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초등 60회 동창회 카페에 소개된 글입니다.
글 쓴이의 기억력이 너무나 탁월하여 감탄만 연발...
혼자 읽기 아까워서 발췌하여 올립니다.
여러분이 보면 아마 무릎을 칠거라 생각하며...
지금은 문화재청장이 된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경상도 음식이 짜고
맛없다는 사실은 경상도 사람만 모르고 전국이 다 아는 거"라 했는데 나 역시 경상도 사람으로서 썩 흔쾌히 동의하기 싫지만 그나마 "능교형보다는 니껴형 음식이 맛깔스러운 데가 있다"고 하니 위안을 삼는다.어릴때 고향을 떠나온 터라 고향음식에 대한 맛깔스럼을 이해하기엔 유년시절의 혀에 한계가 있어 안타깝지만 지금도 잊을수 없는 몇가지 맛의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메뚜기,개구리 뒷다리,미꾸라지,피라미 등 순수하게 공짜로 얻어지던 것은 그것을 잡던 많은
추억들을 함유하고 있지만 시골출신이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하니 이에 대한 소회는 나보다
노하우가 뛰어났던 친구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백마호떡>
아주 어릴때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오케이 양화점)건너편에 있던 백마호떡을 기억하는가?
지금의 호떡보다 더 크고 두꺼운 데다 속에 흑설탕을 많이 넣어서 한입에 먹을수 없었던 한개
10원 하던 백마호떡...(호떡집에 불이나서)인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무렵에 없어졌다.
<케익센터>,<봉봉제과점>
단맛을 보기가 쉽지않던 시절 <케익센터>에서 팔던 찹쌀모찌,곰보빵,단팥빵은 어린 나의 혀를
얼마나 자극했던가!진열대에 보이던 자르지않은 둥근 모양의 삼등분 머리를 한 식빵은 또
왜 그렇게 탐스럽게 생겼던지!
그런데 <케익센터>가 먼저 생긴건지 <봉봉제과점>이 먼저 생긴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황금빵집>
초등학교 5학년 땐가 (초원다방)건너에 황금빵집이 문을 열었다.원래 함창에서 돈을 많이
벌다가 깡패들이 괴롭혀서 옮겨왔다는 말을 함창살던 6촌형한테 들었는데 어쨌거나 그때까지
집에서 만들어 먹던 (엄마표 김치왕만두)에만 길들여져 있던 나에게 한접시 50원 하던
야끼만두의 맛은 알맞게 구운 노릿노릿한 만두피와 돼지고기와 다진 야채가 빚어내는 구수한
속살의 느낌은 환상이었다.
어른이 돼서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꼭 그 집에 찾아 사먹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식당이 자리를
옮겨 이름도(황금분식)으로 바뀌고 맛도 예전같지 않아 실망한 적이 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요!한국이 드디어 버마를 2-1로 꺾고 우승을 차지 했읍니다.
여기는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메르데카 국립경기장입니다"
고무줄로 밧데리를 동여 맨 라디오를 통해서 임택근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티비가 있던 집이 읍내에 한 두집 밖에 없을 때 밤늦은 시간 축구 중계를 듣곤 했다.국가대표 1진인
청룡팀엔 이세연 골키퍼를 비롯해 이회택,이차만,정강지,김진국,김호,김정남 등이 활약했는데,당시엔
몽에몽,몽몽틴 등이뛰던 버마가 한국과 더불어 아시아의 강호로 자리 잡고 있었다.아르무감,하른주소,
목타르다하리,소친원 등이 뛰던 말레이시아나 태국도 만만히 쉽게 이기지 못했다.그 후에도 축구는
김재한의 큰 키를 이용한 포스트 플레이(오늘날의 원톱 시스템)로 킹스컵이나 메르데카컵 그리고
나중에 생긴 박스컵(대톨령배)등을 석권하며 아시아의 강자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읍내의 신작로에 아스팔트 포장이 돼서 더이상 자치기를하고 놀때나 숨바꼭질 할때 먼지를 마시지
않아도 됐지만 한여름에는 길이 끈적끈적하고 물렁한 느낌에다 콜타르의 역한 냄새가 났다.
안동톨로에 있던 <평화상회>에서 한봉에 10원 하던 닭표라면을 사다 먹기도 하고 ,처음 본 생강엿 장사의
따르륵 따르륵 하는 기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깻묵에 밥을 썪은 미끼로 물고기를 잡으며,
학가산인지 흑응산인지 지금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학교 근처의 산에올라 칡을 캐먹으며 ,그 해
3학년의 여름을 보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4학년이 되자마자 그뜻도 다 알기 힘들었던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게 되었다.군사독재
시절 슬픈 그림의 한 단면이었다.
그 해에 처음 <합주부>에 들어 작은북을 치게 되었는데 "도도도시라 솔미솔미"로 시작되는 응원가를
연주하며 읍내에 가두행진을 하기도 하였다. "보아라 이 넓은 씨움터에 청군과 백군이 싸운다..."
<나뭇잎배>,<낮에나온 반달>,<섬아기>등 담임선생님의 풍금연주에 맞춰 부르던 동요가 아직 귓가에
들려온다.
처음엔 엄청 얻어맞아서 조마조마하게 만들다가 심판이 카운트만 하면 벌떡일어나 박치기를 퍼붓던
김일,타이거마스크를 꼼짝못하게 하던 천규덕을 TV로 보며 ,안동통로에서 팔던 ABC형 과자를 먹으며,새한서점에서 사온 <동아전과>를 배껴 숙제를 하며 춥고 긴 겨울방학을 보냈다.
"원수의 총칼앞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주고 간 말 공산당이 싫어요"
공산당이 뭔지도 모를 어린애가 <구름도 망설이던 운둔령고개>에서 외친 "공산당이 싫다'는 말 이후에
반공방첩 교육이 더욱 강화되었다.간첩신고에는 500만원,간첩선 신고에는 3,000만원의 포상금을 준다는 중앙정보부장 명의의 작은 벽보가 곳곳에 붙어있고 가끔씩 천방에서 모의간첩을 잡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꼭 이승복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별다른 저항없이 보이스카웃에 가입하였다.
왼쪽가슴엔 명찰밑에 하루 한가지씩 착한일 하자는 의미로<一日一善>,오른쪽 가슴엔 늘 국가와 이웃에 봉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로 <차리고있다>란 표어를 달고 국방색 유니폼에 파린색 마후라를 목에걸고 다녔다.여름이면 야영대회를 다니곤 했는데 그해 여름엔 경주의 <서라벌중학교>에서 경북지역 소년단 야영대회가 열였다.
두 개에 일원하던 <대영비가>도, 50환 이라고 쓰인 5원짜리 동전도, 포도당이라 불리던 녹여먹던 하얀색의 야바구(야바위)도,우유가루 덩어리가 붙어있던 강낭떡도 어느새 주위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읍내에서 같이놀던 친구들도 하나 둘 大處로 전학가고 나도 교실밑 화장실 옆 화단에 피어있던 사루비아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언젠가는 고향을 떠나야 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첫댓글 내사 읍내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 기억이 별로 없구만요이. 특별히 기억나는 거라곤 학교 정문에서 팔던 한봉지에 5원하던 강냉이 반만 튀긴 것 하고 물빵이 생각나누만요.
봉봉제과점에서 맞선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보다 한해 선배였다고 하더군요
봉봉 제과점이 우리 앞집이고요 황금 빵집이 바로 우리 옆옆집 이었지요 백마 호떡집이 없어지고 황금 빵집옆에 중앙호떡집이 생곘는데 한동안 호황을 누렸지요 그때는 전력이 모자라 밤에 정전이자주 되었어요그러면 집집마다 아이들이 와~하고 집밖으로 다 뛰어나와서 다스께(술래잡기)하고 놀던 생각이 나네요..
다스께이라는 말에 웃음이 절로 나오네요
호떡을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도 호떡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