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운동의 발상지와 무장봉기
상명대학교 황선희*114)
1. 동학의 인본주의 후천개벽사상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에서 1894년에 있었던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은 목적론으로나 결과론으로 볼 때 국내외의 정치문제에 파급이 지대했던 사건이다. 피지배층인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정치세력화 하는데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 동북아시아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에 있었다.
그리하여 학계에서 이러한 문제에 주목하여 ‘동학난’, ‘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 ‘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제로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는 대부분 동학과 농민층의 정치․사회적 기능을 부각시키는 접근방법으로 주도세력의 성분과 전개과정, 역사적 의의를 규명해온 경향이 있다.
동학농민혁 명운동의 근대민족운동사적 위상과 성격 및 의의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를 가능케 한 정신적 원동력이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과 인간관에 있다는 문제제기가 부족하였다. 따라서 갑오동학농민 혁명운동의 발상지와 무장봉기의 역사적 의미부여를 명확히 하려면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이 추구한 궁극의 목표가 무엇이었으며 이것을 사회저변에서 어떻게 현실적으로 구현해갔는가 하는 것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동학의 인간관은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창도당시 제창했던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倉生)에서 알 수 있듯이 동귀일체(同歸一體)에 의한 지상천국 건설이었다.
동학의 정치사상은 2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으로서 전국적으로 만연되고 있던 정치기강과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농촌경제의 파탄 등 왕조사회의 말기적 현상을 자체적으로 회생하고자한 근대적 사회개혁 사상이다.
다음은 민족자립의지로서 서세동점과 서학의 도전이라는 국제정세 변화에 따른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민족주의 정치사상이다.
동학교계가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후천개벽에 의한 지상천국건설을 표방했던 것이나 척왜양(斥倭洋)의 입장에서 양이적(攘夷的) 배외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도 이러한 민족주의 혁명사상에 근거한 것이라 하겠다.
1)최제우가 후천개벽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제시했던 것은 시천주(侍天主)에 의한 인간성 회복이었다. 인간개조를 궁극적 이상으로 한 그의 인간관은 인간의 본질적 평등성을 강조한 것으로 근대적 인본주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시천주의 전제조건으로 수심정기(守心正氣)의 신앙행위를 요구한 도덕지상주의적 측면이 있었지만 정기(正氣)의 실천대상을 ‘한울님’(天)에서 인간개체, 민족, 국가, 인류사회로까지 확대적용 하였다. 또한 후천개벽의 방법론으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영구진화 사상을 제시함으로서 물리적 사회혁명보다 정신개벽에 의한 후천개벽을 강조하였다.
환언하면 그의 후천개벽사상이 아직은 사회운동으로 이어지는 단계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최제우의 관념론적 후천개벽사상이 현실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최시형대에 이르러서였다.
최시형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함으로써 인본주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세속화하였다. 인간의 시천주 상태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인즉천(人卽天)의 입장에서 인간성 회복을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에 내면화한 ‘한울님’의 마음을 길러야 한다는 양천주(養天主)설로 인간평등․인간존중 사상을 주창하였다.
2) 이러한 그의 인권사상은 1865년 적서차별의 철폐를 주장한 설법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되었고3), 도(道)의 근본이 부화부순(夫和婦順)에 있다고 한4) 근대적 여성관과 부인이나 어린이의 말이라도 ‘한울님’의 말로 알고 배울것은 배워야 한다고 한 설법5)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그는 인본주의 인간관을 강조하여 최제우의 관념적인 인권사상을 더욱발전시켰다.
인간을 독립된 인격체로 평가함으로써 인간평등․인간존중사상으로 현실화하였다. 이러한 인본주의 후천개벽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한울님’을 인간으로 대체해서 설법했던 ‘십무천(十毋天)’6)과 1894년 전주화약 당시 전봉준이 제시했던 ‘폐정개혁안
12개조’7)에서다. 십무천의 요지는 피지배층인 일반백성의 입장에서 인권론을 펼친 것이고, 폐정개혁안은 대정부 개혁요건을 제시한 것으로 모두 사인여천의 인간관을 대중화한 것이라 하겠다.
최시형은 1864년 이후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이 일어날 때까지30여년동안 71개 지역을 전전하면서 포교활동을 하는 중에 일반 민
중과 공감대를 형성해갔다. 1870년대의 설법은 대부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1875년 단양에서 있었던 그의 설법은 시운관(時運觀)에 입각한 용시용활론(用時用活論)인데8) 후천개벽운동의 시기와 방법을 선택하는 문제와 관련지은 것으로서 후천개벽의 현실화에 있어서 정국의 흐름과 시대적 요구 파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운동의 기회 포착과 운동방법의 문제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의 사회상은 이필제의 난에서 알 수 있듯이 도처에서 야기되고 있던 민란의열기가 심각할 정도였다.
사회개혁 의지가 직접 표출되지는 않았으나 본격적으로 후천개벽을 위한 사전준비가 진행된 시기는 188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 무렵 조선정국은 김홍집 탄핵을 위한 위정척사운동,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으로 인해서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정도가 약해져 있었다.
따라서 최시형 등 동학 지도층은 동학교단 조직의 재정비와 교리의 이론 정립에 집중할 수 있었다. 최시형의 종교의식 개혁은 이미 1875년에 추진되고 있었고9) 이어서 포접제를 실시하여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교화와 통문을 통하여 각지역 교단조직의 긴밀한 연락망을 확충하는 작업이 1880년대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890년대는 동학의 반봉건적 후천개벽사상을 바탕으로한 개혁 지향의 사회운동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다. 동학의 근대적 인본주의 사상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것도 이 시기였다.
최시형은 1897년에 향아설위(向我說位)의 제사의식을 주장하는 한편 주문의 만사지(萬事知)를 재해석함으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인간존중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인간의 세속적 일상사를 시천주(侍天主)행위로 보고 향아설위의 제사의식을 시천주 행위중의 한가지사례로 여겼다.10) 이러한 주장은 종래의 향벽설위(向壁說位)를 반대한 것으로서 전통사회의 관습과 사고의 일대혁신을 의도한 것이다.
‘한울님’과 인간의 시청언용(視聽言用)․굴신동정(屈伸動靜)자체가 귀신 곧 ‘한울님’이므로 신위는 자신의 마음속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울님’과 인간 사이에 귀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것으로서 인간관계에서도 사회적으로 봉건적 지배층의 신분적 특권을 거부한 것이 된다.
인권사상을 강조한 다른 사례는 ‘만사지’(萬事知)를 밥 한그릇(食一碗)으로 해석한 것이다.11) 인간의 모든 일을 밥 한그릇에서 진리를 깨닫고 인식하려한 것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치를 인간의 일상사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밥 한그릇은 모든 경제적 욕구를 상징한 것으로 양천주를 위한 직접적인 수단으로 본 것이다. 최제우가 주장했던 수심정기가 관념적이었다면 밥 한그릇의 진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본주의 사상이다.12)
만사지의 해석이나 향아설위의 주장은 후천개벽의 추상적 표현을 빌린 것이지만 현실극복을 위한 일대 혁명적 발상이다. 요컨대 최시형의 사인여천사상은 도덕지상주의 종교성과 인본주의 사회사상을 아우르며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면서 근대적 인본주의 성격을 더욱 강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동학사상의 이러한 근대적 성격이 갑오동학 농민혁명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는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발상지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의 발상지를 거론한다면 단연 고부군을 들 수 있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성행되었던 지역이 전라도 일대였고 특히 고부군이 극심했다. 19세기 후반 세도정권하에서 자행되었던 3정문란은 농촌경제의 피폐상을 최고도에 이르게 하여 전국 곳곳에서 민란을 야기케 하였다.
민란의 경우 대부분은 읍폐교구(邑幣矯捄)를 호소하는 소청(所請)의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지역적 연대나 시간적 지속성이 없는 자연 발생적인 것이어서 실패로 끝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고부군에서 있었던 농민봉기는 동학 접주(接主)가 선봉이 되어 농민들이 일으킨 병란적 민란의 형태로 연결되었다.
봉기농민들 중에는 동학교도가 포함되어 있어서 연대성을 갖는 것이 용이하여 뒤에 무장봉기(茂長蜂起)로 이어짐으로서 고부군은 사실상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무장봉기로 이어진 농민봉기가 고부(古阜)에서 시작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종래의 학설대로 정치기강 문란과 조병갑의 탐학때문만이었을까? 고부군은 전라도 지역에서도 곡창지대로 알려진 천혜의 지리적 자연조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부군은 고부평야, 팔왕평야, 배들평야, 백산평야, 수금평야, 화호평야등 비옥한 농토가 넓게 자리잡고 있어서 미곡생산이 풍부하였고 서해안의 해산물을 풍족하게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13) 따라서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탐관 오리들이 가렴주구를 위한 최적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또한 고부군 주변에 즐포, 염소, 동진, 사포의 4포구가 있어서 개항 이후 대일 쌀수출 관계로 지주제가 더욱 강화되어14) 고부농민에 대한 탐학이 상식선을 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 더하여 조선후기 사회에서 야기되고 있던 정치기강의 문란 또한 겹쳤던 것이 고부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과거제의폐단, 매관매직 관행과 3정 문란 등 관료들의 정치기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대원군 집권시기의 사례를 들어보면 매관매직은 원납전 징수의 명분으로 성행되었는데 수령이 되려면 적어도 2만냥 정도를 바쳐야했고15) 과거의 급락도 사전에 뇌물을 바치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이 났다16)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부임한 지방수령들은 대부분 백성을 착취하는 탐관오리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3정문란으로 인한 폐단은 고리대 행위로 전락해 버린 환곡에서 가장 심하였고, 군포와 결세(結稅)의 중첩된 남징이 온갖 명목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대원군 하야후 민씨척족들이 집권하면서 더욱 극심해졌는데 고종실록에 기록된 민란만도 무려 46개소에서 47회 발생하였다. 1860년대에 4회, 1870년대에 3회,1880년대에 18회, 1890년대에는 22회에 걸쳐 민란이 발발하였던 것이다.17) 이것은 철종조에 있었던 임술민란 형태가 계속 이어진 것으로서 종래의 전형적 민란 형태라는 한계는 있었으나 1888년부터 발생빈도가 높아지다가 1890년대에는 전국 각지로 확대되는 상황에 까지 갔다.
이 무렵 전라도 지역은 1892년부터 흉년이 3․4년간 지속되면서 지방수령의 가렴주구와 흉작이 겹쳐서 농민생활이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 빠졌다. 그 중에서도 고부읍은 암행어사 이면상(李冕相)이 5년 동안 향후 면세조처할 것을 건의했을 정도로18) 농민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고부군 농민의 원한은 군수 조병갑이 부임해오기 이전부터 누적되어 왔다. 고부농민봉기가 단순한 민란의 형태가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도화선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방수령 못지않게 전운사와 균전사의 횡포가 극심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세곡운반 감독이 주임무였던 전운사 조필영의 가렴주구는 경창(京倉)에 전달했을 때 발생되는 부족미(不足米)를 양여미(量
餘米)의 명분으로 남징하든가 운송비를 이중부과하고, 기선(汽船) 구입비를 과세하거나 세목(稅目)을 새로 정하는 등 미곡수탈행위를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자행한 것 등이다.19) 또한 매관매직을 통해서 균전사로 부임했던 김창석도 진황전(陳荒田) 개간시 3년간 면세키 로 되어있는 규정을 어기고 새로 개간한 농지를 균전(均田) 전체에 포함해서 균전답도조(均田畓睹租)라는 일종의 소작료를 부과하였다.
20) 그뿐 아니라 상부에는 균전을 진결(陳結)로 보고하여 토지를 겸병하는 방법으로 치부하는 등 균전사의 가렴주구행위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김창석이 농민수탈을 본격화 했던 시기는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후부터였다.21)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은 수세(水稅)징수와 방곡령 남용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고부읍 북쪽 동진강 상류의 만석보 아래에 다시 신보(新洑)를 구축할 때 면세조치하기로 했던 약속을 묵살하고 수세를 강징하였는데 이 때 여러 가지 명목으로 자행한 수탈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만석보에 신보를 쌓고 1두락당 上畓에서는 2斗, 下畓에서는 1斗씩을 부과하여 700석을 착복.
2. 황무지(陳結) 개간시 면세하기로 되어있는 규정을 어기고 結稅를 강징.
3. 농민에게 불효죄, 불목죄, 음행죄, 잡기죄의 죄목으로 2만냥을 수탈.
4. 泰仁 현감이었던 그 아비의 비각건립을 목적으로 1000여냥을 징수.
5. 大同米 징수시 精白米 16斗를 금전으로 징수하고, 상납시에는 下等米로하여 그 차액을 착복.22)
또한 그는 방곡령을 남발하여 농민수탈을 위한 합법적 방법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과 농산물 교역시에 발생하는 부작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방곡령 반포권한을 지방 수령들에게 부여했는데 조병갑이 이를 남용하였다.23) 흉년에도 방곡령을 발표하여 쌀을 대량으로 매점매석한 후 미가가 폭등하면 되팔거나, 고부읍 주변의 4개포구를 통하여 일본상인들에게 밀매하여 폭리를 취하였다.
전운사 조필영과 균전사 김창석의 가렴주구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이러한 권력남용과 맞물려 1893년에 그 탐학정도가 절정에 이르렀고 이에 비례해서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고부농민봉기 발발직후 고종은 그 원인이 수령의 가렴주구에 있다고하여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의지를 보였던 것이24) 이를 입증한다.
1894년 1월 10일에 봉기한 고부농민들은 처음에 조병갑의 탐학시정을 요구하는 등소(等訴)의 과정을 거치는 등 전형적인 민란의
형태로 시작하였다. 1893년 11월 고부군의 동학접주로 있던 전봉준과 농민들 40여명이 고부군아(郡衙)를 찾아 불법적 탐학의 시정
을 요구했던 것이다.25)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었고 오히려 농민 대표들이 체포․구금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후 전봉준 등은 한때 사발통문(沙鉢通文)에 의한 무력적 거사계획을 하였는데26) 고부군아를 점령한 후 전주감영과 서울로 진격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고부군 동학접주들의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농민들이 이 계획에 동조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엿볼수 있다.27) 그러나 이미 8월에 정부에서 전라도 병영을 설치하여 상경로(上京路)에 군사들을 배치하고 있었으며28)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보됨에 따라 이 거사계획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조병갑이 탐학을 계속하자 12월에 전봉준과 고부 농민 60여명은 전주 감영을찾아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다시 민소를 제기하였다.
29) 1893년 11월과 12월에 제기한 민소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안택사 이용태가 동학농민혁명운동 발발후 의정부에 올린 장계중 읍막7조(邑瘼七條)와 거의 흡사할 것으로 생각된다.30) 그러나 전라감사 김문현은 오히려 조병갑의 유임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려 조병갑이 1894년 1월 9일 다시 고부군수로 재임되었다.
조병갑의 유임이 결정되자 고부군 접주 전봉준과 김도삼, 최경선등은 즉시 봉기를 주도하여 11일 농민군을 말목장터(梨坪面)로 집
결시켰다.31) 고부농민봉기가 이때부터 병란적 형태로 발전하였다.
고부군의 농민군이 진격한 과정을 보면 말목장터 집결(1월 11일)→ 고부성 함락(1월 11일) → 말목장터에 재집결(1월 17일) →
백산으로 이동(1월 25일) → 고부 점령(2월 23일) → 해산(3월13일)의 경로를 거쳤다. 고부성을 함락한 농민군은 강징당했던 수세
를 군량(軍量)으로 돌리고, 진결(陳結)징세는 농민들에게 반환하는 한편 만석보 아래 있던 신보를 허물었다. 다시 말목장터로 이동했던 이들은 전략상 공수(攻守)에 유리한 백산(白山)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전봉준은 격문을 발표하여 봉기의 뜻을 선포하였다.32) 비로소 조선정부는 2월 15일 조병갑을 국문하고 박원명을 고부군수로임명하는 한편 전라감사 김문현에게는 월봉3등(越俸三等)으로 처벌
(32) 위의 책, 동학난과 고부함락장의 격문을 참조. 호남창의소 이름으로 발표한 격문의 내용은 봉기목적이 광제창생에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한편 탐관오리들을 처형하고 외세를 구축하는 일에 일반 서리들도 동참하라는 내용으로 되었다.
72 동학학보 제8호)
조치하고33) 이용태를 고부군 안택사로 임명하였다. 고부군수 박원명이 부임 즉시 봉기군이 본업으로 돌아가면 봉기 사실을 용서한다는 효유문을 발표함에 따라 40여일간 지속된 고부농민봉기는 2월 말경 일단 진정되었다.34)그러나 고부농민봉기가 진정될 무렵 안택사 이용태가 박원명을 협박하여 봉기주도자를 색출하고 일반 양민들에게 동학군으로 누명을 씌워서 탄압하였다.
35) 이용태는 고부에서만 아니라 부안, 고창, 무장, 익산 등 전라도 전역에 걸쳐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처럼 백산에잔류했던 농민군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탄압 해산시킴에 따라 표면상고부농민봉기가 3월 13일 완전히 진압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용태의 잔학성과 탐학은 오히려 농민군 봉기가 동학조직과 연합하고 지역적으로 확대되는 형태로 발전하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
고부농 민봉기가 동학농민혁명운동을 점화하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환언하면 고부봉기는 전운사 조필영과 균전사 김창석에서 시작하여 고부군수 조병갑에 이르러 폭발하였고, 안택사 이용태에 의해서 무장봉기(茂長蜂起)로 발전되었던 것이다.36)
3. 무장봉기(茂長蜂起)의 역사적 의의
무장봉기는 전라도 일대를 망라한 전국적 근대민중운동의 출발로서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을 혁명적 정치운동으로 전환케하였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이 특히 무장에서 기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며, 봉기 이후 이들의 진격 이동 경로와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장봉기의 근대사적 의의를 규명하기 위한 접근방법으로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이 동학농민군의 봉기과정에서 발표했던 창의문․격문․통문․4대 명의, 폐정개혁안에서 어떻게 현실적으로 구현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고창․무장은 환경적 측면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불가피했던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지리적 조건과 주민의 의식성향 및 동학조직의 강세 등에서 타지역에 없는 무장봉기 요인이 발견된다. 고창․무장․흥덕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고창군에 포함되는 지역으로서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 당시 중심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으로 정읍․부안․고부와 이웃하고, 남으로 장성․영광․법성포와 접하고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동학농민군을 모으고 대오를 정비하면서 정보교환을 통한 상호연대가 용이한 주요 거점이었다. 고창에서도 특히 무장일대는 다수의 동학농민군 훈련과 전력강화를 위한 최적의 장소인 구수(九水)마을과 여시뫼봉이 있었다.
구수마을은 구시내 또는 당산이라고도 하는데 현재는 고창군 공읍면 구암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무장기포의 현장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무장창의포고비를 건립하여 농민봉기의 성지로 기념하고 있다.37) 또한 여시뫼봉은 지형이 야산으로 되어 있어서 그 일대 구릉지역은 방어와 공격에 유리한 장소로서 전력강화를 위하여 이용되었다.
고창지역 주민의 전통적 의식성향은 일찍부터 지식층․이서(吏胥)․농민을 막론하고 대부분 반골적 기질이 강했다. 또한 이 지역
은 고려왕조 멸망 후 유민들이 모여 살아온 은신처로서 조선왕조에서는 출사(出仕)와 관계없이 절의를 지켜 온 선비들의 의향(義鄕)으로 특징지어진 곳이었다.38) 이러한 지역 특유의 분위기에서 아전․농민․재인․광대에 이르기까지 반골적 민중의식이 싹터왔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농한기에 동학농민군을 모집하고 훈련이 가능했던 것도 이러한 여건성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운동 와중에서 고창․흥덕의 관아가 소실되었을 때 무장의 관아나 객사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 원형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는 사실로 볼 때 이 지역 아전들이 동학농민군과 공감대 형성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무장현감과 상당수 아전 등 관속배가 동학에 입도했다는 사실39)에서 알 수 있듯이 무장봉기는 동학농민군․이서들의 합작품으로서 초유의 민중혁명운동의 시작이라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무장일대의 동학교세는 봉기 이전부터 포접(包接)이라는 동학조직을 통하여 이미 확산일로에 있었다. 대접주 손화중이 동학에 입도한후 부안․정읍을 거쳐 무장에 정착하면서 동학교세가 강화되었다. 손화중은 1890년대 이전부터 김덕령, 김개남 등과 활동하던 중 1892년 8월의 선운사비기사건을 계기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40) 이 사건은 손화중포의 동학교도가 선운사 도솔암 남쪽 석벽에 새겨진 불상 속에서 비결(秘決)이라는 것을 탈취한 일인데, 이후 무장․고창․영광․장성․고부․부안 등지에서 아전을 비롯해서 농민들의 동학입교자가수만 명으로 급증했다는 기록으로 보아41) 손화중포의 동학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 무렵 손화중포에 합세한 지역과 동학접주는 무장의 송경찬․강경중, 고창의 오시영․오하영․임형로, 흥덕의 고영숙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로 인해서 1892․3년의교조신원운동 당시 이 일대의 동학교도가 삼례취회․보은취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이후 정부의 탄압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이곳에 집중되었던 것이다.42) 전봉준이 무장 구시내(당산)에서창의문(倡義文)을 발표하고 동학농민혁명운동을 점화할 수 있었던것도 고창․무장의 이러한 환경적 특수성과 유관하다.
무장봉기는 고부농민봉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전봉준의 입지가 고부농민봉기 때는 훈장이라는 지역유지 처지에서 민소운동을 이끌었지만, 무장봉기에서는 동학접주 및 무장남접도소(茂長南接都所)의 동도대장 신분으로 기포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전에 이미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면서 동학농민봉기 성격의 기포(起包)를 계획하고 있었다.
1892년 공주․삼례취회와 1893년 보은․공주취회에서 반봉건․반외세 의식을 지니게 되었고, 광범위한 계층을 포괄하는 민중연합의 혁명을 구상했던 것이다.43) 전봉준은 삼례취회 당시 이미 소두(訴頭)로 활약하였고, 한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대원군과 접촉하는 등44) 나름대로 거사준비를 위한 독자적 행동을 해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부농민봉기를 통하여 기왕의 뜻을 펼칠 기회를 맞았으나 안택사 이용태의 고부군 장악과 농민군의 해산으로 그는 불가피하게 고부를 떠나 무장으로 피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전봉준이 왜 무장으로 피신했으며 그곳에 도소(都所)를 설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장은 고부와 인접해있고, 손화중포의 거점으로서 동학교세가 컸기 때문에 그의 협조가 이루어 졌을시 무장기포에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계획에서였을 것이다.
당시의 무장현은 고창․흥덕보다 면적이 가장 넓은 지역이었지만 해안마을이 많고 농지가 적었던 관계로 경제적 조건이 열악하여 아전과 평민층 세력이 강하였다.45) 따라서 서원․사우를 근거로 한 향촌사회의 양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에 비례하여 동학교세가 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무장에서 손화중이 보은․금구취회 때 전라도 각지의 동학교도를 집결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했기 때문에 전봉준이 손화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무장으로 피신했을 것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그는 무장의 동학세력을 단기간에 장악하기 위한 야심으로 무장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통문을 발송하는 등 세를 확산해 나갔다.46) 손화중․김개남․김덕령 등 동학접주 중심으로 10개의 군을 도소조직으로 합류시켰다.
47) 그 결과 3월 15일 동학 농민봉기 거사계획에 손화중과 합의하고,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고부농민봉기 단계부터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의 거사계획이 진행되었다고 하겠다.
무장기포와 동시에 포고한 창의문은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 최초의 봉기선언문이었다. 창의문의 내용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의 대의를 표방하여 동학의 인본주의 후천개벽사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48) 여기서 공경이하 방백․수령들의 도덕성 타락으로 인한 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보위하고 민생안정을 위하여 봉기한다는 명분을 제시하였다. 거병목적이 충효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의 근본적 가치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창의문 발표 당시 전봉준의 혁명의지가 동학교도와 농민들에게 어느 정도로 호응을 얻었는가 하는 것은 손화중과 세를 규합한지 불과 수일만에 4천여명의 군중이 당산에 집결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의 진군경로를 요약해서 정리해보면 무장(3월 20일) - 고창․흥덕(3월 21∼22일) - 고부(3월 23일)
- 태인(3월 26일) - 금구․원평(4월 1일) - 부안(4월 4일) - 고부(4월 6일) - 정읍․흥덕․고창(4월 7일) - 흥덕․무장(4월 8일) - 영광․함평․장성(4월 12∼21일) - 금구․원평(4월 25일)- 전주(4월 27일)의 순서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동학농민혁명운동에 합류한 지역은 전라도 지역에서만 계수해도 34개 지역에 달하였다.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거쳤던 무장․고창․흥덕․부안․고부․정읍․태인 등은 교조신원운동 당시부터 지역간 동학조직의 연대가 이
루어진 곳이다. 그 중에서도 무장․고부․태인은 동학농민혁명운동을주도한 3대 동학조직인 손화중포․전봉준포․김개남포가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은 이곳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혁명 운동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무장 당산에서 봉기한 이후 동학농민군이 혁명을 선언한 것은 고부의 백산(白山)에서였다. 백산은 현재부안군 용계리에 위치한 곳으로 전봉준은 여기서 동학농민군의 세를 7천여 명으로 확장한 후 4대명의(四大名義)와 격문을 발표하여 혁명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이때부터 전봉준은 명실공히 동학농민혁명 운동의 대표주자로 부상하였다. 손화중과 김개남도 총관령으로 추대 되는 등 혁명의 이념과 조직․목표가 설정되면서 백산대회는 무장에서의 창의명분을 혁명 운동으로 구체화하였다.
동학농민군의 4대명의는 다음과 같다.
① 살생하지 말 것.
② 충성과 효도를 다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
③ 서양․일본인을 몰아내고 성도를 밝게 할 것.
④ 군대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서 權貴를 진멸할 것.49)
이것은 동학농민군이 지켜야할 일종의 강령으로서 봉건적 사회신분제 폐지와 부패한 집권세력응징에 따른 새로운 정치질서 구현이라는 목표를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어서 호남창의대장소재백산(湖南倡義大將所在白山)의 명의로 발표한 격문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일반민중과 소리(小吏)들도 대의를 가지고 거사에 동참할것을 종용한 대목이다.50) 고부농민봉기 때의 초기 격문이 의리를 명분으로 했다면 무장기포 후의 격문과 4대강령은 혁명의지의 원칙적인 선언이었다고 하겠다.
동학농민군은 이후 4대강령에서 보여준대로 전주를 향하여 계속 북상하였으나 경군(京軍)의 출동정보에 접하면서 진로를 남으로 돌렸다. 부안과 법성포에서 장시에서의 분전수세(分錢收稅) 금지를 요구하고 전운사 운영의 폐단을 지적하였다.51) 이어서 동학농민군은 고부의 도교산 황토현으로 이동하여 감영군 상대로 크게 승리하였다.52)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사기가 높아졌으나 남하하여 다시 고창으로 들어갔다.
전주를 경군이 이미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은 무장 여시뫼봉에서 3일, 영광에서 4일간 체류하면서 진법(陣法)을 교련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농민군의 규율단속을 위하여 행동준칙 12개조 계율(戒律)53)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무장봉기 당시 창의문에서 표방했던 유교적 인도주의 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동학농민군의 행동강령을 다시 강조한 것이었다.
폐정개혁의 의지를 다시 밝혔던 것은 동학농민군이 함평으로 진격한 이후였다. 각종 통문․정문(呈文)․소지(所誌)를 발표하였는데
이때 대원군이 폐정개혁의 선두에서 감국(監國)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54). 폐정개혁요구 움직임이 전라감사를 상대로 구체화된것은 동학농민군이 장성을 점령하면서부터다. 경군(별동대) 700여명과 최초로 접전한 장성전투는 동학농민군의 의식성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5) 이미 언급했듯이 이 때까지는 동학농민군의 의식수준이 충효에 근거한 유교적 가치관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경군과의대결을 피하였다.
그러나 장성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폐정개혁요구안 13개항을 제시할 정도로 정치 참여의식의 적극성을 보였다. 그 내용을 대강 요약하면 전운사․균전사를 혁파하고, 탐관오리와 보부상의 작폐를 금하고, 외국인들의 상행위와 포구에서의 미곡판매행위를 엄금할 것 등 경제문제에 집중된 반봉건적 요구사항으로 되었다.
56) 아울러 폐정개혁의 감국을 대원군에게 요구하였는데 여기서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입각한 유교적 가치관도 함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동학농민군의 이러한 성격의 사회구조 개혁 의지는 전주에 입성한 후 요구했던 12개조 폐정개혁안에 그대로 이어졌다.
57) 이 두 번에 걸친 폐정개혁 요구안은 대부분 일반민중의 민원이 삼정문란으로 인한 경제 문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취제도와 봉건적 지도체제의 전면적 개혁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인간평등사상의 표현으로서 동학의 인본주의 후천개벽사상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고부농민봉기와 사실상 혁명운동으로 시작한 무장봉기 과정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입성할 때까지 살펴보았다.
여기서 무장봉기의 역사적 의의를 든다면 자연발생적인 민란으로 시작했던 고부민란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혁명운동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보여준 창의문,통문, 격문, 폐정개혁안은 무장봉기의 목적과 명분이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서 사인여천(事人如天)․3경(敬天․敬人․敬物)의 인본주의 후천개벽사상의 현실화 의도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부군의 농민봉기와 무장봉기사실은 근대적 민중의식이 어떻게 성장해갔는가를 알 수 있는 생생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국문초록>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발상지와 무장봉기
황선희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이 갖는 궁극의 목표와 이것의 실현 방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시형의 단계에 이르면 동학사상은 도덕지상주의적인 종교성과 인본주의 사회사상을 아우르며 근대적 인본주의의 성격을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근대적 성격은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이 고부에서 시작한 것은 이 지역의 높은 생산성과 이에 따른 탐학에 있었다. 고부농민봉기에 대한 탄압으로 봉기는 무장 지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는 전라도 일대로 퍼져나갔다. 봉기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이 지역의 동학 조직과 지역 특유의 반골 정신에 기인한 바 크다. 이들이 포고한 창의문은 전통적인 유교의 가치관을 강조하였는데, 이는농민과 동학교도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이후 봉기가 발전하면서 동학농민군은 봉건적 신분제 폐지와 부패한 집권세력 응징을 통한 새로운 정치질서 구현이라는 목표를 선언한다. 또한 이들은 삼정문란으로 인한 경제문제의 해결에 주력하였다. 이는 곧 동학의 인본주의적 후천개벽사상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이러한 봉기의 전개과정은 근대적 민중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핵심어
동학, 갑오동학농민혁명, 무장봉기, 인본주의, 후천개벽사상.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日省錄, 海月先生說法註解, 동학사상자료집 ,
매천야록 , 東學亂記錄, 大韓李年史
황선희, 「한국근대사상과 민족운동」 Ⅰ
황선희, 「동학사상의 인본주의 성격」, 동학연구 3, 한국동학학회, p.140
이기화, 「동학농민혁명과 고창과의 관계」, 향토사료 제16회 발표,2002, 고창문화원, 5
김창수, 「고부의 기포」, 동학혁명백주년기념논총 ,
한우근, 「19세기말 한국의 사회상황」, 한국사17 , 국사편찬위원회, 권Ⅰ, pp.34-29
원도연,「동학혁명정신 및 유적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제언」, 전라도 고창지역의 동학농민혁명 , 고창문화원,
배항섭, 「1980년대 초반 민중의 동향과 고부민란」, 1894년 농민전쟁연구 , 역사비평사,
배항섭,「제1차 동학농민전쟁시기 농민군 진격로와 활동양상」, 동학연구 11,
박찬승, 「동학농민봉기와 고창지방 향촌사회」, 전라도 고창지역의 동학농민혁명 , 고창문화원
상명대학교 황선희님 논문을 늘 산에 쬐끔 정리하여 올림.
첫댓글 고려도 망할만 해서 망했고, 조선도 망할만 해서 망했지만 조선이 더럽게 망한것은 마지막 노른 대빵 이완용 일당이 일본 쪽발이 한테 팔아먹엇다는 것 입니다. 조선을 팔아 처먹은놈 독립군을 때려잡은놈, 힘없는 민초를 죽이거나 착취한놈, 없는 조선을 미국에 팔아먹으려고 노력하다 왕초가 된놈이 혹은 대대손손 대한민국의 여태 주역의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지 둘러봐야 합니다. 잊혀지고 없어지는 근대사를 관심있게 살펴야 할 것 같아서...
좋은 글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