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J.퍼싱 장군 동상
▲격파된 T-34/85 전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못한 퍼싱 전차에게 맹활약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30분,
소련제 T-34/85 150대를 앞세운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놀란 미군은 우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 보병사단을 출동시키고
아울러 중전차가 거의 없던 극동 지방 사정상 일단 M24 채피 경전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T-34/85에 대응해 75mm포로 무장한 정찰용
경전차를 투입시킬 생각을 한 미국의 입장이 참으로 눈물겹다 )
그 결과 한국전쟁 최초 미군 전차부대의 실전은 T-34/85를
상대로 경전차를 투입하는 것은 자살행위임을 뼈저리게 실감케한 꼴이 되고 말았다.
《 톡톡하게 망신당한 전의면 전차전 》
한국전쟁 중 최초로 투입된 미군 기갑부대인 제78 중전차대대 A중대의
M24 채피 경전차 14대는 1950년 7월 4일, 부산항에서 하역되어 4일 후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최초로 북한군 제3, 4 보병사단에 배속된 제107, 109
전차연대의 T-34/85 전차와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을 치르게 되었다.
당시 미 제24 보병사단 예하 21 보병연대는 제1, 3대대의 2개 보병대대와
제78 전차대대 A중대, 제3 공병대대 B중대, 제11 포병대대 A중대로
전투단을 구성해 방어에 나섰는데 이 중 제78 전차대대 A중대의 1개 소대가
전의면 방어에 투입되었다.
▲부산에 하역된 제73 전차대대의 M26 퍼싱
항공 폭과 보병 2~300명의 지원을 받아 전의면 시내로 돌입한 11대는
T-34/85 중 5대를 격파해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7월 10일, 북한군의 T-34/85 전차들이 1대대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오고 측후방에서는 보병들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면서 점차 전세가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어 갔다.
거기에 사전에 침투해 들어온 유격대원들에 의해 1대대의 야전
전화선들이 모조리 절단되면서 지휘 통제망이 마비되어 마침내 1대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에 후방에 위치한 제3 대대가
제78 전차대대 A중대 소속 M24 채피 경전차 1개 소대의 지원을 받아 역습을
감행했는데 바로 여기서 때마침 보병을 지원하던 북한군의 T-34/85 전차대와
격돌한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이라는 역사적 순간이었으나 이 역사적
순간은 미군의 일대 망신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최초 미군의 M24 채피 경전차가 75mm 전차포를 사격해
선두의 T-34/85를 격파할 때까지는 그런대로 전황이 괜찮았다.
문제는 이후 진형을 갖춰 사격을 시작한
T-34/85들의 85mm 전차포탄에 2대의 채피가 격파당하면서
상황이 엉망이 된 것이니...
이것은 한국전쟁 최초의 미군 전차 손실이자 완패였다.
순식간에 2대의 전차가 불덩어리가 되는 것을 지켜본 나머지 채피
경전차들은 황급히 후진해 퇴각하기 시작했고 결국 1대대도 조치원
북방으로 퇴각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한국전쟁 초반 북한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M24 채피 경전차
1950년 7월 11일에는 제34 보병연대에 배속된 M24 채피 경전차 4대가 공주
북방 수촌리 부근에서 T-34/85 전차와 격돌했다가 3대를 손실하고
1대만 퇴각하는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몇 차례의 전투 결과 1950년 8월 2일까지 제78 전차대대 A중대는
14대의 채피 중 거의 대부분의 차량을 손실( 이 중에는
14.5mm PTRD/PTRS 대전차 소총에 격파된 것도 있다.
처참한 보고를 접한 본토의 미군은 난리가 났다(
이제 미군도 서서히 독일군이 겪었던 T-34 쇼크에 빠진 것이다.
물론 경전차인 채피가
T-34를 상대로 열세라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일방적으로
패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
일단 본토에서 포트 녹스에 위치한 미 육군 기갑학교와 보병학교, 교도대대
등의 '교육 훈련용 전차'들을 맏론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전차란 전차들은 모조리 집결시키는 한편 1950년 6월 29일, 한국과 가까운
일본의 도쿄 병기창에서 예비 전차로 보관되어 있던 M26 퍼싱 3대를 급하게
수리해 1950년 7월 13일, 부산항으로 보냈다.
이 때 최초로 실전 투입된 3대의 퍼싱 전차는 1950년 7월 16일,
부산항에서 하역되어 M24 채피 경전차를 운용하던 제77 전차대대 A중대에서
전차병 14명을 차출해 탑승시켜 우선 대구에서 전차포 사격 훈련 등
기본적인 차체 적응훈련을 실했는데 여기에서 퍼싱의 엔진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하필이면 엔진의 팬벨트를 M26 퍼싱용 정품(
이 아닌것이 화근, ( 퍼싱의 엔진에 비하면 )약할대로
약한 셔먼 전차의 것을 장착하는 바람에 퍼싱의 강력한 엔진 출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엔진 과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수리를 위해
진주시로 후송됨 )
그러나 전황은 너무나도 다급했다. 당장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고 쌩쌩한
전력을 유지하며 무방비 상태의 전라도를 석권한 북한군 제6 보병사단이 이제
서서히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마산 ━ 창원 방면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 한국전 당시의 타이거 페이스를 그려넣은 M26 퍼싱
7월 31일, 진주 시가전
때마침 경남 진주에는 고장을 수리하기 위해 7월 28일에 후송된
3대의 M26 퍼싱 전차가 대기 중이었다. 문제는 7월 31일, 북한군 제6
보병사단이 인근의 방어선을 돌파해 진주 시내로 쳐들어온 것이다.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오는 북한군 보병들을 향해 3대의 M26
퍼싱 전차는 M2HB 중기관총과 7.62mm 기관총을 난사하며
진주 동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의 팬벨트가 과열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다( 완전히 고철됐다.
이로 인해 3대의 퍼싱 전차 중 2대가 교량 위에서 멈춰서 버렸고
전차병들은 북한군에게 산채로 노획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치를 열고 탈출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수류탄을 해치 안으로
던져넣어야 했다.
그렇다면 진주 시내에서 퇴각한 1대는? 얘라고 뭐 별 수가 없어서
결국 얼마 가지 못해 엔진 고장을 일으켜 마찬가지로 전차병들의
수류탄에 의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리하여 한국땅을 밟은 3대의 퍼싱 전차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부 전차병들의 수류탄에 의해
자폭하는 망신을 당한 것이다(
전차를 자폭시키고 퇴각하는 전차병들 입장에서는 이만큼
쪽팔리는 일이 또 있을까? 팬벨트 장착한 정비병들은 일본에 있으니
뭐라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
하지만 미 기갑부대의 망신은 어느 정도 해소되기 시작했다.
미 제24 보병사단이 대규모 희생을 내며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안
일본에 주둔한 제1 기병사단과 제25 보병사단이 한국으로 증파되었고
7월 23일, 기갑학교와 보병학교, 기타 부대에 흩어졌던 전차들을 긁어모아
재편성한( 미 제1 기갑사단의 1개 전차대대를 포함 )
3개 전차대대가 샌프란시스코항에서 수송선에 선적되어 한국으로 향한 것이다.
1950년 7월 30일, 일본 본토에서 M4A3E8 셔먼 2개 중대와
M26 퍼싱 1개 중대로 완전 편성된 제8072(
후의 제89 전차대대 ) 전차대대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또 8월 2일에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제6(
이 전차대대는 신형 M46 패튼으로 편성 ),
제70, 72 전차대대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물론 이들 3개 전차대대가 도착한 날 제89 전차대대 A중대가 마산
북서부로 공세를 감행했다가 북한군의 매복에 걸려 8대의 M4A3E8 셔먼
전차가 측면에서 발사된 45mm 대전차포에 피격되어 격파되는 망신을 당해
아직 전황이 미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 한국전 육상에서 용맹을 떨친 M26 퍼싱 전차
하지만 이후 벌어진 전차전은 미군의 승리였다.
제89 전차대대는 B중대의 M26 퍼싱 전차를 미 해병대 제1 전차대대의 M4A3E8과
교체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한 후 제25 보병사단을 지원해 M26 퍼싱 운용이
단기간으로 끝났지만 해병대 제1 전차대대, 제6 전차대대, 제70 전차대대,
제72 전차대대는 그렇지 않았다.
제70 전차대대는 M4A3E8 셔먼 전차 2개 중대와 B중대의 M26 퍼싱
전차로 편성되어 있었지만 제72 전차대대는 3개 중대가 모두 M26 퍼싱(
물론 1개 소대는 M4A3E8 셔먼이었다 )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제70 전차대대는 8월 12일 제1 기병사단에 배속되어 대구 근방으로
이동했고 제72 전차대대는 사실상 독립 중전차대대로 운용되었다.
보병 지원을 주로 맡았던 제72 전차대대는 이후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부산으로 이동해 8월 16일 부산에서 전면 재편성을 거쳤다.
이렇듯 한국에 배치된 M26 퍼싱 전차들은 제105 기갑여단을
위시한 북한군의 T-34/85 전차들을 맞아 거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M46 패튼이 투입된 후에도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물론 수적인 주력은 679대가 투입된 M4A3E8 셔먼이지만 309대의 M26 퍼싱이
실질적인 주력이었다 )
《 1950년 8월 21일, 볼링 구장 전차전 》
1950년 8월, 북한군은 제2 군단 예하 제1, 13, 15 보병사단을
상주 일대에 전개시키는 한편 제3, 10 보병사단을 왜관 서부 방면으로
집결시켜 총 5개 사단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8월 3일부터 대구 북방에서 감행된 이 대규모 공세 결과 8월 11일,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은 다부동으로 밀려났고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은 다부동
일대로 진출했다.
8월 14일부터 북한군의 총공세가 감행되어 UN 공군의 활동도 급증해
8월 16일부터 왜관 서북 방면에 대규모 융단폭격이 실시되었다.
▲ 격파된 북한군 T-34/85
그리고 8월 21일, 한국전쟁 최초의 대규모 전차전인 볼링 구장 전차전이 벌어졌다.
그간 T-34/85 전차 수대 정도를 앞세우고 공세를 감행했던 북한군은
이 날 야간을 기해 T-34/85 9대와 수대의 SU-76 대전차 자주포를 앞세워 5차례에
걸쳐 공세를 감행한 것이다.
이에 미군은 M26 퍼싱 전차 1개 중대를 포함해 모든 화력을 집중시켜
반격했고 22일 오전 무렵, 다부동 일대에는 T-34/85 전차
7대와 SU-76 자주포 3대, 다수의 트럭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이 대규모 전차전은 야간에 벌어진 통에 주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T-34/85에 명중되는 모습이 마치 볼링장의 핀이 쓰러지는 것과 같다 하여
볼링 구장 전차전으로 불린다.
이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은 T-34/85 전차 14대와 SU-76 자주포 4대를
손실하고 1,300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후 동부전선에서 8월 5일부터 감행된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한국군 제8 보병사단, 수도 사단, 제3 보병사단이 급격히 밀려나기 시작,
8월 10일 북한군 제12 보병사단이 기계를 점령하고 영일 비행장으로
육박해 들어와 포항이 위기에 빠지자 막 부산에서 하역되고 있던
제73 전차대대 B중대의 M26 퍼싱 전차들이 급파되기도 했다.
《 인천 상륙작전과 북진 작전 중 퍼싱의 활약 》
낙동강 전선의 국면 타개 및 북한군의 허를 찔러 감행된
인천 상륙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13개 보병사단과
제105 전차사단, 제16, 17 전차여단을 투입한 상황이었기에 인천·경인 지역의
T-34/85들은 그 수가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출동은 했으나 압도적인 UN군 항공
전력에 의해 도로 상에서 파괴되는 일이 빈번했다.
인천 상륙작전 당시 최초 상륙한 10대의 전차 중 6대가 M26 퍼싱이었고
나머지는 M4A3 도저 전차 2대, M4A3 화염방사형 1대, M32 구난전차 1대였다.
상륙작전 기간 중 M26 퍼싱 전차는 엄호 임무를 주로 수행했는데 이
엄호 덕분에 M4A3 도저 전차 2대가 북한군의 토치카를 그대로 밀어 북한군
병사들을 생매장시킬 수 있었다.
이어 9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한국군과 미군은 M26
퍼싱과 M4A3E8 셔먼을 앞세우고 낙동강 전선에서 일대 반격을 실시했다.
초반 3일 간은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고전을 치렀으나 9월 18일,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이 다부동을 돌파함으로써 북한군의 방어선은 9월 19일
소백산맥으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다가 9월 21일, UN군의 인천 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기가 저하되어 급격하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23일, 북한군은 전군에 북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고
UN군은 그 뒤를 맹렬하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추격 작전에는 미 제1 기병사단에 배속된 제70 전차대대,
제25 보병사단 배속 89 전차대대의 M26 퍼싱과 M4A3E8 셔먼 전차들이
앞장서고 있었다.
《 한국전쟁의 전격전!! 특수임무부대 "린치"와 "베이커"의 쾌속 주파 》
제70 전차대대 C중대의 M26 퍼싱 전차들은 미
제1 기병사단장 게이 소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지.S.패튼의 참모장 )의 명령에 의거 특수임무부대
"린치"에 편입되었다.
특수임무부대 "린치"는 제70 전차대대 C중대,
제7 보병연대 3대대( 대대장 린치 중령 ),
공병대대 B중대, 박격포 소대, 제77 포병대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1950년 9월 22일 08시를 기해 다부동을 출발한 린치 특수임무부대는
제70 전차대대 C중대의 전차들을 앞세워 오전 12시, 선산에 도착했으나
상부의 지시로 방향을 틀어 낙동리로 북상하던 중 이 곳에서 북한군의
T-34/85 전차 2대와 50여대의 트럭을 노획하였다.
▲ 한국전쟁의 M4A3E8 셔먼
9월 24일 오후에는 충북 보은군에 도착했으니 그야말로 호쾌한 전격전이었다.
하지만 게이 소장은 이런 속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누가 패튼 부하 아니랄까봐 )
게이 소장은 제70 전차대대 C중대 3소대(
소대장 베이커 중위 )와 제7 보병연대 수색소대를
차출해 이른바 특수임무부대 "베이커"를 편성했다.
"베이커 중위, 사단장 직권으로 명령한다.
자네의 부대는 적군의 저항을 받지 않는 이상 전차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무조건 서울을 향해 북진하라! 알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이리하여 특수임무부대 "베이커"는 오전 11시 30분을 기해
보은을 출발해 쾌속 주파로 오후에는 충북 청주시에 도착했고 18시 경에는
충북 진천군 서남방의 입창리에 도달했다.
하지만 여기서 연료가 바닥이 나버려 부대 전체가 정지했는데 운좋게
북한군의 보급 트럭을 노획해 여기에 적재된 연료를 급유하여 20시에 진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진격을 거듭한 결과 20시 30분에는 충남 천안에
도달했고 여기에는 약간의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육중한 퍼싱 전차를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퇴각해 버려 베이커 중위는 진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격로가 길어질 수록 제7 보병연대 3대대장인 린치
중령과의 무선 교신이 잘 되지 않았고 결국 린치 중령은 3.5인치 바주카포
1개 반과 보병 1개 소대를 트럭에 태워 베이커 중위의 부대에 증파했는데 그
무렵 베이커 중위의 전차대는 오산에 진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6일 22시 26분, 오산 북방 5~6km 지점에서 베이커
중위의 전차대는 인천 상륙에 성공한 미 제7 보병사단 31 보병연대와
조우했다.
보은을 출발한 지 약 11시간 만에 170km를 주파해 이 곳까지 진격해
들어온 것이다. 참으로 감격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M26 퍼싱 전차는 미 제1 해병연대와 연계하여 서울 수복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어진 북진에서도 M46 패튼과 함께 선봉에 서서 활약했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실시된 한국군과 UN군, 미 해병대의 후퇴
과정에서도 이들 퍼싱과 패튼 전차들이 없었다면 중공군에게 포위·섬멸되었을
아찔한 상황이었으니 이들 전차들은 한국전쟁의 영웅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전차들이었다.
한국전쟁 말기에는 M4A3E8 셔먼에게 고지전의 주력을 내줬지만(
아무래도 덩치가 큰 만큼 유지 및 수리 등 운용상의 난항이 크다보니 )
때때로 90mm 주포를 이용해 이동포대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 전시된 M26 퍼싱 전차
▲ M60A3 패튼과 M26 퍼싱 전차
M60A3 패튼과 M26 퍼싱 전차. 이제는 전시되거나 민간인에게 불하되어
리인액트 행사 등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M60 패튼은 지금도 여러 국가에서 개량되어 현역으로 굴러다니는
차량이 많은 편이지만 퍼싱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니 아쉬운 부분.
M26 퍼싱 전차
M26 퍼싱 전차
M26 퍼싱 전차
존.J.퍼싱 장군(1860~1948)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총사령관이었다.
M26 퍼싱 전차의 모델이 된 장군은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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