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7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윤석열 대통령 김건희 여사와 함께 나토회의 참석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오는 2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4년9개월 만에 3국 정상회담을 했다.
또한 28일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후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 면담을 하고 저녁은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이 주최하는 환영 갈라 만찬에 김건희 여사와 함께 참석했다.
29일에는 나토 정상회의가 열리고 이날 오전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과 면담 한 후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와 각각 양자회담을 갖었다.
같은 날 오후 3시 열리는 나토 동맹국-파트너국(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정상회의에 참석했디.
30일에는 체코·영국 정상과의 회담이 있었다.
윤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도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참석국 정상 배우자들과 함께 배우자 대상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2018년 한국대표팀 러시아 월드컵 예선 3차전에서 사상처음으로 FIFA 랭킹 1위 독일에 2-0 승
2017년 김국영 선수 2017 코리아오픈 국제육상경기대회 남자 100m 10초07 다섯 번째 한국신기록
2017년 신종 랜섬웨어 페트야(Petya) 150여 나라 30만 곳 이상 공격
2016년 미국미래학자 앨빈 토플러(87세) 세상 떠남
2016년 예멘 무칼라에서 자살차량폭탄 테러 사망 42명
2010년 우리나라 최초 통신해양기상위성 천리안 발사
2012년 오재경 전 문화공보부 장관·동아일보 사장 별세
황해도 옹진 출신인 고인은 1941년 일본 릿쿄대학 경제과를 졸업한 뒤 이승만 정부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 정부 공보실 실장을 거쳐 1961~62년 문화공보부 장관, 1970~74년 CBS 기독교방송 운영이사장(현 사장), 1983~85년 동아일보 사장을 각각 지냈다. 한국관광공사 총재, 국제광고협회 한국회장, 국제로타리 이사, 국제관광공사 초대 총재 등도 역임했다. 고인은 1957년 국립교향악단 창립을 주도했으며 공보부 장관 재직 시에는 KBS-TV를 설립해 대한민국 최초의 TV방송을 실시하는 등 문화·관광·언론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2008년 북한 영변의 원자로 냉각탑 폭파
2007년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취임
2007년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 2007년 6월 27일 뉴질랜드 크아이스트처치 에서 열린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국내 처음으로 세계유산(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유산지구는 '한라산 천연보호구역'과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등으로 제주도 전체 면적의 10.1%(187.2㎢)와 공유수면 1.2㎢ 등 모두 188.4㎢에 이른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폭포와 다양한 모양의 암석 형성물, 용암이 흘러 굳어진 해안 절벽, 분화구에 호수가 형성된 정상부의 경관과 미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산일출봉은 해상에서 화산이 분출한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적인 중요한 장소라고 밝혔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신청된 동굴은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이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유산지구는 지구의 화산 생성과정 연구와 생태계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의 아름다운 경관은 자연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
2005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에서 ‘박지성길’ 개통식
2005년6월27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만포동에 위치한 ‘박지성길’ 개통식에 참석한 박지성은 2000여명의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안전상의 문제로 행사 도중 황급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박지성이 온다는 소식에 지역 주민들과 축구팬들은 부슬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2시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해 왕복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웠고, 박지성이 행사장에 나타나자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2000여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에 오른 박지성은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에 올랐을 때만큼 기쁘고 영광스럽다. 약속의 땅 영국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 힘들 때마다 이 길을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기념사가 끝난 뒤 박지성은 손학규 경기지사, 김용서 수원시장 등 경기도 및 수원시 관계자들과 함께 테이프 절단식을 가졌고, 이때 먼발치서 ‘축구영웅’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팬들은 일제히 단상 주위로 몰려들어 박지성을 에워쌌다.
박지성은 단상을 정리하고 팬사인회를 시작하려 했지만 이미 주변은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든 팬들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 프리미어리그 최고 명문구단 유니폼을 입게 된 영웅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려는 팬들의 광적인 열기에 질서는 일찌감치 묻혀버리고 없었다. 밀고, 당기고, 넘어지고, 깨지고…. 결국 박지성은 안전요원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쳐준 덕분에 겨우 대기하고 있던 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2000년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발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2000년 6월 27일 가요 공연 전면 개방, 일반 극영화 극장 상영, 애니메이션 개방 등을 골자로 하는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조치를 발표했다. 정부의 이번 개방은 1999년 9월 있었던 2차 개방조치보다 대폭 확대된 것으로, 영화 애니메이션 가요 게임 방송 등 일본 대중문화 전 부문에 걸쳐 개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향후 국내 관련 분야에 미칠 파장이 주목됐다.
3차 개방에 따라 대중가요 공연 분야는 ‘2000석 이하 실내공연’으로 제한했던 개방 제한 규정이 완전 철폐됐다. 음반은 일본어 가창을 제외하고 연주음반, 제3국어 가창음반, 한국어 번안음반 등이 개방됐다. 애니메이션은 우선 국제영화제 수상작(약 30편 가량)에 한해 개방한다고 밝혔으나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음을 감안할 때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관측되었다. 영화는 폭력과 선정성이 강한 ‘18세 미만 관람불가’는 제외한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종래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했던 개방범위를 일반 극영화 전체로 대폭 확대했다.
2000년 북한, 남북적십자회담 취재차 방북한 김인구 조선일보 기자 입북 거부
북한측은 27일 남북적십자 회담 취재를 위해 방북한 우리측 신문공동취재기자 2명 가운데 조선일보 김인구 기자의 입경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김 기자는 장전항에 정박중인 현대의 관광선금강호에서 내리지 못했다.
북한측은 이날 오전 장전항에 도착한 우리측 대표단 16명 중 김 기자만 제외하고 15명을 입경시켰다.북한측은 김 기자 입경 문제에 대해 “추후 입장을 전달하겠다”고만 밝혔다.
이에 앞서 북한측은 우리측대표단이 동해항을 향해 서울을 출발하기 직전인 26일 오전 9시쯤 적십자 연락관 접촉을 통해 돌연“우리(북한)를 자극하는 기사를 많이 쓰는 조선일보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해왔다고 통일부 당국자는전했다.
북한측은 남북정상회담 때도 조선일보와 KBS가 과거 그들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두 언론사 기자의 방북을 거절했으나, 양측의 막후 조정 결과 13일 우리측 대표단이 서울을 출발하기 직전에 방북을 허용했었다.
2000년 게놈 지도 초안 발표
1996년 007시리즈 제작가 앨버트 브로콜리 사망
1995년 제1회 4대 동시지방선거(투표율 67.4%)
1990년 서울지하철 5호선(방화동-고덕동) 건설공사 착공
1990년 문학평론가 김현 사망
1989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으로 구속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1988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1989년 6월 27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서의원은 유럽여행 중 성낙영 목사를 통해 접촉한 북한인사 정모씨의 주선으로 체코를 경유, 방북했다. 북한체류중 김일성 종매부 허담이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과 면담, 통일문제 등에 관해 회담을 가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전형적인 국회간첩단 사건으로 단정하고 서의원이 활동해온 정치권과 재야단체에 수사의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특히 당시 김대중 총재의 사전인지 여부 등을 둘러싸고 조사과정에서 정국에 팽팽한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이길재 평민당 대외협력위원장, 방양균 비서관 등 9명이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 등의 혐의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됐고 서의원은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에 추징금 3천여만원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1988년 5공비리특위 구성
5공화국 비리를 조사할 목적으로 설치한 5공비리특위(위원장 이기택)가 1988년 6월 27일 발족했다.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가 정식명칭이다.
특위는 산하에 4개 소위를 두고 있으며 제1소위는 정치권력에 의한 비리, 제2소위는 경제비리, 제3소위는 인권 및 인사비리, 제4소위는 사회 및 기타 비리를 다루고 있다.
조사대상으로는 일해재단, 새세대 심장재단, 전씨 일가 해외재산 도피, 연희동 사저, 노량진 수산시장 등 44건을 1차대상으로 선정했다.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속에 11월 2일 제1차 청문회를 시작으로 수차례 청문회가 개최되었으나 속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1985 서울 지하철 3호선 개통, 강북 구파발-강남 양재역 27km
그 뒤 구파발에서 지축역까지 다시 일산까지 연장, 양재에서 수서까지 다시 분당까지 연장.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 1호선(서울역-청량리 9.5km)은 1971년 4월 착공 1974.8.15 개통
1984년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영남과 호남을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1984년 6월 27일 개통됐다. 건설부는 이날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 건설부장관 등 관계인사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88고속도로의 양쪽 시발점인 전남 담양 인터체인지와 경북 옥포 인터체인지에서 개통테이프를 끊고 중간지점인 지리산휴게소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착공 33개월 만에 이날 준공, 개통된 88올림픽고속도로는 전남 담양군과 경북 달성군을 연결하는 175.3km의 2차선도로로 전구간이 국내처음으로 시멘트콘크리트로 포장됐다.
88올림픽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구에서 광주까지의 거리는 기존 국도망을 통한 195km보다 20km가 단축됐고 주행시간은 종전의 5시간대에서 2시간30분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88올림픽고속도로의 통행은 개통식이 끝난 직후부터 허용되었으며 1984년말까지 통행료가 면제되기도 했다.
1977년 지부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1976년 팔레스타인 게릴라, 항공기 탈취해 엔테베공항에서 농성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1976년 6월 27일 프랑스 항공기를 하이재킹한 후 우간다 엔테베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서독,프랑스,이스라엘,스위스,케냐에 수감중인 자신들의 동지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테러에는 일관되게 강경입장을 고수해 온 이스라엘도 7월1일 260여명의 인질들 생명을 위해 그들과 교섭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게릴라들은 일부 인질을 석방시켰지만 아직도 102명의 인질이 남아있었고 그중 과반수 이상이 이스라엘인이었다.
마침내 7월 3일 100여명의 이스라엘 특공대가 군용기 3대로 공항을 기습, 총격전을 벌인 끝에 게릴라 7명 전원과 우간다 군인 20여명을 사살했고 7대의 우간다 전투기도 파괴했다.
1975년 방위세 신설
1974년 닉슨 미대통령 소련 방문
1973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전권, 울산권, 마산-창원-진해권, 춘천권, 청주권, 전주권, 진주권, 통영권 지정
1972년 영국과 아일랜드공화국(IRA)간의 무기한 정전 발효
1972년 로저스 미국무장관 SEATO회의 연설에서 북한을 DPRK로 호칭
1970년 경부고속도로 완공
1969년 미 동성애자 스톤월(Stonewall) 폭동
6월 27일은 미국의 게이들에게는 각별한 날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의 여주인공이자 오랫동안 게이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던 주디 갈랜드의 장례식 날이었기 때문이다. 6월 27일 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게이바 ‘스톤월’에는 장례식을 마치고 몰려온 200여 명의 젊은이로 북적거렸다. 경찰이 스톤월에 들이닥친 것은 6월 28일 토요일 새벽 1시 20분께였다.
경찰이 동성애자들을 경찰차로 끌고 가려 하자 여기저기서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500~600명으로 불어난 구경꾼은 시위대로 돌변했다. 새벽 4시쯤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스톤월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현장에서 시위대 13명이 연행되고, 경찰 4명을 포함해 여러 명의 시위대가 다쳤다.
사상 첫 ‘게이 폭력시위’에 대한 흥분은 쉽게 가라않지 않았다. 날이 밝자 시위 소식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스톤월로 모여들었다. 수백 명의 동성애자와 경찰이 대치하여 싸움을 벌였다. 이후 나흘 동안 스톤월 일대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거리는 동성연애자들의 해방구로 바뀌었다. 사회의 지탄과 경멸을 받으며 숨어 생활하던 동성연애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떳떳이 밝히고 사회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던 ‘공개된 동성애자’ 1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1968년 체코 지식인들,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2000어 선언’ 발표
1968년 6월 27일 작가동맹 기관지 등 체코슬로바키아 4개 신문에 자유화를 촉구하는 ‘2000어 선언’이 발표됐다. 자유민주화 노선을 줄기차게 추진해 보수세력을 몰아내라’는 호소를 담고 있는 이 선언으로, 공산당 독재의 완화와 기업경영의 민주화 등 개혁을 추진해 온 두브체크와 당원들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본격적인 공산화로 들어섰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경제 정책 실패로 사회 전반에 비판이 일어나면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다. 이러한 자유화 운동을 대담하게 표현한 서명문서가 바로 ‘2000어 선언’이다.
1968년 1월 노보트니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그 자리를 이으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해 4월 공산당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화 노선을 천명하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했으나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 군대가 체코를 침공하면서 막을 내렸다.
1968년 주요 도시에 대공미사일 설치, 서울에만 7개 호크 기지
1967년 영월 무장공비사건 발생
1958몀 서울운동장 개장
1954년 변영태 제5대 국무총리 취임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휴전반대 성명
1950년 한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 국민총궐기 요청 방송하고 대구까지 갔다가 대전으로 돌아옴
1950년 미군의 허가와 참관 하에 보도연맹원 처형,
1950년 유엔 안보리 남북 양측에 정전명령·한국군원조 결의,
1950년 트루먼 미대통령 한국전쟁에 미군 해공군 출동 명령
1950년 소련, 유엔안보리 복귀를 신청
1950년 유엔 안보리, 한국 원조를 결의
1950년 6월 24일 밤 10시(한국시각 25일 낮 11시), 장면 주미 대사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남침했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전화였다. 비슷한 시각, 무초 주한 미 대사도 미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토요일이라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 발발 7시간 만이었다. 국무부로 달려간 장면 대사는 딘 러스크 아태담당 차관보와 미국의 지원문제에 관해 협의했다. 국무부 유엔담당도 취침 중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화로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25일 오후 3시,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됐다. 전례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였다. 공산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라는 미국의 결의안이 9대0으로 채택됐다.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한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27일 다시 474차 유엔 안보리가 소집됐다. 밤 11시30분,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이 7대1로 채택됐다. 그리고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됐다.
1947년 입법의원 보통선거법 통과
1946년 북한, 농업현물에 관한 결정서 발표
1941년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 사망
세기를 장식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독립 폴란드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1941년 6월 27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미군 만이 안장될 수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장차 폴란드가 자유의 땅이 될 때까지라는 잠정적 조치였다. 결국 1992년 서거 51주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860년 러시아령 폴란드 쿠릴쿠프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되던 해에 바르샤바 컨서버토리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연주가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7세부터 빈, 파리, 런던, 뉴욕 등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1차세계대전 무렵 그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 폴란드 국가위원회의 일원으로 워싱턴 주재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조국을 구하는 데 십분 발휘했다.
미국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드로우 월슨 미국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8년 그의 요청에 따라 의회에서 폴란드 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폴란드가 16세기 야젤로왕조 이후 이웃 독일과 러시아 등 열강들에 의해 계속 유린당하는 역사적 운명을 극복하는 데 헌신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사건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이다
간도와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해온 4000여명의 독립군들이 일본의 독립군 토벌을 피하기 위해 만주에 있던 독립군 들이 소련의 영토인 스보보드니(자유시)로 이동했다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은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의 두 세력이 지휘권을 쟁취하기 위해 상호 대힙하다가 고려혁명군이 지휘권을 쟁취 하였다
그리고는 소련군과 함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하기로 하였다
1921년 6월22일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의용군에게 무장해제 명령을 내리고 소련군과 함께 독립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대한의용군 2000여명 중 100여명이 사망하고 800여명이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다시 만주로 돌아온 사건이다
1918년 각도에 금융조합연합회 설치
1909년 독립운동가 이은찬 의병장 순국
구한말 경기북부 지역의 연합의병을 지휘,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이은찬(1878∼1909) 의병장이 1909년 6월 27일 순국했다.
강원도 원주군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군대 해산 뒤 전국 의병연합체인 ‘13도 창의대’를 편성, 서울탈환에 들어가 동대문밖 10리까지 진격했으나 의병간 협조체계 미비로 작전에 실패했다. 1908년에는 임진강 연합의병을 결성, 서울 재침공을 목표로 가평과 포천, 양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여 대승을 거뒀다.
선생은 밀정의 신고로 서울 용산역에서 일경에 붙잡혀 1909년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7년 모병령 공포
1905년 포템킨호 수병 반란
1905년 6월27일, 흑해 북쪽 오데사항에 주로 입항해 온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포템킨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혁명의 기운이 러시아 전역에 휘몰아치고 장교들의 부패와 횡포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부실한 식사를 거부하던 수병 1명이 장교에게 사살된 것이 발단이 됐다.
함장과 장교들을 모두 사살하고 파업이 한창이던 오데사항에 입항, 수병 일부가 총파업에 가담하자 가장 용맹하다는 코사크 기병대가 투입됐다. 남녀노소 할 것없는 무차별 학살이 전개되고 포템킨호도 이에 응수, 시가를 향해 포격을 시작함으로써 오데사는 피로 물들었다. 다른 흑해함대까지 동원해 포템킨호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수병들의 발포거부로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포템킨호는 육상으로부터 지원이 끊기고 수병들의 투지도 급격히 떨어지자 7월8일 루마니아의 콘스탄츠 군항으로 탈출했다. 루마니아가 러시아의 수병인도를 거부해 이들 중 상당수는 루마니아에 정착하거나 캐나다ㆍ미국ㆍ브라질 등으로 이주했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수병 54명은 사형되거나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간요구 거절
1889년 언론인 유광렬 출생
1884년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문학이론가 가스통 바슐라르 출생
1883(조선 고종 20) 무기 제작하는 기기국 (군기창) 신설
1880년 장애자의 희망 헬렌 켈러 출생
1869년 배(胚)발생 유도를 발견한 독일의 슈페만 출생
1864(조선 고종 1) 불탔던 종각 중건, 중단됐던 인정 파루 다시 시작
1844년 미국의 예언자 조셉 스미스 사망
1550년 프랑스의 왕 샤를9세 출생
1514(조선 중종 9) 『속삼강행실』 편찬
1469(조선 예종 1) 봉선사 창건
1388년 최영장군, 고봉현에 유배
678년 교황 아가토, 79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