년 박근혜 대통령 여야 합의 국회법 거부
2009년 마이클 잭슨 심장마비 사망
마이클 잭슨의 사망원인은 치사량의 마취제 성분으로 밝혀졌으며, 잭슨의 불면증 치료를 약 6주간 해왔으며 매일 밤 강력한 마취제인 프로포폴(propofol) 50㎎을 정맥에 주사한것으로 알려진 잭슨의 주치의인 콘래드 머리(Murray)가 과실치사 혐의를 받게되었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 인생은 5세 때 부터 시작됐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5인조 그룹 '잭슨 파이브'를 결성, 음악적 재능을 뽐내며 리드 보컬로 팝계에 입문했다. 그는 1976년 '잭슨스'로 이름을 바꾼 이 그룹에서 1984년까지 활동했다.
마이클 잭슨은 1971년 '갓 투 비 데어'(Got To Be There)라는 음반을 시작으로 홀로서기 시작했으며 그의 솔로 전성 시대는 1982년 발매한 '스릴러'(Thriller) 음반에서 만개했다. 앨범 수록곡 9곡 중 7곡이 빌보드 차트 톱 10에 들었다. 특히 '빌리 진'의 뮤직비디오가 MTV로 공개되자 그의 '문워크 춤'은 전세계 음악팬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스릴러’앨범은 전세계적으로 약 6000만장이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는 이같은 명성을 바탕을로 지난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오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2009년 ‘미녀 삼총사’ 파라 포셋 사망
그는 1976년 ‘미녀 삼총사’에 출연하면서 빛나는 금발과 환한 미소로 바로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포셋이 몸에 착 붙는 수영복을 입고 찍은 포스터는 수백만장이 팔려 나갔으며 그의 헤어스타일은 미국 전역의 소녀와 여성 사이에 크게 유행되기도 했다. 포셋은 ‘미녀 삼총사’에 한 시즌만 출연한 뒤 떠났으나 이후 80~90년대에 많은 영화에 등장했다.
그는 2006년 항문암 진단 후 오닐의 헌신적인 간병 속에 치료를 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24살 된 아들 레이먼드가 있다. 이달 들어 오닐은 포셋에게 정식으로 청혼해 응낙을 받았다고 공개,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암 투병 끝에 2009년 6월 25일 6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05년 이란 대선에서 강경보수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당선
2004년 국내 최장신 농구선수 하승진, 한국인으로서 첫 미국 NBA 진출
국내 최장신 농구선수 하승진(연세대·2m23)이 한국선수로서는 처음으로 NBA(미프로농구)에 진출했다.
하승진은 미국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실시된 04~05시즌 신인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17번, 전체 46순위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의해 지명됐다.
하승진은 2년 계약기간 최저연봉 34만9458달러(약 4억247만원)를 보장받는다.
하승진은 자신이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됐다는 소식을 드래프트가 실시된 뉴욕이 아닌 LA에서 들었다. NBA측이 1라운드 상위 지명이 예상되는 선수들만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일급 대우가 보장된 1라운드 지명에서 제외되고, 2라운드 17번째 만에 이름이 불려졌으나 그의 목소리에선 실망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에 와보니 뛰어난 선수들이 너무 많았어요. 몇 라운드, 몇 순위에 지명되는가보다는 일단 NBA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오히려 2라운드에 지명되고 보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앞서요.”
2m23의 큰 키로 국내 고교(삼일상고)·대학(연세대) 무대를 간단히 평정했던 하승진은 스스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2002년 한국, 월드컵 준결승전서 독일에 0대1 패
잘 싸웠다. 휴전선에서 마라도까지, 백령도에서 독도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 마음이 된 4800만 ‘붉은 악마’와 함께 잘 싸웠다. 우승후보로 꼽히던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을 잇달아 꺾으며 세계축구사를 새로 써온 한국의 월드컵 ‘이변 행진’이 준결승에서 멈췄다. 하지만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본선 1승은 물론 16강·8강을 거쳐 4강까지 진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25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독일의 미하엘 발라크에게 결승골을 내줘 0대1로 분패했다.
한국 선수들은 조별리그 3경기에 이어 이탈리아와의 16강전(18일) 117분, 스페인과의 8강전(22일) 120분을 뛰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나선 철인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과 선수들의 잠재력이 결합된 한국만의 ‘파워 축구’는 남미와 유럽의 어느 팀도 흉내낼 수 없었다.
독일도 그 힘을 의식했는지 이날 전반부터 조심스럽게 나왔고, 후반전 득점한 뒤에는 철저히 지키기 작전을 펼쳤다.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전에서 발목을 다친 김남일을 빼고, 이천수와 차두리를 선발로 내세웠지만 신체조건이 앞선 독일의 단단한 수비를 뚫기에는 선수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
독일의 결승골은 한국 선수의 피로 기색이 역력했던 후반 30분 터졌다. 노이빌레가 한국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든 뒤 낮게 크로스를 했다. 발라크는 문전으로 달려들며 오른발 슛을 했고, 이운재가 전진하며 쳐낸 공을 다시 왼발로 슛해 골 그물을 흔들었다. 이날 서울(250만명), 부산(43만), 대구(29만명), 인천(20만명) 등 전국 458곳에서 700만명이 거리응원에 나섰다.
2000년 6.25전쟁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 `아! 6.25`전 전쟁기념관서 개막
6.25전쟁 50주년을 맞아 전쟁기념관과 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하는 특별기획전 `아! 6.25-그때는 자유를,이제는 통일을`이 2000년 6월 25일 오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개막됐다. 이날 오전 11시 개막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전시회 현황 브리핑을 들은 뒤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있어선 안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막행사에는 김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 피델 라모스 필리핀 전대통령 내외, 조성태 국방부장관,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아! 6.25`전은 `잊혀진 전쟁`이나 `동족상잔`만이 아니라 `자유세계를 지켜낸 전쟁`이자 `냉전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긴 계기를 만든 전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6.25전쟁의 의미와 실상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기획됐다. 2년간 미국-일본-중국 등지에서 수집한 사진, 문서, 영상 및 실물자료 5천여점이 12월 31일까지 전쟁기념관내 2천평의 특별전시실에서 전시됐다.
1998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98` 영문판 판매
1996년 불교계 대표적 스님 서경보 스님 입적
1996년 6월 25일 입적한 일붕선교종 종정 서경보 스님은 불교계에서 일반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한명이었다. 서경보 스님은 세계 각국을 무대로 활동을 펼쳐왔으며 1백 26개의 명예박사 학위와 1천42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그는 또 헤아릴 수 없는 서예작품을 남겼고 이같은 정력적인 활동으로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저명인사가 됐다.
제주도 서귀포 출신인 서경보 스님은 18세에 출가한 후 구례 화엄사, 서울 개운사 등에서 공부했으며 일본 임제불교 전문대학 유학을 거쳐 1950년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 중 한사람으로 1969년 미국 템플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던 그는 동국대 불교대 학장, 불국사 주지, 원로의원 등 조계종단의 중요직책을 역임했다. 서경보 스님은 그러나 1988년 조계종을 탈종해 ‘일붕선교종’이란 별도의 종단을 만듦으로써 한국 불교의 주류에서 벗어났으며 1992년에는 세계불교법왕청을 세워 초대 법왕이 됐다.
1993년 저서 7백33권, 박사학위 73개, 통일기원비 건립 7백51개, 선필 50만장 등 4개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던 서경보 스님은 이같은 파격적인 행동으로 불교계에서 ‘돈키호테’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 다란 부근 미군공군기지 폭탄테러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항구도시 다란 부근 미 공군기지 앞 도로에서 1996년 6월 25일 밤10시30분쯤 차량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폭발사건으로 도로와 접한 기지 내 8층 건물이 부서지면서 19명이 숨지고 중상자 73명 등 2백70여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19명은 전원 미군인 것으로 알려졌다.
파괴된 건물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방부 소유로 미군 가족 아파트와 미 공군 4404비행단 사령부로 사용돼 왔다. 폭발 현장은 깊이 11m 폭 28m의 구덩이가 파여졌으며 사건 현장에서 5km 떨어진 주택가 유리창들도 모두 박살나 폭발물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날 폭탄 테러는 1983년 2백41명의 사망자를 낸 레바논 미 해병대 건물 폭탄테러사건 이래 최악의 것이라고 미 국방부 측이 밝혔다.
1995년 대북 지원용 우리쌀을 실은 ‘씨 아펙스호’ 동해항 출발
대북쌀 지원을 위한 우리쌀 1차분이 1995년 6월 25일 오후 5시 강원도 동해항 중앙부두를 출발했다. 이날 출발은 북측의 연기요청에 의해 하루 늦어졌다가 이날 북경에서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와 북한 삼천리총회사간에 실무계약서가 서명됨에 이루어졌다. 1천여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출항식에는 이홍구 국무총리의 기념사와 송영대 통일원차관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기념식후 우선 지원분 2천톤을 실은 ‘씨 아펙스호’(선장 김례민)는 출항 기적을 세번 울린 뒤 출발해 26일 오후 청진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씨 아펙스호’는 북한의 위협으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만을 게양한 채 청진항에 진입, 쌀을 하역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부는 북한에 공식항의하며 북측이 사과할 때까지 2차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하자 북측은 30일 공식 사과했다. 이에 수송선 3척에 나눠실은 2차분 8천톤도 7월 4일 목포항과 부산항에서 각각 출항했다
1995년 미국 대법원장 워렌 버거 별세
버거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판사로 분류됐으나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철폐하는 데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 등 그의 판결은 진보주의자들로부터도 많은 찬사를 들었다.
그는 또 1974년 자기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해 준 닉슨 대통령에게 워터게이트 스캔들 판결을 위해 백악관 녹음테이프를 제출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의 판결은 닉슨 사임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했다.
1993년 오스트리아 빈 유엔세계인권회의 결의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언급
1991년 유고연방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
1991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신고에 155명 접수
1990년 중국 정부 반체제 물리학자 방려지 부부 출국 허용
1990년 태풍 오페리아 서울 2백9㎜ 등 전국에 비 21명 사망 재산피해 553억 원
1987년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경찰 가택연금에서 풀림
1987년 세균무기(생물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약(BWC) 국내에서 발효
1986년 브라질, 22년 만에 쿠바와 외교관계 재개
1984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사망
그는 역사와 철학의 근본에 관한 날카롭고 새로운 의문제기로 대서양 양대륙에 많은 지식인 지지자들을 끌어모았으며 현실에 사상의 뿌리를 두어 동성연애자와 수감자들의 권리 및 사형폐지를 위해 싸워왔다.
푸코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61년에 출간한 ‘광기와 착란,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였다. 이 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면서 프랑스 바깥에서는 ‘반정신의학’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사상운동을 일으켰고 프랑스에서는 구조주의 문학이론가 롤랑 바르트에 의해서, 역사과학에 구조주의를 적용한 첫번째 시도로 평가됐다.
1983년 파키스탄 지하핵실험 성공
1982년 김상협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아세안5국 방문 등정
1980년 엘살바도르, 국외탈출 꾀한 시민에 군의 무차별발포로 600여명 사망
1979년 중국, 월남과 평화협상 재개
1977년 국내 최초의 해양자원탐사선 `탐해호` 명명식
1975년 모잠비크,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973년 한미경제협의회 발족
1966년 서울 서소문육교 개통(493m)
1966년 김기수(金基洙) 세계챔피언에 올라
15라운드가 끝나고 발표된 점수는 1대1. 마지막 주심의 채점을 발표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벤베누티 68점...". 순간 장충체육관을 가득메운 8000여명의 관중석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이겼다`는 표정이었다. “칠시입...”하는 발표가 다시 이어지자 장내는 함성의 도가니가 됐다. `74점`의 뒷 숫자 `4`는 환호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고 들을 필요도 없었다.
1966년 6월25일 밤 10시20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탄생했다. 함흥에서 월남한 가난한 소년 김기수(金基洙) 선수가 숙적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2대1 판정승으로 이기고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6년전 로마올림픽 준준결승전에서 김기수를 무릎꿇려 아마전적 88전 중 유일하게 1패를 안겨준 벤베누티에 대한 멋진 설욕이었다.
승리를 확인한 김기수는 귀빈석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달려갔고 대통령은 손수 챔피언 밸트를 채워주었다. 가난에 찌들었던 시절, 5만5000달러나 되는 개런티를 주면서까지 일궈낸 김기수의 승리는 국민들에게 꿈과 자신감을 심어준 `일대사건`이었다.
1963년 거제도 장승포 산사태 압사 사고
1963년 6월 25일 아침 8시쯤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장승포리 3구 거제 중학교 앞 왼편에 있던 높이 70미터쯤되는 산이 무너져 언덕 뒤편의 학교운동장과 앞쪽의 가옥 6체를 완전히 뒤덮어 경찰관 9명과 주민 60명 등 모두 69명이 묻혀 숨졌다. 숨진 경찰관은 마을 주민들에게 대피를 독려하기 위해 사고 현장에 출동했다가 주민들과 함께 변을 당했다.
이날 사고가 난 산은 며칠전 남해안을 강타한 태풍 셀리호의 영향으로 금이 간데다 24일 밤부터 내린 비로 붕괴될 염려가 있어서, 경찰이 이 마을 9가구 주민들에게 대피를 독려했으나 이를 외면해 일어났다.
이번 사태로 너비 약50m, 길이 20m쯤 되는 흙더미가 쏟아져 1천여평이 매몰됐다. 사고 목격자에 따르면 사고난 때가 아침식사 시간이라 대부분 가족이 아침을 먹던 중 우레같은 소리와 함께 높이 2m 폭1m가량의 바위가 집 앞마당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산이 무너졌다고 한다.
1962년 한국-도미니카 공화국, 국교 수립
1962년 한국-시에라리온 국교 수립
1955년 김낙중 휴전선 넘어 단독 월북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1955.2.2.)한 자신의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 휴대하고 비밀리에 월북. 7월 초순 평양 도착, 북한당국에 이 안을 제출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부산정치파동으로 정국이 혼란에 처해있던 1952년 6월 25일. 상해임시정부의 행동대 의열단의 한 단원이었던 유시태가 6·25전쟁 기념식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했으나 탄환이 불발함에 따라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유시태는 현장에서 잡히고 배후인물인 김시현도 잇따라 붙잡혔다. 김시현은 6개월 전인 1951년 12월에도 인천형무소장 최양옥에게 이대통령 저격을 제의한 혐의로 당국의 수사를 받은 바 있다. 김시현과 유시태는 `국가를 살리는 길은 이대통령을 제거하는 길 밖에 없다`고 결론, 거사에 합의했다고 진술했다. 한때 수사당국은 배후인물 김시현이 민주국민당 소속이었음을 이유로 민국당 고위층인 백남훈, 조병옥 등에게도 수사의 손길을 뻗쳐 정가를 더욱 긴장시켰다.
두 사람은 1953년 12월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1954년 1월 무기형으로 특사 감형되었고 1960년 4·19혁명으로 풀려났다
1951년 미 CBS방송, 최초의 상업 컬러TV 방송 개시
미국의 콜롬비아방송(CBS)이 세계 최초로 상업컬러 방송을 1951년 6월 25일 오후 4시 35분부터 시작했다. 제1회 출연자는 FCC(연방통신위원회) 이사와 연예인들이었다. 방송은 CBS가 개발한 회전원반방식(回轉圓盤方式)으로 진행됐다.
컬러TV방송은 이 CBS방식과 RCA의 3전자총방식(3電子銃方式)이 경쟁하고 있었다. CBS방식은 화질이 뛰어나지만 전용 수상기를 필요로 하고, RCA 방식은 흑백의 화상으로 되어있는 종래의 수상기에서도 수신이 가능하지만 색번짐이 심했다.
그래서 FCC는 CBS를 허가, 이날 정기방송을 개시할 수 있었다. RCA는 소송을 제기하며 반격했다. 그러나 10월 19일 국방동원국은 6·25전쟁의 전략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컬러TV 수상기 생산중지를 CBS에 요청, 컬러방송은 연말에 중지됐다. 나중에는 호환성의 문제가 제기되어 RCA사의 全전자식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 방식이 미국의 표준규격으로 채택되어 1954년 1월부터 방송되기 시작했다.
1950년 한국전쟁 (6·25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 인민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만에 대구, 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게 됐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하게 되고 이로써 전쟁은 국제전화 되었다.
미군을 주로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1950.9.15), 서울을 탈환하고(9.28),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10.13),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10.26)하였으나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이 개입(10.25)함에 따라 전세가 역전, 휴전 교섭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의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후 5년 만에 일어난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9년 북한서 남북의 민전(民戰)을 통합한 한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
1948년 제1회 전국바둑선수권대회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서울-평양에서 각 단체와 합동회의
1944년 미술사학자 고유섭 사망
1940년 드골 런던에 프랑스망명정부 수립
1939년 소설가 백신애(31세) 세상 떠남
1920년 한국 최초의 월간 종합지 `개벽` 창간
한국 최초의 종합 월간지 `개벽`이 1920년 6월 25일 창간됐다. 편집인 이돈화, 발행인 이두성, 인쇄인 민영순으로 창간된 이 잡지는 국판 160면 내외의 국한문 혼용체였다. 천도교를 배경으로 발간된 탓에 일제에 대한 항쟁을 기본노선으로 삼았고,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개조와 민족문화 창달을 표방했다.
이 때문에 개벽은 창간호부터 압수되는 수난의 길을 시작했다. 1926년 8월 72호를 끝으로 강제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압수)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의 기록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이 연일 개벽의 폐간조치에 항의하는 기사를 실었지만 결국 소생하지 못하고 1926년 8월 1일 폐간됐다.
개벽은 이런 수난의 역사를 통해 당시 민중들에게 자주의식과 자유사상,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세계적 조류인 민족자결주의를 소개했으며, 민족대동단결과 국산장려운동 등을 제창했다. 민족문화창달을 위해서 전 지면의 3분의 1을 할애하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도 의의가 커, 김기진 박영희 현진건 이상화 염상섭 최서해 등 사회주의적 또는 동반자 작가적 성향을 지닌 문인들이 `개벽`을 통해 자신들의 초기 작품들을 발표했다. `개벽`이 폐간된 후 1934년 11월 차상찬이 속간호를 발간했으나 4호로 끝났고, 1946년 1월 1일 김기전이 복간을 시도했으나, 해방후의 어려운 시대적 여건으로 1949년 3월 25일 통권 9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1916년 경복궁 터에 총독부 청사 기공
1910년 미국연방의회, 백인노예금수법 가결
1907년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 3명, 헤이그 도착
헤이그 밀사사건은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이 상실되고 통감부가 설치돼 국권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어났다.
1906년 6월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았다.
이 회담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한국침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평리원 검사 이준, 주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등 3인을 밀사로 파견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 등 대한제국 대표단 일행 3명은 각 국 대표를 만나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고 호소문을 제출하는 등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회의에 참석도 못하고 낙심의 나날을 보내던 중 7월 14일 이준이 분사했다.
이역만리 차디찬 타국 땅에 동료를 묻은 이상설과 이위종은 허탈한 마음으로 7월 19일 헤이그를 떠났다.
이들은 일본의 압력을 받은 본국정부가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은 교수형, 이위종은 종신징역에 처함으로써 귀국도 하지 못하고 외국을 떠돌게 됐다.
이 헤이그특사 사건은 오히려 일본이 한국침략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대신들은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고 이에 못이겨 고종은 7월 19일 순종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양위조칙을 발표했다.
이어 24일에는 정부 부처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이 조인됐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이, 29일에는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각각 공포됐다.
그리고 31일에는 군대 해산령이 떨어짐으로써 대한제국은 본격적으로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1905년 낙동강철교 준공
1904년 허위 등, 배일통문(排日通文)을 전국에 발송
1903년 영국 작가 조지 오웰 인도에서 태어남
1891년 북로전신선(한성·원산간) 개통
1876년 미 제7기병대, 인디언에게 전멸
1800년대 중반, 미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이미 정복자들에게 빼앗긴 인디언들에게 남은 땅이라곤 중북부의 대평원뿐이었다. 남북전쟁으로 경황이 없던 정복자들은 두 번의 ‘라라미 조약’을 통해 그 길을 지나는 백인 개척자들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았다. 대신 인디언들에게는 영토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북전쟁도 끝나고 이 지역 내 블랙힐즈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복자들의 탐욕이 되살아났다. 미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이곳을 떠나 보호구역으로 옮기라고 통보했지만 인디언들은 시한 내에 이주할 수 없었다. 미 정부가 제7기병대를 급파하자 수우족의 최대 부족인 라코타족과 샤이엔족은 시팅불과 크레이지 호스를 중심으로 몬태나주(州) 리틀 빅 혼 강가에 모여 항전 채비를 했다.
1876년 6월 25일, 남북전쟁의 영웅 커스터 중령은 다른 부대와의 합류약속을 깨고, 먼저 인디언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전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코만치라는 기마만이 살아남았을 뿐 200명 이상의 기병대원 전원이 몰사했기 때문이다.
1852년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 태어남
근대 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지에가 유일하게 천재라고 칭찬했던 가우디의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카사 밀라’는 1984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스페인이 낳은 천재 가우디의 작품은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다. 고유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생명력을 얻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야 완전히 무르익는 열매와 같다. 이 결실은 매우 낯설고도 신기하기에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메넨데스 피달
1676년 스웨덴 장군 칼 구스타프 브랑겔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