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답사(高興 踏査) 2023. 07. 16 광주민학회(光州民`學會)
학송(學松) 송대종(宋泰鍾)
예전에 없던 7월 장마가 폭우를 몰고 와서 연일 계속되고, 더구나 어제 큰비가 와서 이민영 회장님과 송혜자 부회장의 애간장을 얼마나 태웠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어젯밤 전화로 “민학회 답사에는 궂은 날씨도 출발하면 좋아져서 날씨로 중지한 예가 없었습니다” 부회장 말씀이었다.
아침이 되니 비가 조금 줄어들어 마음을 놓고 9시에 사무실 앞에서 출발하였다.
광주 보성 간 고속화 도로를 지나 9시 무렵에 순천 목포 고속도로로 들어서니 비는 소강상태가 되었으나 차창으로 보이는 보성강 물은 흙탕으로 변해 넘실거린다. 보성녹차휴게소에서 15분 휴식하고 벌교 나들목을 통하여 봇재를 넘어 고흥 땅에 들어섰다. 회장님의 안내 말씀과 고흥의 유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고흥에서 나고 자라서 고흥은 조금 아는지라 곳곳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어느덧 고흥에 들어서고 말았다. 타향살이 30여 년에 고흥에 들어서니 천지가 개벽 된 듯 생소한 곳을 찾아온 느낌이다.
歲月與人同變中(세월여인동변중) 세월과 사람이 변해가는 데
故鄕景物亦新風(고향경물역신풍) 고향 경물도 새바람 일었네.
鳳凰舊態蒼松鬱(봉황독흘창송울) 봉황산 옛 모습 푸른 솔 무성하나
恰似孤城夜落躬(흡사고성야락궁) 외로운 성, 밤에 떨어진 몸 같구나.
차는 존심당(存心堂) 앞에 멈췄다. 고흥군청이 있던 자리의 공터엔 포장되었고 4칸 정자를 지었는데 흥양정(興陽亭)이란 편액의 글씨가 새 깃털과 같이 가벼워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존심당은 담으로 둘러있는데 해설사가 해설하는 동안 고흥아문(高興衙門) 앞으로 가보았다. 삼문은 닫혀 있으나 단정한 자태며 편액의 글씨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옆의 안내판을 읽어 본다.
「고흥존심당(高興存心堂) 및 아문(衙門)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53호>
(전략)이 건물은 흥양현의 동헌건물로 현재 존심당과 아문이 남아있다. 현재 존심당 건물은 영조 때 이 고을 현감인 김시걸이 세웠다고 하며 이후 고종 때 보수하였다. 그 후 고흥군청 청사로 사용하다 1987년 6월 해체 복원하여 원형을 찾았다. 아문의 건립연대는 존심당과 같은 시기로 여겨지는데 이는 아문에 ‘건륭 십삼 년’이라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조선 영조 41년(1765)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하 생략)」
서쪽 협문을 통하여 존심당으로 들어서니 동헌은 위엄이 있고 편액은 행서로 활기가 있다.
國泰民安行政時(국태민안행정시) 국태민안으로 행정을 할 때
赴任官長豈心持(부임관장기심지) 부임 관장은 어떤 마음 가졌을까?
積憂宿願解消處(적우숙원해소처) 싸인 근심 소원 해소하는 곳이니
當日軒前想像窺(당일헌전상상규) 당일의 동헌 앞을 상상하며 엿본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뒷산으로 오른다. 지금은 옥하공원이라고 하나 원래는 김정태(金禎泰) 후손들의 소유였다. 김정태는 일제 강점기에 영광군수, 광주 군수, 순천 군수를 지내며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하였고, 그의 아들 김상형이 역시 중추원 참의로 국가 공인 친일파로 지목되었다고 한다. 이 땅은 2009년 대통령 소속 반민족 행위 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 국가로 귀속되었다고 하며, 예전에 보았던 김정태 동상을 해설사에 물으니 철거되었다고 한다. 즉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녹동고등학생을 주축으로 흉상제거 민원이 제기되었고, 국가보훈처는 김정태 후손에 흉상철거를 통보했으나 응하지 않자, 국가보훈처는 행정 집행을 통보했고, 결국 승복하여 자손들이 선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어려서 향토에 베푼 영관군수의 선행을 듣고 자란 저는 씁쓸한 심정이다. 역사의 자취를 지우면 후손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예수님은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자를 돌로 처라,” 하셨다고 한다. 과연--
完全無缺果然成(완전무결과연성) 완전하고 무결한 것이 과연 있는가?
善惡相存歷史耕(선악동존역사경) 선과 악이 존재하며 역사를 갈아왔네.
時代同乘先覺輩(시대동승선각배) 시대와 같이 탔던 선각의 무리를
那知後進是非爭(나지후진시비쟁) 무엇 알아 후진들이 시비하며 다툴까?
새로 지은 정자 위에서 해설사는 고흥읍 내를 바라보며 주변 산과 지형을 열심히 알려 준다. 성터에는 들리지 못하고 서문리 홍교에 도착하니 10시 10분이다. 전국에 이름 난 선암사 홍교, 흥국사 홍교, 벌교 홍교에 비하면 작으나 원형이 잘 보존된 홍교라고 한다. 컴퓨터로 검색을 해보니 자세한 설명이 있다.
<1978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된 고흥홍교(高興虹橋)는 옥하리 여산마을 중심을 흐르는 너비 8~9m의 고흥 천에 상하 150m의 간격을 두고 머리뼈의 홍교가 있다. 이 중 위쪽에 있는 서문리 홍교의 규모는 높이 4.2m, 길이 8.7m로 비교적 큰 다리이다.
맨 밑바닥에 몇 개의 다듬은 돌을 안치하고 그 위에 2, 3개의 장방형 돌을 짜 올렸는데 모두 2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무지개형의 다리 정면이 되는 서쪽에 용머리를, 그 반대되는 동쪽에 용 꼬리를 새겨놓았다. 이 다리에서 동쪽으로 150m쯤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옥하리 홍교는 규모가 높이 6m, 길이는 10m나 된다. 석재의 결구 수법이나 형태는 위쪽의 것과 비슷하나, 용머리가 다리 아랫면 천장 중앙에 부착된 것이 앞의 홍교와 다르다.
이 홍교의 서쪽 왼편에 “同治十年辛未四月日西水口虹蜺刱建……(동치 10년 신미 4월 일서 수구 홍예 창건······)”이라는 10행 48자가 새겨져 있어 1871년(고종 8)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조선 시대 후기에 속한 홍교이나 결구 수법 및 무지개형의 장엄 미가 한층 돋보이는 걸작이다.>
數處虹橋踏査之(수처홍교답사지) 여러 곳 홍교를 답사했으나
高興探訪感懷奇(고흥탐방감회기) 고흥을 탑방하니 감회가 기이하다
壯時上下常親熟(장시상하상친숙) 젊어서 상하고 항상 친숙했으나
白髮纔尋歲月欺(백발재심세월기) 백발에 겨우 찾으니 세월이 속인 듯
11시가 되어간다. 녹동 가는 국도를 타고 가다. 풍양 한동리를 지나 왼편 좁은 길로 들어서 달리니 오마간척 한센민 추모공원이 방조제 중앙 언덕에 있다. 아마 전에는 섬이었으리라. 11시 30분이다. 오마도 간척지는 고흥의 4대 간척지로 자세한 내용을 몰라 컴퓨터에서 검색해 보았다.
“1962년 정부는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약속한다. 오마도와 오동도를 연결해 둑을 싸 새로운 간척지를 만들면 그 땅을 한센인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소록도가 아닌 섬 밖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센인들은 팔을 걷어붙였다. 피땀 흘려 간척한 땅은 1500세대가 2,500여 톤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정도의 드넓은 땅이었다. 수백 명의 한센인이 2년 넘게 간척 공사에 매달렸지만, 사업권 이전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혔고 1,000헥타르에 이르는 비옥한 간척지는 결국 1988년 한센인들이 아닌 지역 주민들에게 분양되었다.”
또 장흥 출신 소설가 이청준께서는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을 통해 약자인 한센병 환자를 동정하는 내용을 기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나병은 천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환자를 고도인 소록도에 당시 보건사회부에서 국립병원을 짓고 수용하면서 관리하였습니다. 60년대 당시의 형편은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환자들이 배가 고프니 육지로 뛰쳐나와 구걸하고 다니는데 지역민들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모르며, 혐오감도 컸었다. 지금은 한센병 치료제가 나와서 완치가 되니 망정이지 당시에는 지역민과 절대 같이 살 수 없는 형편이었고, 또 광활한 농토를 그들에게 분양하면 환자의 몸으로 어떻게 경작할 것인가?. 국가에서 심사숙고해서 정책을 바꾼 것이지 환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싶어서 였겼는가.
공원에 올라가니 말 다섯 마리의 동상과 환자들이 노역하는 탑 모양과 하나운 시 병풍이 있다.
읽을수록 애절하다.
, '보리피리'
"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저자거리와 같이 북적거리는 사람 사는
세간)
인간사 그리워 피-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니리."(전남 고흥 소록도에 시비가 있음)
공원에서 그들이 막았다는 방조제를 바라보며 당시를 상상해 본다.
天刑孤島絶望時(천형고도절망시) 천형으로 고도에서 절망 할 때에
一脈陽光惠降期(일맥양광혜강기) 한 맥의 햇볕 내리기 기대했으리
世事無情流大勢(세사무정류대세) 세상일 무정하게 대세로 흐르니
循環命運順應宜(순환명운순응의) 순환하는 운명에 순응할 뿐이네.
12시가 되었다. 오른편으로 넓은 간척지의 푸르름을 보면서 녹동항에 도착하여 부둣가의 「성실 산장어 구이 전문」 식당에서 장어탕을 먹었다. 더구나 김안철 원장님이 베푼 붕장어구이에 녹동 유자술을 한잔하였다.
지금까지는 비가 조금씩 뿌리고 곧 개더니 부두 앞 해상공원을 둘러보는데 억수로 쏟아진다. 쌍충사(雙忠祠)를 안내하기로 한 나는 비 개기를 바랬으나 12시 30분이 되자 모두 차를 돌리자고 한다. 우리 답사의 주제가 조선 시대 명현 적소지를 찾아보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없이 도화 발포진으로 가는 차내에서 쌍충사에 올라가 설명하고자 했던 세 가지를 설명하였다.
첫째. 쌍충사와 충렬공(忠烈公) 이대원(李大源) 장군, 충장공(忠壯公) 정운(鄭運) 장군에 대하여
둘째. 1597. 8.3. 이충무공(李忠武公)이 삼도(三道) 수군통제사(水 軍統制使)로 재임명된 후 군량(軍糧)을 확보한 조양현(兆陽縣)과 득량도(得糧島) 및 도양(목장道陽牧場)에 대하여
셋째. 1597.9.16. 명량해전(鳴梁海戰) 후 고군산열도 법성포를 지나 보화도진을 거쳐 1598.2.17 고금도(古今島)에 진(陣)을 친 후 7월 16일에 천조수병(天朝水兵) 5천을 거느리고 온 진린(陳璘)의 교만(驕慢)함을 꺾은 7월 18일 절이도(折爾島) 전투(戰鬪)에 대하여 대략을 설명하였다.
深思熟考益垂頭(심사숙고익수두) 생각할수록 고개가 숙여지니
忠武精神此地留(충무정신차지유) 충무 정신이 이곳에 머물고 있네
仰望赤門回步事(앙망적문회보사) 붉은 문 쳐다보며 발길을 돌리니
雨中不可感懷流(우중불가감회류) 비가 와서 참배 못 한 감회가 있네.
도화(道化) 발포(鉢浦)에 도착하였다. 4시 38분이다. 가는 빗속에 동편 숲에 백로가 솜뭉치 같이 보인다. 발포 포구를 매워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찾아와 세웠다는 「이충무공이 머무시던 곳」이라는 표지석을 찾았다. 옛날 이 앞에 바다였으나 지금은 바다가 보이지도 않는다. 좌로 돌아 홍살문을 지나 새로 조성된 성곽에 기대있는 발포 만호성 안내판을 읽어 본다.
<발포 만호성
---조선 시대 만호(종 4품)가 지휘하던 수군이 있었던 곳이다.
발포진은 세종 21년 (1439)에 만호가 배치된 수군 진이 되었으며 성곽은 성종 21년(1490)에 둘레 1,360척(약 626m) 높이 13척(약 6m) 규모로 축적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발포진은 전남 좌수영에 소속된 수군 진으로 당시 발포만호로 황정록과 소개남이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 활동하였다.--(이하 생략)>
충무사로 향했다. 충무사 오르는 계단 옆의 안내판에
<충무사(忠武祠)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선조 13년(1580) 7월 이순신 장군이 36세 때에 이곳 발포만호로 부임하여 선조 15년(1582) 1월 모함받아 파직되기까지 18개월간 재임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이 충무사는 1976년 충무공 「유적 고흥 보존위원회」(49명)를 구성하여 발포만호진성(도제산)의 남쪽 기슭이고 성곽의 북벽 바깥에 인접한 경사지에 범국민 사업으로 교육을 강화하려고 1976~1980년 5년간에 건립하였다. (중략) 이곳에서는 매년 「충무사보존위원회」 주관으로 충무공 탄신일(4.28) 에 탄생제를 거행하고 있다.>
충무공 종질(從姪)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을 보면
경진년 가을에 발포만호가 되었다. (중략) 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쪼개서 가야금을 만들고자 하였다. 공이 불허하면서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라 심어 가꾼 지 오래된 나무를 하루아침에 벤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수사가 크게 노화하였으나 감히 베어가지 못하였다. (이하 생략)>
<庚辰秋 爲鉢浦萬戶 (중략) 左水使成鎛 遣人本浦 欲斫客舍庭中桐木爲琴 公不許曰 此官家物也 栽之有年 一朝伐之何也 水使大怒 然亦不敢去也 (이하 생략)
이후 모략이 계속되어 파직된 것이다.
충무사는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발포(鉢浦)는 발우(鉢盂) 같은 깊은 포구(浦口)로 앞에 섬이 가로막고 있어 천혜의 군항이었으나 절반이 매립되어 사발같이 되어 있다. 내려오는 길에는 무궁화 한 그루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동편에 있는 굴강(掘江)을 찾아본다.
발포리 성촌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다리가 있고 그 안쪽에 작은 규모의 굴강이 있다. 이곳 발포 굴강은 방파제, 군수물자를 싣고 내리던 선착장, 선박수리소 역할을 한 선소(船所)였다. 훼손되어 있던 굴강을 근년 마을주민들이 뜻을 모아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았다 하나 규모가 많이 축소된듯하다.
鉢浦舊容尋不能(발포구용심불능) 발포에 옛 모습 찾을 길 없어
雨中訪問感懷增(우중방문감회증) 우중에 방문하니 감회가 많다.
生平環境改良事(생평환경개량사) 살아가는 환경을 개량한 일이나
歷史欲知何處憑(역사욕지하처빙) 역사를 알고 하면 어느 곳을 찾을까.
좌 편으로 돌아가면 발포역사전시체험관이 있고 그 뒤 언덕에 송씨 부인 동상과 송씨 부인 사당이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정열편(貞㤠編)
본관은 여산인이며 충강공 간의 후 손녀이며 증 통정이며 장수 황정록의 부인이다. 선조 정유년에 그의 부군이 이충무공을 따라 여러분 군공을 세웠으나 적탄을 맞아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송씨는 아들, 딸을 데리고 같이 강물에 투신하여 죽으니 향인이 그 절개를 영원히 전하고자 사우를 도화면 내발리에 세웠다.
宋氏 籍礪山忠剛公侃后孫女贈通政長水黃廷祿妻宣祖丁酉其夫從李忠武公累立軍功忽中丸而殉宋氏聞夫死軍中率其子女投江而死鄕人立祠宇道化面內鉢里
이 사실은 송씨 부인이 장수황씨와 여산송씨 족보에 없는 것으로 보아 내 추측으로는 아마 현지처가 아니었을까 한다. 통신시설이 없는 시대인 만큼 소문을 듣고 순절하였고, 지역 사람들이 사당을 모셔 지금까지 내려온 것은 사실이다.
今世之情不可知(금세지정물가지) 지금 세상 정서로 알 수 없는 일
女人貞節卽夫隨(여인정절즉부수) 여인의 정절이 남편을 따랐도다.
戰場消息怒波沒(전장소식노파몰) 전장의 소식은 성난 파도에 묻히고
悲報乘風落下涯(비보승풍낙하애) 비보가 바람 타고 물가에 떨어졌네.
오늘 주 목적지인 한포재(寒圃齋) 적려지(謫廬地)인 덕양서원을 보기 위해 동일면 덕흥선착장에 도착했다. 4시가 조금 넘었다. 조금 소강이던 비가 다시 쏟아지는데 건너편의 동래도 선착장을 바라보며 저기서 옛날 배로 건넜을 것을 생각하였다.
광장 입구에 목 계단이 길게 있고 덕양서원 표지석이 고색이 창연하게 세워져 있으며 곁에 안내판이 있다.
<덕양서원(德陽書院) 전라남도문화재자료 53호
이 서원은 순조 때 좌의정을 지낸 이건명을 모시기 위하여 영조 44년(1768)에 유허비와 함께 세운 사당이다. 숙종에서 경종에 이르는 붕당정치의 폐단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였다.
경종이 병약한 것을 안 숙종은 영잉군(후에 영조)의 보호를 이건명에게 부탁하였다.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하여 김창집, 이이영. 조태채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영잉군의 세자 책봉에 이로 인하여 소론의 견제와 미움을 샀다. 결국 1722년 노론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모함을 씌워 나로도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목을 베어 죽임을 당했다.
이 서원은 이건명(1663~1722)의 유배 사실과 그 행적을 기리고자 하는 이 지방 사람들에 의해 1768년 건립된 유허비에서 출발 되었다. 유허비 건립 때 서원도 함께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나 적절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서운의 비각 건물은 1928년에 이건명 8대손인 이정호의 발의로 다시 지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1768년에 송정악, 박유석 등 지방 유림들이 유허비를 세우고 사당을 지어 모셨다는 것이다.
계단을 오르니 평탄한 보도 끝에 풀에 덮여 다 쓰러져 가는 비각이 보인다. 마음이 좋지 못하나 풀을 헤치고 보니 2기의 비석이 보인다.
孝子明公亨鎭之碑(효자명공현진지배) 淑人金海金氏孝烈碑(숙인김해김씨효열비)이다. 서원하고 관계 없는 아마 지역의 유력자 선조 비인 듯하다. 유허비는 바로 뒤에 있다. 웅장한 비각 속에 9척 정도 대형 비이나 문이 닫혀 있어 내용을 읽어 볼 수 없으나 커다란 예서체로 한포재충민이공적려유허비(寒圃齋忠愍李公謫廬遺墟碑)라 하였고 입구 옆에 덕양서원송화비(德陽書院頌華碑)가 멋진 행서로 있으나 쏟아지는 빗줄기로 내용을 읽어 보지 못했다. 비각의 뒤에 강당인 숭양제(崇陽齋)가 있다. 원래 강학이 목적이 아닌 사당 형식이어서 동서재가 없다.
숭양재 뜰에서 우중에 최윤식 교수님은 열심히 설명하나 빗소리에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뒷계단으로 사당에 오르니 사당 재호가 없고, 한포재 한 분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1928년에 비각을 고쳐 세우고 서원으로 하면서, 한포재를 주벽으로 황재 이기천, 송애 정동준, 돈암 이린기, 도사 오광생, 양촌 노주관, 입재 문악연. 정소송, 정난파, 명중화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으나 지금은 이들의 위패를 모두 내렸다고 한다.
漢陽千里謫廬風(한양천리적려풍) 한양 머나먼 길 적려의 바람 센데
君向忠心日月通(군향충심일월통) 임금 향한 충성심은 일월 같았네
何事波中當斬首(하사파중당참수) 어찌 파도 속에서 참수를 당했던가?
鄕人義德只今崇(향인의덕지금숭) 행인들은 옳은 덕을 지금도 숭양하네
4시 40분 차를 타고 영남면 해맞이로에있는 우주발사 전망대에 가니 해무가 가득하여 무료입장이란다. 전망대에서 커피를 마시니 바다의 섬과 주변이 마치 동양화 한 폭 같다.
광주로 향하면서 나는 회원들에게 고흥에 오면 고흥분청문화박물관을 둘러보고 운암산 수도암을 들려 볼 것과 팔영산 등산을 권하였다. 차 안에서 최 교수님의 유배 생활에 대한 강의를 계속하면서 하나운 시 <전라도 길>을 낭독하였다.
'전라도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중략)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일본식 버선)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개
없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이란 시는 문둥병 환자의 고통과 참담함이 절절히 묻어난다)
최교수의 말 중에서
“외로움을 고독으로 만들어라” 한 말씀이 귀에 남았고,
또 야은(野隱) 노영대 선생이 우리가 소홀히 여긴 부분을 말씀해 주셨다.