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8일 오늘의 역사
2018년 헌법재판소 대체복무 없는 병역법(제5조 제1항) 헌법불합치 판정
2017년 57번째 연륙교 석모대교(1,540m) 개통
2016년 터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 IS 추정 3차례 연쇄 테러 사망 44명 부상 240여명
2016년 문경 민간인학살사건 생존자로 진상규명 힘쓴 채의진 씨(80세) 세상 떠남
2010년 ‘시계산업 구세주’ 스와치 하이예크 회장 별세
1928년 레바논에서 태어나 7살 때 가족과 스위스로 이주했다. 프랑스 리옹 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대 초 취리히에서 경영컨설턴트 회사(하이예크 엔지니어링)를 설립해 네슬레·지멘스 등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자문했다. 1980년대 스위스 시계산업이 아시아의 공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할 때, 그는 저가품과 고급품의 생산 이원화를 주장하며, 스위스 대형 시계회사 SMH를 인수했다. 그는 플라스틱 줄과 수정진동자(쿼츠)를 적용, 패션 소품 개념의 가볍고 싼 스와치 시계를 개발해 스위스 시계산업을 되살렸다.
이후 스와치의 성공에 힘입어 오메가·론진 등 19개 시계 브랜드를 가진 스와치그룹으로 성장시켰다. 현재 스와치그룹의 연 매출액은 55억 달러에 이른다.
2009년 온두라스 군부 쿠데타… 셀라야 대통령 추방돼
온두라스에서 집권 자유당을 포함한 여야 정치권은 셀라야 대통령이 대법원과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권연장을 염두에 둔 개헌 국민투표를 강행하려 하자 탄핵을 경고했다. 그리고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군인 10여명이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한 2009년 6월 28일 새벽 마누엘 셀라야(Zelaya) 대통령을 체포해 국외로 추방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코스타리카에 머물며 망명을 요청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이날 코스타리카 TV 방송에 나와 자신은 파자마를 입은 상태로 납치당했으며 이는 명백한 쿠데타라고 말했다.
온두라스 의회는 곧이어 쿠데타로 축출된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의 후임에 로베르토 미첼레티 국회의장을 확정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의회는 이날 셀레야 대통령이 “그동안 헌법과 법을 반복적으로 위반한 것은 물론 헌법기관들의 명령과 판결들을 무시하는 등 분명히 직권남용을 했다”면서 만장일치로 탄핵을 결의했다. 의회는 또 대통령 유고시에는 의회 의장이 계승한다는 헌법에 따라 미첼레티 의장을 후임 대통령으로 확정하고 “새 지도자는 오는 2010년 1월27일까지 셀레야의 잔여임기를 수행한다”고 밝혔다.
2009년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 유현목 감독 타계
1925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한 유현목 감독은 46년 월남한 후, 전쟁 중 아버지와 동생을 폭격에 잃고, 대학(동국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실존주의에 깊이 빠졌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6·25 전후 격변하는 한국 사회상을 담고 있으나, 그 표현방식은 매우 담담하고 지적이었다. 1956년 영화 ‘교차로’로 데뷔했으나, 한국의 작가주의 시대를 연 유 감독의 대표작은 주로 리얼리즘 소설이 원작이다
유현목 감독은 또 철저히 현실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한 장면을 길게 찍는 롱테이크, 앞 장면이 사라지면서 다음 장면이 이어지는 식의 오버랩 등 영화형식에 대한 실험도 잊지 않았다. 1990년 동국대 예술대학장으로 퇴임했고, 이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명예교수를 맡았다.
2004년 미국, 이라크에 주권이양
미국에서 이라크로의 주권 이양식이 당초 일정을 이틀 앞당긴 2004년 6월 28일 오전 10시26분(현지시각), 삼엄한 경비 속에서 바그다드 도심에 위치한 옛 과도통치위원회(IGC) 본부에서 은밀히 치러졌다. 폴 브리머 연합군 임시행정처(CPA) 최고 행정관은 이날 주권이양과 관련된 법률문서를 가지 알 야와르 임시정부 대통령에게 공식 인계하고 서명식을 가졌다.
이로써 2003년 4월 9일 수도 바그다드 함락으로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정권이 붕괴되면서 미군 주도 연합군의 점령통치가 시작된 지 1년2개월19일 만에 이라크는 다시 주권국가가 됐다.
미 군정 당국과 이라크 임시정부가 당초 예정일을 이틀 앞당겨 전격적으로 주권이양 행사를 가진 것에 대해 당초 예정일에 맞춰 감행될 저항세력들의 대규모 테러공격을 피하고 이라크 안정화를 조기 실현하려는 포석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2003년 서기7세기 추정의 마애불상 발견
2001년 부패방지법 제정
2001년 미국 항소법원,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명령은 무효라고 판결
미국 항소법원이 2001년 6월 28일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을 명령한 하급법원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 재판부가 이 사건을 재심리하도록 돌려보냈다.
MS사는 2000년 6월 미 법원으로부터 컴퓨터 운영체제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며 향후 연방과 각 주의 반독점법 위반을 방지하기 위해 회사를 두 개 그룹으로 분할하라는 판결을 받았었다. 항소법원은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불법적으로 윈도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해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판결 내용은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 심리를 담당할 판사가 적절한 제재 조치를 결정하도록 했다.
MS사는 2월 연방항소법원에서 잭슨 판사의 판결이 회사와 최고경영자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처벌을 목적으로 내려졌다고 주장했었다.
2000년 ‘요도호’ 납치범, 범행 30년 만에 일본으로 송환
일본항공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했던 일본 적군파 간부 다나카 요시미(51)씨가 28일 범행 30년만에 일본으로 송환됐다. 태국 정부로부터 신병을 인도받은 일본 경찰은 이날 새벽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다나카씨를 강도상해·감금 등의 혐의로 체포·수감했다.
1970년 일본도로 무장한 8명의 다른 적군파 단원과 함께 ‘요도호’를 납치했던 그는 김포공항을 거쳐 북한에 망명,국제 경찰조직의 추적을 받아왔다. 다나카씨는 지난 96년 캄보디아에서 체포돼 위조달러 사용혐의로 태국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왔으며, 일본정부 요청에 따라 이날 신병이 인도됐다.
그는 그동안 유럽·동남아 등에서 활동해왔으나 활동 내용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다나카는 27일 방콕 공항에서 일본 기자들에게 “비행기 납치는 일본정부의 미국 추종 일변도 자세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어쨌든 일본 국민에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를 포함한 요도호 범인들은 평양 교외에서 공동생활을 해왔으며 8명이 일본인 여성과 결혼, 18명의 자녀를 낳았다. 북한에는 범인그룹 중 4명이 생존해 있었으며, 이들은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일본 귀국 의사를 밝혔다.
1998년 김정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선거 후보자로 선출
1995년 박용길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이사장 방북
1995년 미국 여배우 ‘라나 터너’ 사망
30년대 초 은막에 데뷔한 후 50년간에 걸친 연기생활을 통해 5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던 터너는 2차대전 중에는 가장 인기 있는 핀업걸로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1957년 영화 ‘페이튼 플레이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이밖에도 ‘자니 이거’ ‘헝키 텅크’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 등 영화에서 로버트 테일러, 클라크 게이블, 존 가필드 등과 공연했다.
터너는 1995년 암으로 죽기 전까지 8번 결혼 하는 등 떠들썩한 사생활로도 유명했다. 갱스터 조니 스톰파나토와 8번이나 결혼을 반복했고, 조니 스톰파나토는 1958년 그녀의 딸에게 살해돼 또 한번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남북정상회담 평양 개최(7.25-27) 합의했으나 김일성 사망(7.8)으로 무산
1993년 미스코리아 선발 부정사건
1991년 코메콘, 42년 만에 공식해체
1991년 6월 28일 동유럽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공식 해체됐다. 1947년 미국이 마셜 플랜(유럽부흥계획)을 제안했을 때 동유럽 여러나라가 동요함에 따라 1949년 1월 25일 소련 주도하에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 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동유럽공산권국가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창립됐었다.
1960년대 이후 코메콘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눈부신 발전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제체제협력으로부터 경제통합으로 활동형태를 바꾸었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변혁은 코메콘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고 1990년 1월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개최된 코메콘 10개국 지도자회의에서 종래의 엄격한 중앙경제계획에서 시장중심의 무역제도로의 전환을 결정하였고, 1991년 6월 제46차 총회에서는 모든 조약과 문서를 취소시키고 기구해체 의정서에 정식 서명했다
1985년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 국내 첫 발생
1980년 정부, 컬러TV 방영방식을 NTSC식(미국식)으로 결정
1979년 제5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최(일본 동경)
1979년 석유수출국기구(OPEC), 기준유가 59%인상
1977년 외무부, 김형욱사건 청와대 도청사건과 관련 미국에 항의각서 전달
1977 울릉도 첫 교통사고 발생,
자동차 울릉도 상륙 6개월 만에 1명 숨지고 1명 중상, 항구 방파제 공사장으로 가던 트럭이 운전부주의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짐 “울릉도에 자동차가 들어온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교통사고 현장을 보니 차라리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 그립다”-울릉도 주민
1976년 세이셸이 영국의 통치로부터 독립
1976년 실론 독립. 국가명을 스리랑카로 명명
1975년 전남·북(광주,완도)지역 무장공비사건 발생∼8.1일 까지
광주시 서구 동운동 뒷산에서 괴한 2명 발견하여 신고, 군·경은 추격 끝에 1명 사살, 1명 도주, 8월 1일 전북 완주에서 사살
1974년 해경 초계정, 북한 함정에 피침
863호는 1941년 일본에서 건조된 최대 속력 13노트의 200톤급 경무장 초계정으로, 1953년 대한민국 해양경찰에 인수된 것이었다. 1974년 6월 28일, 대한민국 국방부는 8시 50분경 어로보호 경비 중이던 해양 경비정 863호에 인민군 경비정 2척이 접근해 왔고, 10시 30분 현재 동쪽 군사경계선 남방 해상에서 인민군 경비정 3척에 둘러싸여 교전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국방부측의 발표에 의하면, 28명이 탑승한 해경 속초기지대 소속 863호를 3척의 인민군 함정들이 납북을 시도, 863호의 승무원이 완강히 저항하자 북쪽으로 밀고 가다가 격침시켰다고 하였다. 조선중앙통신은 28일 군사분계선 해상연장선 부근 해역에서 남한의 경비정 1척을 침몰시키고 수명의 승무원을 사로잡았다고 보도하였다
1970년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어방송국 개국
1970년 영흥도 간첩선 격침사건
아군초소 경비정이 영흥도 북방에서 간첩선을 발견, 합동작전으로 격침시키고 내륙으로 상륙한 공비 6명 사살
1967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병합
1967년 지리학자 육지수 사망
1966년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 일리야 대통령 실각
1962년 이준구, 미 워싱턴에 태권도장 개관
이준구는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1946년 서울로 올라와 동성중학에 다니며 서울 견지동 청도관에서 태권도에 입문했다. 당시에는 ‘태권도’라는 말이 없었고 가라테의 한자인 ‘당수’ 혹은 ‘공수도’로 불렸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육군 소장 최홍희가 만든 후 널리 보급되었다.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1957년 11월 21일이었다. 이후 텍사스주립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는 한편 1958년 4월 대학 내에 ‘코리아 가라테’라는 이름으로 태권도 클럽을 열었다. 당시 미국에는 태권도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다행히 처음부터 170명의 회원이 몰려온 덕에 학비는 해결되었다.
텍사스에 있으면서도 항상 워싱턴 진출을 꿈꾸던 이준구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62년 5월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국방부 직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러 갔다가 대학 마지막 한 학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워싱턴에 눌러앉은 것이다.
이준구는 1962년 6월 28일 워싱턴에 ‘준 리 태권도’ 도장을 열었다. ‘워싱턴포스트’지에 광고를 냈더니 120명이 몰려왔다. 그는 태권도를 배우면 체력 단련은 물론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잘하고 가족과도 화목하게 지내게 된다고 홍보했다. 실제로 이준구의 태권도 도장에서는 청소년들이 검은 띠를 따려면 우등생이어야 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며 인성교육이 되어 있어야 하는 등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이러한 교육적인 요소들은 미국 사회의 학부모들에게 인상적으로 비쳤다.
이준구는 1967년 워싱턴의 TV에 태권도 광고도 시작했다. 1969년부터 1980년까지는 당시 워싱턴에 있는 5개의 TV채널에 하루도 빠짐없이 한군데씩 돌아가며 광고를 했다. 아이들이 “Nobody Bothers Me!(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어!)”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끝나는 광고는 큰 히트를 쳤다. 이후 워싱턴에서 ‘준 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 이준구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 때 ‘세기의 무술인’에, 2000년 3월 2일에는 미 법무부 이민국이 선정한 ‘가장 성공한 이민 200명’에 선정되었다.
이준구는 레이건 대통령 때는 교육고문,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는 체육고문을 역임했다. 아들 부시 대통령 때는 백악관 직속 아시아·태평양정책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003년 6월 28일은 워싱턴 시장에 의해 ‘준 리의 날’로 선포되었는데, 6월 28일은 41년 전 이준구가 워싱턴에 처음 태권도장을 연 날이다.
1958년 제6회 스웨덴월드컵서 브라질 우승, 펠레 일약 스타로 부상
1958년 6월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6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주최국 스웨덴을 5대2로 이기고 우승했다. 이날 브라질 승리의 원동력은 신장 168cm, 체중 67kg의 17세 소년 펠레였다. 가히 이번 스웨덴월드컵은 훗날 ‘축구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펠레를 위한 대회였다. 수줍음 잘 타는 앳된 얼굴의 17세 소년 펠레는 등번호 ‘10’을 달고, 프랑스전 해트트릭과 결승전 2골 등 6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에 첫 줄리메컵을 안겼다.
특히 이날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그가 뽑아낸 골은 역대 최고의 골 장면으로 남아 있다. 왼쪽 사이드에서 올라온 센터링을 정확한 트래핑으로 수비 한명을 제친 뒤, 다시 수비 머리 위로 공을 띄운 후 돌아 들어가 발리슛으로 넣은 골은 신기(神技)에 가까웠고, 상대편이던 스웨덴 관중의 기립박수까지 쏟아져 나왔다.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스시멘토(Edison Arantes do Nascimento)가 본명인 그는 브라질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빈민가에서 태어났지만 축구공 하나로 명예와 부를 얻었다. 펠레(Pele)는 '진주'라는 뜻의 애칭이다. 펠레는 13세에 브라질 프로축구 산토스에 입단한 이래 1363경기에 출전해 1281골을 뽑아내며 축구 황제로 군림했지만, 따뜻한 인간미로 더욱 사랑받았다.
브라질은 이후 1971년 7월 18일 펠레가 은퇴하기 전까지 62년 칠레월드컵, 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우승해 ‘3회 우승한 나라가 영구 보유한다’는 FIFA의 규약에 따라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게 됐다
1956년 폴란드 포즈난에서 반공의거, 반소(反蘇) 봉기
1954년 주은래, 네루의 평화 5원칙 발표
1952년 국회 김성수 부통령 신변에 낭설, 공보처에서 부정성명
1950년 한강 인도교 폭파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민간인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정부는 인민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한강대교(인도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강인도교는 폭파됐지만 한강철교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 조선인민군은 약간의 보수공사 후 빠르게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 당시 대통령 이승만, 국방부장관 신성모 등은 이미 서울을 떠나 피난간 뒤였다. 27일 저녁에 대전 충남도지사 사저에서 제작된 이승만의 육성이 녹음된 방송이 라디오로 방송됐던 것은 밤 10시였다.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고 하였다. 서울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 이승만과 정부는 전날 이미 피신한 뒤였으며,
이 서울사수방송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 시민들은 다음날 한강 교량들이 폭파되어 발이 묶이고, 서울시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950년 공산주의 운동가 이주하 처형
1950년 독립운동가 이붕해 사망 - 일본왕 히로히토 암살을 시도
1950년 북한 공산군 서울 점령
1948년 코민포름, 유고 공산당 제명
1948년 6월 28일 코민포름이 체코 공산당 기관지에 티토 중심의 유고공산당을 비난하며 유고공산당을 제명했다.
비난내용은 유고공산당과 지도자가 반소적이고 국가주의적이며, 계급투쟁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세력이 유고의 각 지방에서 발달하고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유고공산당은 이 비난결의를 거부했고 7월 21일 당대회에서도 거부를 재차 확인했다. 이후 코민포름과 유고공산당은 정면으로 대립, 동구권 여러나라는 유고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유고와 소련은 서로를 `적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1947년 파키스탄, 인도와 분리 독립을 결정
1939년 군용자원보호법 공포
1921년 러시아 적군, 이만시에 집결한 한국독립군 공격(자유시사변)
1921년 흑하사변 발발,(소련, 무장해제에 불응하는 흑룡강 자유시의 한국독립단부대 습격)
1919년 베르사유 강화조약 조인
제1차대전 발발의 원인이었던 사라예보 총격사건이 있은지 만 5년째가 되는 1919년 6월 28일 오후 3시12분, 베르사유궁에서 독일대표단이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모든 해외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영토의 일부를 넘겨야 했다. 이 결과 독일은 전쟁전에 비해 10% 이상이나 되는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지됐다. 육군은 10만 이하로, 해군은 보유함 10만톤 이하로 제한됐고 공군과 징병제는 금지됐다. 200억 마르크의 배상금도 결정됐다.
6월16일 조약내용이 알려지자 샤이드만 수상은 서명을 거부했고 내각은 21일 총사퇴했다. 학생들은 프랑스기를 불태우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22일 샤이드만 수상의 뒤를 이은 바우어 내각은 국민의회를 통해 조약수락을 결정했다.
1918년 미국 육군에 화학전부대 창설
1918년 소런, 대공업의 국유화 포고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피살
1914년 6월 28일, 인류에 대재앙을 예고한 두 발의 총소리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울려퍼졌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이곳에서 열린 육군 대연습 열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중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병원에 실려 갔지만 황태자비는 이미 절명했고 황태자 역시 15분 뒤 사망했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프린시프라는 20세 청년으로 세르비아 해방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의 멤버였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사건의 책임이 세르비아 정부에 있으므로 세르비아 국내에서 일고 있는 반오스트리아 운동을 금지하라는 요구였다.
세르비아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참전할 경우 독일도 함께 싸운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 우려한 대로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동족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러시아의 참전은 독일을 불렀고, 이는 러시아와 3국협상으로 묶여 있는 프랑스·영국의 자동개입으로 이어 졌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태자 피살은 구실에 불과했을 뿐 유럽의 강대국들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명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4년반 동안 6000만명의 젊은이가 전장에 동원돼 900만명이 전사하고 2000만명이 부상할 정도로 두발의 총성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피해는 실로 컸다.
1908년 터키의 청년터키당, 마베도니아 지방에서 봉기
1904년 덴마크의 노르게호 스코틀랜드 록콜섬 근해서 조난 사망 620명
1902년 미 하원, 해협운하법 가결. 미 대통령에게 파나마와 니카라과 운하부설권을 부여
1902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3국동맹 제4차 갱신하여 6개년 연장
1892년 영국 정치학자 E. H. 카 태어남
1873년 프랑스의 생물학자 알렉시 카렐 출생
1867년 근대 희곡의 혁신자 피란델로 출생 -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
1836년 미국의 제4대 대통령 매디슨 사망
1800년 조선조 22대왕 정조 승하
조선후기의 최고 군주로 꼽히는 정조(正祖)가 1800년 6월 28일 서거했다. 48세였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조선문화의 황금기를 이끈 국가 지도자였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였다. 아버지는 장헌세자로 흔히 사도세자로 불린다.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였다. 1759년 세손에 책봉돼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올랐다. 인간적인 면에서 정조만큼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농민들은 부유해지고 신해통공으로 시장은 번영했으며 신분질서는 이완되고 새 시대의 꿈을 품은, 자유롭고 발랄한 예술들이 자라났다. 이처럼 밝고 풍요로운 시대의 한 가운데 더없이 어둡고 고독한 군주, 정조가 있는 것이다. 11살때 아버지는 뒤주에 갖혀 살해되고 일평생 역겨운 어머니와 목숨을 노리는 할머니, 대화가 안되는 아내, 가증스런 정적들에게 포위되어 인생의 낙이라곤 오로지 책밖에 없었던 남자가 바로 그였다. 갖가지 사회문제가 빈발하는 근대로의 전환기에 정조는 사적인 원한을 참고 공평무사한 탕평정치를 통해 국민적 통합을 도모함으로써 오랜 당쟁을 종식시켰다.
이같은 정치적 안정위에 적서차별의 철폐, 공노비 해방을 통한 신분제도의 혁파, 과거제도의 개혁 등의 의욕적인 개혁정책으로 새 문화창달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조의 문화적 이상은 조선인의 정체성에 근거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와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한 확고한 문명국가로 요약된다.
1786(조선 정조 10) 추사 김정희(1786-1856) 태어남
1712년 프랑스 사상가 루소 출생
1577년 화가 루벤스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